클레르 옵스퀴르 분석 칼럼 :#6 왜 결론에 대한 논쟁이 생기는가? (부제 : 이 게임의 엔딩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 상편(1/3)
반갑습니다.
지난 한 주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이 게임을 여러 번 플레이하고, 레딧과 여러 커뮤니티에서 다양한 토론을 하며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 그 재미도 끝내고, 좋은 감정을 안고 현실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네요. 그러나, 아직 제가 할 일이 하나 남은 것 같군요. 바로 헌사입니다.
창작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창작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아마도 ‘즐거움’과 ‘감동’일 겁니다. 희극을 보며 웃기도 하고, 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죠. 활극에서 활력을 얻기도 하고, 슬래셔물에서 짜릿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모든 감정들은 결국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니까요.
그리고 창작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또 다른 큰 선물은 “무엇이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내가 그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현실에 대한 질문을 던져준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관객들은 이를 통해 실제 삶의 선택 순간에 도움을 얻거나, 인생의 다른 가능성들을 고민해볼 수 있죠.
그래서 앞으로 ‘현실의 눈으로 바라본 Clair Obscur’이라는 주제로 몇 차례 칼럼을 써볼까 합니다. Clair Obscur의 세계는 현실은 아니지만, 현실 사람들이 만들고 즐기는 만큼 현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이 모든 분석과 사유가 제가 이 게임과, 제작자와, 그리고 여러분께 진정한 경애와 존경의 마음으로 바치는 헌사이며, 저는 그것이 작별 인사로서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추가로, 이 글은 원래 레딧에 게시했던 글이며, 영어로 쓴 글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어투나 어순, 혹은 일부 용어가 어색하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최대한 다시 다듬기는 했지만, 보시면서 혹시 말이 좀 어색하게 느껴지시더라도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이제 본론인 33 분석 논문 여섯번째 칼럼, "왜 결론에 대한 논쟁이 생기는가? (부제 : 이 게임의 엔딩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 상편"을 시작하겠습니다.
1. 지나친 모호함
└ 1-1. 엔딩의 모호함 : 베르소 엔딩
└ 1-2. 엔딩의 모호함 : 마엘 엔딩
└ 1-3. 인물들의 성장
└ 1-4. 깊이 없는 결론
1. 지나친 모호함
이 게임의 엔딩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것은 다들 익히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근 한달간 레딧에서 벌어진 수많은(정확히는 43개의) 엔딩 토론에 참여해 격렬하게 의견을 나누었지만,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아마도, 영원히 나지 않겠죠. 사실, 똑같은 의견이 또 나오고 또 나오고를 반복하고 있고.
저는 두 엔딩 모두 나쁜 엔딩이며, 엔딩으로 진행되는 과정 자체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사람입니다만, 각 엔딩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고 감동을 얻은 모든 주장에 대해서는 긍정합니다. 모든 개인의 주장은 진실입니다, 적어도 그 주장을 펼치는 개인에게는. 전능하신 신과 제 양심에 맹세코, 저는 그 모든 주장이 그 개인에게는 진실이며 올바른 것이라 믿으며, 따라서 그 모든 의견을 지지합니다. 그 의견에 제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말이죠. 다만 저는 그러한 의견에 논리적, 합리적 비판점이 있을 때 '제 생각은 다르다'고 말할 뿐입니다.
대표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논쟁이 벌어진다는 사실 자체가 이 게임의 훌륭함을 입증하는 것이다'라는 취지의 주장을 합니다. 저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논쟁이 벌어진다'와 '훌륭하다'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거대한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수많은 논쟁이 벌어집니다. 국가간 분쟁, 인종 문제, 성적 기호, 스포츠 팬덤, 지지하는 정치인, 자녀의 성적, 서로의 애인, 성적 매력, 누가 더 많이 먹을지에 대한 논쟁까지. 하지만 그 모든 논쟁이 훌륭하거나, 옳거나, 고귀하거나, 혹은 진실함을 증명할 수는 없죠. 기본적으로 논쟁이란, 그저 모든 사람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도덕성 논란이 끊이지 않는 GTA 시리즈 역시 많은 논쟁이 벌어지는 게임이지만, 그 논란이 GTA의 예술성이나 작품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발더스 게이트 3는 예술성이나 작품성 측면에서 33원정대에 절대 밀리지 않는 작품이지만, 결말에 대한 논란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그 안에는 매우 비도덕적으로 행동하는 다크 어지나, 명백한 배드 엔딩이 존재하는데도 말이죠.
제가 생각하기에, 33원정대의 엔딩이 그토록 많은 논쟁을 야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나친 모호함입니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고, 이 빈틈을 추측으로 메꿔야하므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이죠. 예컨대 "캔버스 안의 인물은 심즈의 캐릭터 같은 마법적 AI일 뿐이다"를 확정적으로 증명할만한 내용이나 언급이 있다면, 현재 벌어지는 논쟁의 대부분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제작자들 역시 논쟁을 고의로 유발했다고 밝히기도 했죠. 사실, 저는 이 점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데, 모호함으로 꾸미는 것 까지는 그렇다쳐도, 나쁜 내용의 엔딩들을 배치해서 고의로 논쟁을 유발한다는 것이 그렇게 좋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자, 그렇다면 먼저 그 모호함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부터 살펴봅시다.
1-1. 엔딩의 모호함 : 베르소 엔딩
베르소 엔딩의 가장 큰 모호함은 '이것이 해피엔딩인가?'라는 점일 것입니다. 사실 많은 분들이 '색감이 따듯하다, 마엘은 현실로 돌아갔다'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베르소 엔딩이 진짜 엔딩이고, 해피엔딩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제작진이 직접 해피엔딩이나 정사는 없다고 이야기했는데도 말이죠. 실제로 제작진 인터뷰에서, 사회자가 '베르소 엔딩은 따듯한 색감이니까 해피엔딩'이라고 이야기하자, 제작진은 아주 깊은 미소를 돌려줬을 뿐입니다.
제가 보기에, 베르소 엔딩을 해피 엔딩으로 보이게(혹은 보이지 않게) 만드는 모호한 점은 아래와 같습니다 :
(1) 뤼미에르 시민들은 살아있는가?
제가 그 사실을 얼마나 유감스럽게 생각하는지와는 별개로, 뤼미에르 사람들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뤼미에르 가족 역시 플레이어에겐 허구의 존재다' 또는 '그들은 감정을 느끼고, 지성을 가졌으니 살아있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것이 정확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4의 벽을 넘지 않고, 게임속 세계를 완전한 하나의 현실 세계라고 가정할 경우, 뤼미에르 사람들은 초능력에 의해 창조된 존재들이며, 현실의 살아있는 사람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뤼미에르 사람들이 '현실에서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거나' 혹은 '초능력에 의한 창조물이라는'라는 사실이, '그들은 마법적인 AI나 심즈 캐릭터들이다' 혹은 '존중할 필요가 없는 가치없는 존재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명백하게 무리수가 있는 논리입니다. 사실, 뤼미에르 시민들이 AI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짚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토대가 무너지고, 이야기의 진행이 우스꽝스러워져버려요.
A. 마엘의 엔딩에서 마엘이 되살려 낸 '늙은 베르소'는 괴로움, 고통, 회한에 가득 차 있습니다. 마엘이 만약 베르소를 '프로그래밍'해서 살려낸 거라면, 왜 그녀는 그가 고통받도록 만들었을까요? 마엘이 "고통받는 남자"에 대한 뒤틀리고 음습한 페티쉬를 가지고 있어서? 혹은 원래 베르소의 영혼이 "나는 고통받을 때 제일 멋진 거 같아"라고 생각하는 나르시시스트여서?
B. 현실 세계의 클레아에 의해 덧칠되어 조종당한 '그려진 클레아'는, 자신의 의지를 되찾자마자 자살해버립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실 세계의 원래 클레아는 그림 자체에 큰 가치를 두지 않으며, 르누아르를 돕고 33원정대를 공격하는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려진 클레아'는 자신이 자살할때 그려진 베르소가 말려들지 않도록 제지하고, 뒤로 물러나 죽습니다. 그럼 그것은 누구의 의지라고 봐야 할까요?
C. 클레아는 시몽을 조종하기 위해, 그녀가 '그려진 클레아'인 것처럼 위장하고 목소리로 그를 유혹합니다. 그녀가 그려진 인물을 조종할 수 있다면 왜 굳이? 거기다 시몽은 죽기 전 베르소에게 자신의 무기인 시모소를 건네줍니다. 그렇다면 알린이 그를 창조할때 '누군가 너를 죽인다면, 너의 무기까지 친절히 건넴으로써 보답하라'라고 프로그래밍한 걸까요?
D. 33원정대의 첫 상륙에서 그들을 습격했던 네브론 느와르는, 클레아가 무채색 네브론들의 처형을 위해 창조한 것입니다. 그는 클레아에게 대륙 각지의 비선공 무채색 네브론(몸이 흰색이며, 빛, 리듬, 돌조각 등을 찾고 있는)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차마 그럴수가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만약 주인공 파티가 무채색 느와르들을 죽이지 않고 도와줬으면, 느와르는 감사의 표시로 100루미나를 건네줍니다. 그럼 클레아는 느와르를 만들 때 "나는 명령을 하겠지만, 너는 거역해도 괜찮다"라고 한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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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그림 속 개별 인물들이 '살아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그들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비교적 명백합니다. 그들은 창조주인 화가들에게 대놓고 반기를 들거나, 혹은 명령을 거부하거나, 다른 속셈을 가지거나, 혹은 자신의 의지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종종 ‘현실이란 과연 진짜로 존재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곤 합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다른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른바 ‘통 속의 뇌’나 ‘가상현실 이론’이 바로 이러한 의심에서 비롯된 것이죠.
우리가 타인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이유는 우리의 감각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며, 우리의 감각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 사람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캔버스 안의 인물들이 진짜 살아 있는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점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명백히 자유 의지를 지닌 존재처럼 행동합니다.
