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
사구메가 피곤에 쩔어있던 눈을 떴을 때, 주위는 눈을 감기 전과 마찬가지로 서류투성이인 자신의 사무실이었다. 하지만 단지 눈을 감고 깼을 뿐이던 사구메는 소름끼치는 위화감을 느껴 주변을 숨죽이곤 두리번거렸다.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한 듯한 기분이 그녀에게 오한처럼 다가와있던 것이다.
'…역시, 너무 일한 건가.'
사구메는 한참을 생각하다 그런 결론을 내렸다. 벌써 나흘, 아니 사흘인가. 아무튼 시간 개념이 맛이 가버릴 정도로 철야중이던 차였다. 사실은 기한이 이 정도까지 빡빡한 일들은 아니지만, 그런데도 굳이 철야를 자처하면서까지 일을 빨리 처리하려는 이유는, 단지 딸을 하루라도, 또 보는 김에는 오래 보고 싶어서였기 때문이었다. 달에서는 기한 내에 주어진 작업을 마친다면 긴급상황이 주어지지 않는 한, 일이 추가적으로 들어오지는 않으니까. 들어오더라도 기한 내에만 처리하면 OK라는 식이다.
그렇다는 소리는 일을 빨리 끝내면 끝낼수록 그에 비례해 자유시간이 는다는 것. 사구메가 미치도록 철야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이번만은 몸도 그런 이성과 박자가 맞는지 본능적으로 움직이며 서류를 처리하는 지경이었으니까. 다만, 너무 과로한 것인지 잠시 졸았던 듯하지만.
'……?'
그렇게 다시 일을 처리하려고 찌뿌둥한 몸을 푸는 사구메에게 위화감의 정체가 번개처럼 번뜩였다. 높았던 서류의 산이 눈에 띄게 줄어있던 것이다. 자던 도중에 처리했나? 싶어 처리된 서류를 돌아보았지만, 자신과 다른 글씨체로 처리되어있어서 그렇다기엔 어폐가 있었다. 누군가가 도와준 걸까. 턱을 살 매만지며 곰곰이 글씨체의 정체를 찾던 와중 머리 맞은편의 서류족자에 숨겨진 갈피를 하나 찾아냈다.
'다음부터는 절대 안 도와드릴 거니까요!'
그 메모를 찾은 순간 사구메는 잠들었을 때, 즉 꿈에서의 일을 전부 떠올려버렸다.
얼굴이 화끈해진 사구메는 서류를 꽉 붙잡고 한참을 부끄러움에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쓰러졌었기 때문일까, 근 사흘간 묘렌사의 그 누구도 세이자에게 수련을 하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세이자는 그저 몰렸던 피곤이 단숨에 풀어졌던 것일 뿐이었지만, 주는 휴식을 마다할 생각이 없어 그런 꿀맛같던 휴식을 주는대로 받아먹었다. 그렇게 이틀간의 휴식이 끝나고, 막 묘렌사 생활 사흘차로 들어든 날이었다. 인상을 찌푸릴 정도로 시끄러운 야마비코의 알람도, 용태를 살피겠다며 옆에서 함께 자고있는 쇼도. 이제는 세이자에게 익숙하다 못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가던 차였다.
"어때요, 몸은 괜찮나요?"
문을 연 히지리가 그렇게 묻기도 했으나, 솔직히 절 안에서 쉬어봤자 즐길 거리라고는 더 없기도 해서, 세이자는 그다지 부정을 표하진 않았다.
"상관 없어. 애초에 당신들이 요란떤 것 뿐이었잖아."
"다행이네요. 그러면 잠시 따라와주시겠어요? 쇼도 같이."
세이자는 별 말 없이 히지리를 따라갔다. 따라간 방은 아무런 장식도 없어 옻칠이 된 나무바닥만 눈에 띌 정도로 무미건조한 방이었다. 방석도 없고, 설법을 듣던 방처럼 생기지도 않았고, 도대체 부른 용무가 뭔지 궁금해하던 세이자였다. 히지리가 어깨를 꽉 움켜쥔 채 말하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머리 정리를 해야겠어요."
"……뭐?"
멍을 때리던 세이자는 잠시 귀를 의심하며 반문했다. 뭔 헛소리냐는 얼굴로 뒤의 히지리를 바라봤지만 히지리는 태연히 방금의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세이자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쇼와 히지리를 번갈아보면서 다시 물었다.
"아니, 잠시만. 댁들이 내 머리 운운할 처지야?"
이쯤에서 주변을 한 번 살펴보자. 히지리는 보라색과 노란색의 그라데이션 머리를 하고 있고, 옆의 쇼도 호랑이 갈기같은 투톤 컬러 헤어를 하고 있다. 세이자도 기본 바탕은 검정에 하양과 붉은색 끼가 조금 섞여들어있는 쓰리 톤의 컬러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승려면서 두 명 몫의 미친 머리를 하고 있는 저들에게 딱히 지적받고 싶은 사항은 아니라고 스스로 느꼈다.
