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밤이 찾아왔다. 이번에도 잔별이 밤하늘을 빛내고자 했지만, 무녀님의 무대가 오늘은 휴업임을 알고 있던 별들은 전날 밤보다 많이 나타나진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대지의 불빛을 싫어했다. 기지의 수많은 천막 주변에는 가로등이 하나씩 불을 품고 있었고, 건물 안에서는 몇몇 등불 빛이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무녀님의 무대를 보기 위해 밤하늘을 찾아온 초승달은 자신이 하루 늦게 왔음을 깨닫고 서둘러 지평선 밑으로 돌아가고자 궤도를 돈다.
나는 천막들이 둘러싸고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무녀님을 위해 마련된 공간, 가장 한 가운데의 제단 천막과 숙사만이 세워져 있는 곳. 이를 제외하고는 잡초와 잔디, 그리고 잔돌밖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다지 가파르지도 않은 평원에 가까운 언덕이었다.
숙사에서 아이린 무녀님이 나오시는 것을 보았다. 무녀님이 나를 향해 뛰어오자, 나도 덩달아 발걸음이 빨라졌다. 심장도 빨리 뛰기 시작했다. 마침내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서로 간의 거리가 좁아지자, 무녀님은 내 가슴팍에 뛰어드셨다. 나는 무녀님이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았고, 달려온 속도가 붙어버리는 바람에 빙글빙글 돌다가 함께 잔디 위로 넘어졌다. 물론 무녀님이 다치지 않도록 내가 바닥에 넘어졌고, 무녀님은 내 품 위에 쓰러지셨다. 허벅지 길이까지 내려오는 무녀님의 길고 흰 생머리와 동색(同色)의 원피스가 부채 펼쳐지듯이 잔디밭을 수놓았다. 마치 대지에 의해 빼앗긴 하늘의 별들이 무녀님 안에 숨어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루이!”
무녀님이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보셨다. 뽀얗고 앳된 얼굴에 티끌 같은 눈물이 한 방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지?”
무녀님의 눈동자가 물결치고 있었다.
“저는 멀쩡합니다. 무녀님.”
나는 무녀님께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었고, 다친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로 맹세했었다. 이 둘을 모두 지키고 무녀님 앞에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고마워, 정말로……”
무녀님과 나는 머리를 맞대고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술(前述)했지만 어제 비해서 별달리 보이는 별빛은 많지 않았다. 나는 전날의 밤하늘을 무녀님께 보여 드리고 싶었으나, 내가 봤던 아름다운 광경을 그대로 전달할 방도가 없어서 답답하였다. 나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언어적 표현으로 그 천체를 묘사하고자 하였지만, 만족스럽게 이야기하지는 못하였다. 무녀님은 내 서툰 문학적 감각을 듣고는 폭소를 참아내고자 두 손으로 안간힘을 다하였다. 하지만 그 작은 두 손으로는 웃음이 새어 나와 키득거리는 소리를 막지 못하였다. 얼굴을 가리는 데는 충분했지만 말이다.
“흡, 미안. 비웃으려는 건 아니야. 단지, 흐흐, 너무 과장하는 것 같이 들려서……”
뻘쭘해진 나는 이야기를 창작하고자 하는 시도를 그만두고 다른 이야기를 감상하고자 하는 시도로 화제를 돌렸다.
“무녀님, 어제 부르신 가사는 <사냥꾼 카를로스>에서 따오셨죠?”
“어떻게 알았어?”
“저야 뭐, 무녀님께서 생각하시는 바와 달리 문학에 관심이 많답니다.”
의외라는 듯이 물어보는 무녀님에게 나는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답하였다. 그 말대로 나는 꽤 많은 문학작품을 읽어보았다.
저택에서 살고 있었을 어린 시절, 한 떠돌이 음유시인이 영지를 들른 적이 있었다. 그 당시의 나는 집사와 산책을 나서다가 우연히 그의 류트 연주를 듣게 되었다. 손때묻고 볼품없는 현악기였지만, 나는 그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에 매료되었다. 나는 그가 영지를 떠나기 직전까지 그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매일 산책을 나섰다.
