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 꽃이 묻힐 때까지
아내는 시골집에 오면 잠을 잘도 잔다
어머니께서 어디 가셨다가 마당에 들어오시며 “민세
엄마 어딨냐” “자요” “호랭이 물어간다 시방” 햇살이 강
기슭에 곱게 가닿는데, 아내는 잠자고 민세와 민해는 강
에서 고기를 낚는다 민세가 고함을 지를 때마다 나는 문
을 열고 나가 마루에 서서 강물을 본다 문 열면 산도 물
도 꽃도 밭도 다 보인다 강기슭엔 파란 풀잎들이 돋아나
고 키 큰 미루나무 푸른 가지들이 강물에 어리고 앞산엔
산복숭아꽃이 피어 붉다
‘올해는 산들이 왜 저리 꽃으로 난리인가 모르겄네?’
새 풀이 돋아나는 강 언덕에 집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
이다 까치가 난다 민세가 또 고기를 한마리 낚았나보다
민해의 들뜬 소리가 강물 소리에 묻어 따라와 창호지 문
에 묻는다 민세 낚시에 걸린 물고기가 허공에서 빙빙 돌
며 반짝인다 산그늘이 가만가만 강을 건너간다 아, 저
저문 날을 내 얼마나 사랑하고 그리고 못 견뎌했던가 해
저무는 날의 슬픔, 해 저무는 날의 그리움, 해 저무는 날
의 설레임, 외로움, 문을 열고 마루 기둥에 오래오래 기
대서서 앞산을 넘던 뒷산 그늘, 조용한 산과 물,
강물은 흘러도
해는 강을 건너고
앞산이 높아도
햇살은 앞산을 넘어가는데
저 건너 강 건너 해 넘어간 저 앞산에
피는 꽃이 지금 피는 꽃이냐
지는 꽃이냐
산비탈에 붉디붉은 산복숭아꽃아
아내는 긴 잠에서 깨어나 인적 없는 저문 강으로 저문
산을 잡으러 가네
저문 물을 잡으러 가네
혼자서 가네
산이 있고 그 산에 나무와 꽃들이 살고
강물이 있고 그 강물에 비늘 반짝이는 고기들이 살고
아이들이 그 산과 그 강과 꽃들을 보며 산다면, 살아,
아 살아 저 산에
저 저무는 산 아래 기울어진 집 뒤안에, 하얗게 핀 오
래된 살구나무 살구꽃같이 산에 바람에, 돌담에 기대어
서늘히 피고 곱게도 지고
산아 꽃아 물아
서쪽에 돋아나는 별들아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들아
아, 해가 저렇게 지고
날이 이렇게도 천천히 저무는구나
어둠이 이렇게도 천천히 찾아갈 곳을 다 찾아가는구
나
어둠을 따라다니다가 어둠의 끝에서
진달래가 핀다
아이들이 낚은 고기를 수대에 담아 왔다가 한참을 들
여다보더니 다시 어둔 강물로 고기를 풀어주러 간다 아
이들이 두런두런 돌아오고, 빈 수대에 묻은 몇개의 고기
비늘들이 봄 나비가 되어 강을 건너고
물 만난 고기들의 기쁜 몸짓이 꽃이 되어 산을 간다
누구나 해가 해같이 천천히 지는 것을 온전히 바라본
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천천히 오는 어둠속에 꽃이 묻
힐 때까지 앉아서 누구나 자기를 보고 싶어한다. 나는
한발 뗄 수 있는 밝음만 갖고 싶다. 그 한줌 빛으로 나
는 사랑을 이루고 시를 쓰고 싶다 아이들도 초상집에 가
신 어머니도 강에 갔던 아내도 다 돌아온 밤
소쩍새야, 소쩍새야,
산에, 산마다 소쩍새가 운다
시골집에 와서
밤에도 창호지문 앞에 그림자같이 앉아 나는 오래오
래 밤새 새소리를 듣네
아내도 내 등뒤에서 밤새 새소리를 귀담아듣네
어둠속에 꽃이 다 묻힐 때까지.
나무
김용택, 창비시선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