이것이 '고도로 발달하여 현실의 인간만큼 자유의지와 감정을 지닌 마법적인 AI'의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고도로 발달하여 현실의 인간만큼 자유의지와 감정을 지닌 그림'의 것으로 보느냐는 사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에서 지적하는 부분은 그들이 AI냐, 그림이냐가 아니라 그들이 '현실의 인간만큼 자유의지와 감정을 지녔다'는 부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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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 역시 그들이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고, 명백히 '인간처럼' 독자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1) 고마주를 실행하며 그들을 천천히 죽여나갈 때 2) 2막 끝에서 그들을 한번에 몰살시킬 때 3) 3막 이후 '또 한번' 그들을 몰살시키려 할 때, 그는 뤼미에르 사람이 느끼는 고통, 공포, 절망에 대한 어떤 존중이나 성찰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그 문제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어보이죠.
르누아르가 그렇게 결론을 짓고, 행동하는 이유는 그의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가족을 위해 하나의 세계와, 그 안에서 살아가고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는 모든 존재를 통째로 학살하는 그의 행위는 그를 '사이코패스 살인광'이나 '미쳐버린 창조주'로 보이게 만듭니다. 이 시점에서, 제4의 벽을 넘어서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플레이어는 자신이 대량학살에 가담하거나, 학살자를 지지한 듯한 불편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플레이어 역시 뤼미에르 사람들이 살아가고,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는 존재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창조주는 창조물에 대한 모든 권리(학살의 권리 포함)를 가지는가?(또는 '신은 인간을 학살할 권리를 가지는가?' 아니면 '부모는 자식을 학살할 권리를 가지는가?')라는 문제도 포함하지만, 그 이전에 '과연 뤼미에르 사람들은 무엇에 대한 책임을 지닌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뤼미에르 시민들은 데상드르 가문의 가족 문제의 핵심에서도 비켜나 있고, 그 이외에 종말을 맞을 만한 중대한 사유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마엘이 캔버스에 중독되었을 때, 그것은 명백히 '그녀의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단순히 뤼미에르 캔버스를 삭제할 경우, 마엘이 이후 페인터로서 어떤 세계를 창조하게 되면 그녀는 다시 그 세계에 중독될 것입니다. 알린의 경우, 그녀는 명백하게 현실세계에서 실조하여 정신과적 치료를 필요로 하는 상태입니다. 즉, 이 두 가지 사례 중 어떤 것에서도 '뤼미에르가 학살 및 소멸당해야 하는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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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적 측면에서, 뤼미에르 학살은 슬픔 및 갈등에 몰입하기 위한 장치로서 '도덕성과 이기심'이라는 대비되는 요소입니다. 모든 갈등이 오로지 '개인적인 문제'로 국한된다면, 각 인물들이 필사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고수할 필연성이 떨어지고, 그만큼 몰입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뤼미에르의 완전한 소멸'이 아예 논외일 경우, 즉 그들이 완전히 AI거나 심즈의 캐릭터에 불과하다면, 각 인물들의 주장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A. 르누아르 : 사랑하는 공주님, 제발 게임 좀 그만해! 대체 몇시간째야!
B. 베르소 : 난 죽고 싶어...죽게 해줘...
C. 마엘 : 난 이 게임이 '너무' 좋아요! 그냥 평생 이것만 하다 죽을래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각 주장에 따르는 무게감과 그에 반대하는 무게감이 동시에 낮아져버리죠. 이 경우 많은 플레이어가 각자의 인물에게 아래와 같은 인상을 가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A. 르누아르 - 오, 그렇습니다. 당신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정말로 훌륭한 신사분이시군요.
B. 베르소 - 제발, 알았으니까 가서 죽어! 죽을 방법은 니가 알아서 찾고, 제발 주변 사람 끌어들이지 말고!
C. 마엘 - ...진지하게? 이것봐, 꼬맹아. 정신 챙겨! 정신!
이 경우, 갈등 그 자체가 굉장히 조잡해 보일 뿐더러, 세 의견 중 설득력을 가지는 의견은 르누아르의 것 뿐입니다. 그럼 이야기에서 슬픔을 강조하거나, 갈등을 강조하기가 어렵죠. 그래서 제작진들 입장에서는 뤼미에르 시민들을 '자유 의지를 지닌 사람과 비슷한 존재'로 그리고, '뤼미에르 학살'을 실제 학살에 버금가는 무게감으로 그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마엘 엔딩을 선택한 분들의 의견을 지지하죠.
하지만 르누아르(+베르소)가 완전히 설득력을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제작진들은 '뤼미에르 학살'을 '데상드르 가문의 가족 문제'와 연결하게 됩니다. 트롤리 딜레마처럼,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쪽이 죽는다는 식으로. 그리고 이 부분이 베르소 엔딩을 선택한 분들의 의견을 지지하는거죠.
위 두가지를 보시고 눈치채셨겠지만, 논쟁을 유발하기 위해 두 요소를 억지스럽게 연결해두었기 때문에 이 두 요소간의 얼개가 애매합니다. 이 '얼개가 약한 점'에 대해서는 5번 칼럼에서 이미 다루었기 때문에 넘어갑니다.
(2) 가족은 화합했는가?
가족 사랑은 분명 위대하고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마법의 열쇠는 아니며, 때로는 오히려 문제를 만들거나 악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이름으로 학대받은 아이들'이 성장하여 부모와 인연을 끊거나, 부모를 공격하거나, 최악의 경우 그 이상의 짓을 저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건 고통스럽겠지만, 널 위한 좋은 선택이야"라는 말은, 훈육한다는 핑계로 아이를 때리는 부모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물리적 폭력이나 욕설, 고함만이 '학대'인 것이 아닙니다. 화상입고 추해진 모습을 그려내는 것 같은 조롱, 죄책감을 유발하는 날카로운 폭언, 한심한 것처럼 대하는 냉소적인 태도, 대화하려 들지 않는 차단, 폭력을 이용해 개인의 의사를 무마하는 억압, 애착 물건의 강탈과 파괴 등이 인간의 정신을 더 확실하게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데상드르 가족들이 마엘에게 행한 행위들은 확실하게 아동 학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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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화합이 진정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가족이 마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마엘이 가족을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정서적으로 학대받은 아이들이 가족을 사랑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많은 비극이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됩니다.
앞선 많은 학대와 비극, 심지어 엔딩에서조차 르누아르와 알린이 마엘을 한번 돌아보지도 않은 채 둘이서만 껴안고 있다가 사라지고, 그나마 클레아가 미소 한번 던지고 바로 떠났는데도 그들이 마엘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희망입니다.
물론, 희망은 아름다운 것이죠. 하지만 아름다운 희망이 현실에서 얼마나 이루어지던가요? 현실에서는 수많은 가족들이 바로 데상드르 가문이 하는 식으로 무너집니다. 오히려 큰 다툼이나 폭력 없이, 점차 서로를 낯선 사람처럼 대하면서 관계가 붕괴되는 경우가 훨씬 많아요. 왜냐하면 그 누구도 가족과 서로 고함을 지르거나 멱살을 잡으며 싸우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가정의 붕괴는 학대받은 자식이 커서 부모의 연락을 피하거나, 부모를 찾아가지 않으면서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르소의 엔딩의 내용을 깊이 생각해보면 과연 데상드르 가족이 화합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에 대해 '의문스럽다'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르누아르나 알린이 마엘을 안아주거나 소통하는 장면이 일체 나오지 않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 더더욱.
(3) 마엘은 현실로 돌아갔는가?
'마엘이 새로운 미래(중독 및 가족 해체의 위험성을 분명하게 내포한)를 얻는 것'은 오로지 베르소와 르누아르가 폭력으로 마엘을 제압했을 경우에만 도달할 수 있는 미래이며, 이 때 폭력으로 제압된 후 애착 물건을 파괴당한 마엘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희망입니다.
저는 그런 희망 자체를 부정하진 않고,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는 중요한 점은, 베르소 엔딩에서는 그런 '새로운 미래'나 '나아감'에 대한 표현이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허망한 표정을 짓고 사라진 33원정대원들의 환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니까요.
물론, 마엘이 나아질 가능성도 있겠죠. 하지만, 16살짜리 여자아이(중증 3도 화상 환자에, 기형에, 한쪽 안구 소실, 성대 소실, 2급 종합 중증 장애인)가 폭력으로 제압되고, 애착 물건을 파괴당한 후, 애착 세계에서 쫒겨나, 그녀를 학대하던 가정으로 돌아가는 전체 과정을 냉정하게 고찰해보면, 그녀가 나아질 가능성이라는 것은 '가능성은 있다'는 수준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를 ㄱㄱ하며 "괜찮아, 너는 언젠가 이 일을 잊고 나아갈 수 있을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ㄱㄱ당한 사람이 그 일을 잊고 나아갈 수도 있겠죠. 가능성의 측면으로 말하자면야.
현실로 쫒겨난 그녀가 처한 가혹한 현실은 3번 칼럼에서 이미 다루었으니 넘어가겠습니다.
(4) 페이딩 보이는 자살할 수 있는가?
이 부분의 모호함도 문제입니다. 클레아는 페이딩 보이가 그림을 멈추도록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베르소는 그의 엔딩에서 페이딩 보이의 손을 잡고 함께 사라지죠. 그러나 '페이딩 보이가 그림을 멈추는 것이 곧 뤼미에르의 완전한 파괴'를 의미하는지는 모호합니다.
만약 그림이 스스로 '자살'할 수 있다면,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르누아르는 엑손을 만들고, 고마주를 실행하고, 클레아에게 네브론을 만들라고 하는 대신, 페이딩 보이를 설득하거나 위협하거나 제압해서 죽이려 해야 하니까요.
르누아르가 페이딩 보이를 설득하지 못하도록, 알린이 길을 막고 있었다고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막 초반, 르누아르는 뤼미에르를 파괴하기 시작하면서도 거울 공간으로 이동할 낌새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최종 대치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냥 르누아르가 마엘을 내버려두고 혼자 거울 공간으로 이동해서 페이딩 보이를 제압해버리면 되는 거잖아요. 즉, 그림이 스스로 자살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이야기의 큰 틀이 어그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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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지점에서 생각해볼만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화가가 캔버스에 다이브해 있을 때, 현실에서 그림을 파괴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입니다.
대체적으로 아래 두 가지 중 하나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죠.
