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나의 사탕발림에 아르실은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시에나의 손을 맞잡으며 흔쾌히 승낙했다.
“큼! 원래 아무 부탁이나 받지 않지만, 언니가 날 좀 도와줬으니 이 아르실님이 특별히 도와줄 게! 야 쓰레기! 너도 따라와!”
“아, 알겠습니다.”
아르실의 말 한 마디에 렘 브란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르실의 뒤에 붙었다.
앞장서서 치료소로 가는 시에나는 뒤에서 따라오는 두 사람을 보곤 싱긋 웃었다.
차갑고도 눅눅한 골목길, 피투성이의 가온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일어나지를 않았다.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가온은 이를 악문 채 억지로 일어났다.
“허, 허억, 후욱, 후우.”
거칠게 심호흡과 함께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가온은 힘겹게 중얼거렸다.
“후, 아직, 쓰러져선 안 돼.”
하운드 앞에서 온갖 수를 쓰고 거기에 목숨까지 걸어 만든 거래다.
하운드와의 거래를 무사히 마치면 여기서 허망하게 죽지 않고 미르를 찾을 기회가 더 생긴다.
함께해주던 아르실이 못마땅해 하는 것 같지만, 상관없다, 많은 이들의 원망을 받을 걸 각오하고 벌인 일이다.
“만약, 최악의 경우에 아르실이 날 떠나더라도……괜찮아, 미르를 구하기 위해서 모든 지 버릴 각오는 되어 있으니깐.”
나름 정 든 아르실과 헤어지는 건 아쉽지만, 그 뿐이다.
미르를 구하기 위해서 지금껏 달려온 자신에게 남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말튼 성의 누가 죽든 내 알바 아니야, 어차피 노예인 날 무시했을 놈들뿐이니깐, 날 욕하든 원망하든 남 일이야, 상관 안 해.”
순간 머릿속에 몇 명의 사람들이 스쳐지나갔지만, 애써 모른 척 무시했다.
사적인 감정에 휩쓸리면 미르를 구할 기회는 영영 사라진다.
가온은 그새 자신의 머리에 가득 쌓인 눈들을 쓸어내리며 작게 말했다.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이렇게 망설일 시간도 없는데.”
평생 노예로 살아오면서 모두에게 멸시당하고 배척한 자신을 유일하게 사람처럼 대해준 게 미르였다.
그런 그녀를 구하기 위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선택지인 말튼 성의 모든 이들을 배신하고 하운드 밑으로 들어가 미르를 찾는 걸 골랐다.
선택을 하고 기회까지 얻어냈는데 어째서 몸이 움직이지가 않는 걸까.
가온은 파랗게 변해가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이대로 있다간 얼어 죽을 텐데.’
당장 움직여야 하는데 몸과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다.
하운드 앞에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당당히 맞서 얻어낸 기회인데 이제서 망설이다니.
골목길 벽에 몸을 기댄 채 다시 주저앉아버린 가온은 고개를 올려 높다란 하늘을 응시했다.
“귀족 자제 놈들 자장가로 동화책 몇 번 읽어줬을 때 본 거였지, 하늘에서 내리는 눈들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데려가려고 내려온 천사들이라고.”
만약 자신이 여기서 죽는다면 저 많은 눈들 중 자신의 영혼을 거둬줄 천사가 있을까.
자신이 말하고도 웃긴지 가온은 반쯤 풀린 눈으로 실소했다.
“하찮은 노예 목숨을 잘나신 천사들이 가져갈 리가 없겠지, 움직여야하는데……왜 이렇게 졸린 거야.”
적진에서 뛰어다니며 뜨거웠던 몸은 어느새 차갑게 식은 채 눈앞이 아른거린다.
가온은 멍한 두 눈을 비비다가 못내 일어나지 못한 채 눈 바닥에 얼굴을 박으며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미르……난 어쩌면 좋은 거야.”
몸도 마음도 망가진 가온은 일어날 힘도 마음도 없었다.