그가 다른 곳으로 떠난 이후로 나는 예술작품에 관심을 두게 되었지만, ‘예술은 아무것도 없어 허무할 뿐이다.’라고 주창하시는 아버지의 훼방 때문에 많은 작품을 접하지는 못하였다. 물론 예술가가 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주변의 귀족들이나 그 자제들은 예술작품에 대해서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나는 거기에 참여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조상님들이 줄줄이 모두 기사였던 마르시우스 가문, 나의 아버지는 뼛속까지 군인이었던 탓이었고, 나 또한 그 계보를 계속 잇는 것을 강요당했기 때문이었다.
“지난주에 마을 도서관에서 펼쳐봤지. 읽는 내내 정말 두근거렸어!”
“플롯 자체는 평범하지만, 카를로스가 숲을 묘사하는 표현과 마녀가 읊는 시 하나하나가 정말 감명 깊지요.”
<사냥꾼 카를로스>. 수렵으로 삶을 연명하던 사냥꾼 카를로스에게 어느 날 마녀가 찾아온다. 그 마녀는 자신만의 숲으로 카를로스를 안내하고, 그는 나날이 새롭고 신비한 하루하루를 지낸다. 하지만 마녀의 숲을 호시탐탐 노리던 악마가 빈틈을 통해 들어오면서 마녀와 카를로스는 숲을 빼앗긴 채 쫓겨나게 된다. 여러 고난 끝에 동료와 함께 악마를 쫓아낸 카를로스는 숲을 봉인해야 한다는 마녀와 영원히 헤어지게 되고, 숲에서 지냈던 나날을 그리워한다는 진한 여운을 남기는 동화이야기다.
전날 전장에서 무녀님이 부르신 노래는 바로 이 이야기 속에서 등장한 시를 가사로 삼은 것이었다. 카를로스와 마녀가 숲에서 쫓겨난 지 하루가 지났을 밤, 동굴 속에서 달을 넘기고자 한 주인공 일행 앞에 동굴의 주인인 호랑이가 들이닥친다. 입구는 호랑이가 막고 있고, 동굴 안쪽은 막다른 길인 절체절명의 순간, 호랑이를 진정시키려고 마녀가 부른 노래가 그것이었다.
“루이, 이제 다른 곳으로 간다고 했지? 그래서 내가 준비한 노래였어.”
무녀님이 눈을 반짝거리며 말하였다. 필히 그 감상을 묻는 것이리라.
“영광입니다, 무녀님. 그래도 이게 작별노래라는 것이 아쉽군요. 좀 더 무녀님과 함께……”
“아니, 이건 작별노래가 아니야. 노래를 부르기 전에 루이의 점을 쳐봤어. 그랬더니 이 노래가 땅겨지더라구.”
“그러셨다는 말씀은……”
“아무래도 너의 앞날이 아닐까?”
그 노래의 바탕이 될 동화이야기가 앞으로 내 인생의 줄거리라니. 도대체 각자의 상징물에 무엇을 대입해야 한다는 것인가? 노래를 골라주시려면 좀 더 행복하게 끝나는 이야기로 선택하셨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하였다.
“루이, 잘됐네! 앞으로의 나날이 기다려지겠는걸? 축하해! 그렇다고 해서 너무 자만해지지 말기. 약속해~”
무녀님은 내 마음을 모르시는지 싱글벙글하게 웃음이 만발한 표정으로 새끼손가락을 세우셨다. 무녀님은 수업에서 몰래 도망쳐 나에게 숨어들어올 만큼 배움을 싫어하시는 분인지라 그 책도 도중에 읽다 말았으리라. 나는 말없이 새끼손가락을 서로 맞대어 걸었다. 그 당시에 지었던 내 표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무녀님과 나는 머리를 수평으로 맞닿은 채로 하늘을 향해 누웠다. 조금이나마 떠있는 별들을 바라보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물어보고자 하는 질문을 떠올렸다.
“무녀님.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뭔데?”