A. 다이브해 있던 화가들이 전부 현실로 튕겨남
B. 다이브해 있던 화가들이 전부 사망함
가상현실에서 사망할 경우 현실에서도 사망한다는 것은 '매트릭스'에서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서사적 장치죠.
캔버스에서도 B.의 경우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은데, 르누아르가 굳이 알린을 따라 다이브했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파괴했을 때 화가가 현실로 돌아갈 뿐이라면, 르누아르가 굳이 뤼미에르 캔버스에 다이브할 필요 없이 현실에서 그림을 태워버리면 그만이니까. 르누아르가 그러지 못한 시점에서, 화가가 그림 안에 다이브하고 있을 때 그림이 파괴되면, 화가가 죽거나 죽을 만큼 위험한 타격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이 결론에 따르면, 그림의 자살 가능성은 게임의 전체 서사를 굉장히 어그러뜨립니다. 만약 그림이 '자살'할 수 있다면, 캔버스 안에 화가가 다이브하고 있을 때 그림이 자살하면서 화가를 죽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마엘이 뤼미에르 캔버스에 들어가도록 도와준 사람은 클레아입니다. 만약 마엘이 다이브한 모노리스 49년 시점에서 뤼미에르 캔버스가 자살한다면, 그 순간 클레아는 아버지, 어머니, 아주 어린 여동생을 동시에 잃게 됩니다.
거기다 클레아는 게임 중간에 자기도 잠깐 캔버스 안에 들어가죠. 즉, 가족 네 명이 캔버스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그림이 자살해버리면 끔찍한 일이 일어납니다. 말 그대로, 일가족 몰살이죠.
과연 클레아가 그 위험을 감수하면서 마엘을 뤼미에르 캔버스에 넣어준 것일까요? 연출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클레아는 마치 가벼운 산책이라도 보내주는 것처럼 마엘을 배웅하죠. 만약 그녀가 데상드르 가문의 재산을 탐내 세 명의 가족을 모두 죽이려 계획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해석해도, 이 경우 자기 자신까지 들어간 것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가장 합리적인 결론은 '그림은 자살할 수 없다'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대체 어째서 페이딩 보이의 그림 그리는 걸 멈춰야 했을까요? 이 서사적 연결성이 굉장히 모호하고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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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저는 이 엔딩에서 뤼미에르 캔버스를 파괴한 것이 르누아르라고 생각합니다. 베르소와 페이딩 보이가 붉은색 꽃잎을 흩날리면서 사라지기 때문이죠. 붉은 색 꽃잎의 고마주는 르누아르의 고마주에 당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특징입니다.
(5) 엔딩 컷신의 모호함
베르소 엔딩은 따듯한 색감과 부드러운 보컬로 마치 해피 엔딩처럼 보이는 구성을 보여주지만, 냉정하게 보면 명확한 현실인지, 아닌지가 굉장히 모호하게 연출되어 있습니다.
A. 베르소의 묘비가 클로즈업되는 장면을 잘 보면, 그의 사망일은 1905년 12월 33일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게임 내에서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단순히 게임 내의 현실 프랑스 달력이 다른 걸까요? 이 33일은 서사 내에서 어떤 다른 역할도 맡지 않아요.
B. 2막 마지막, 현실의 마엘이 방에서 깨어나는 장면에서, 창문 너머로 에펠탑이 보입니다. 이 방은 저택 정문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2층 오른쪽 복도에 있는 방입니다. 즉 저택 정문을 보는 시점에서, 에펠탑은 오른쪽에 있습니다.
엔딩에서 나오는 저택의 모습은 캔버스가 있던 방의 유리문에 인접해있는 뒤뜰입니다. 캔버스에서 뤼미에르 저택이 나오는데, 정문쪽에는 저택 맨 위에 작은 창이 하나 더 있기 때문에, 베르소 엔딩에서 나오는 부분이 저택의 후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당연한 거죠. 설마 정문으로 들어오는 길 한가운데에 아들 무덤을 배치하진 않을 테니까. 기둥의 조각상들도 저택 쪽으로 향해있고. 그런데 이 뒤뜰의 정면 멀리로 에펠탑이 보입니다.
즉, 에펠탑 위치가 바뀌었어요.
이를 정확하게 알수 있는 요소가 바로 창문의 형상입니다. 마엘의 방은 외벽 쪽에만 창문이 있고, 이 창문은 직사각형 4개의 면을 가진 가로 2개의 창문입니다. 저택의 정면과 후면에 있는 모든 창은 정사각형 8단 가로 1개짜리입니다.
에펠탑이 2개 있거나, 에펠탑 아래에 바퀴가 달려있어서 움직일 수 있거나 한 것이 아닌 이상, 에펠탑이 마엘 방의 창문에서 보이려면 엔딩 시점에서 왼쪽 멀리에 있어야해요. 아니면 그 반대로, 마엘 방에서 에펠탑이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과연 이것이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단순 실수? 아니면 현실의 프랑스에도 뭔가 격변이 생겼다는 암시? 알수 없습니다. 너무 모호해요.
C. 르누아르와 알린이 너무 순식간에 사라져요. 르누아르와 알린이 무덤 정면에서 껴안고 있는 장면에서 갑자기 마엘의 등으로 화면이 전환되는데, 진짜 뚝 끊기듯이 전환됩니다. 연결이 굉장히 어색해요.
원래 이런 식으로 인물이 갑자기 사라지면 장면의 연결이 어색해보이기 때문에, 많은 경우 '어디론가 이동하는 듯한' 액션을 보이는 것이 보통입니다. 예를 들면 마엘 뒤로 걸어가는 모습을 살짝 비춘다거나. 근데 그런 것도 없이 르누아르와 알린이 갑자기 사라져요. 이것도 모호한 부분입니다.
D. 마엘이 보는 33원정대와 베르소의 환영이 사라질 때, 그들은 마치 고마주되는것처럼 사라지는데, 다른 인물들은 붉은 색 꽃잎을 흩날리면서 사라지지만 그려진 마엘은 금색의, 베르소는 은색의 꽃잎을 흩날리면서 사라집니다. 이 장면이 굉장히 이상한 것은, 진짜로 마엘과 베르소가 사라질 때는 르누아르의 고마주인 붉은 색 꽃잎을 흩날리면서 사라졌거든요.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대체 뭐죠? 너무 모호합니다.
참고로 은색의 고마주는 현실의 베르소(페이딩 보이)의 색, 금색의 고마주는 마엘의 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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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베르소 엔딩은 명확하게 현실이라고 보기엔 너무 모호한 지점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렇다고 현실이 아니라고 딱잘라 말하기엔 너무 현실같죠. 이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설명되질 않습니다.
(6) 엔딩 컷신의 미장센
베르소 엔딩은, 다시 말하지만, 따듯한 색감과 부드러운 보컬로 해피 엔딩처럼 보이는 구성을 가지고 있지만, 장면의 미장센은 오히려 부정적으로 해석될 것들이 여럿 있습니다.
A. 엔딩이 끝나기 직전, 마지막 부분의 배치를 보면 마엘이 있는 장소가 거꾸로 된 십자가 형상의 한 가운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엘은 이 십자가 한 복판에 오도카니 서 있고요.
많은 창작물에서, 어떤 등장인물이 십자가 한 군데에 오도카니 서 있는 장면으로 표현하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구세주(예수의 메타포)
2) 희생양(예수의 메타포)
3) 갈등(사방으로 길이 뻗어있어 선택하기 어려움)
4) 움직이지 못함(못박힘의 메타포)
5) 비난받음(희생양의 메타포)
6) 주목받음(희생양의 메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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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같은 장면에서, 마엘이 보고 있는 방향에서 보이는 것은 뚫리지 않은, 정원 벽으로 막힌 프레임입니다. 심지어, 물리적인 벽 말고 꽃으로도 그 끝을 '가두고' 있습니다. 꽃벽끼리 연결되어서 틈이 없어요.
이렇게 가두어진 프레임 안에서 인물이 먼 경치를 내다보는 것은 '감옥 벽 밖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죄수'의 메타포이며, 인물이 심리적(또는 육체적)으로 갇혀있음을 표현하는 일반적인 장치 중 하나입니다.
작고 왜소한 인물의 등과, 그가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거대한 벽(화면 전체를 가리는), 그 너머로 비춰 보이는 세상이라는 메타포도 굉장히 많이 쓰이죠. 특히 갇힌 인물의 상태나 심리를 표현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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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그 장면에서 마엘이,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관객도 바라보고 있는) 방향으로 '전진'하려면, 그녀는 베르소의 무덤을 '짓밟고' 건너가야 합니다. 이는 '빗장'이나 '경고 배너'의 메타포이며, 많은 경우 '미련에 가로막혀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역으로, 어떤 인물이 누군가의 무덤을 배경으로 '나아감'을 표현해야할 때는, 많은 창작물에서 무덤을 뒤로 하고 180도 돌아서서 화면 쪽으로 걸어나오는 구도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만약 창작물에서 인물이 누군가의 무덤을 뒤로 하고 뒤돌아 걸어나오는 장면이 나온다면, 그것은 인물의 표정에 따라 '미련의 해소', 혹은 '복수의 결심'등을 표현하는 장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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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그 장면에서 저 멀리를 보면, 검은 안개로 둘러싸이고 화면 프레임에 의해 반으로 뚝 잘린 것처럼 보이는 에펠탑이 보입니다. 이는 '어두운 미래' 또는 '재난의 예고'라 불리는 고전적인 장치로, 화면 테두리에 의해 잘려지거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거대한 랜드마크(대표적으로 자유의 여신상)은 향후 닥쳐올 재난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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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저 멀리로 보이는 '안개로 휩싸여 잘 보이지 않지만, 굉장히 어두운 정경'은, 많은 경우 불안감, 재난, 불운, 괴로운 미래를 상징하는 메타포입니다. 우리가 흔히 "미래가 어둡다"라고 표현하듯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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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카메라 워크에서, 페이드아웃을 사용하는 기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다만 '희망'이나 '미래'를 표현할 때는 화면을 하늘 방향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특히 파란 하늘.
반대로 인물의 감정, 특히 네거티브한 감정을 표현할 때는 땅 쪽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는 많은 경우 '슬픔 때문에 땅으로 고개를 떨구듯이' 이동합니다.
