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번엔 티바트 전체에 걸친
'거짓말'을 주제로 삼았으며,
3.8 버전을 기준으로
작성됐음을 알립니다.
전에 이런 글을 쓴 적 있죠.
(굳이 안 보고 와도 됨.)
대충 내용을 요약하자면
원신 티바트 편은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인류가 고난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펼치게 된 '둘이라는 착각'을
논파하는 서사라는 결론을 냈습니다.
이번 글은 그 연장선이죠.
물론 제가 저런 글을 썼다고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존재해선 안 될 사이비종교처럼
취급하는 건 안 될 말입니다.
형이상학에는 별명이 하나 있는데,
바로 '만학의 여왕'입니다.
세상 온갖 학문으로 가지를 뻗어
'존재의 설명'을 탐구했거든요.
현존하는 수많은 학문과
학파들의 어머니인 셈이죠.
특히나 그 중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플라톤주의'라는 이름으로
서구권을 2천년 넘게 지배했고요.
그런데 호요버스는
각 지역의 주제이자 미덕들에
모순점들을 덧붙이면서
그 둘의 불가분함을 묘사하죠.
형이상학적 이원론으로부터
탈피해야 함을 역설하려고요.
그래서 자유와 구속, 불변과 마모,
영원과 찰나, 그리고 지혜와 무지가
이제까지의 각 지역 주제이며
동시에 이원론적 모순이었습니다.
가령, 몬드 서사에서의 종반부에
고통에서 해방된 드발린이
벤티에게 이런 충고를 듣죠.
"신에게 명령받은 자유도
결국은 일종의 구속이잖아."
자유라는 말에는 모순되게도
구속 역시 내포된다는 거죠.
자유의 의미를 알자면
구속의 의미도 선험적으로
알고 있어야만 하니까요.
때문에 티바트의 서사는 매 지역마다
미덕에 상충되는 개념을 배척하는 게
근본적으로 불가능함을 묘사합니다.
가장 극단적인 예로, 바알세불은
찰나의 염원을 떨칠 수 없음을 알자,
염원을 포용해 찰나를 이어붙여
영원으로의 실마리를 찾았죠.
찰나와 영원을 나눌 필요가
애초부터 없었음을 깨닫자,
마코토는 시간 초월의 힘을
에이 앞에 선보이면서까지
에이에게 정진을 권합니다.
이제 자질을 갖췄으니
다음 단계를 밟으란 격려였죠.
이는 다분히 니체 철학,
즉 불결한 대지를 끌어안고
거짓된 운명일지라도 사랑하라는,
허무주의 극복의 사상을
서사에 반영한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릴 출발시킬
질문이 정말로 중요해집니다.
'거짓말이어도 수용할 수 있는가?'
'거짓말에도 진실을 담을 수 있는가?'
호요버스의 의도를 수용하자면
거짓은 진실과 불가분하므로,
우리는 거짓도 불가피하게
수용해야만 합니다.
하늘과 땅, 천사와 악마, 영혼과 육신,
그리고 진실과 거짓의 대립에서
영지주의를 논파하기 위해
호요버스는 이 중 '거짓'을
우리에게 떠먹이려 합니다.
이를 앞서 제목에 나온 양반,
레이먼드 K.헤셀의 얘기로 시작하죠.
레이먼드는 여러 모로 파격인 영화
'파이트 클럽(1999)'의
단역 등장인물입니다.
(이젠 고전영화로 봐야 하나..)
저거 안 보면 우린 얘기 못해요.
꼭 시청한 다음 내려가세요.
(몇 분 안 되니까 꼭!)
한창 때의 브래드 피트와
에드워드 노튼이 주인공으로 나오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일 거야.
아침 식사도 너랑 내가
이제껏 맛본 어느 식사보다도
더욱 맛이 좋을 거라고."
끝내주지 않나요?
야간에 총기로 무장한 강도한테
꼼짝없이 죽을 거라 생각했을 텐데,
거기서 본래 삶의 의미를 되찾습니다.
어쩌면 레이먼드는 동물병원을 차린 뒤
세월이 지나 직원들한테
어느 강도의 살해 협박을 되뇌면서
그런 미친 일화가 있었단 썰을
웃으며 풀지 않았을까요?
저 번역 영상 뒷편으로
씬이 좀더 이어진 장면에서는
실린더가 빈 리볼버를 보여줍니다.
네, 저 탄환 없는 리볼버는
'그렇다'라고 답하더군요.
알맹이가 빈 협박이
누군가에게 인생의 전환점이라..
그래서 말인데, 거짓말 하면
원신에서 누가 떠오르시나요?
