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선 안 된다, 말로 논하는 싸움의 결과는 들을 가치도 없다.
싸움은 끝이 와봐야 결과를 알 수 있는 법, 자신은 도망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어떻게?’
내일 있을 적들과의 싸움이 문제가 아니다, 당장 자신을 기절시키려 다가오는 역전노장 고드프리를 설득시켜야 한다.
샤로텐은 주먹을 쥔 채 머리를 쥐어 짜내보지만,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말로 설득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말튼 성의 병사도 아닌 트라야비아가의 부기사단장인 고드프리에게 영주인 자신의 권위와 호통은 먹히지 않는다.
오로지 이방인과의 싸움 혹은 가문과 자신의 명예를 위해 움직이는 노장, 이런 그를 멈추게 할 언변은 샤로텐에겐 없었다.
다시 절망감으로 휩싸이려는 찰나의 순간, 샤로텐은 자신의 뇌리를 스친 두 사람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영주라는 직급은 이 자리에선 소용없지 내가 가지고 있는 건 고작 한 줌의 목숨……하지만 고드프리라면…….’
그리고 샤로텐은 실소를 흘리며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될지 알겠군, 두 사람에게 고마워해야겠어.’
“웃음이 나오십니까? 영주님?”
“하하, 미안하네, 고드프리 경, 갑자기 어떤 건방진 꼬마랑 충성스러운 하인의 말이 떠올라서 말이야.”
“잡다한 생각은 나중에 하시지요, 가지 않겠다면 기절 시켜드리겠습니다, 영주님에게 바치는 예의 겸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순순히 가거나 강제로 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고르시지요.”
“미안하지만, 둘 다 고르지 않을 걸세.”
샤로텐의 즉답에 고드프리 또한 더는 망설이지 않고 주먹을 풀며 당장 때릴 듯이 다가왔다.
고드프리가 샤로텐을 기절시키려고 주먹을 든 순간, 고드프리는 그의 하나 남은 눈이 움찔거리며 이제껏 보지 못한 곤혹스러운 표정을 보이며 물러섰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영주님?”
“하하, 고드프리 경도 그런 표정을 지으실 줄 아시는 군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고 당장 그 손에 든 거 내려놓으십쇼.”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고드프리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샤로텐, 말튼 성의 영주가 언제 꺼냈는지 모를 호신용 칼로 자신의 목에 대고 있는 것이다.
자객이 찾아온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것도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검을 든 영주는 더 다가오면 스스로의 목을 그어 죽을 기세였다.
지켜보고 있던 하밀부르크 또한 동공이 찢어질 듯이 확장된 채 놀란 목소리로 만류했다.
“영주님! 뭐하시는 겁니까!”
“그대는 가만히 있게, 지금부터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내게 다가온다면 난 스스로 목을 그을 거야.”
“영주님!”
하밀부르크는 물론 고드피로 또한 이런 상황이 될 줄은 예상도 못했는지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샤로텐은 두 사람으로부터 천천히 거리를 벌리면서 느긋하게 말했다.
“고드프리경께선 말하셨죠, 제 안위 따윈 알바 아니지만, 이방인과 싸우는 도중에 제가 죽으면 명예가 실추되니 절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겠다고요.”
“이상한 소리 말고 칼부터 내려라, 말로 할 때 들어, 예의고 뭐고 턱에 주먹을 꽂아버리기 전에.”
“해보시죠, 그러다가 자칫 제 몸이 상하기라도 한다면 고드프리경의 책임입니다, 아무리 콧대 높은 백금 기사의 부단장이라 해도 한 성의 영주를 다치게 했다면 경의 가문에 꽤나 큰 먹칠을 하게 될 겁니다.”
“샤로텐!”
채챙!
고드프리의 살벌한 외침과 함께 집무실 창문이 모조리 깨져나갔다.
유리조각이 사방으로 튀어나가도 샤로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손에 든 칼을 내려놓지 않았다.
샤로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고드프리에게 도발까지 했다.
“트라야비아가, 대대로 명예롭고 강한 기사들을 배출하고 황제에게도 그 명예로움을 인정받은 명문가, 그런데 그 기사들 중, 그것도 부단장 급 기사가 영주에게 해를 끼쳤다? 최악의 경우 황제폐하께서도 노하실 수도 있겠군요, 하하.”