끝없이 내리는 눈과 함께 감겨가는 가온의 눈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어느 배불뚝이 남성이었다.
자신을 발견한 배불뚝이 남성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히 달려왔다.
“가, 가온! 이 멍청한 꼬맹이가! 왜 이런데 누워있는 거야? 몸은 또 왜 피투성이고…….”
“…….”
가온이 들을 수 있는 말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헛소리!”
쾅!
위엄 넘치는 중년 남성의 노호성과 함께 탁자가 거칠게 흔들리며 그 위에 놓인 수많은 서재들과 서류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도서관에 온 마냥 여러 서재들과 고풍스러운 가구들로 가득한 검소한 영주의 집무실,
오래된 책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는 이 집무실 한 가운데서 영주 샤로텐은 격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 분노의 대상은 다름 아닌 4대 가문 트라야비아가의 백금 기사단 부단장 고드프리였다.
샤로텐은 당장이라도 터질듯이 핏줄이 튀어나온 이마를 쥐어 잡은 채 물었다.
“방금 뭐라 하신 겁니까, 고드프리경!”
“격노하실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주님, 오늘 밤 홀로 이 성을 버리고 도망쳐야합니다.”
“헛소리!”
쾅!
영주의 주먹이 책상을 강타하며 책상 위에 있던 모든 물건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지간히 세게 쳤는지 내리친 영주의 주먹이 붉게 부풀어 올랐지만, 샤로텐은 신경쓰지 않고 고드프리를 비난했다.
“하룬가의 쓰레기도 아니고 트라야비아가의 인사인 고드프리경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병사들, 백성들 절 따르는 모든 이들을 버리고 도망가라니!”
“안타깝게도, 그게 최선입니다,”
“최선이라 말이라 함은 목숨을 버릴 각오로 노력을 했을 때 하는 말이오! 병사도 백성도 아닌 한 성의 영주로서 그런 비열한 짓은 할 수 없소!”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알겠습니다만, 영주님께선 지금 현실을 직시하셔야 합니다.”
격하게 화를 내는 샤로텐의 말에도 고드프리는 표정 하나 변화 없이 옆에 있던 하밀부르크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하밀부르크는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애써 담담히 말했다.
“영주님, 오늘 잠깐 있었던 수성 전에서 죽은 병사들의 수만 삼백, 부상자의 수는 오백이 넘어갑니다.”
“성벽에 주둔했던 병사들의 수가 천 명이 조금 넘어갈 텐데 사상자만 팔백이라고?”
“네, 예비 병력이 조금이라도 늦게 왔다면 말튼 성은 바로 함락 당했을 겁니다, 그리고 예비 병력들이 생각보다 잘 싸워주었지만, 그럼에도 전력 차이는 분명합니다, 아마 내일 싸움이 시작되면 오늘처럼…….”
“그래서, 패배할게 뻔하니 도망치란 말이오, 자유 해방단 단장?”
샤로텐의 물음에 하밀부르크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샤로텐의 날카로운 눈빛은 다시 고드프리에게 향했다.
“도망이고 뭐고 다 떠나서 대체 어디로 도망간단 말이오? 말튼 성의 동서남북 모두 막혔는데 말입니다.”
“정문이 있는 북쪽은 물론 동서 양쪽 성벽 다 둘러싸였지요, 하지만 남쪽 암벽산이 남아있지요.”
“길 하나 없는 절벽인데다가 거기 또한 짐승들이 모여 있다는 정보를 받았습니다, 갈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암벽 산에서 시끄럽게 짖어대던 짐승들이라면 걱정 마십쇼, 제가 전부 쓸어버리고 왔습니다.”
예상치 못한 고드프리의 말에 샤로텐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드프리는 껄껄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적들이 저희 성을 포위한 직후 적들의 전력을 보았습니다, 바로 알았지요, 예비 병력으로는 못 막을 거라고요, 그래서 영주님이라도 피할 수 있게 재빨리 손을 쓴 거였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끌끌.”
