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가 어떠한들, 결국에 서로는 반대의 입장이고 대립되는 그 마음가짐도 철회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루어야만 하는 이유나, 막아서야 하는 이유나 모두 서로에겐 타당하게 다가왔으나 단지 그뿐인것으로, 의견은 흔들리기만 하고 꺾이지는 않았다. 결코 고개돌릴 수도 없고 무산으로 돌릴 수도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가능한 것은 오직 물리적 대립 뿐. 하지만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에게 손을 대어 꺾겠다는 결심을 가지는 것은 것은 각자에게 더할나위없이 고통스러운 선택지여서, 서로의 망설임은 한참을 이어졌다.
카센은 자신도 주저하고 있지만 상대도 똑같은 고민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아직은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남아있다고 느꼈다.
레이무는 점차 해이해져가는 자신의 결단을 느끼며 그나마 천천히가던 발걸음조차 잠시 멈췄다. 마주보고 싸울 용기조차 희미해져가는 걸 느끼고 스스로에게 혐오가 들어 시선을 내리깔곤 자신을 향한 조소를 실컷 했다. 가라앉은 그녀의 웃음소리는 허탈했다. 김새고 진빠진 지금의 의욕은 방금까지 분화하고 있었다는 것이라기엔 도무지 설득력이 없었다.
신조라고 생각해왔던 복수가 단지 막힘당하는 것만으로도 이리 간단히도 부정당하고 있다니, 지금까지의 결심과 발버둥이 가벼웠던 것처럼 느껴져 불쾌함이 그득이었다. 무척이나 언짢았다. 마음속에 턱 걸려있는 답답함에 머리를 홱 쓸어넘기며 트여있는 저머를 봤다. 시야는 저시력자의 세상처럼 테두리없는 뿌염 투성이었다. 이러니 나에게는 무엇 하나 확연한 게 없는듯하였다. 그리해서는 안 될, 복수에 대한 결심까지도.
희끄무레한 시야를 일부러 더욱 뿌옇게 하였다. 그것은 시야 속의 모든 것의 형태가 일그러져 섞여버릴때까지 계속되었다. 눈앞의 인영이 구분되지 못하게끔 , 세상속의 모든 테두리를 사라지게 하고서야 레이무는 다시 걸었다.
뭉뚱그레한 세상 속을 딛는 걸음걸이는 휘청이다 못해 위태했다. 그래도 그것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직시하지 않고 눈돌림으로써만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원통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빈약하고 휘청이는 사생결단이 똑바르게 보이기 위해서는 그 휘청임에 자신이 맞춰야 했다. 그렇게 휘청이기 위해서는 나를 지탱해와주던 모든 것들을 내팽개쳐야만 했다. 희미하지만 눈앞에 존재는 하는, 소중한 존재부터..
그렇기에 목표조차 제대로 가늠되지 않는 불제봉을 뻗으며 레이무는 말했다.
"카센, 날 막을 생각이라면, 어쭙잖은 각오로 덤벼들지 마. 누구 하나가 죽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덤벼. 그렇지 않고선 이 인과는 끝나지 않아. 나는 살아있는 한, 복수를 추구하고 이룩하고자 할 테니까."
"알고있어요."
그 고혈을 짜내 추구한 말의 대답은 본능적이라 생각될정도로 빨랐다. 일말의 고민조차 없이 튀어나온 답이 도무지 결심의 중압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레이무는 헛웃음쳤다. 지금의 상황이 그저 무던히 해결될 그런 사태로 보이는 건가? 내 복수심이 그리 하찮은 것으로 느껴지는 건가? 그렇게 느꼈기에 분노했다.
"제대로 답해. 이건 장난 따위가 아니야. 누구 하나가 죽지 않는다면 결코 타협되지 않는 협상이라고. 그딴 사글사글한 말투로 괜히 신경긁지 말고, 제대로 말해. 넌 날 죽일 결심이 돼있어? 그렇지 않다면 돌아가."
"저는, 당신을 막아설 거예요. 그리고 그 과정 중에는 누구의 죽음은 상정되어있지 않아요."
"푸흐… 흐….하……."
한없이 이상적이기만 한 지긋지긋한 대답, 그것을 향한 허탈한 웃음소리가 이어지다 처절하며 싸늘한 한숨이 되었다. 모든 것이 김빠지고 허탈했다. 나의 복수조차 고작, 같은 것으로 여기는 저 태도는 특히 신물났다. 상대는 그런데도 신경을 긁는, 그 천연덕스러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죽이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분명 어딘가에 존재해요. 그런 가능성을 전 당신에게서 봤어요. 그러니까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저는 레이무를 계속해서 막아설 거예요."
"그런…!"