“궤변은 집어치워라 멍청한 영주! 네 놈을 살리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하면 가주님도 폐하께서도 이해해 줄 거다!”
“그렇게 확실하시면 지금 달려들어 절 쓰러뜨리시지요, 고드프리 경의 속도라면 제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전에 쓰러뜨릴 수 있을 겁니다가, 아 물론 자칫 재수 없게 제가 죽는다면 큰일 나겠지만 말입니다.”
“이, 이런 정신 나간 영주가!”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하는 고드프리와 샤로텐, 이를 지켜보는 하밀부르크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꽤 오래 자유 해방단 단장으로서 활동하면서 온갖 별난 꼴을 다 본 하밀부르크였다.
정신 나간 마법사나 인간만도 못한 노예 상인은 물론 살인을 즐기는 기사나 반란을 몰래 군대를 조직해 반란을 꿈꾸던 영주 또한 상대해보았다.
사악하고 정신 나간 이들을 많이 보고 상대한 하밀부르크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자기 목숨을 인질로 잡아 협박하는 영주라니, 하밀부르크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못해 하얗게 번질 지경이었다.
일단은 말려야 할 거 같으니 하밀부르크는 조심스레 두 사람에게 말했다.
“두 분 다 잠시 진정하시고…….”
“닥쳐라 애송이! 방관하는 네놈도 영주와 한패나 다름없는 놈이다!”
“하하, 고드프리경께서 화가 많이 나셨군요, 단장께서는 신경쓰지 말고 얌전히 있어주시죠.”
“…….”
하밀부르크의 만류에도 두 사람은 제대로 듣지도 않은 채 계속 대치를 이루었다.
고드프리의 말에 따라 영주를 안전한 곳에 보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니 하밀부르크 또한 곤란해졌다.
자유 해방단을 지원해주는 트라야비아가의 인사인 고드프리, 그렇기에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영주를 기절시킬 생각이지만, 잘못하면 영주가 죽게 생겼다.
하밀부르크는 심호흡을 하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대로 대치만 하면 서로가 손해야, 내가 틈을 타서 영주를 기절시키는 게 최선이겠지만, 자칫 영주가 다치거나 죽기라도 한다면 나에게도 책임이 오갈 수도 있다.’
영주를 기절시키는 건 무리다, 그렇다면 차선책은?
눈을 감은 채 생각하던 하밀부르크는 순간 미르라는 단어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이런 데서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야, 빨리 이번 사태를 해결하고 미르를 찾아야 한다.’
미르라는 단어 하나에 하밀부르크는 지금까지 해온 모든 손익 계산과 생각들을 지워버렸다.
하밀부르크의 머릿속에는 온통 미르로 가득 찬 채 그녀를 구할 생각으로 가득했다.
‘미르, 노예 놈의 말대로 하룬가에게 잡혀갔다면 본가에 그녀가 있을지도 몰라.’
미르가 하룬가 본가에 잡혀 있을지도 모른다, 하룬가 본가는 말튼 성에 있다.
말튼 성이 함락되면 본가에 있는 미르 또한 위험해진다.
말튼 성이 함락되지 않기 위해, 본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그녀의 안위를 위해 내일 있을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하밀부르크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이길 수 있습니다!”
하밀부르크가 외친 말에 고드프리와 샤로텐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고드프리는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하밀부르크에게 차갑게 말했다.
“하, 정말로 영주와 한패였더냐? 우리 가문에게 지원을 받기로 해놓고 이러다니 역겨워서 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야.”
“아닙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제대로 훈련도 안 된 천 여 명의 병사들 가지고 만 명이 넘어가는 이방인 군대를 이길 수 있다? 좋다 어디 말해봐라, 수긍할만한 답변이면 내 실수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영주를 그냥 두고 네 놈 해방단에 대한 지원금을 두 배로 늘리겠다, 허나 그러지 못한다면……재미없을 줄 알거라.”
“…….”
엄포를 놓는 고드프리의 말에 하밀부르크는 자연스레 입을 다물었다.
미르의 안전만을 생각하느라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제대로 된 해결책이 있을 리가 없다.
샤로텐도 하밀부르크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되는 지 희망어린 눈빛을 띤 채 바라보고 있으니 졸지에 이 싸움의 해결사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하밀부르크는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잘 못 걸려도 너무 잘 못 걸렸군.’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