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을 중요시하던 일본에선 명검(名劍)이 몇 가지가 있었는데 무라마사(村正)란 칼도 그 중 하나였지요. 그런데 도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가 이 칼에 부상을 당하고 또 그 아들이 자결할 때도 이 칼을 씀으로써 무라마사는 도쿠가와 가문에 저주를 주는 칼로 알려졌으며 가신들에게도 이 칼은 터부가 됐습니다. 도쿠가와 가문외에도 이 검의 주인은 화를 당했기에 요도 무라마사라 불리워 졌다는군요.
명검의 수집광이었던 나가사키(長崎)의 원님 다케나카(竹中重義)는 이 칼을 24자루나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해 여인(女人)을 사이에 두고 거상(巨商)과 소송문제를 일으켰는데 이때 조사관들이 그 집을 뒤지다 무라마사가 여러 자루 나옴에 따라 막부(幕府)에 반역을 하기 위한 것 아니냐며 심문을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한 그의 변론은 “그게 아니라 이 정도의 명검이라면 세월이 지나면 가치가 올라갈 게 아닙니까?”라고 말하려 한 것을 “시대가 바뀌면 가치가 올라갈 게 아닙니까?”로 잘못 말하는 바람에 `역시 도쿠가와 정권이 망하는 걸 기다리는 반역자'로 판결을 받아 할복 자결케 되었다.
출처 : http://www.dapis.go.kr/mndweb/daily/2000/08/0831-18.htm
저도 무라마사를 한번 보려고 여기저기 검색을 해봤지만, 능력부족으로 진품 무라마사의 사진은 도저히 못찾겠군요.
무라마사에 대한 글이 있기에 copy 인용합니다만, 번역기를 통한 번역이어서 글이 매끄럽지는 않습니다. 대충 문맥은 이해하실수 있을겁니다.
글을 읽어보니 이에야스의 할아버지 키요야스, 아버지 히로타다, 아들 노부야스, 그리고 이에야스 본인에게도 해를 입힌 칼이더군요.
도쿠가와 가문에서 두려워할만한 악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http://j2k.naver.com/j2k.php/korean/member.nifty.ne.jp/bintaro/touken/muramasa.htm
무라마사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시대 초기, 이세(미에현) 쿠와나에서 3대 계속된 도공의 이름으로, 또 그들이 만들어 낸 일련의 작품의 명입니다. 도공 무라마사는 다작으로, 칼에 시작해 단도, 창 등 많은 작품이 남아 있습니다. 즉 <무라마사> 라고 명이 붙는 도검은 다수 존재합니다. 초대 무라마사는, 인가의 마사무네에 사사했다고 하는 민간 전승도 남아 있을 정도의 명공으로, 물론 그 이름을 이은 제자들도 같은 명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도 이름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명검으로, 날카로운 예리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크게 물결치는 파문과 칼날의 양면의 파문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 일본도상의 특징입니다.
요도 무라마사
피에 굶은 요도, 주로 탈이 나는 칼의 일화는, 대부분이 「무라마사」가 모델이 되어 있습니다.
발단
무라마사의 요도전설은, 한마디로 말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만들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① 토쿠가와가가 미카와의 한쪽 구석에서 「마츠다이라」를 자칭하고 있었을 무렵, 이에야스의 조부인 마쓰다이라 기요야스는, 천문 4년(1535년) 오와리로 오다가와의 싸움으로 전사하고 있습니다만, 그 때 청강을 벤 것은 마츠다이라가의 가신인 아베미시치로우로, 그 차료가 「천자 무라마사」였던 것입니다.
오른쪽의 어깨로부터 왼쪽 옆구리까지 달한 상처라고 말하기 때문에 그 예리함은 상당한 것이 있습니다.
② 다음은, 이에야스의 아버지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입니다.
그는 천문 14년(1545년), 신하의 이와마쓰8미에 갑자기 베어 붙여져 있습니다.
생명에는 이상은 없기는 했지만, 가랑이를 베어졌습니다.
이 때 사용했던 것도 무라마사의 호신용 단도였습니다.
③ 이에야스의 적남 노부야스는 타케다가와의 내통을 의심되어 노부나가에 할복 자살을 명령받습니다. 이 때 노부야스의 시중에 사용되었던 것도 천자 무라마사.