무녀님은 호기심에 가득 찬 어조로 내게 물어보았다. 내가 조금 주체하는 척이라도 한다면 무녀님은 볼을 부풀리며 내 질문을 재촉하실 것이었다.
“아까 저녁식사시간 전에 아멜리아 대위님이 저를 찾으셨습니다.”
“그래? 뭐라고 했어?”
갑자기 무녀님이 몸을 일으켜 내 얼굴 위로 머리를 세우셨다. 수직선상에 있는 무녀님의 머리카락이 계곡물 흐르듯이 흘러내려 와 내 얼굴 위로 안착하였다. 코를 간질여졌으므로 무녀님 존안에 재채기할 뻔했다. 그때의 무녀님의 태도는 마치 생선을 눈앞에 둔 고양이의 모습과 흡사하였다.
“네? 딱히 아무 말씀은 안 하셨습니다. 호테 대위님이 부르신다는 말씀 말고는……”
“그래? 그랬구나.”
무녀님은 낚싯줄에 의해 멀리 달아난 생선을 그저 바라보듯이 기가 빠진 어투로 말하며 몸을 추슬렀다. 덩달아 내 얼굴을 간질이던 머리카락도 치워지게 되었다. 무언가 숨겨진 일이 무녀님이 기대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틀림없었다.
“무녀님, 아멜리아 대위님께서 마저 못하신 말씀이 있었습니까?”
“응, 아멜리아는 루이에게 감사할 일이 있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기억으로는 딱히 아멜리아 대위님을 직접 돕거나 한 기억은 없었다. 케르베로스 중대에 있었을 동안에 일어난 일 중에서 아무리 골라봐도 감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처음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관 4개가 준비됐었지?”
대대장의 무리한 작전으로 먼저 희생된 4명의 용기병을 말하는 것이었다. 용기병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하전입자포의 포문을 그녀들을 향해 돌리는 속도가 더 빠름은 지당한 일이었다. 모두 하전입자빔에 전신이 증발했으므로 시신은 남지 않았지만, 전사자의 영혼을 묘지까지 모시기 위한 관이 준비되었었다.
“호테 대위님이 오늘 아침에 돌아오면서, 아멜리아가 그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자 찾아뵈었대. 하지만 호테 대위님이 사은을 거절하시면서 말씀하신 거야.”
그다음 이어진 말은 나에게 복잡한 기분을 안겨주도록 하기엔 충분한 지나친 겸손의 말이었다.
“비록 대대장님 앞에서 나서서 출전을 간청한 것은 저 자신이지만, 자신을 대대장 앞으로 세우게 한 것은 루이 소위라고 하셨대. 바로 네가 호테 대위님을 다독여 준 덕분이라면서 감사는 루이에게 하라고 그분이 아멜리아에게 말씀하셨던 거야.”
호테 대위님은 수세기를 걸쳐 살아오시면서 많은 음모와 모함에 휘말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오신 분이었다. 자신이 섬겨온 주군에게 배신당하고, 복수를 위해 이용당하고, 나라를 뒤집어 개국공신이 된 뒤, 화창한 나날만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닥쳐온 누명으로 백의종군하길 중세 역사와 함께 여러 차례 반복하셨다고 한다. 나도 대위님의 견습기사(Squire)를 통해―대위님이 직접 말씀하셨을 리가 만무하였다.― 그의 무용담을 들으면서 반신반의하긴 했지만, 대위님이 말씀하신 사건들이 모두 역사적인 사실임을 확인하고서는 조금이나마 대위님의 처지를 실감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근래에 와서는 그저 조용히 봉토를 받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전우들을 이끌고 전장을 누비셨던 것이었다. 그 때문에 대위님은 용기병들의 전사소식이 들려와도 묵묵하게 가만히 계실 생각이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대위님이 이 부조리한 참사에 애써 고개 돌려 외면하려는 셈인가 멋대로 생각했던 나는 냉정하게 생각하지 않고 대위님에게 찾아가 그를 다그쳤다.
