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엘리야베크로 돌아가려 합니다."
오스피어가 다르시, 하눈, 복수의 늑대들, 모험가를 거쳐 뮨 히다카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히다카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러나 엘리야베크에서와는 다른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지?"
"모험가님은...."
오스피어는 그동안의 일을 가만히 생각했다. 내가 모르던 사람들,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른 진실들, 그리고 나의 사명. 이들은 황혼으로 가야 할 이들인가?
오스피어는 마음을 굳혔다.
"황혼과 새벽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오스피어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려운 것, 복잡한 것은 제외했다. 황혼과 새벽 모든 교리를 아는 대로 설명하고, 그리고 그것들이 대립하는 것까지 설명했다.
".... 그리하여, 저는 이곳에 순례를 오게 된 것입니다만..."
"어, 어. 들어봤어. 정말 황혼쪽 인간이 맞았구나, 너."
모험가가 오스피어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놀란 다르시와 다른 복수의 늑대들과는 다른, 이미 들어볼 것 다 들어 봤다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잠깐의 침묵 후, 모험가는 입을 열었다.
"아이디어가 있어. 이 국면을 타개할 아주 기막힌 아이디어가. 일단, 오스피어 너는 페이튼으로 가라."
페이튼.
반인반마, 데런들의 땅. 그 더럽혀진 이름에 오스피어는 본능적으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페이...튼, 말씀이십니까?"
"그래. 엘리야베크는 나와 뮨 히다카, 그리고 유사시에 장 엎어버릴 복수의 늑대들 모두가 간다. 물론 뮨을 일개 모험가인 내가 끌고다닐 수는 없으니, 먼저 복수의 늑대 몇명이 날 감시하는 것으로 하여 회담장소를 잡도록 하지. 타이예르가 가장 강력한.... 절벽지대로."
"잠깐, 이야기가 너무 앞서가는군."
뮨 히다카가 모험가의 말을 끊고 말했다. 하눈은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었고, 다른 복수의 늑대들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험가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다시 이어갔다.
"아아, 미안. 버릇이 되서. 어디부터 설명할까? 오스피어? 회담?"
"페이튼부터 설명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엘리야베크를 왜 가야되는지부터 이야기해줬으면 좋겠군."
오스피어와 히다카의 말이 겹쳤다. 모험가는 머리가 지끈지끈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일단 페이튼부터. 이쪽이 더 중요해. 어차피 엘리야베크와 페이튼, 두 가지 모두 같은 키워드를 공유하니까. '무지'라고."
"너, 지금 우리 타이예르가 무지하다고.."
"하눈. 일단 들어보지."
하눈이 으르렁거리자 제지하는 히다카. 모험가는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듯 눈을 감고 고개를 주억거리다 입을 열었다.
"페이튼은 반인반마인 데런들의 땅이야. 표정 보니까 거기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는 모양인데, 내 예상이 틀렸나?"
"....네. 그곳은.... 새벽의 교리를 따르는 이들이 희생하여 루페온의 빛을 전파하고 있다, 고 들었습니다."
실패했을 것이 분명하지만 말입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등등의 끝맺음이 떠올랐지만, 오스피어는 그 말을 억눌렀다. 그러나 다음 모험가의 말에 오스피어는 눈을 크게 뜰 수 밖에 없었다.
"그래, 그 곳의 세이크리아 사제들이 데런에게 빛을 전파하고 있지. 불가능하겠지만. 니 생각대로라면. 틀려?"
".....!"
"너는 지금 황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지. 고아때부터 황혼에 거둬져서 자랐다면서? 그럼 자연스럽게, 새벽을 폄훼하는 사고방식이 깔렸을거라고 본다. 틀렸나?"
"아, 아니, 저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라는 말 한마디를, 오스피어는 꺼낼 수 없었다. 오스피어가 믿어왔던 진실은 깨졌다. 그렇다면, 자신이 세이크리아에 가지고 있던 신념 또한 깨진 것이 아닌가?
모험가는 그 속마음을 읽듯이 천천히 말했다.
"새벽을 따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반대 의견도 들어봐야 한다는 것은 안다. 물론 니가 사제 일루시오에게 교리문답도 하고 했단 건 잘 알아. 하지만 그는 이 타이예르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던 인간 아니던가?"
"....."
"페이튼으로 가서, 사제단장 페데리코를 찾아라. 서신을 써 줄테니, 엘리야베크에 정박된 아스트레이 호의 선원들에게 보여주면 최소 하루만에 도달할거다. 엘리야베크의 사제들에게 잡히지 말고, 하룻동안 페데리코와 대담할 것.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데 하루 해서 총 3일 안에 쉼터로 와라. 알았어?"
"페데리코라면...."
"아주 뛰어난 사제지. 믿을 수 있겠냐? 그 혼자서 수천의 악마를 막아내는 결계를 칠 수 있다는걸. 그것도 평야지대에 말이야."
"....예?"
수천의 악마를...? 평야지대에서? 사제단장이...? 빌헬름 대주교님도 그만한 신성력을 가지지 못했을텐데? 어떻게? 등등의 의문이 한데 뭉쳐 나왔다. 모험가는 그 표정을 보고 가볍게 웃은 뒤, 말을 이었다.
"말이 수천이지, 사실은 끝없이 나타나는 악마를 막아내는 결계였지. 그런 수준의 믿음을 가진 사제라면, 자네가 가진 황혼과 새벽의 교리갈등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중립을 지키며 설명해줄거다. 아, 물론 그는 새벽이니 새벽에 치우쳐 있겠지만, 그 정도야 황혼에 치우친 네가 들어서 거를 수도 있겠지."
"....말하자면, 중심축을 잡고 오라는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좋아."