④ 이에야스 자신도 세키가하라의 전투의 꺾어, 오다 유라쿠금기의 아들이 토다 무사시 마모루를 토벌한 무라마사의 창을 검시하고 있는 한중간에, 잘못해 떨어뜨려 손가락을 잘라 버렸습니다. (이 때, 이에야스가 창을 일부러 검시 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창이 무려 요로이를 관통했기 때문입니다. )
이상 ①~④의 흉사에 의해, 불길을 느낀 이에야스는 집안의 모든 무라마사의 폐기를 명했습니다. 이것으로부터 토쿠가와에 탈이 나는 요도무라마사의 전설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설의 전개
이에야스가 폐기를 명한 것은 집안이었습니다만, 다른 영주가 이것을 물어 끝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라마사를 가지는 것이, 반토쿠가와의 봉화를 올리는 것으로 같다는 풍조가 완성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토쿠가와 정권화에 있어서의 일종의 타프가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토쿠가와막부에게 반감을 가진 후쿠시마, 사나다, 시마즈 등의 에도시대 토쿠가와를 섬긴 영주는 오히려 무라마사를 존중해 은밀한가에 소유했다고도 말해지고 있습니다.
막부를 쓰러뜨림
에도막부 말기의 시대, 토쿠가와막부 타도를 뜻하는 것에 있어, 이 정도 적격인 차료는 그 밖에 없다. 무라마사의 가격이 폭등할 정도로, 막부를 쓰러뜨리려는 지사는 다투어 무라마사를 입수했습니다. 어두운 그늘을 휘감은 토쿠가와에 원수라는 요도무라마사. 사람 베러 달리는 지사들은, 기꺼이 무라마사를 사용했습니다.
정말로
무라마사는, 정말로 토쿠가와에 원수 이루는 요도였을까.
물론 그 예리함은 요도라고 부르기에 어울린 것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라마사의 탄생한 이세와 토쿠가와가의 미카와는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일, 당시 벌써 명검으로서 알려져 있던 것, 무라마사는 다작인 것 등으로부터 추측해, 마츠다이라가의 집안, 주변에는 상당한 수의 무라마사가 유통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우에에 둔 토쿠가와가의 흉사도, 우연히 말해 끝내질 정도의 확률인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어쨌든, 「요도」로서 해외에까지 저명하게 된 「MURAMASA」입니다.
확률로 정리해 버리는 것은 아까운 생각도 듭니다.
아래 화상은 산해당의 후의에 의해 빌려 주어 주시고 있는 「세이슈 후지와라 아손(계급 명칭) 무라마사」의 화상입니다.
사본 파문의 모조 칼이기 때문에 당시와 같은지 어떤지는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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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대한 역사가 많아서인지.. 요도라 이름 붙은 칼이 꽤되는가 보네요..
재미로 한번 보세요~
명검의 수집광이었던 나가사키(長崎)의 원님 다케나카(竹中重義)는 이 칼을 24자루나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해 여인(女人)을 사이에 두고 거상(巨商)과 소송문제를 일으켰는데 이때 조사관들이 그 집을 뒤지다 무라마사가 여러 자루 나옴에 따라 막부(幕府)에 반역을 하기 위한 것 아니냐며 심문을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한 그의 변론은 “그게 아니라 이 정도의 명검이라면 세월이 지나면 가치가 올라갈 게 아닙니까?”라고 말하려 한 것을 “시대가 바뀌면 가치가 올라갈 게 아닙니까?”로 잘못 말하는 바람에 `역시 도쿠가와 정권이 망하는 걸 기다리는 반역자'로 판결을 받아 할복 자결케 되었다.
출처 : http://www.dapis.go.kr/mndweb/daily/2000/08/0831-18.htm
저도 무라마사를 한번 보려고 여기저기 검색을 해봤지만, 능력부족으로 진품 무라마사의 사진은 도저히 못찾겠군요.
무라마사에 대한 글이 있기에 copy 인용합니다만, 번역기를 통한 번역이어서 글이 매끄럽지는 않습니다. 대충 문맥은 이해하실수 있을겁니다.
글을 읽어보니 이에야스의 할아버지 키요야스, 아버지 히로타다, 아들 노부야스, 그리고 이에야스 본인에게도 해를 입힌 칼이더군요.
도쿠가와 가문에서 두려워할만한 악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http://j2k.naver.com/j2k.php/korean/member.nifty.ne.jp/bintaro/touken/muramasa.htm
무라마사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시대 초기, 이세(미에현) 쿠와나에서 3대 계속된 도공의 이름으로, 또 그들이 만들어 낸 일련의 작품의 명입니다. 도공 무라마사는 다작으로, 칼에 시작해 단도, 창 등 많은 작품이 남아 있습니다. 즉 <무라마사> 라고 명이 붙는 도검은 다수 존재합니다. 초대 무라마사는, 인가의 마사무네에 사사했다고 하는 민간 전승도 남아 있을 정도의 명공으로, 물론 그 이름을 이은 제자들도 같은 명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도 이름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명검으로, 날카로운 예리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크게 물결치는 파문과 칼날의 양면의 파문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 일본도상의 특징입니다.