애초에 태클을 걸려면 주지의 머리가 저렇게 찰랑찰랑해도 되는 건지부터 태클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저게 어딜 봐서 절에 있는 놈들이냐. 아니, 년인가 아무튼.
"아뇨, 산발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신경쓰이는 걸요. 적당히 칠 필요는 있어요."
"아니 저쪽은 뭔데? 나보다 더 더러운데!"
"더, 더럽다뇨…."
쇼를 향해 손가락질하자 쇼는 충격을 받았는지 풀죽은 표정으로 자기 머리를 시름시름 매만졌다.
"쇼는 저게 트레이드 마크니까요. 호랑이잖아요? 갈기 같은 야생성은 좀 있어야죠."
"아니 나도 그러면 내버려두라고!"
"안 돼요. 세이자는 어디까지나 수련생, 외견부터 바로잡는다는 마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안되겠다.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아. 그렇게 느낀 세이자는 일단 빠져나가보려 했다. 하지만 어깨를 붙들은 히지리의 힘은 일개 아마노자쿠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강대한 것이었다. 그래, 이 상황에서는 타협뿐이라 생각한 세이자는 차근차근 추후를 살피는 질문을 해봤다.
"머리는 누가 자르는데."
"당연히 저죠."
"으아악! 이거 안 놔!? 승려한테 내 머리를 맡기라고?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고 말지!"
세이자는 안간힘을 다해 다시 버둥댔다. 하지만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래도 그녀가 모르는 일말의 희망이라면 묘렌사의 녀석들은 꽤나 스타일이 있는 편이라는 거였다. 그리고 그게 전부 히지리의 솜씨였다는 사실도. 대부분 단발 뿐이지만, 그래도 못 봐줄 정도의 솜씨로 잘려진 건 또 아니다. 오히려 겹치는 스타일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게다가 웬만한 곳에서 자르는 것보다 솜씨가 더 좋아 설법을 명목으로 잠시 묘렌사에 귀의해 단정하게 머리를 깎는 요괴나 인간들도 있는 편이다.
다만 '외견부터 바로잡는다'는 히지리의 말에 겁먹어버린 세이자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리가.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는 세간의 승려의 이미지인 빡빡머리뿐에 생각나지 않았단 게 문제다.
"걱정하지 마세요…! 쇼의 털갈이를 도와준 적도 많으니까…!"
"내 머리가 털갈이와 동급이라 생각하지 마아아아!!!"
"육체강화를 사용하면 실패해도 다시 머리를 풍성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세이자는 그 말에 솔깃해 버둥거리던 힘을 잠시 풀었다. 그 틈을 놓칠리가 없는 히지리는 이제 세이자를 완전히 꽉 붙들곤 심각한 표정으로,
"……경우에 따라 부작용으로 모근이 죽어버릴 수도 있지만."
"이거 안 놔!? 당장 풀지 못해???!"
"쇼, 잠시 도와줄래요? 이번 손님은 좀 많이 과격하네요."
"……네."
어딘가 꺼림한 마음으로 쇼가 세이자를 구속하려던 참이었다.
"손님이 왔어요~! 손님! 키진, 아니 키신 사구메 씨에요!"
다행히도 제압의 흐름이 끊기고, 히지리는 사구메를 맞으러 방을 떴다. 아직 양 팔이 붙잡혀있는 채인 세이자는 쇼에게 이거 안 푸냐는 눈치를 보냈다. 쇼는 크흠, 헛기침을 하면서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그러는 동안 히지리가 빠르게도 방으로 돌아왔다. 어쩐지 흥분하는 사구메를 데리고.
낌새가 불안하다 느낀 세이자는 급하게 탈출을 시도했지만 금세 발을 잡히며 제압당했다. 히지리는 호호 웃으면서,
"……그런 이유로 세이자 양의 머리를 좀 치려 그러는데요."
사구메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과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이자는 살려달라는 눈빛으로 간곡하게 사구메를 봤지만, 벌써부터 단정해져 보기좋게 변한 딸의 모습을 망상하고 있는 사구메에게는 전혀 닿지 않을 구원의 요청이었다.
하지만 곧 히지리가 미용도구를 가지고 오는 것을 보면서, 사구메도 잠깐 찜찜해졌는지 세이자를 가리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누가?"
"제가요."
"……."
그니까 살려달라고! 라고 쏘아대는 세이자의 구원 요청을 사구메는 이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평소처럼 입을 가리고 있었지만 눈은 티날 정도로 긴장에 절여져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초점없는 눈을 하던 사구메는 누구를 불러야 딸이 더 예쁘게 변할 지를 몰라서, 자신의 능력을 믿곤 세이자의 어깨를 잡으며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괘, 괜찮지 않아. 네 머리는 분명 망쳐질 거니까."
"댁 능력 뭔지는 알지만 그래도 들이니까 빡치는구만!?"
다행히도 머리는 제대로 잘렸다.
하지만 말을 안들어줬다는 이유로 불만투성이의 눈총을 받은 사구메는 모처럼 들렸어도 세이자에게 전혀 다가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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