".....이제 우리 차례인가, 외지인."
뮨 히다카가 모험가에게 입을 열었다. 모험가는 마찬가지로 은은한 미소를 띄고 입을 열었다. 오스피어는 그 표정을 보고, 다르시에게 말했다.
"다르시,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는 지금 옷이 없거든요."
"......옷...말이야? 왜? 그게 왜 도움이지?"
"....모험가님의 말이 맞습니다. 저는 신성기사로써 저들과 문답하고 이단으로 선포할 생각이었지만, 지금의 저는 중심이 매우 흔들려 있는 상태입니다. 느껴집니다. 저의 믿음이.... 흔들린다는 걸. 만약 제가 그곳의 사제들에게 붇잡힌다면.... 제가 그걸 뿌리칠 수 있을거라 생각이 들지 않는군요."
"그게 어쨌다고?"
"이해하시겠지만, 옷은 신분을 상징합니다. 로웬의 공식적인 항구는 엘리야베크입니다. 모험가님의 서신을 받고 그 곳에 배를 탄다고 하더라도, 제가 그곳에 있는 사제들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군요. 이 갑옷은...너무 화려합니다."
오스피어는 자신의 은색 갑주와 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루페온의 빛을 상징하는 빛. 그리고 황혼의 따스함을 상징하리라 믿었던 적색. 어두운 하늘의 땅인 로웬에서, 그 갑옷은 너무 화려했다.
자부심을 가지던 자신이던 시절이 벌써 그리워지는군, 이라고 생각할때 즈음, 다르시가 말했다.
"들키지 않으면서 무법지대를 빠져나갈 무장...이라. 뭐, 간단하네. 경갑과 검을 준비해줄게. 너 정도의 실력자라면, 검이 좀 달라지더라도 싸울 순 있을테고 말이야."
"가능하시겠습니까?"
"가능하고 자시고, 널린 게 그런 거니까. 많이들 죽었거든."
"........그렇다면 돌아올때까지, 제 무구들을 맡기겠습니다."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어. 조금만 기다려."
다르시는 그렇게 말을 하곤 날렵하게 사라졌다. 오스피어는 겉 갑주를 천천히 분리하면서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바라봐야 할 것인가. 내가 갈 곳은 어디인가....
겉갑주를 모두 벗고 신성기사로써의 증표만 만지작거리던 오스피어에게, 누군가 인기척을 내며 다가왔다.
"다르시, 고맙습..."
"나야, 인마. 서신은 받아가야지. 왜 다 벗고있어? 징그럽게."
"....모험가님이셨군요."
오스피어는 모험가가 내민 서신을 받았다. 처음 보는 인장. 그의 영지의 인장인가? 오스피어는 마음이 풀어지는 걸 느꼈다. 이것이 편안함인가.
"다 벗고 있기는요. 갑옷 안에 받쳐입는 가죽자켓이 아무리 부실해 보여도, 일단 벗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렇게 온 몸을 다 가린 '다 벗음' 이 어디 있다고요."
"....짜식, 벌써 좀 컸구만."
"넓은 세상을 보고...중심을 잡으려면, 이정도 마음가짐은 가져야지요."
"오스피어, 가져왔어."
오스피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르시가 어디선가 나타났다. 다르시가 오스피어에게 경갑과 투박한 한손검을 건넸다.
묵묵히 갑옷과 검을 챙겨입던 오스피어가 뼈 목걸이를 발견하고 물었다.
"다르시, 이건...?"
"어, 그건.... 늑대의 뼈야. 우리는 동물의 뼈에 사람의 명복이나 행운을 기리는 문화가 있거든. 행운을 기리는 문양을 새겨두었어."
"....늑대의...? 그렇다면 그것이..."
"그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스피어는 입을 다물었다. 오스피어는 타이예르가 부적으로 사용하는 뼛조각들이 모두 사람의 뼈인 줄 알고 있었다.
오늘은 놀라움의 연속이군. 오스피어는 검을 점검하며 생각했다. 검은 투박했지만 나름대로 예리했다. 신성검을 사용하기엔 충분할 정도로.
"모험가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 뮨 히다카, 나, 그리고 복수의 늑대 둘과 함께 엘리야베크로 내려가게 되었어. 뮨 히다카가 말하던데, '그런 이유라면 굳이 복수의 늑대가 두 걸음 할 필요는 없다' 라던가?"
"그렇다면..."
"회담이 파토 날 경우, 최대한의 속도로 회담장을 벗어나서 후방의 늑대들이 있는 곳으로 후퇴할거야. 저들은 무지했을 뿐이니, 분노를 사그라트릴 명분이 있다면 해결이 될 가능성이 있겠지."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알아. 하지만 가능성은 걸어봐야지. 실패하더라도 원점회귀일 뿐이고."
오스피어는 그런 모험가의 표정이 아주 약간 어둡게 느껴졌다. 오스피어에게 페이튼으로 가야 할 이유를 설명할 때는 자신이 있어 보였지만, 모험가 스스로가 회담을 성공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그러나 그는 모험가이다. 모험가라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3일의 시간.... 내가 없어도.
오스피어는 로브를 입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3일 후에 뵙겠습니다."
"그래."
모험가는 짧게 대답했다. 오스피어는 실마엘 채굴장에 있는 스퀘어홀을 생각했다. 그곳의 기도실에, 황혼의 교리서가 있었다. 당장 엘리야베크 스퀘어홀로 갈 경우, 이목이 집중될테니 돌아갈 겸 해서 교리서를 챙길 생각이다. 교리서를 들고 페이튼으로 가서....
"세이크리아에 정녕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진실인지.... 물어봐야겠어."
오스피어는 나지막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