요도 무라마사
피에 굶은 요도, 주로 탈이 나는 칼의 일화는, 대부분이 「무라마사」가 모델이 되어 있습니다.
발단
무라마사의 요도전설은, 한마디로 말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만들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① 토쿠가와가가 미카와의 한쪽 구석에서 「마츠다이라」를 자칭하고 있었을 무렵, 이에야스의 조부인 마쓰다이라 기요야스는, 천문 4년(1535년) 오와리로 오다가와의 싸움으로 전사하고 있습니다만, 그 때 청강을 벤 것은 마츠다이라가의 가신인 아베미시치로우로, 그 차료가 「천자 무라마사」였던 것입니다.
오른쪽의 어깨로부터 왼쪽 옆구리까지 달한 상처라고 말하기 때문에 그 예리함은 상당한 것이 있습니다.
② 다음은, 이에야스의 아버지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입니다.
그는 천문 14년(1545년), 신하의 이와마쓰8미에 갑자기 베어 붙여져 있습니다.
생명에는 이상은 없기는 했지만, 가랑이를 베어졌습니다.
이 때 사용했던 것도 무라마사의 호신용 단도였습니다.
③ 이에야스의 적남 노부야스는 타케다가와의 내통을 의심되어 노부나가에 할복 자살을 명령받습니다. 이 때 노부야스의 시중에 사용되었던 것도 천자 무라마사.
④ 이에야스 자신도 세키가하라의 전투의 꺾어, 오다 유라쿠금기의 아들이 토다 무사시 마모루를 토벌한 무라마사의 창을 검시하고 있는 한중간에, 잘못해 떨어뜨려 손가락을 잘라 버렸습니다. (이 때, 이에야스가 창을 일부러 검시 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창이 무려 요로이를 관통했기 때문입니다. )
이상 ①~④의 흉사에 의해, 불길을 느낀 이에야스는 집안의 모든 무라마사의 폐기를 명했습니다. 이것으로부터 토쿠가와에 탈이 나는 요도무라마사의 전설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설의 전개
이에야스가 폐기를 명한 것은 집안이었습니다만, 다른 영주가 이것을 물어 끝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라마사를 가지는 것이, 반토쿠가와의 봉화를 올리는 것으로 같다는 풍조가 완성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토쿠가와 정권화에 있어서의 일종의 타프가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토쿠가와막부에게 반감을 가진 후쿠시마, 사나다, 시마즈 등의 에도시대 토쿠가와를 섬긴 영주는 오히려 무라마사를 존중해 은밀한가에 소유했다고도 말해지고 있습니다.
막부를 쓰러뜨림
에도막부 말기의 시대, 토쿠가와막부 타도를 뜻하는 것에 있어, 이 정도 적격인 차료는 그 밖에 없다. 무라마사의 가격이 폭등할 정도로, 막부를 쓰러뜨리려는 지사는 다투어 무라마사를 입수했습니다. 어두운 그늘을 휘감은 토쿠가와에 원수라는 요도무라마사. 사람 베러 달리는 지사들은, 기꺼이 무라마사를 사용했습니다.
정말로
무라마사는, 정말로 토쿠가와에 원수 이루는 요도였을까.
물론 그 예리함은 요도라고 부르기에 어울린 것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라마사의 탄생한 이세와 토쿠가와가의 미카와는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일, 당시 벌써 명검으로서 알려져 있던 것, 무라마사는 다작인 것 등으로부터 추측해, 마츠다이라가의 집안, 주변에는 상당한 수의 무라마사가 유통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우에에 둔 토쿠가와가의 흉사도, 우연히 말해 끝내질 정도의 확률인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어쨌든, 「요도」로서 해외에까지 저명하게 된 「MURAMASA」입니다.
확률로 정리해 버리는 것은 아까운 생각도 듭니다.
아래 화상은 산해당의 후의에 의해 빌려 주어 주시고 있는 「세이슈 후지와라 아손(계급 명칭) 무라마사」의 화상입니다.
사본 파문의 모조 칼이기 때문에 당시와 같은지 어떤지는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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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대한 역사가 많아서인지.. 요도라 이름 붙은 칼이 꽤되는가 보네요..
재미로 한번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