저는 단연코 호두입니다.
마침 그녀의 거짓말은
레이먼드가 들은 것과
그 결이 아주 비슷하죠.
먼저 그녀의 인생관부터 봅시다.
'삶을 후회없이 살라.'
어린 호두가 장례를 직접 주관한
할아버지의 영혼과 만나고자
무망의 언덕에서 저승 문턱의
어느 비경까지 출입한 뒤
겨우 깨우친 인생관이었죠.
호두가 비경에 들어갔음에도
후회없는 삶을 살았기에
홀연히 이승을 떠난 할아버지는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하필 지역 이름이 '무망'인 것도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무망의 언덕은 중국판에서
무망파(无妄坡)로 표기되는데,
'*망념이 없는 절벽'을 뜻합니다.
(*妄念 : 이치에 어긋나는 생각.
즉 헛된 생각이나 공연한 잡념.)
망념이 없다는 곳에 굳이 찾아가서
그 고생을 하고 작별인사도 못했지만
호두는 인생에 다시는 없을 교훈과
결코 번복하지 않을 인생관을 얻었죠.
바로 번뇌를 불살라
후회없이 사는 삶!
한마리 나비가 되는 꿈처럼
덧없는 인생을 알차게 사는 것!
호두가 쓰는 호마봉의 호마(護摩)는
불교 종파 중 밀교의 의식 이름으로,
호마목(木)이란 목패를 공물로 던져서
번뇌를 불사르는 의식입니다.
(원래는 브라만교 전통이지만.)
그런데 호두가 한 거짓말이
기억 안 나는 사람은 없겠죠?
적어도 이 장면은 기억나셔야죠.
"짜잔~ 사실 소그신 거애오~"
귀신에 시달리는 고객들 앞에서
거짓으로 해주 의식을 거행하고는
사실 애초에 귀신은 물론이요,
저주 같은 것도 없었다며
위 대사를 멋드러지게도 날렸죠.
해주 의식이라는 것도
그저 지맥 제압석 수호물로
마물을 끌어들인 것에 불과했고요.
그럼 저 거짓말 폭로 전의
고객이 한 답변도 기억하시나요?
엄청 좋아하죠?
거짓말에 속은 상황인데
전혀 내막을 모릅니다.
그런데 저 '고객'은 이미
삶의 구원을 얻은 것처럼
기쁨이 샘솟는 사람이 됐죠.
애초에 귀신이나 저주가 없었으니
사실 그는 호두를 만나지 않아도
행복해야 했을 사람입니다.
하지만 바보처럼 스스로 만든 고난에
제 발로 들어가서 허우적거렸죠.
네, 마치 레이먼드 K.헤셀이
다음날 아침에 맞이했을 만찬처럼,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도
실은 달콤한 고인물로 안 것처럼
답은 결국 마음에 있었습니다.
거짓말이라는 형식은 아무래도 좋았죠.
요이미야도 거짓말쟁이입니다.
전설임무 1막이랑 2막 모두
서로 서사만 달랐을 뿐이지,
주제는 아예 똑같았죠.
1막에서는 해외로 나가 살며
해방된 삶을 찾던 사쿠지로가,
절의를 안고 텐료봉행에서
라이덴 쇼군의 정의를 대행하던
케이스케를 만난 게 주내용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동향 출신이면서
서로 다른 이유로 고난한 삶을 살았죠.
사쿠지로는 원하던 삶을 못 이뤘고
외국의 이상을 이나즈마에서
펼치는 일도 하지 못했으며,
케이스케가 집행하던 정의는
사실 다른 이에게 위해를 가하며
부정함이라는 의심을 품게 합니다.
'난 옳은 선택을 했는데,
왜 그릇된 결론으로 나아가지?'
둘은 같은 동네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서로 너무나 다른 삶을 택했지만,
서로 똑같이 삶의 의미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가련한 중생들이었죠.
그래서 1막의 시작부분에서
요이미야가 아이들에게
동심을 잃지 않도록
요괴에 대한 거짓말을 하던 건,
두 주인공의 고난한 삶에도
거짓말로 지킨 동심이
필요했음을 의미합니다.
아이들의 요괴에 대한 믿음처럼
사쿠지로는 언젠가 여정 끝에
꿈을 이룬 삶을 이룰 수 있음을,
케이스케의 경우는 정의관을
뒤바꾸는 험난함을 감수하고라도
그 끝에 정의의 의미를
관철시킬 수 있음을 믿어야 했죠.
바라던 바대로 이루지 못할지언정,
호두의 인생관처럼 최소한
후회는 생기지 않도록 말이죠.
