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에서 사투를 벌이는 이들, 떨고 있는 주민들, 지원하거나 살리려고 애쓰는 내성 안의 사람들까지.
말튼 성의 있는 모두가 전쟁에 휩쓸렸을 때, 적진의 심장부로 들어온 유일한 인물인 가온은 하운드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랠리 숲에서 이미 했던 말이지만, 다시 한 번 제안하지 내 권속이 되어라 가온, 그래준다면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지.”
적의 수장의 권속이 되라는, 말 그대로 자신을 따르는 충실한 부하가 되라는 제안이었다.
승낙하든 거부하든 이런 제안을 받으면 놀랄 법도 한데 가온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오히려 놀란 건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막심이었다.
“하, 하운드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운드 님의 목을 노린 저 망할 놈에게 권속이 되라는 제안이라니요! 절대 안 됩니다!”
막심이 두 눈에 불을 킨 채 펄쩍 뛰자 그 모습을 본 가온은 피식 웃으며 조롱했다.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전력이 늘어나는 게 그렇게 싫어? 아니면 내가 들어오고 네 저리가 위협 받을까봐 그래?”
“저, 저런 불경한! 하운드님 제게 맡겨주십쇼! 건방진 저 꼬마의 혀를 잘라내겠습니다!”
막심이 다시 검을 빼드는 걸 본 하운드가 약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당장이라도 가온을 벨 듯이 굴던 막심이었지만, 하운드의 거절 의사 하나로 다시금 검을 떨궜다.
그래도 여전히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지 막심은 자신의 가는 눈을 찌푸린 채 못 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운드는 막심을 응시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막심, 난 널 높게 평가한다, 네가 없었다면 내가 여기까지 오지 못했고 앞으로의 계획 또한 불투명했겠지.”
“하운드님?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아직도 모르겠느냐, 널 높게 평가하기에 저 아이를 내 권속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절 높게 평가하기에 저 노예 놈을 거두려 하신다니요?”
하운드의 말에 막심은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모습이었다.
평소의 하운드였다면 바로 이해를 못하는 막심을 그냥 무시했겠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하운드는 고개를 든 채 가온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직 저 아이 뿐이었다, 말튼 성의 놈들도 콧대 높은 하룬가의 놈들도,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고 당하던 너의 계획을 유일하게 먼저 알고 대처한 게 저 아이였단 말이다, 또한 내 목에 유일하게 상처를 낸 녀석 또한 저 아이고.”
“그, 그렇긴 합니다만.”
“막심 네가 당부했던 말이 있었지, 말튼 성 다음에 있을 제국군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쓸 만한 놈들이 필요하다고, 그렇기에 쓸 만한 놈들은 내 직접 거둘 것이다, 이유는 이정도면 되겠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군요, 알겠습니다.”
하운드의 논리에 막심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막심이 고개를 숙이자 하운드는 시선을 가온에게 고정하곤 근엄한 태도로 다시금 가온에게 제안했다.
“내 권속이 되어라 가온,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될 의향이 있어서 온 거겠지, 안 그러냐?”
“…….”
“미르라고 했지? 네가 구해야한 다는 여성의 이름이?”
“……!”
하운드의 입에서 미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처음으로 가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막심 또한 적지 않게 놀랐다.
“미르? 이방인 최강 중 한 명? 이방인에 대해 관심이 없으실 하운드 님이 미르를? 아니 그보다 저 꼬마가 그 이방인과 관련이 있다고?”
막심이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도 하운드의 말은 계속되었다.
“랠리 숲에서 나와 한 대화를 기억하겠지, 가온? 난 하룬가 놈들에게 내가 가장 아끼는 주인을 잃었다, 전에 있던 세계에서도 넘어와 살게 된 이 세계에서도 그녀는 내 주인이자 빛이었다, 그녀가 죽고 난 빛을 잃었다, 크르르.”
자신이 아끼던 이를 잃었던 그때를 회상하는지 말하는 하운드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흥분한 하운드의 몸집이 부풀어 오른 것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도 조금씩 몸집이 커지고 있었다.
“난 인간이 밉다, 크르르르, 그녀를 죽인 하룬가 놈들, 보호받으면서도 그녀를 돕지도 못하고 죽은 외곽 마을의 쓰레기들! 그리고 이 상황을 만든 모든 놈들을 난 크르르르, 크르르륵!”
변하는 건 몸집만이 아닌, 목소리 또한 사람의 말을 잊은 짐승의 언어로 변질되었다.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활화산처럼 하운드는 이성을 잃은 채 날뛰려 했다.
