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들이 서로 농담을 하는 와중에도 감독관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말할 기운은커녕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말허리를 붙잡은 자신의 다리 힘은 풀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임무를 마칠 생각이었다.
새벽이 다 되도록 감독관과 기사들의 정찰은 끝나지 않았다.
해와 달이 서로를 마주본 채 돌아가기를 한 바퀴.
어느새 하루가 지나갔다.
하루가 지났지만, 짐승 군대는커녕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달이 지고 해가 뜨는 동안 드넓은 벌판을 돌아다니는 감독관과 동행하는 말튼 성의 기사들은 짐승군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의아해했다.
“분명 랠리 숲에서 이쪽으로 오고 있다 들었는데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거지?”
“넌 출발하기 전에 영주님의 말을 듣기는 한 거냐? 랠리 숲에서 내려오다가 다른 방향으로 꺾었다잖아.”
“그럼 더 이상하지 않아? 말튼 성으로 멀쩡히 진군하던 놈들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게?”
“반이 짐승으로 이루어진 군대라는 데 정상적으로 움직일 리가 없지, 정 궁금하면 저 친구한테 물어보던가.”
기사 중 한 명이 감독관을 가리켰다.
밤을 지새워도 멀쩡히 말을 타고 다니는 기사들과는 달리 감독관은 정말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래도 눈빛만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기사의 물음에 감독관은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꺼냈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습니다,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만, 계속 정찰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쉬자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의왼데?”
“하루 종일 말에서 매달린 채 버틴 것도 대단한데 정신상태가 훌륭한 걸? 이봐 자네, 이번 임무가 멀쩡히 끝나면 기사 생도 시험이라도 볼 생각 없나?”
“저 친구는 내가 먼저 찜했어.”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음에도 임무에 의욕적인 감독관에 모습에 기사들은 싱긋 웃으며 그를 칭찬했다.
말튼 성 근처를 배회하며 정찰하는 정찰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는 길게 이어진 목책과 함께 세워진 임시 막사가 있었다.
밤새 병사들과 함께 목책과 임시 막사를 세운 오툰은 마음이 풀린 병사들에게 경고했다.
“정신 차려라! 당장 짐승들의 군대가 안 온다 해도 방심했다간 당한다! 지원군이 올 때까진 철저하게 경계를 하도록!”
“넵!”
오툰의 말에 목청껏 외치는 병사들의 목소리는 고양되어있었다.
걱정으로 가득했던 어제의 모습과는 정 반대였다.
오툰의 부관이 병사들의 모습을 보곤 오툰에게 슬쩍 말했다.
“병사들의 사기가 바짝 오른 거 같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굳이 싸울 필요 없이 이대로 기다리면 지원군이 올 테니.”
상대는 몇 천은 될 짐승들과 조종당하는 병사들이다.
말튼 성의 전 병력, 하룬가 그리고 자유 해방단의 전력이 부딪혀도 승산이 적은 싸움이었다.
그러나 짐승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지원군이 온다면 상황은 역전된다.
이러한 상황은 말튼 성에도 알려졌다.
빠르게 소문을 접한 시민들은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뭐야, 굳이 도망갈 필요도 없겠는 걸?”
“분명 쫄아서 도망간 게 분명해.”
“다행이다, 성안에 가족들을 데리고 어떻게 피난가나 싶었는데.”
“말튼 성 만세!”
시민들의 혼란은 잠잠해지고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소식을 들은 영주 샤로텐은 조금이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집무실이 아닌 성벽 위에서 한발자국도 떼지 않던 샤로텐이었다.
샤로텐은 진심으로 안도해하며 중얼거렸다.
“다행이군, 이유는 몰라도 짐승들이 늦게 온다니.”
옆에 있던 하랄드 또한 안도했지만, 자존심 때문인지 피식 웃으며 샤로텐에게 빈정거렸다.