제 인생에서 이루지 못해
꿈이 거짓말로 귀결난다 해도,
그 거짓 안에서 행복했으면
그걸로 그만이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요이미야의 불꽃놀이가
정말 중요했습니다.
폭죽처럼 찰나인 인생이기에
불꽃 같은 삶을 살아야 하죠.
요이미야의 전설임무 2막은
그보다도 더 극적이었는데,
질병 때문에 다리를 잃고는
그 때문에 삶이 무너진 아빈이
환상으로써 허무주의를 극복하죠.
아빈은 원래 달리는 걸 좋아했으나
이젠 걷지도 못하는 불구자였습니다.
게다가 아란나라에게 작별인사를 못해
친구에게 상처를 줬을 거란 생각이
제멋대로 아이의 행복을
갉아먹고 있기도 했죠.
하지만 요이미야는
스스로조차 속이는 거짓말로
아빈에게 다시는 없을 선물을
한가득 안겨 기쁨을 되찾아줬죠.
요이미야 본인은 아란나라마저도
여행자와 페이몬이 준비한
환상인 줄로 알았지만,
그게 거짓이든 아니든
개의치 않고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호요버스가 준비한 영지주의 논파,
즉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타파에
호두와 요이미야는 꽤나
유쾌한 답을 내놓았죠.
거짓과 악마의 상징이던 대지에서
거꾸로 솟는 유성우로부터,
우리는 거짓을 들였음에도
진실한 행복을 체험합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힌들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요?
중간에 나오던 대화에도
이를 암시한 부분이 있었죠.
전설 속 재료로만 여기던 청송석,
그리고 이를 얻고도
쓰지 못한 대장장이!
재료를 얻고도 못 쓴 대장장이는
자신이 청송석과 같은 진귀한 재료를
감히 단조하지 못할 거라 여겼죠.
하지만 이는 역설적이게도
겸손이 아니라 교만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완성된 존재로서
세상에 던져지지 않으니까요.
그렇기에 인생의 특정 시점에
자신의 미완을 책망하는 건
정작 완성으로 나아가는 길을
저버리는 짓이고, 그러니 이는 교만이죠.
제가 썩 좋아하는 격언 중에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못난 짓이 둘 있으니,
하나는 무엇도 시작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도 끝내지 않는 것이다.'
전자에 해당한 대장장이들은
교만한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미완이라고 보고도
완성으로 나아가지 않았죠.
그러고는 결말에 다다르지 못함을
시작조차 않고 걱정하면서
고난에 스스로 구속됐습니다.
마치 다리를 잃어
괴로워하던 아빈처럼 말이죠.
대장장이의 저 대사들은
아빈도 간단한 마음가짐 하나로
쉽게 고난을 벗을 수 있었다는
암시를 위해 나온 겁니다.
혹시 누구 또 안 떠오르시나요?
시작을 해야만 했는데,
시작조차 않던 바보 두 명이요.
제게는 나히다와 에이가 있습니다.
나히다는 타인을 사랑해주기에
다른 이의 꿈을 유영하면서
근심을 덜어준다고 여겼죠.
그거면 신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실은 스스로에의 사랑을 저버려
아카데미아에 대한 항변이나
추종세력에의 구명 요청을
일절 한 적 없었습니다.
에이는 뭐.. 말이 필요한가요?
주변인을 떠나보낸 슬픔에 잠겨
찰나를 붙들고는 그걸 멋대로
영원에의 수행이라 착각했죠.
그래서 제가 보기에
두 집정관은 스스로를 기만했습니다.
나히다와 에이 모두 스스로가
집정관으로서 관장하는 미덕에
충실히 정진한다고 여겼으나,
실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되뇌며
책무를 배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실과 거짓 따위는
애초에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모순을 끌어안고, 부정을 부정하면
생각보다 많은 해답이 열렸죠.
꿈과 환상이 거짓이듯이
영지주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대지 역시 거짓이었습니다.
하지만 티바트 사람들에게
대지가 거짓임은 사실
아무런 한계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쾌한 거짓말로
불쾌한 진실, 고난을 떨쳤다는 심상에
너무 마음 놓지는 마세요.
호요버스는 굳이 수고를 덜어서
몸소 불쾌한 거짓말까지 준비하여
우리를 여정의 시작점에
다시 불러들이고 있었으니까요.
글이 너무 길기에
일단 여기서 마칩니다.
또다른 거짓말을 제목으로
한번 더 돌아올게요.
p.s. 다른 가이드를 보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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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이야기에서 카이키 데이슈가 가짜에게는 진짜가 되려고 하는 의지가 담겨 있는 만큼 가짜 쪽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대답한거 생각나긴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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