옆에서 보고 깜짝 놀란 막심이 급히 진정시키려 노력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하, 하운드님! 진정 하십쇼! 여기서 이성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크르르르르!”
“제, 제길, 이대로 폭주하시면 안 되는데.”
딸랑!
막심이 어쩔 줄 몰라 하던 찰나, 랠리 숲에서 들렸었던 은은한 방울 소리가 하운드의 목에서 울려 퍼졌다.
눈보라 속 잔잔히 퍼지는 방울 소리에 흥분해하던 하운드가 멈칫했다.
“크르……후우.”
작게 한숨을 내쉰 하운드의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일단은 진정한 거 같아 보이는 하운드에게 막심이 조심스레 물었다.
“하운드님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 그래, 난 말하고 있었지, 계속 말하마. 힘을 가진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버러지 같은 인간들을 지키려하다 죽은 필리아, 그녀는 네가 말한 미르라는 여성과 닮았다, 옆에 있는 막심 또한 하룬가 놈에게 소중한 걸 잃었지, 가온, 넌 우리와 같은 처지다.”
“같은 처지?”
“그래, 짐승보다 못한 노예라고 불리지만, 내가 평가하는 넌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독한 녀석이다, 나와 함께 이 세상을 불태우자, 나와 막심은 복수를 위해, 가온 넌 빼앗긴 그녀를 되찾기 위해.”
복수라는 단어를 담은 하운드의 두 눈에는 강한 불꽃이 일고 막심 또한 가는 눈을 뜬 채 두 눈에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가온은 차가운 눈으로 하운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내가 너의 권속이 되어주면 하룬가 본가를 박살낸 다음 거기 갇혀 있을 미르를 구해주겠다고? 설령 본가에 없어도 앞으로 박살낼 다른 하룬가에서도 찾아보겠다고?”
“그래, 원래라면 내게 복종하지 않는 인간은 전부 죽일 예정이지만, 네가 구해야하는 그 여성만은 예외로 쳐주지.”
“만약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죽인다, 내가 몇 번이나 자비를 베풀었는데도 적이 되겠다 하면 봐줄 필요도 없지.”
하운드의 목소리가 단번에 거칠어짐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압박감이 가온을 덮쳤다.
쿵!
“크윽?”
아까 흥분한 채 폭주하려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의 하운드가 뿜어내는 기운은 마치 바다처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무거웠다.
하운드의 묵직한 기운에 눌린 가온의 무릎이 자연스레 꺾인 채 눈에 파묻혔고 고개 또한 숙여져 눈에 얼굴을 박았다.
주위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이 가는 듯 막심조차 무릎을 떨며 몸을 세우는 것도 힘들어했다.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눈밭에 파묻힌 가온은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하운드를 노려보았다.
가온의 시선이 향한 곳은 하운드 목에 새겨진 자상이었다.
자신이 유일하게 낸 상처를 노려보며 가온은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목을 노려볼까.’
잠깐 든 생각이지만, 이내 그 생각은 접었다.
랠리 숲에서 하운드가 완전히 방심하고 있을 때 달려들어도 실패했던 기습을 온 몸이 억압당하고 있는 상태에서 성공시킬 리가 없다.
자신은 절대로 하운드를 잡지 못한다는 사실에 가온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돼.’
하운드가 뿜어내는 기운은 대단하지만, 자신은 이보다 더한 것도 느껴보았다.
미르를 데려간 불을 뿜어내는 그 남자에 비하면 하운드의 힘은 비할 바가 못 된다.
강하게 깨문 가온의 입술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며 하얀 눈을 더럽혔다.
꾸득.
입술을 깨문 가온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 모습에 하운드의 눈썹 한 쪽이 꿈틀거렸다.
“견뎌?”
하운드의 눈썹이 꿈틀거림과 동시에 아까보다 더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쿠우우웅!
아까의 기운이 잔잔한 바다였다면 이번엔 솟구치는 파도처럼 강하고 거칠었다.
하운드가 뿜어내는 기운에 가온은 물론 주위의 눈들과 쌓인 눈밭이 납작한 쥐포처럼 밑으로 폭삭 가라앉았다.
덩달아 근처에 있던 막심까지 영향을 받곤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신의 심복마저 괴로워하지만, 하운드의 신경은 오로지 가온에게 향해 있었다.
“직접 힘으로 도망 못 가게 누르는 수도 있지만, 그랬다간 자칫 터질 수도 있으니, 내 나름의 배려다.”
“크윽!”
“권속은 단순히 예 아니오로 되는 관계가 아니다, 이방인인 내가 원하고 대상인 권속이 굴복해야만 이루어지는 관계다, 넌 나를 인정했어도 내게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니 내게 굴복해라!”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