레이무는 이를 꽉 물며 외친다. 감정에 휘둘려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런, 그딴 나약한 마음가짐으로 내 복수를 막지 마! 누구도 죽지않고 사태가 진정될 수 있다는 하찮은 이상론을 들이밀지 말라고! 저번처럼 이번을 막아낸다 한들, 그게 영원히 가능할 것만 같아? 갈등이 해결될 것 같아? 전혀! 가당찮아! 풀리지 않은 응어리는 미룬다 한들 영원히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오히려 쌓이고 쌓여 저번보다, 이번보다 더 크게 폭발하겠지!
난, 나는 그딴 건 지긋지긋해! 도저히 악화되어가는 이 인과를 못 버텨내겠다고! 그러니까 끊어낼 거야! 죽일 거야! 그래, 죽여야만 한다고!
카센, 유카리! 마지막, 정말로 마지막이야! 당장 꺼져!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내 이성이 그나마 존재할 때 사라져버리란 말이야!"
숨은 씩씩대고 심장은 터져버릴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것처럼 주체되지 않는 모든 내장기관들에 정신이 혼미해져 금방이라도 의식의 끈이 끊어져버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휘청이며 몸을 가누려하는 것은, 단지 하나만을 위함이었다.
복수, 그것 때문이다. 들끓어 치밀어오르는 지금의 가쁜 호흡같은 성질의 그것을 위함이다.
"……."
모질게 몰아치는 호통의 답으로는 가라앉은 침묵뿐이었다. 가슴을 붙잡고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구는 레이무의 건너편의 카센이 보내는 건 그러한 침묵과 아련함어린 시선뿐이었다. 어떻게 고개를 쳐들어 발작을 발버둥치면서까지 막고 눈을 대치해보려는 레이무는 카센의 그런 동정어린 시선을 능멸이라고까지 느꼈다.
그럼에도 마음의 주저를 떨어내지 못하고, 그런 발작에 휘둘리기만 하며 병약함을 보이고만 있을 때. 참다못한 누군가의 발길질이 시원스런 타격음을 내며 레이무의 몸뚱아리를 덮쳤다. 상정조차 못한 개입에 태세조차 갖추지 못한 몸은 너무나도 쉽게 땅을 가르듯이 굴렀다. 가해자는 말했다.
"거 찌질하게, 말로만 하고 앉았냐?
너, 복수라매? 원한 있다매? 넌 원수를 냅두고 딴 데다 신경이나 파냐? 그러니까 저 자식이 가당찮다 느끼지 쯧."
"스이카!"
"넌 닥쳐라. 이 녀석은 나한테 복수를 하겠다 했지, 너한테 한다 하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넌 일단 제 삼 자야.
직접 연관된 내가, 너한테 우선순위가 밀려서야 되겠냐? 응? 안 그래?"
그러니까 못다한 싸움이나 하자며, 스이카는 목을 크게 꺾고 날려버린 방향으로 크게 웃음지으며 말했다. 그 목소리는 외치는 것에 가까운 고함이나 마찬가지였다. 반드시 누군가가 들어야만하는 이야기인 듯이 말이다.
그 덕에, 들었다. 레이무는 그것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것과 혼란하던 머릿속을 백지로 만들어준 얼얼한 충격 덕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가장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게 무엇인가 상기할 수가 있게 되었다. 깨달은 레이무는 곧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냈다. 복수를 위해 행동해야만 하는 내가, 인간의 감정일 터인 정에나 연연하여 정작 '하여야만 하는 일'을 자꾸만 뒤로 미뤘다는 게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어서였다. 또 그것을 원수에게 들었다는 것이 정말로 그러해서였다.
"…그래, 그렇지."
그래도, 수긍했다. 레이무는 중얼거리며 스스로에게 자조했다. 그 자조를 멈추기 위해 이제는 정말로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인간을 이미 포기해버렸던 나는'
"덕분에 깨달았다."
그렇게는 말했으나. 먼지투성이의 모래바람이 멎었을 때, 너머에 보일 소중한 존재를 눈으로써 인식하게 된다면 또 망설이게 되지 않을까? 이러한 결심이 또 다시 흔들리게 되지는 않을까? 의식이 걷잡을 수 없이 망연해지더니 그러한 의문을 떠올렸다. 레이무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지금의 가라앉은 목소리와 같은 성질의 모진 선택을 필요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수조건일까?
"정말로, 최선을 다해 죽여줄게."
잠깐의 고민 후, 레이무를 감싸던 모래바람이 단숨에 걷어지더니 그 속에서 미사일이 발사되듯 그녀가 뛰쳐나왔다. 흉흉함투성이인 인간의 육체는 금세 오니를 엎어뜨려 가격하기 시작했다. 선혈이 흩날렸다. 복수의 것이었다.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핏덩이는 타격점에서와, 오니를 제압하고 있는 인간의 얼굴 눈두덩이에서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스이카는 두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방어조차 생각도 못한 채 맞기만 하고 있었다.
눈 앞의 인간은 지금, 두 눈이 뽑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