“이대로 두어도 괜찮은 겁니까? 천사들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들을 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 아닙니까?”
그날 밤 나는 호테 대위님께 찾아가서 그를 자극하였다. 내 입 밖으로 나온 문구 대부분은 대위님께 실례가 될 말이었을 것이었다.
“대위님은 살아가시면서 많은 용기병을 만나뵈셨잖습니까. 어린 나이부터 가호를 부여 당한 그녀들에게 연민을 느끼신다고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눈에 띄시는 것이 두려우신 겁니까? 앞으로의 안식을 위해 그 수박만 한 눈을 질끈 감으시렵니까? 아예 저희 장교 텐트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숨어보시지 말입니다!”
대위님의 신체를 전부 숨길 수 있는 텐트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안으로 들어간답시고 등지고 있던 천막은 거의 병풍처럼 세워져 있었다. 미처 천막을 다 두르지 못하고 뚫려있는 방향에서 내 동료 사관들이 흥분한 나를 말리기 위해 달려들었고, 대대장의 친위대 또한 우연히 대위님의 텐트를 지나치던 중이었다. 분명 나는 나름 정치적 연줄을 가진 대대장의 눈 밖에 났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이는 나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곧이어 나는 동료에게 어깨를 결박당한 뒤, 강제로 이끌려 내 텐트에 처박혀졌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머리가 식혀지자,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았어도 대위님은 대대를 이끌고 용기병대를 구원하기 위해 출전하셨으리라 생각했다. 잘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위님은 돌아갈 고향을 매우 원하였지만, 전우들의 죽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고자 하셨기 때문이었다. 전우들에 대한 각오가 병적인 대위님의 생각과 부조리함을 못 참는 내 생각은 분명 일치할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나와 대위님 간의 차이는 여기서부터 벌어진다.
대위님은 자신이 생각하신 바를 떠올리자마자 당장 실천하시는 분이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망설이시지 않았다. 황소고집과는 다른 것이, 자신의 신념에 따른 행동 때문에 무고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을까 항상 염려하시고, 언제나 주위를 둘러보셨다. 덕분에 1년 동안 대위님의 휘하에서 나는 그의 많은 물음에 답하였지만, 나는 오히려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실질적으로 대위님의 많은 도움이 된 적은 없었지만, 그는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아버지와 사관학교 밑에서 새겨진 관념들이 대위님에 의해 깨져나갔다. 어떤 날에는 대위님에 의해 나 자신이 거꾸로 뒤집혀, 내가 품고 있던 낱알들이 남김없이 털리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대위님과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소인배이자 겁쟁이였다. 내가 자유의지는 일절 묻지 않은 채, 군인이 될 것을 강요한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그로부터 도망칠 힘―재력이든 용기든―을 가지지 못하고 무력한 나 자신을 혐오하였다. 나는 어떤 형태로든 황제 폐하의 오른손이신 아버지와 연관되었다. 특히 자신 스스로 더욱 싫어지는 사실이란,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나는 항상 그의 뒤에 숨기 바빴다는 것이었다.
“저는 대위님의 사의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루이, 아멜리아의 감사는 받아주었으면 좋겠어.”
나는 자조하며 말하였지만, 무녀님은 수긍하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사의를 받기엔 너무 부족한 몸입니다. 게다가 전 한 일이……”
“루이, 넌 정말 잘한 거야!”
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어나가려 했으나, 무녀님이 갑자기 끼어들어 말을 끊으셨다
“사람은 말이야. 고난을 겪어서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도, 응원 한마디면 충분히 앞으로 나아갈 힘을 낼 수 있어. 진심이 담겨있으면 자기가 생각해도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말이라도 충분해. 받아주는 사람은 저절로 알게 되어있거든.”
여태까지 투정 하나 마음 놓고 부릴 수 없는 강압적인 환경에서 자라온 나에겐 실감하지 못할 말이었다.