엔딩 장면처럼 '서서히' 멀어지는 페이드 아웃은, 화면 구성과 배치에 따라 달라지지만, 거리감을 상징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이것이 희망찬 정경을 배경으로 할 경우,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를 의미하며, 반대로 어두운 배경으로 할 경우, "그들의 미래는 암울할 것입니다"를 상징합니다.
특히 인물 여럿이 화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구도에서 페이드아웃 되는 경우, 이는 대체적으로 '결의'를 상징하기 때문에 인물의 전신을 잘 비추지 않습니다. 인물의 전신을 비춘다는 것은 그만큼 '거리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죠. 특히 인물이 하나일 경우, 그 거리감은 인물의 '소외감'이나 '외로움', '왜소함', '나약함'등을 상징하게 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누군가의 축 처진 어깨와 오도커니 서 있는 모양새를 '뒤에서' 먼 샷으로 잡으면서 페이드 아웃할 경우, 이는 그 인물의 '소외감', '외로움', '왜소함', '나약함'을 짙게 표현하는 연출입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슬며시 사라져버리는 것 또한 그런 분위기를 강조하는 장치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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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그 장면에서, 눈을 내리깔고 우울하게 서있던 마엘은 무언가를 알아챘다는 듯이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서' 바라봅니다. 뒷모습에서도 그녀가 고개를 왼쪽으로 비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화면에 정면으로 잡히는 인물이 고개를 돌리며 옆을 바라보는 장면은 '문제나 감정을 직시하지 않음(회피)', '다른 것에 주의를 돌림(환기)', '거짓말을 하고 있음', '올바르지 못함', '죄책감' 등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시선을 돌림으로써, 마엘은 자신의 정면에 대칭으로 서 있는 33원정대의 그려진 마엘을 직시하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이는 '거울을 직시하지 않는' 모습 등으로 사용되는 장치이며, 이것들이 상징하는 바는 대체적으로 '현실을 직시하지 않음',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음' 등 입니다.
이런 장치들에서 대부분 거울은 '넘어서거나 바꿀 수 없는 경계선'의 상징인데, 다시 말하지만 베르소의 무덤을 기준으로 마엘이 직시하지 않는 것은 마치 거울 건너편에 있는 것처럼 대칭의 자리에 있는 그려진 마엘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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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마엘이 환상을 보는 장면에서, 마엘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구스타브입니다. 그녀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구스타브는, 환상 중 유일하게 '이쪽으로 오라는 듯이' 손짓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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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메타포나 클리셰의 사용은 '반드시 그런 의미다'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이 작품처럼 굉장히 클리셰나 은유를 남발하는 작품은, 창작자의 의도가 아주 명확하게 전달된다고 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다만 '일반적인', 고전적인 화면 배치와 구도로 해석했을 때 위와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장면들이 상징하는 것이 대체 뭘까요?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너무 지나칠 정도로 모호해요.
그래서 베르소 엔딩이 명확히 '해피 엔딩'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전 칼럼들과 위에서 설명했던 수많은 문제들을 다 제외하더라도, 컷신 그 자체만으로도 딱 잘라 해피엔딩이라 하기 모호한 부분이 너무 많아요.
1-2. 엔딩의 모호함 : 마엘 엔딩
지금까지의 칼럼에서, 저는 대체적으로 베르소 엔딩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취해왔습니다. 다시, 또 다시 말하지만 저는 두 엔딩 모두를 비판하는 입장이며 어느 엔딩도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직관적인 인식으로 베르소 엔딩이 좀 더 나아보이는 점도 있고, 마엘 엔딩이 지나치게 공포스럽게 연출된 면도 있어서 양 엔딩에 대한 의견차가 비대칭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내용적인 측면을 지적하는 것이죠. 제작자들 역시 해피 엔딩이나 정사는 없다고 밝혔고, 마엘 엔딩을 지나치게 안좋게 보이도록 한 것에 대한 당황을 표한 바 있습니다.
서사적으로 말하자면, 두 엔딩 모두 굉장히 뒷맛이 좋지 않은 씁쓸함을 남기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만 내용적인 측면에서 마엘 엔딩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에, 연출적으로 이 간극을 좁히려 시도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만약 두 엔딩이 비슷하게 따듯한 톤으로 구성되었다면 아예 논쟁이 벌어지기 어려울 정도로 내용적인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엔딩도 반드시 씁쓸하고 괴로운 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베르소 엔딩에서도 마찬가지임을 보여드리기 위해 칼럼 4번과 위 부분에서 여러 부분을 짚어보았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마엘 엔딩이 어째서 '최악의 엔딩'이 아니라 베르소 엔딩과 마찬가지로 배드 엔딩 중 하나일 뿐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에 대한 모호함을 짚어보겠습니다.
(1) 베르소는 고통받는가?
칼럼 4번에서 지적했듯, 베르소가 긴 세월 삶을 살아오며 여러 고통을 겪은 사람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력한 전사이며, 불멸의 존재로서 죽음의 공포도 느끼지 않습니다. 비록 관계가 좋지는 않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고, 서로 아끼는 여동생도 있습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들과 교류하며 살아가고, 가끔은 새로운 인연과 모험도 경험합니다. 좋은 와인을 수집하고 즐길 정도로 물질적 여유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레코드를 수집하며, 매력적인 여성과의 성관계도 즐깁니다. 즉, 베르소는 캔버스 내에서 그렇게까지 불행하게 사는 것으로는 묘사되지 않습니다.
또한 베르소가 고통받았다고 해서, 그가 그와 완전히 동일하게 그려진 존재인 뤼미에르 시민 전체를 죽이려 드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할까요? 베르소의 고통이 중요하다면, 그 사람들의 고통은 무시당해도 괜찮은 걸까요? 심지어 그 뤼미에르 시민에는 루네, 시엘, 모노코, 에스키에 등도 포함됩니다.
애초에, 베르소는 작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거짓말과 배신만을 반복합니다. 그가 유일하게 내뱉은 진심은 '이런 삶은 원하지 않아'라는 애원 뿐이었죠. 그가 고통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그럼 그의 거짓말과 배신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거죠? 그에게 살해당한 이전의 원정대원들은요? 다시 말하지만, 그들 역시 베르소와 동일한 권리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의 고통은 왜 무시되는 걸까요? 작품에서는 이 부분을 조명하지 않고 슬쩍 넘어가버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인 불편감을 느끼게 됩니다.
(2) 베르소는 늙었는가?
이 부분도 굉장히 모호합니다. 마엘 엔딩의 베르소는 명백히 늙은 것처럼 보이죠. 머리는 하얗게 셌고, 주름은 깊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원래 흰머리입니다. 염색을 하고 다니던거죠. 동료 사이드퀘스트에서 직접 언급합니다.
또한 깊은 고난과 스트레스, 표정근의 지나친 활용이 주름을 더 깊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가 불멸성을 가지고 있어도, 그 불멸성이 상처를 입은 즉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죠. 허리가 잘리고도 한나절 동안 서커스를 보여줬으니까요. 거기다 즉시 작용한다면, 전투시에도 HP가 손상될 때마다 실시간으로 차올라야 한다는 문제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베르소가 과연 늙었는가? 늙었다면 얼마나 늙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아주 모호합니다. 무엇보다 수염 때문에 인상이 너무 달라져서 알아보기가 힘들어요.
이 모호함이 마엘 엔딩에서 쟁점이 되는 이유는, 마엘이 그에게 모종의 처치를 가해서 그가 늙도록 해주었는지, 만약 그렇게 해주었다면 왜 굳이 그를 죽지 못하게 만들면서까지 그렇게 했는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A. 마엘이 베르소를 처벌하기 위해, 죽지는 않되 늙는 것은 가능하도록 했다고 생각할 경우 : 그것은 '영원한 안식'을 바라는 베르소의 의향을 존중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늙을 수 있다면, 결국 시간이 흐른 후 죽을 테니까. 이 경우, 마엘이 그에게 죽음을 선물하면서 마엘 자신의 슬픔과 미련도 달래는 절충안을 선택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죠. 따라서 처벌이라는 명분이 명확해지지 않습니다.
B. 마엘이 베르소에게 미련이 남아, 죽지도 늙지도 않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단지 베르소가 고통받도록 했다고 생각할 경우 : 이 경우 베르소의 처지는 '형벌'인데, 정작 그가 받는 형벌은 콘서트에서 피아노를 치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베르소와 마엘이 나누었던 약속이기도 하죠. 그것이 과연 형벌로 기능할까요? 애초에 그에게 기억을 물려준 원본 베르소도, 그 자신도 피아노 연주를 좋아하는 인물이었어요.
즉, 두 경우 모두 명확하게 딱 맞아떨어지지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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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부분에서, 그가 왜 괴로워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애매합니다. 많은 분들이 '마엘이 베르소를 조종했다'고 생각하시던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1.에서 짚었던 것처럼, 화가가 캔버스 소속 인물의 자유의지를 조종할 수 있다는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폭력으로 제압하거나, 특수 능력으로 몸을 조종하더라도 여전히 그 개인의 의지가 살아있는 듯한 장면만 있죠.
엔딩에서 베르소가 피아노에 앉기 직전, 마엘이 박수를 보내며 그에게 미소지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베르소도 목례로 화답하죠. 제게는 이 장면에서 그들이 교감을 나누고 있다고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꼭두각시에게 명령을 내리는 장면처럼 보이진 않아요.
그들이 교감을 나눈 직후, 마엘의 오른쪽 눈에서 조용히, 살며시 눈물이 흘러내리는데,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이 눈물과 미소가 정확히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 건지는 모호하지만, 그것이 '많은 것을 희생한 끝에 마침내 지켜진 오래 전의 약속'에 대한 감동으로 흘려내렸다고 봐도 이상할 것은 없어요. 그리고 그녀는 베르소의 연주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한번도 깜빡이지 않고 떨리는 눈동자로 오직 베르소만을 주시합니다.