“하핫, 안심하는 꼴이라니 고작 짐승군대에게 겁을 먹었던 거냐, 말튼 성의 영주라는 이름이 아까울 지경이야.”
“하랄드경, 방금 그쪽도 안심하는 표정을 제 눈으로 봤습니다.”
“큼큼, 그런 적 없다, 이젠 눈도 삐었나보군, 영주 자리를 때려 치는 게 좋을 거야.”
“하하, 어쨌든 상황이 나쁘지 않아 다행이군요.”
하랄드의 험한 말에도 샤로텐은 옅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자칫 말튼 성이 함락될 수도 있는 위기였기에 샤로텐은 이런 희소식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안도하는 두 사람과는 달리 하밀부르크는 뭔가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이를 본 샤로텐이 정중히 물었다.
“표정이 안 좋으신 거 같습니다만?”
“아, 별거 아닙니다, 영주님 신경 쓰지 마십쇼.”
“별거 아닌 것 치곤 표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말하기 곤란한 겁니까?”
“……조금 걱정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밀부르크의 서두에 샤로텐은 물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던 하랄드도 관심을 보였다.
자신에게 쏠린 두 사람의 시선을 느낀 하밀부르크는 더 지체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방인 하운드의 군대가 말튼 성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간 게 마음에 걸립니다.”
“저도 그 점에 있어선 걱정되는 게 많지만, 당장 말튼 성에 오지 않으니 다행인 거 아닌가.”
“혹시 영주님께서는 미르라는 여성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하밀부르크의 뜬금없는 질문에 샤로텐은 문득 고드프리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고드프리가 맞붙고 싶었다는 말튼 성에 있었다는 이방인의 이름이었다.
이름만 들었을 뿐인 이방인이기에 샤로텐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하랄드의 반응이 이상했다.
“미, 미르?”
화들짝 놀라는 하랄드의 모습에 샤로텐은 의아해했다.
“흠? 하랄드경이 알고 계시는 분입니까?”
“……아니, 모르는 년이다, 하던 이야기나 해.”
모른다고 하기는 하랄드는 너무나도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밀부르크는 시선을 하랄드에게로 돌렸다.
하밀부르크와 눈을 마주친 하랄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적의를 내비쳤다.
“갑자기 날 왜 보는 거냐? 고작 자유 해방단의 단장 주제에 나와 눈을 마주하려 들어? 이런 상황이라고 나와 맞먹으려 드는 거냐!”
노발대발하는 하랄드의 말에 하밀부르크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하밀부르크는 들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생각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정말인가 보군, 노예 꼬마의 말대로 미르의 실종은 하룬가와 관련되어있어.’
하밀부르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이 자리에서 하랄드를 제압하고 미르의 위치를 실토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튼 성의 모든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문제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기에는 책임감이 막중하기에 하밀부르크는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아니야, 미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하룬가를 공격할 순 없다.’
표정을 가다듬은 하밀부르크는 차분한 목소리로 하랄드에게 말했다.
“……하랄드 경께서는 여러 이방인들을 봐오셨을 테니 잘 아실 겁니다, 이방인이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
“한때 함께하던 이방인 미르로부터 이방인에 대해 많을 걸 들었습니다, 이방인에게 목적이 있다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코 허투루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밀부르크의 말에 화를 내던 하랄드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하밀부르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방인 하운드는 분명히 말튼 성을 공격하고자하는 의도로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오다가 사라졌다? 다른 목적이 생겨서가 아닌 분명 말튼 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군대를 돌린 겁니다.”
하밀부르크의 말에 잠자코 있던 샤로텐이 반박했다.
“군대를 돌린다고 놈들이 얻을 이득이 대체 뭡니까?”
“그건……저도 모릅니다.”
“말튼 성 주위를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놈들의 우두머리인 이방인 하운드는 짐승이니 분명 제대로 된 사고를 못하고 실수를 한 게 분명합니다.”
“그건 아닙니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이방인은 상식을 벗어난 존재입니다.”