무녀님은 윗몸을 완전히 일으키고, 다리를 무릎 꿇듯이 고쳐 앉았다. 무녀님이 자세를 바꾸실 때마다 머리카락과 치맛자락이 잔상을 남기듯이 천천히 끌려왔다. 하늘 위로 보이는 우주의 은하수가 상대성이론을 무시하고 냇물 흐르듯이 빠르게 움직인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 아닐까.
“자, 여기야.”
나는 무녀님이 가리키는 곳, 허벅지에 머리를 대었다. 무녀님이 불편하지 않도록 목에 힘을 주었지만, 무녀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자 이내 힘이 빠져버렸다. 볕 잘 드는 들녘에 누워있는 듯 매우 포근하고 따뜻했다. 무녀님과 처음 만났을 때, 내 뺨을 어루만져주시던 그 감각 그대로였다. 차이가 있다면, 그땐 거신병과 감각을 공유하고 있었으므로 무녀님의 손이 티끌만큼 작게 느껴졌다는 것이었겠지만.
무녀님은 짧게 노래 한 절을 부르셨다. 취침 중인 병사들이 깨지 않도록 은은한 자장가를 하나 고르셨다. 무녀님의 노래가 다시 머릿속에서 고요히 물결쳤다. 전우들도 꿈결에 같은 노래를 들으며 몽환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으리라.
초승달은 무녀님의 깜짝 공연을 듣지 못한 채, 산 너머로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다음 날 아침, 일조점호와 연병장에서 간단한 일정을 마친 뒤 나는 마구간으로 찾아갔다. 거신병을 격납하고 있는 이 건물은 기지에서 수송기 격납고 다음으로 큰 건물임에도 나무와 흙으로 된 벽돌로 쌓여 있었다. 투란크 인들이 지은 이 마구간은 본성(本星)에서 짓는 마구간보다 통풍이 더 잘 되어 맨앳암즈 사이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다.
마침내 거신이 바르시다 호로 옮겨지기 위해 마구간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다리를 반쯤 접어 앉은 채로 밖으로 나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신과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계단을 타고 거신을 둘러싸고 있던 철골 구조물에 올라간 뒤 휘파람을 불었다. 나의 신호를 들은 거신은 왼팔을 들어서 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왼손에 올라탔고, 거신은 손바닥에 발을 짚고 서 있는 나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평형을 유지하면서 왼손을 어깨에 갖다 대었다.
“로시난테. 잘 잤어?”
14살 때, 내가 직접 지어준 그의 이름이었다. 그때의 로시난테도 이제 막 견습기사가 되었던 나처럼 갓 태어난 망아지였다. 그 뒤로 나와 로시난테는 함께 유년기를 보냈다. 군대에서나 쓰일 법한 대형 솥을 끌고 가서 그를 먹이고, 건물을 청소하듯이 천장에 줄을 매달아 공중에서 그를 씻기고, 그의 어깨 위에서 같이 바람을 가로지르며 평원을 자유롭게 달리기도 했다. 사관학교에서도 나는 새 거신병을 받지 않고, 로시난테에 올라타 기사 수업을 받아 왔다. 로시난테는 나의 애마이자, 절친한 친구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로시난테의 왼쪽 어깨에 걸터앉아 그가 천천히 마구간을 나올 수 있도록 손짓과 말로 지시를 내렸다. 로시난테의 바로 앞에서는 사병 하나가 깃발로 내가 못 보는 사각지대를 보완하며 우리를 유도하였다.
“이제 우린 다른 곳으로 갈 모양인가 봐.”
나는 앞을 응시하며 로시난테에게 말했다. 그가 내 얘기를 알아들을 리는 없으므로, 이는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다.
“어디로 가게 될까…… 너는 기대되냐?”
내심 로시난테가 내 말에 대답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구간을 등지자, 놀런이 자신의 거신을 타고 다른 마구간 입구에서 나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도련님, 좋은 아침입니다!”
놀런이 가벼운 경례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는 자신이 타고 있는 거신의 오른쪽 어깨에 걸터앉고 있었다. 그의 거신이 로시난테의 왼편에 같은 방향으로 걸어나갔으므로, 놀런과 나는 꽤 가까운 거리에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놀런! 자네, 공터로 나가던 중이었나?”