그 이후, 컷신은 베르소가 피아노를 치려고 손을 펴다가 머뭇거리며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장면, 미소로 가득하던 시엘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지는 장면, 약간 불안해하면서도 응원하듯이 미소짓는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루네로 이어집니다. 이 장면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호합니다만, '너무 오랜만의 연주라 머뭇거리는 베르소와, 그런 그를 조용히 응원하는 애인(혹은 애인들, 혹은 전 애인들)'로 해석될 여지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즉, 영상 속에서 베르소가 엄청난 고통 속에 있다는 근거가 따로 있진 않아요.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뿐인거죠. 그리고 그 반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충분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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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클레르 옵스퀴르 무비컷'으로 검색해서 그 장면을 다시 천천히 보시면, 마지막 마엘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장면 말고는 연출 자체가 '최악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지는 않아요.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장면을 보면 긍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어둠 속에서 가만히 서 있다가 두 갈래의 스포트라이트 앞으로 걸어나가는 베르소의 모습이라든가, 앞서 언급한 고갯짓의 교감이라던가, 친구들의 미소라던가, 결의에 찬 듯 단호한 얼굴로 피아노를 주시하는 베르소라던가.
인간의 뇌는 어떤 결론을 먼저 내려놓고 상황을 관찰하면, 내린 결론을 지지하거나 보강하는 정보만을 수집하게 됩니다. 심리학적으로는 이를 인지 편향이라고 하는데, -_- 이렇게 점 세개가 역삼각형으로 모여있으면 사람 얼굴처럼 보이는 파레이돌리아 현상, 빨간색 신발을 신고 길에 나가면 평소에는 인식하지 못하던 거리의 빨간 물건들이 갑자기 눈에 띄는 아포페니아 현상, 다른 나라 언어로 구성된 노래가사가 갑자기 모국어로 구성된 것처럼 들리는 몬더그린 현상 등이 바로 이런 인지 편향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엔딩의 컷신 전체를, 마엘 얼굴이 무너지는 부분만 빼고, 차분히 다시 보세요. "수십년간의 지리한 고통 끝에 마침내 콘서트에서 피아노를 치게 되어 머뭇거리는 베르소와, 그를 조용히 지지하는 마엘과 애인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 해석이 옳다거나, 절대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컷신이 오로지 '최악의 상황'이나 '형벌'로만 해석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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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 경우 합리적인 추론은, 베르소가 만약 고통받는다 해도, 그는 어떤 강제력에도 억압되고 있지 않지만 힘이 모자라 마엘을 구원해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죄책과 회환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3) 베르소는 마엘을 구원하려 했는가?
베르소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 생각을 기반으로 마엘을 때려눕히려 했다면, 그것은 굉장한 도덕적 잘못입니다.
베르소는 이미 자신만의 이기적인 이유로 수많은 거짓말, 배신, 살인을 감행해온 인물이니 그가 저지른 죄의 명단에 도덕적 잘못 하나가 더 얹어진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지만, 생각해보세요. 그는 현실의 알리시아가 정확히 어떤 고통을 받는지 모릅니다. 그는 현실의 알리시아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그가 물려받은 베르소의 기억도 원본 베르소의 것이 아니라, 베르소를 기억하는 알린의 기억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원본 베르소도 알리시아가 고통받는 원인인 화재 때 사망했기 때문에 화상을 입고 추해진 알리시아의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즉, 그는 현실이 알리시아가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그녀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몰라요. 마지막 순간 마엘이 급하게 몇마디 언급하긴 하지만, 그녀는 아직 너무 어리고, 사회성도 부족하고, 말솜씨도 애매해서 그리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애초에 16살 여자아이가,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어른 남성에게 자신의 끔찍한 모습과 불행한 현실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어할까요?
베르소는 현실의 알리시아를 토대로 하는 그려진 알리시아를 봤습니다. 하지만 그려진 알리시아는 화상 자국만 빼고 모든 것이 달라요. 현실의 알리시아가 "음~음~음"하는 소리만 낼수 있는 반면, 그려진 알리시아는 쇳소리가 섞이긴 하지만 정상적으로 말을 할 수 있고, 서전트 점프로 3미터 정도는 가볍게 뛰어오르며, 시간을 멈출수도 있는 초인입니다. 무엇보다 그려진 알리시아는 인간 사회 속에서 살지 않아요. 초능력을 지닌 은든 슈퍼히어로라고 해도 될 정도죠. 베르소가 허리를 통째로 잘려도 잠깐 툴툴댈 뿐 멀쩡했던 것을 보면, 그려진 알리시아가 현실의 알리시아같은 고통을 느낄 확률도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베르소가 '현실의 알리시아의 고통'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할 확률은 0%입니다.
결론적으로 베르소는 알리시아의 현실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그녀가 현실에서 사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자신만의 신념, 자신만의 고집, 자신의 강박으로 그녀를 때려눕혀 제압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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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끔찍한 고통 때문에 ㅁㅇ성 진통제를 투여받는 말기 암환자에게서 ㅁㅇ성 진통제를 빼앗아 불태워버리면서 "이건 현실이 아니야! 넌 현실에서 더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어!"라고 말한다면, 그 누가 그것을 올바른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의도가 얼마나 선했는지와는 별개로, 정확한 상황을 모르는 상태로 타인의 삶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그 사람의 행동이 설령 자기파괴적으로 보인다고 해도. 인간은 매 순간 합리적이거나, 건설적인 행동만을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옆에서 감시하면서 "이때는 이렇게, 저때는 저렇게"하라고 명령하거나, 폭력을 통해 강제로 명령에 따르게 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없어요.
만약 이 글을 보는 당신에게 누군가가 "게임 따위를 왜 해? 그 시간에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해!"라거나, "레딧 따위를 왜 해? 그건 인생을 낭비하는 짓이잖아. 정신나갔어?"라고 말하면 당신은 뭐라고 대답할 건가요? 인간 삶의 본질은 행복의 추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행복의 추구를 폭력으로 억압하는 일이 올바를 수는 없죠.
바로 그래서, 베르소의 죽고 싶다는 의지를 거슬러 그가 피아노를 치게 만드는 마엘의 행동도 올바르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그 반대로 마엘이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의지를 거슬러 그녀의 행복을 파괴하는 베르소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부분이, 제가 두 엔딩 모두 별로라고 생각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물론, 베르소의 폭력과 억압이 차후 마엘의 진정한 구원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죠. 하지만, '차후에 진정한 구원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누군가의 행복을 짓밟는 행동을 정당화할 수 없어요.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뿐입니다.
(4) 마엘은 곧 죽는가?
마엘 엔딩에서, 그녀가 멀지 않은 미래에 죽게 될 것이라는 암시가 등장합니다. 바로 그녀의 무너진 얼굴이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베르소의 선택이 옳았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3번 칼럼에서 다루었듯, 현실에서도 그녀는 그리 오래 살 수 없어요. 눈알과 후두가 녹아내릴 정도로 심각한 화상을 전신에 입은 사람이 오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망상입니다. 현대 의학을 기준으로 그녀가 10년(엔딩 시점에서는 약 8년)을 살아남을 확률은 대략 15%로, 말기 간암이나 폐암 진단을 받은 사람이 10년을 살아남을 확률과 비슷합니다. 의학적으로 보자면 이 수치는 '가망없음'의 완곡한 표현입니다.
의학적으로 생존 확률이 15%인 상황 몇 가지를 꼽아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
A. 심정지 이후 10분 이상 방치되었을 경우의 생존 확률(10~15%)
B. 병원 밖에서 심정지 후 병원에 이송되었을 경우의 생존 확률(10~15%)
C. 머리나 심장에 총격을 당한 후 응급처치 없이 10분 이상 경과했을 경우의 생존 확률(10~20%)
D. 상공 3km 고도(일반적인 건물 기준 1,000층 높이)에서 맨몸으로 추락했을 때의 생존 확률(5~15%)
E. 대형 화재가 발생한 밀폐건물의 5층에서 뛰어내렸을 경우의 생존 확률(10~15%)
G. 사형 집행용 약물을 주사받은 경우의 생존 확률(10~15%)
앞서도 누누이 말했듯 이 정도 확률은 '가능성은 있다' 수준의 이야기이며, 대부분은 확실하게 사망한다는 뜻입니다. 육면체 주사위를 던져서 특정한 하나의 숫자가(예:6) 나올 확률이 16.6%에요. 당신이라면 그 확률에 목숨을 걸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보다도 낮은 확률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게 죽음'일수밖에 없죠.
현대의 모든 의료 기술을 동원해도, 마엘과 같은 중증 3도 화상 환자는 평균적으로 수개월~2년 내외 정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할 경우, 게임의 엔딩 시점에서 마엘의 수명은 평균의 최대치로 잡아도 채 1년이 남지 않아요.
거기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대 의학 기준이고, 게임의 배경인 19세기말 프랑스 기준으로 마엘의 3년 생존율은 거의 0%에 수렴합니다. 당시에는 흡인성 화상을 치료하는 치료법 자체가 없었으니까요. 즉, 현실에서 마엘의 남은 수명은 그리 길지 않아요.
그리고 캔버스에서는 현실보다 약 100배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죠. 캔버스 내에서라면, 어쩌면 그녀는 현실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들, 예컨대 누군가와 연애를 한다거나, 아이를 낳는다거나, 가정을 꾸리는 경험을 할 수도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현실로 돌아간 마엘의 미래'에 대해 말하지만, '캔버스 안에서의 마엘의 미래'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그것을 실제로 경험한다면, 그것은 현실과 똑같은 행복을 그녀에게 선사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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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생존 기간'의 채산을 맞추려 하면, '그림 내에서 잔류할 경우 수명이 얼마나 깎이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알린이 캔버스에서 100년 이상, 르누아르가 최소 67년 이상 생존한 것으로 보았을 때 대략 60년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들은 오랜 캔버스 경험을 가진 훈련된 화가들이므로 마엘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더 짧을 가능성이 높죠.
하지만 게임 후반에 마엘은 페인트리스로 각성하고 각종 능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므로, 게임 시작시의 알리시아보다 더 오래 버틸 수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기간의 기준이 지나치게 모호하기 때문에, '마엘이 곧 죽을 것이다'라는 말이 합리성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곧'이 어느 정도의 기간인지를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 '곧'이 캔버스 기준으로 100년(현실 기준 1년) 정도 되는지, 아니면 캔버스 기준으로 하루 이틀밖에 되지 않는지조차 알수가 없어요.