“합류가 늦었던 이유가 그거였군요.”
“지금쯤 적들은 남쪽이 비어있다는 걸 알았겠지만,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저기 자유 해방단 단장 녀석이라면 영주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피할 수 있을 겁니다.”
고드프리는 창문 너머 말튼 성의 남쪽에 위치한 암벽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느새 밤이 되어버린 하늘 아래 암벽산은 눈으로 뒤덮인 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마냥 보였다.
살짝 마음이 흔들렸지만, 샤로텐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거절했다.
“저는 말튼 성의 영주입니다, 죽어도 말튼 성 안에서 죽겠습니다, 차라리 저보다 외부 인사이신 고드프리 경이 피하시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헛소리 마시죠, 영주님, 제가 왜 당신을 도망치게 두는 지 아십니까? 제 명예를 위해서입니다, 내일 전 이방인 하운드와 목숨을 걸고 싸울 겁니다, 그 싸움에서 제가 이기든 지든 영주님이 싸움에 휘말려 죽는다면 백금 기사단 부단장인 저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일이니 영주님만은 어떻게든 피하게 할 겁니다.”
“어지간히 이방인과의 싸움에 미치셨군요, 고드프리경.”
“끌끌,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거부권은 없습니다, 영주님 어서 자유 해방단 단장 녀석과 함께 여기를 떠나시죠, 만약 운 좋게 이 싸움을 이긴다면 영주님에게 악 소문 같은 게 퍼지지 않도록 제가 힘을 쓰겠습니다.”
말이 권유지 사실상 강제였다.
말을 듣지 않는다면 힘으로 쓰러뜨려 보낼 생각인지 고드프리는 주먹을 풀며 천천히 샤로텐에게 다가갔다.
하밀부르크 또한 이게 최선이라 생각했는지 제지하려 들지를 않았다.
다가오는 고드프리를 바라보며 샤로텐은 생각했다.
‘그냥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게 좋은 건가.’
주력 부대가 모조리 박살난 말튼 성과 두 성의 전력이 합해진 이방인 하운드의 군대와의 싸움.
누가 이길지 지나가는 노예에게 물어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못이기는 척 눈감고 살아나 훗날을 도모하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를 일이다.
포기하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는 영주의 뇌리 속 어느 소년의 차가운 일갈이 비수처럼 꽂혔다.
-정신 차려, 영주라는 직급과 되도 않는 호통 한번으로 지금의 말튼 성을 구해줄 거 같아?
싸움이 벌어졌을 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좌절하던 자신을 처음 보고 듣지도 못한 어린 소년이 자신의 뺨을 치고 나서 한 소리였다.
전시 상황에서 한 성의 영주의 뺨을 치다니, 다시 생각하면 당장 목을 베어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지만, 왜 그 말이 지금 떠오르는 걸까.
이어 하룬가의 졸개로 살아왔지만, 자신을 살리려 목숨을 던진 배불뚝이 남자의 외침 또한 뇌리에 박혔다.
-한 성의 영주가 목숨을 그렇게 쉽게 포기해도 되겠습니까! 고집 부리는 건 영주님입니다!
영주도 대단한 직급도 아닌 두 사람, 도망쳐도 상관없을 이들이지만, 말튼 성이 함락당하기 직전인 최악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각자 할 일을 해냈다.
저런 두 사람도 포기하지 않는데 한 성의 모든 걸 책임지는 영주라는 사람이 도망치려하다니.
여기서 도망친다면 자신을 위해 죽어간 병사들과 기사들 그리고 사람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진다.
눈빛이 바뀐 샤로텐의 시선이 고드프리에게 향했다.
“…….”
도망가선 안 된다, 말로 논하는 싸움의 결과는 들을 가치도 없다.
싸움은 끝이 와봐야 결과를 알 수 있는 법, 자신은 도망치지 않을 거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