서로 반박을 하지만, 결론이 나지 않는 대화에 하랄드가 한 소리했다.
“그 놈의 이방인 하운드가 무슨 꿍꿍이로 군대를 돌렸든 간에 지원군만 오면 걱정할 거 없지.”
하랄드의 말에 수긍하는지 샤로텐과 하밀부르크는 더 입을 열지는 않았다.
양 쪽 성에서 오고 있을 지원군만 오면 된다.
여기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가 또 지나갔다.
랠리 숲에서 잔뜩 내리던 눈이 말튼 성에도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무수히 내리며 땅에 쌓이는 눈들로 인해 움직임이 둔해지고 시야 또한 좁아졌지만, 정찰대의 보고는 늘 같았다.
여전히 짐승들은 오지 않는다는 한 줄 한 장의 보고서뿐이었다.
보고서 내용을 함께 확인한 하밀부르크는 우려섞인 말을 했다.
“좋은 소식이지만, 문제가 하나 있군요.”
오늘쯤 와야 할 지원군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걱정하는 하밀부르크와는 다르게 샤로텐과 하랄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루 정도 늦어지는 것 정돈 있을 수 있는 일이니 너무 걱정 말게.”
“칫, 늦게 오는 건 상관없지만, 우리 하룬가의 지원군이 가장 먼저 와야 할 텐데, 다른 놈들에게 뒤처지기만 해봐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주와 하룬가 적자의 말이다.
하밀부르크는 완전히 걱정을 지우지는 못했지만, 억지로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차질이 생겨 혹은 갑자기 내리는 눈 때문에 행군이 느려져 늦은 게 분명하다고 다들 결론을 내렸다.
며칠 전만 해도 휑하던 시장 거리에 사람들이 다시 북적였다.
짐승 군대가 온다는 소식에 겁먹었다는 게 거짓말인 것처럼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여기 생선이 쌉니다 싸!”
“옷 한번 보고 가세요!”
“향신료가 다 떨어졌다고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상인들이 며칠 간 발이 묶이는 바람에……오늘 아침에 출발했으니 금방 충원이 될 겁니다.”
완전히 긴장이 풀린 건 아니지만, 사람들은 웃으면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밖에서 돌아다니는 정찰대나 오툰이 이끄는 부대 또한 상당히 풀어졌다.
“대장 여기 와서 이것 좀 드셔보십쇼! 자유 해방단 녀석들이 한 스튜인데 되게 맛있습니다!”
“헛소리 말고 빨리 식사나 마쳐라, 식사 후 바로 교대로 근무 서는 것도 잊지 말고.”
“아 너무 딱딱하십니다, 벌써 3일째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근무만 섰다고요.”
“언제 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데 그런 말이 나오냐!”
오툰의 불호령에 부하들은 움츠려 들었다.
이를 보고 있던 부관 중 한 명이 조심스레 건의했다.
“근위 대장님, 부하들의 말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습니다, 잠도 제대로 못자고 근무까지 서는 데 눈까지 내려 추위가 심합니다, 병사들의 피로가 심하니 잠깐 정도는…….”
부관의 말에 오툰은 부하들의 안색을 살폈다.
부관의 말대로 부하들의 안색은 심히 좋지 못했다.
잠시 고민하던 오툰은 신음성을 내며 마지못해 수긍했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알겠다, 조금은 쉬게 해주지.”
“감사합니다.”
오툰의 허락이 있자 병사들은 환호했다.
하늘에 울려퍼지는 병사들의 환호성과 더불어 눈은 끝없이 내린다.
오툰과 병사들도 멀리서 정찰 중인 감독관과 기사들에게도 그리고 말튼 성에도 눈은 멈출 기세 없이 내린다.
온 대지를 뒤덮을 것만 같은 하얀 눈, 그 순백의 이름처럼 모든 사람들의 걱정과 불안이 잠잠해질 때.
가온이 일어났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