하지만 확실한 것은, 현실에서 마엘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미래'라고 말할 정도의 기간을 살아남을 확률은 거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캔버스에서는 그 100배(-캔버스 잔류로 일찍 죽게 되는 시간)의 시간을 멀쩡한 몸으로, 초능력을 지니고, 서로 사랑하고 그녀를 학대하지 않은 친구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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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화상 후유증을 완전히 무시한다고 쳐도, 마엘은 당연히 언젠가 죽을 겁니다. 캔버스에서 나왔다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녀가 '언제' 죽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그녀를 학대하는 가정의 상황이나 사회적 고립을 제외하더라도, 체온 조절 불가와 감염으로 인한 고열 및 염증을 매일 느껴야하는 현실, 3초마다 선인장 하나를 통째로 삼키는 고통, 성장기이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박피 처치 등, 그녀의 현실의 삶은 매 순간이 끔찍한 고통으로 가득할 확률이 높습니다. 마엘 스스로 그렇게 말하기도 했고.
이것이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행복추구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인데, 3번 칼럼에서 충분히 설명했으므로 이 부분은 넘어갑니다.
(5) 소년은 누구인가?
시엘과 함께 콘서트장에 참여하는 소년은 과연 누구일까요? 이 소년의 후보로는 대략 3명의 인물이 거론됩니다.
A. 구스타브의 제자 중 한명인 기욤
- 구스타브의 제자는 총 3명이지만, 알렉상드르는 심한 곱슬머리이고, 어윈은 흑인이므로 가능성이 없죠.
B. 페이딩 보이
C. 시엘과 피에르의 아들
제가 보기에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은 B. 페이딩 보이입니다. 소년은 대략 10살~15살 사이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데, 시엘의 아들이라고 보기엔 나이가 너무 많아요. 거기다 시엘의 아들이라면 그가 굳이 부모를 남겨두고 마엘과 루네 사이에 앉을 필요가 없죠.
반대로 구스타브의 제자인 기욤으로 보기엔 나이가 너무 적습니다. 프롤로그에서 엔딩 사이, 성장기 후반인(16세) 마엘은 대략 10cm정도 성장했습니다. 따라서 기욤도 프롤로그보다 훨씬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거기다 엔딩 소년의 머리색은 검은색인데, 기욤의 머리색은 밝은 갈색이죠. 거기다 기욤이라고 치기엔, 구스타브가 자기 옆옆자리에 앉는데도 한번 돌아보지조차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얼굴 모양도 좀 다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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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소년이 확실한 페이딩 보이인지의 여부는 게임 내에서 설명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가 마엘이 '그려준' 시엘의 아들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녀가 자살을 기도하다가 잃어버린 아들을 되살려낸 거라면 나이도 얼추 설명되죠. 그가 시엘의 아들이라도, 부모의 오붓한 시간을 지켜줌과 동시에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루네의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려고 일부러 부모와 떨어져 루네와 마엘 사이에 앉을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도 할 수는 없고요.
기욤일수도 있습니다. 그가 왜소증을 앓고 있거나 성장이 느린 체질일 수도 있고, 머리색은 변할 수도 있고 베르소처럼 염색을 할 수도 있으니까. 같은 논리에서 알렉상드르일 가능성도 있죠. 매직펌과 염색을 동시에 했다거나. 그가 구스타브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루네의 체온에 너무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고.
느끼셨겠지만, 이정도쯤 되면 추측의 합리성이란 것이 거의 사라져버립니다. 아예 세 명의 후보 중 누구도 아닌 다른 사람일수도 있어요. 명확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처럼, 게임의 "그렇게 해석될 수 있고,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는" 부분들 때문에 엔딩에서 수많은 추측과 논쟁이 난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해석의 자유로움과 풍부함, 그리고 문명적인 논쟁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만, 그래도 이렇게 너무 떡밥만 던지는 것은 좋아하지 않아요. 어떤 논의도 건설적인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막다른 길처럼 느껴지거든요.
(6) 마엘은 진짜인가?
우리가 아는 마엘, 그토록 사랑스럽게 깔깔대던 소녀, 큰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고통을 호소하던 소녀, 애교스럽게 장난치고 발랄하게 옷깃을 잡아끌던 그 소녀는 2막 마지막에 르누아르에게 고마주되면서 사망합니다.
2막 에필로그에서 나오는 것은 알리시아, 그것도 구스타브를 죽인 그려진 르누아르와 동행하는 그려진 알리시아의 원본이자, 사실상 3막에서 처음 만나는 인물인 알리시아이며, 그 이후 3막에서 등장하는 것은 마엘의 기억을 가진 알리시아입니다.
이 지점에서 많은 분들이 당혹감을 느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녀는 마엘일까요? 아니면 단지 마엘의 기억을 가졌을 뿐인 알리시아일까요?
현실적으로 보자면, 마엘이라고 봐도 무방하긴 합니다. 예를 들어 완전히 같은 사람이라도 그가 16살 때일때와 32살일때는 세포 단위부터 전부 다르거든요. 일치하는 것은 DNA와 16살까지 공유하는 기억 뿐입니다. 이처럼, 연속되는 시간적 변화 속에서도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성질이기 때문에, 알리시아는 마엘과 동일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죠. 이 글을 보신 분들도 느끼셨을거라 생각하지만, 저는 그런 의미에서 엄밀히 말하자면 '알리시아'인 3막 이후의 그 소녀를 계속해서 마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리시아로 변한 후, 그 소녀는 이전과는 명백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엘이 소극적이고, 수줍으며, 감정이 풍부하고 장난기가 넘치는 명랑한 소녀였다면, 알리시아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이며, 신경질적인데다, 이기적인 날카로운 소녀입니다. 대표적으로 마엘은 게임 내내 감정적 충돌이 일어나도 절대 검을 뽑지 않지만, 알리시아는 르누아르와의 말다툼에서 말문이 막히거나 베르소가 페이딩 보이와 계속 대화하자 곧바로 검부터 뽑아들죠.
문제는 이것이 '알리시아의 원래 성격'인지, 아니면 '처한 상황이 마엘의 상황과 달랐기 때문'인지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는 행동을 보면 분명히 마엘과는 많이 다른데, 처한 상황이 다르다보니 딱 마엘이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해요. 그래서 이 소녀를 '내가 알던 마엘'로 생각해야 할지, '마엘의 기억을 가진 알리시아'로 대해야 할지에 대해 감정적 혼란이 생기게 됩니다.
이처럼, 게임 전체가 지나치게 모호해요. 제대로 설명해주질 않습니다. 상징이나 은유, 클리셰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명쾌한 맛이 없습니다.
(7) 뤼미에르 시민들은 진짜인가?
캔버스 내에 그려진 인물이 진짜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위에서 했으니 넘어가겠습니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엘 엔딩에서 멀리서 흝고 지나가는, 콘서트장 바깥에 몰려든 뤼미에르 시민들이 매우 비슷한 느낌의 옷을 입은, 매우 비슷한 체격을 지닌, 매우 비슷한 인물들로 보여지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게임의 프롤로그에서도 엑스트라들은 대체적으로 비슷한 복식을 하고 있으며, 그 중에는 붙여넣기된 인물들도 여러 명 있습니다. 광장을 돌아보면 간단히 찾을 수 있죠. 하지만 마엘 엔딩에서 나오는 인물들처럼 완전히 복식의 색과 모양이 똑같은 사람들'만' 있지는 않습니다. 아망딘, 리처드, 라파엘처럼 고유한 모델링을 가진 인물들도 있고.
이 부분은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합니다.
A. 마엘이 실력이 부족하여, 아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복사 붙여넣기했다 :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여러 사람이 지나치게 비슷해 보이고, 아니 완전히 똑같아 보이고, 이런 몰개성한 모습은 복사 붙여넣기된 인물들처럼 보입니다.
또한 마엘은 그녀가 잘 알고 지내던 시엘이나 루네를 복원할 때조차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잘 알지 못하는 뤼미에르 시민들을 복원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B. 주변인들이기 때문에 연출적으로 일부러 간단하게 처리했다 :
이것도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프롤로그에서도 복사 붙여넣기로 만들어진 인물은 여럿 있지만, 당시는 34 고마주 직전이라는 혼란스러운 시기이고, 사람들이 도시를 재정비하거나 복식 통일에 신경쓸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았으니까요. 마엘 엔딩 장면에서 비춰지는 엑스트라 들은 모두 콘서트에 들어가는 사람들이며, 드레스코드가 있거나(기쁨이나 조의의 의미로 흰 옷을 착용하는), 혹은 그런 복식이 한참 유행이었을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마엘과 예쁘고 사랑스럽고 귀여운 루네, 그리고 시엘은 완전히 똑같은 복장을 입고 있습니다.
또한 그림을 그리는 능력과 캔버스를 창조하는 능력은 별개의 능력입니다. 그들이 실제로 부활하는 것에 중요한 것은 그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크로마를 불러오는 것이며, 마엘은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을 뿐, 베르소의 조언으로 요령을 파악하자 쉽게 그들을 불러옵니다.
실제로 마엘 엔딩에서 등장하는 루네, 시엘, 피에르, 구스타브, 소피는 전부 완벽한 모습으로 부활했습니다. 마엘이 피에르를 되살린 것에서 그녀가 33원정대만큼 친밀하지 않은 인물도 부활시킬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 뤼미에르 시민들도 크로마를 불러와서 완벽하게 부활시킬 수 있을 가능성도 있죠. 혹은, 순차적으로 그렇게 하는 도중일수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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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 역시, 앞서 지적한 많은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복사 붙여넣기로 만들어진 인물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가 너무 모호합니다. 이렇게 해석해도, 저렇게 해석해도 말이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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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소결론으로, 이 게임은 의도적으로 각 엔딩의 좋고 나쁨을 가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제작진들은 해피 엔딩이나 정사는 없다고 분명히 밝혔어요. 마엘 엔딩이 배드엔딩이라고 하는 것이 당황스럽다고도 했고. 앞서 짚은 여러 모호한 점들은, 해석의 여지를 넓게 남겨둠으로써 각 엔딩의 균형을 맞추고 각 엔딩의 위험성과 슬픔의 비율을 조정하기 위한 장치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합니다. 두 엔딩 전부, 편안한 톤으로 진행되다가 갑자기 목에 탁 걸리는 부정적인 암시들이 슬며시 등장하는 구조이기도 하고요.