“아닙니다. 저도 이 녀석을 수송기에 태우기 위해 착륙장으로 향하던 중입니다.”
“무슨 말인가?”
“앗차, 어제 도련님께 말을 못했었지요?”
놀런은 자기 머리를 꿀밤으로 살짝 쥐어박는 듯한 모습을 취하고 나서 어제 전하지 못했던 자신의 말을 이었다.
“저도 도련님과 같은 178대대로 전임되었습니다. 같은 행선지군요~”
놀런은 그 특유의 어린애 보는 듯한 억양으로 절망적인 사실을 전달했다. 맙소사, 이 중대를 떠나도 계속 이놈을 끌고 다녀야 한다니.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잔소리로 내 안식을 파먹는 저 가신(家臣) 대신에, 차라리 무녀님을 데리고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분명히 이 비관적인 인사이동에는 아버지의 입김이 작용했으리라. 애초에 내가 놀런을 첫 번째 가신으로 삼게 한 것도 아버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떨어져도 계속 나를 감시할 수 있게 말이다.
“자네는 잠깐 쉬는 것이 어떻겠나? 그동안 많이 무리하지 않았는가. 그래, 휴가라도 보내보는 것이 어떤가?”
나는 제발 좀 과인으로부터 떨어져 달라는 메시지를 최대한 완곡하게 돌려 말했다. 하지만 귀족들의 연회에는 발을 들여본 적도 없는 못한 나의 천한 가신은 본 의미를 알지 못하고, 글자 그대로 대답하였다.
“안 그래도 반테 일등상사가 절 보고 무진장 부러워했습죠. 휴가 자기 몫까지 잘 갔다 오라면서 말입니다.”
놀런은 뒤를 돌아보며 너털지게 웃었다. 난 자네와 같이 휴가를 보내고 싶진 않다만…… 잠깐.
“휴가?”
“도련님,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시는 겁니까?”
“전달받지 않았네만”
“나 참, 대위님에게 유성펜이라도 선물해주십쇼. 대위님은 손바닥에 ‘프리지아’라고 적으셨어야 했습니다. 그걸 그 새 잊으셨나…… 아니, 혹시 샘이 나셔서 일부로 말씀 안 하셨을지도 모르겠군요.”
“프리지아?”
장교들 사이에서 지나가는 소리로 처음 접하고, 연줄을 이용하여 기밀문서를 통해 보게 된 그 행성이었다. 7년전의 대전쟁 이후로 전선 식민지는 대부분 황폐해졌다. 이를 복구가 될 때까지 대신하기 위한 우회로를 개척하던 중 우연히 발견된 지구형 행성이 ‘프리지아’이다. 환경이 인간에 적합하게 구성되어있어, 거창한 테라포밍 과정이 요구되지 않는 행성을 발견하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진주를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해도 무방했다. 그러나 그 진주가 바로 ‘프리지아’인 것이다. 프리지아가 맨몸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행성임을 ―기밀처리가 되어있으므로―알 리가 없는 놀런은 방호복을 왼쪽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1년 동안 함께였던 전우들과 떨어지는 건 아쉽군요…… 부대원들에게 작별인사는 제대로 하셨습니까?”
“아직 시간이 남아있으니 천천히 할 예정이네.”
“한 놈도 빠짐없이 악수하십쇼.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요.”
나는 인사이동 관련 서류처리를 마무리하기 위해 석조건물로 지어진 행정실 옆에 멈춰 섰다. 내가 땅 위로 내려갈 수 있도록 로시난테가 무릎을 꿇는 동안, 놀런은 나에게 가벼운 경례를 한 뒤 다시 착륙장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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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을 넘기는 연재 텀에 얼굴도 제대로 비추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동안 과제에 치여살아온지라 ㅠㅠ
다음편은 휴일을 등가교환하여 빠른 게시를 약속하겠습니다...orz
이번편은 무녀님 앞에서 신비주의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잘라낸 설명이 많습니다만, 의도가 제대로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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