이 칼럼 시리즈에서 여러 번 말씀드렸던 내용을 다시 말씀드리지만, 어떤 엔딩을 선호하든 그건 그 개인의 자유이고, 그 개인이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얻었든 그것은 모두 그 개인의 진실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의견들에 대해 반대하지 않아요.
제가 이 전체 칼럼, 그리고 이번 편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나와 다른 결론'을 가진 사람들을 비방하거나, 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머릿속에 생겨난 가상의 적을 욕하는 것과 똑같아요.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입니다. 그걸 무너뜨리고 박살내기 위해 노력하거나, 혹은 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얕잡아보고 비하하는 것은 바다에 소금을 타는 것만큼이나 어리석고 비생산적인 일입니다.
그냥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며, 동의할 수 없다면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대화를 종료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상대를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베르소 엔딩을 지지하다니, 감성이 부족한 사람이군, 대량 학살을 지지하는거야?"라거나 "마엘 엔딩을 지지하다니, 지능이 부족한 사람이군, 베르소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해? ㅁㅇ 중독자의 현실도피를 지지하는 거야?"는 식으로 상대를 미워하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게임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아요.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일 뿐입니다. 그걸 아셔야 해요. 여러 모호한 부분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것 뿐이라는 점을요.
그러니 부디,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해주세요. 적어도 같은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는 그래도 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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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흡한 복선활용
└ 2-1. 사라진 고블루
└ 2-2. 페인티드 르누아르의 목적
└ 2-3. 가슴을 두드리는 구스타브
└ 2-4. 쏘 쿨한 마엘
└ 2-5. 어째서 갑자기 밤이 되었을까?
└ 2-6. 적군이 너무 적어
└ 2-7. 치매에 걸린 구스타브
└ 2-8. 어색한 로맨스
└ 2-9. 큐레이터는 어떻게 움직였는가?
└ 2-10. 얼굴이 부서진 이들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 2-11. 페인티드 알리시아의 편지
└ 2-12. 꽃바구니로 둘러싸인 흰머리 여자
2. 미흡한 복선활용
앞서 1.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게임은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상징과 은유, 클리셰를 남발하기 때문에 명쾌하고 직관적인 맛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서사적으로도 굉장히 애매한 부분이 많은데, 대체적으로 '복선일 것처럼 등장했다가 그냥 사라져버리는' 부분들이 여럿 있죠. 이것들이 게임 전체적인 흐름의 일관성을 해치고, 많은 궁금증을 발생시킵니다. 이 '미흡한 복선 활용'의 대표적인 예시를 몇가지 짚어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2-1. 사라진 고블루
고블루 첫 만나는 장면을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소피의 환영이 스쳐가고, 소피에게 주었던 꽃이 딱 등장하는 장면에서, 고블루가 뛰쳐나와서 전투가 벌어지는데, 이 고블루를 죽이지 않고 돌려보내죠. 그러면서 루네가 '꽃만 안 건드리면 공격하지 않는 것 같다.'라거나 마엘이 '뭔가 익숙한 느낌이었다.'라고 언급하는 등등 복선을 팍팍 뿌립니다.
창작물 좀 즐긴다하는 분이시라면, 이 장면에서 '저 고블루가 소피와 뭔가 연관이 있구나', 혹은 '소피가 고마주된 후 저 고블루로 변이한 것은 아닐까?(+고마주된 사람들이 사실은 죽지 않고 네브론으로 변이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수밖에 없는 광경입니다.
근데 이 복선, 그대로 사라져버리죠. 그 고블루는 이후 다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장면의 의미는 대체 뭐였던 걸까요?
물론 의도적으로 회수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모종의 메타포나 맥거핀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중요할 것처럼 제시된 복선이 그대로 사라지는' 현상은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중간이 비어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2-2. 페인티드 르누아르의 목적
페인티드 르누아르는 자신의 목적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저 가족과 행복하게 지내고 싶을 뿐이라고요. 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목적과는 영 상관없는 행동들을 합니다.
그가 가족과 최대한 오랫동안 행복하게 지내려면 다음과 같이 행동해야 합니다.
A. 네브론을 최대한 많이 쓰러뜨려야 합니다. 그 네브론들이 '종말의 날'을 앞당기고 있는 원인이니까요. 페인티드 르누아르는 강력한 보스이며, 시몽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네브론들을 손쉽게 살해할 능력이 있습니다. 클레아가 그것을 좋게 보진 않겠지만, 어차피 페인티드 르누아르는 베르소처럼 알린에게 불멸을 선물받은 존재이며, 클레아를 직접적으로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막아내거나 회피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해 보입니다.
B. 원정대를 최대한 많이 직접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에게 살해당한 원정대원들의 크로마가 페인트리스에게 회수될 테니까요.
C. 원정대원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합니다. 이 경우, 르누아르의 말을 원정대원들이 얼마나 믿을지는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시도해볼만한 가치는 충분합니다.
베르소는 자신이 진실을 다른 원정대원들에게 설명하려 여러 번 시도했지만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장면에서 베르소의 말을 대부분 거짓이며, 그가 전하려던 '진실'도 진짜 진실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의 목적은 '진실을 숨기고, 페인트리스를 처치하여 뤼미에르 캔버스를 멸망시키는 것'이니까요. 애초에 베르소는 진실을 제대로 밝힌 적 자체가 거의 없어요.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거짓말과 배신을 시도합니다.
반대로 르누아르는 가족들과 오랫동안 사는 것이 목적이므로, 충분히 진실을 전달할만한 동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겐 강력한 증거도 있죠. 그 자신이 늙은 사람이니까. 원정대원들과 협력해서 네브론들을 소탕하고, 크로마의 흐름을 페인트리스에게 돌려주면, 그는 영원히 가족과 살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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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그 모든 가능성을 제쳐두고 원정대를 공격하며, 그것도 알랭(33원정대의 리더)과 구스타브만을 직접 죽일 뿐, 나머지는 느와르와 네브론들이 죽이도록 만듭니다. 그것은 분명하게 그의 행복한 시간을 줄이는 행동인데 말이죠. 대체 왜 그러는거죠?
2-3. 가슴을 두드리는 구스타브
구스타브는 계속해서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립니다. 마치 폐병환자처럼 보이죠. 하지만 여기에 연관된 설명은 나오지 않고, 구스타브가 살해당하면서 영원히 알수 없게 됩니다.
그가 팔을 어떻게 잃었는지, 가슴을 왜 두드리는건지, 33고마주 이전에 루네와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등등 여러 복선이 던져지지만, 이것들은 하나도 해소되지 않죠.
2-4. 쏘 쿨한 마엘
베르소가 구스타브를 죽게 내버려 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마엘은 분노했어야 했습니다. 그 분노야말로 그녀가 구스타브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더 나아가 캔버스 세계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증거이니까요. 물론, 그녀는 화를 내면서도 괴로워했을 겁니다. 베르소의 입장을 이해했을 테니까요. 그런 감정적 갈등 역시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겠죠.
하지만 그녀는 그저 "아, 알겠어요. 진실을 말해줘서 고마워요!" 라고 말합니다. 마치 베르소가 "내일 저녁은 뭐 먹지?" 같은 질문에 막 대답한 것처럼요. 굉장히 허탈하죠.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이 소녀가 내가 알던 그 마엘과 동일인물이기는 한가?"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넘어갈만한 문제였나요?
2-5. 어째서 갑자기 밤이 되었을까?
33원정대 전체 장면 중 가장 뽕이 차는 장면이라면 누구라도 3막 중반에 각성 마엘이 부활원정대 쫙 깔아놓고, 정면으로 검을 겨누면서 '내일은 온다.'라고 비장하게 읊조리는 장면일 것입니다. 최종전의 서막으로 딱 들어맞는, 게임 최대 명장면 중 하나죠.
다만 이 장면을 냉정하게 음미해보면 이상한 부분이 여러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인게임에서 뤼미에르로 들어가는 부분은 무조건 낮에 가게 되어있는데, 그 직후 나오는 영상은 한밤중입니다. 일단 여기서 '응?'하는 느낌 드신 분들 좀 있을 겁니다. 전반적으로 컨티뉴어스 문제가 좀 있어요.
예컨대 최종전 직전에 온 맵이 어둡고 기괴한 느낌으로 변하고, 이게 주인공 파티의 최종 돌격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컨티뉴어스를 가진 창작물은 진짜 차고 넘치거든요. 앞 문장 보시면서 '아, 그거가 그랬지?'하고 생각하시는 분들 많을거고, 그분들 각각이 생각하는 창작물들도 전부 다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게 단순히 기술력이나 정성의 부족에서 유래된 거라 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아무리봐도 이 사이에 뭔가 짤린 부분이 있다는 느낌이 들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2-6. 너무 왜소한 적군
최종 국면의 뤼미에르 돌격신에서 걸리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맨 처음 돌격하는 장면에서 우리편은 대충 30명 정도의(컷신 영상 보면 컷마다 인물 숫자가 다르게 나와서 정확하게 셀수가 없습니다. 마엘 파티까지 포함해서 대략 30명 정도 되죠) 대인원이 칼을 뽑아들고 돌진하는데, 정작 상대편에서는 계단 위 다섯 마리의 일탈자가 맞돌격합니다.
좀 이상하지 않나요? 이쪽이 대부대로 돌진하는 만큼, 상대측도 그정도, 혹은 더 많이, 혹은 더 거대한 적들이 나와야 그림이 좋은 장면이었는데요. 그렇다고 일탈자가 막 엄청나게 센 몹인 것도 아니고. 거기다 컷신 이후 몇걸음 진행하면 곧바로 사방에서 거대한 몬스터들이 튀어나옵니다. 이 부분의 마감이 굉장히 어색해요.
2-7. 치매에 걸린 구스타브
게임 맨처음에 소피와 구스타브가 항구로 향하는 장면에서, 루네가 광장 동상 밑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소피가 '루네...불쌍한 아이'하면서 복선도 깔아주죠.
그런데 여기서 플레이적으로 1시간 남짓 지난 다음, 섬에 도달해서 고립된 구스타브가 루네를 만나서 마엘과 재회하고 처음 야영할 때, 루네가 기타치는 것을 보면서 구스타브가 '오랜만에 연주하는 모습을 보네.'하면서 운을 띄웁니다. 게임 내 시간 흐름을 아주 정확하게 계측할 수는 없더라도, 소피의 고마주-> 원정대 출발-> 첫날 야영-> 다음날 마엘과 재회-> 그날 야영에 연주하는 것이니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것이 확실한데도요.
2-8. 어색한 로맨스
시엘과의 로맨스를 생각해봅시다. 이사람, 임신까지 했던 유부녀인데다 사별한 전남편 피에르를 엄청나게 사랑하고 있거든요? 근데 구스타브하고도 음담패설을 자연스럽게 나누고, 베르소는 실제로 육체적인 관계를 맺기까지 해요. 그것도 자기가 먼저 유혹해서. 그것도 두 번.
첫째로, 만약 시엘이 죽은 남편의 그림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고 깊은 애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면... 왜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가지려 하는 걸까요? 만약 베르소가 그녀의 외로움을 이용해 성적 욕망을 해소하려 했고, 시엘이 거기에 넘어간 것이라면, 그래도 저는 불편하겠지만, 적어도 시엘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정반대입니다. 시엘이 베르소를 유혹하니까요.
둘째로, 만약 시엘이 베르소에게 깊은 관심이 있었다면, 설령 결혼을 생각하는 수준의 헌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왜 죽은 남편과 그에 대한 애정을 장황하게 이야기한 '후에야' 성관계를 유혹했을까요? 이 글을 쓰는 저는 남성인데, 만약 제가 제 아내에게 헤어진 전 여자친구를 얼마나 사랑했고,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고,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는지 장황하게 설명한 다음 잠자리로 유혹하려 했다면, 아마 제 아내는 제 뺨을 후려갈길 것입니다. 여러 번. 그리고 저는 그렇게 맞아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행동은 파트너에 대한 존중이 아니니까요.
글쎄요... 프랑스 문화권에서 성관계가 단순한 스킨쉽처럼 여겨진다면, 예를 들어 깊은 우정의 신체적 표현처럼 여겨진다면, 문화적 상대주의의 관점에서 "글쎄요... 어쩌면... 어쩌면... 어떤 면에서는 말이 될 수도 있겠네요...어쩌면. 그렇죠, 어쩌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저의 상식으로 생각했을 때, 시엘의 행동은 정말로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 부분 때문에, 게임의 로맨스 시스템은 좀 엉성하게 느껴집니다. 무엇보다 성관계까지 맺는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포옹을 하거나, 키스를 나누는 장면이 하나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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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게임을 진행하다보면 '시엘이 연인이어도, 루네가 연인이어도 말이 되는 장면'이 여럿 나옵니다. 근데 이 대부분에서, 루네보다는 시엘이 먼저 나오고, 좀 더 깊은 관계인 것처럼 나옵니다.
심지어 시엘을 거절하고 루네와 연인관계라도, 항상 시엘이 먼저 베르소와 상호작용한 후 루네가 나옵니다. 이게 느낌이 영 별로에요. 굳이 설명을 붙이자면, '시엘이 연인은 아니지만 인간적으로 가까워서'라고 변명을 할 수는 있겠지만 조잡하죠.
2-9. 큐레이터는 어떻게 움직였는가?
큐레이터, 즉 르누아르씨는 알린에게 제압되어 모노리스 아래에 갇혀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데상드르 저택 안에서 마엘을 돌봐줄 뿐만 아니라, 일행의 야영지에도 따라오고, 페인티드 르누아르와의 싸움에서는 직접 등장해서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도 합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거죠?
모노리스에 짓눌린 르누아르는 본체고, 큐레이터는 그 단말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큐레이터는 단말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능력을 구사하고, 강력하며, 무엇보다 르누아르 본인이 큐레이터로 변신하거나, 큐레이터가 르누아르로 변신하는 장면이 직접 나오기 때문에 애매해요. 큐레이터가 밖으로 나와서 돌아다니는 시점에선 르누아르가 두 명이라는 이야기가 되니까요. 혹은, 원본 베르소가 그랬듯, 르누아르가 자신의 영혼을 쪼개서 복제본을 만든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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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리스 역시 비슷한 능력을 보여줍니다. 본신이 여전히 르누아르를 짓누르고 있을 때, 캔버스 안의 뤼미에르 저택에서 나타나 마엘과 베르소를 맞이하는 장면이 있죠. 그런데, 이 부분이 스토리적으로 굉장히 어색합니다. 그녀는 왜 뤼미에르 시민들에게 진실을 설명하려 하지 않을까요? 그 단말을 뤼미에르로 보내서 뤼미에르 시민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원정대원들로 하여금 그들을 돕게 할 수도 있었잖아요.
원정대원들이 그녀를 도울 능력이 없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린은 뤼미에르 시민들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을 존속시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오랜 세월을 버텨냈습니다. 하지만 뤼미에르 시민들은 그걸 모르고, 알린이 고마주를 실행한다고 여겨 그녀를 욕하고 미워하죠. 알린 입장에서는 많이 서운하고 억울할만한 일인데, 단말을 생성하고 이동하는게 가능하다면 왜 그 설득을 하려들지 않을까요?
단순히 알린이 정신이 나갔기 때문에? 고마주를 그려 뤼미에르 시민들에게 경고를 할 정신만 남아있고, 나머지 정신은 다 부서져나갔기 때문에? 이 설명은 그리 명쾌하지 않습니다.
2-10. 얼굴이 부서진 이들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페이딩 보이, 큐레이터, 클레아, 페인트리스의 공통점은 얼굴 한가운데가 도려내진 것처럼 움푹 파여있다는 것입니다. 이 디자인이 상징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페이스리스, 즉 신원불명이라는 말을 단어 그대로 형상화했을 뿐일까요? 사실, 서사적으로 이들의 얼굴이 가려진 것은, 마엘과 동일인물인 것을 가리기 위해 가면을 쓰는 그려진 알리시아와 마찬가지로 나름의 역할을 가지긴 합니다.
하지만 "원래 그랬다"는 식으로 넘어가기에는 뒷맛이 좀 개운치 않은 것도 사실이죠.
제가 가장 설득력있다고 생각하는 가설은, 60원정대원들이 그들을 만나 진실을 들었을 때, 그들의 한심함을 못 견디고 공기역학적인 펀치를 내질렀다는 것입니다. 직선으로, 곧게.
그들이 어린 아이인 페이딩 보이에게조차 그렇게 했다는 점은 굉장히 놀랍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누군가의 얼굴에 주먹을 내지를 때 상대의 나이 같은 사소한 특징에 신경쓸 것 같지는 않군요.
2-11. 페인티드 알리시아의 편지
페인티드 알리시아는 베르소를 통해 마엘에게 편지를 건네주려 합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마엘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으며, 선택을 잘못할 경우 그녀의 가족은 하나만 남을 위험성도 있다' 입니다.
하지만 그 편지의 내용은 서사적으로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마엘은 뭔가를 선택하지도 못했고, 그저 상황에 휩쓸려다닐 뿐입니다. 그녀가 뭔가를 선택한다고 할만한 것은 마지막에 그녀의 애착 물건을 파괴하려는 르누아르와 베르소에게 저항한 행동인데, 이는 선택지라고 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때릴 때 맞는 사람이 저항하는 것을 '선택'이라고 하기 애매한 것처럼요.
거기다 가족이 하나만 남지도 않죠. 베르소 엔딩은 당연히 아니고, 마엘 엔딩에서 뤼미에르 캔버스 안에 이미 페이딩 보이, 즉 오빠의 영혼 조각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있고, 애초에 그녀는 33원정대원들을 가족이라 여기니까요. 그럼 대체 이 편지가 서사에서 어떤 역할이나 의미를 가지는거죠?
2-12. 꽃바구니로 둘러싸인 흰머리 여자
프롤로그에서 뤼미에르를 돌아다니다보면, 꽃바구니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한 여자가 벤치에 앉아 있습니다. 챙이 넓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정확한 정체는 알기 어렵지만, 흰색 머리칼에 날씬하고 키가 큰 성인 여성이라는 것은 알아볼 수 있죠.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가면 BGM도 바뀝니다.
이 사람 누구인지 아시는 분? 서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인 것처럼 등장하는데, 그녀는 그 이후 어떤 언급도 없이 사라져버립니다. 아마 못 보신 분들도 많을거라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페인트리스, 알린의 단말 중 하나일까요? 근데 왜 거기서 그러고 있는거죠? 주변의 꽃바구니는 뭘까요? 사람들에게 받은 걸까요, 아니면 사람들에게 팔고 있는 걸까요? 그것도 아니면, 꽃을 많이 받았다는 자랑일까요?
이 게임은 설명이 너무 부족하고, 불친절합니다. 최소한 어느 정도의 힌트라도 줘야죠. 저는 이런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휙 스쳐지나가는 것이 굉장히 답답해요.
(중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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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재미를 드릴 수 있었기를 바랍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다른 분들도 보실 수 있게 추천 한번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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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칼럼 예고 :
분석 칼럼 :#1 현실과 캔버스의 시간 비율(부제 : 캔버스의 시간은 거꾸로 가는가?)
분석 칼럼: #2 캔버스의 위험성(부제 : 왜 화가들은 위험해지는가?)
분석 칼럼: #3 마엘은 행복할까? (부제 : 베르소의 선택이 가진 위험성)
분석 칼럼: #4 "베르소 엔딩은 굿 엔딩일까?"(부제:엔딩 논란의 이유)
분석 칼럼: #5 최선의 답은 없었을까? (부제 : 정신 질환이 초래한 비극)
분석 칼럼: #6 왜 결론에 대한 논쟁이 생기는가? (부제 : 이 게임의 엔딩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 상편<-
분석 칼럼: #6 왜 결론에 대한 논쟁이 생기는가? (부제 : 이 게임의 엔딩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 중편
분석 칼럼: #6 왜 결론에 대한 논쟁이 생기는가? (부제 : 이 게임의 엔딩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 하편
분석 칼럼: #7 이 게임은 좋았는가? (부제 : 비평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33원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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