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 계속.
이렇게 그림 콘티를 고친 작품은 V건담 뿐
토미노 감독에게서 작화에 대한 트집은 없었다지만 실제 다소 신경쓰이지 않는 필름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연출가에겐 '내가 담당한 에피소드를 조금이라도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리테이크 하고 싶었는데 토미노 감독은 "그렇지 않다. TV시리즈 라는건 매주 제대로 방송되고 재밌게 보일수 있으면 좋은것. 세세한 리테이크는 필요 없다"고 항상 말하셨죠. 제 담당화수의 초호 시사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저 컷은 고치고 싶었는데요..."라고 말했더니, "그런건 고치지 않아도 좋아. 그걸 고친다고 애니메이션 그랑프리
(※)를 딸수 있나? 그런건 자기 만족일뿐"이라고 말씀하시던게 인상에 깊게 남아있습니다. 그게 네거티브한 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긍정적으로 생각해 말씀하셨던것 같아요. '잊고서, 다음으로 나아가는게 좋다' 라고. 지금은 저도 감독을 하고 있습니다만, 같은 말을 당당하게 할수 있느냐 하면 참 어렵습니다.※애니메이션 잡지에서 개최되는, 애니메이션 대상 어워드. 1979년 제1회 작품부문은 '기동전사 건담'이 수상.
'그림콘티 천개 작성'의 일화도 있고, 감독 작품도 방대한 토미노 감독다움이 그런데서도 엿보이네요. 이제부터는 야마모토씨가 그림콘티를 담당한 화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제34화와 제41화, 제50화의 그림콘티를 가져왔는데, 다시보면 대부분 페이지에 토미노 감독의 손길이 들어가 있습니다. 표지나 크레딧에는 제 이름이 박혀있지만 거의 토미노 감독이 그린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콘티를 고치신건 처음이었습니다. 그렇다랄까, 자랑하는건 아닙니다만 다른 작품에선 그림콘티를 고쳐받은 적은 없습니다. 8~9할의 내용을 고친건 V건담 뿐인데, 스승인 이우치씨한테도 그렇게까지 수정받은 적은 없거든요. '아버지한테도 맞은적이 없는데'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웃음)
제41화의 그림콘티. V건담에서 유일하게 그림콘티가 연명인데 그 이유는 후술.
©소츠, 선라이즈
크레딧에서는 제41화만 토미노 감독(斧谷稔 명의)와의 연명인데, 다른 화수도 그렇게 손길이 들어간 거군요.
그림과 글씨를 보면 바로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정이 정말 공부가 되거든요. 한번 직접 생각한 그림콘티를 고쳐달라 함으로써 '똑같은걸 표현해도 이런 방법이 있구나!' 하고 시범을 보는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걸 하룻밤이나 이틀밤 사이에 수정하셨을텐데 그게 또 굉장합니다. 제가 똑같이 하려면 일주일로도 안끝나네요.
말한건 해봐야 한다
첫 콘티회인 제34화 '거대 롤러 작전'은 제28화로 현장에 들어가자마자 두달도 안된 화수인데, 현장에 들어오자마자 착수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제28화의 연출을 하면서, 평행으로 콘티작업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토미노 감독께 "어째서 건담의 세계관 속에 타이어가 붙은 전함 같은게 달리고 있아요?" 라고 의문을 제기했죠. 지금보면 '정말 무서운줄 모르는구나' 하고 생각되지만(웃음).
날카로웠군요(웃음).
"수십미터 짜리 폭의 타이어 전함으로 거리 하나를 짓밟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나요? 이걸로 멕시코 전 국토를 부수는데는 꽤 무리인거 아닙니까" 하는 이야기를 했는데, "괜찮아 신경쓰지마! 이대로 해주면 되니까!" 하고. 그렇게 말하면 "네 알겠습니다, 할게요!"할수밖에 없죠(웃음). V건담은 그런 작품이구나 하고, 납득했습니다. 거기서부턴 아무런 망설임없이 '오토바이 전함을 최대한 멋지게 그리자'고 생각하고 작업했습니다. 토미노 감독이 대단한건 하기로 결정하면 철저히 한다는 점이라고 느꼈기에, 저도 그걸 따르자고. 그리고 결과적으론 오토바이 전함도 타이어 붙은 모빌슈트도 강력한 임팩트를 남겼으니까요.
©소츠, 선라이즈
'하기로 결정하면 한다'는게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인가요?
오토바이 전함은 황당한 설정입니다만 한번 내놓기로 결정하면 그게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백본을 토미노 감독이 제대로 만들어 가죠. V건담에서는 시리즈 초반부터 바퀴 달린 탈것을 잔뜩 내놓고, 게다가 타이어 붙은 모빌슈트도 나오고, '아하 이 적은 타이어적인데서 가치를 찾는 사람들이구나'하고 생각할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둡니다. 적의 디자인 전반에도 둥근 모티를 많이 사용해 제대로 그 바탕을 만든 다음 그 만반을 가지고 오토바이 전함을 냅니다. 그런식으로 작품의 레일이 깔려있었던 것 같아요. 감독 자신이 그린 이미지 보드의 단계에서 이미 타이어 달린 모빌슈트가 그려져 있으니까요. 이건 토미노 감독의 '감독으로서의 본능'인것 같습니다. 어떤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하더라도 제대로 성립시키겠다. 그리고 투덜거림이나 푸념은 일절 스탭에겐 하지 않는다.. 훌륭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그렇게나 작가성으로 말하는 사람이면서도 장인적인 감각이 있습니다.
정말 말씀하신 대로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이야기를 최근에 요시자와 슌이치군이라는, 지금 토미노 감독에 가까운 연출에게도 들었습니다. 그에 대해서도 '말한건 그냥 들이대지만 말고 해보라'고 한다더군요. 무리라고 생각되는 요구가 있어도 '자신의 실력'을 통해, 즉 자신의 감성과 기술로 형태를 잡으면 제대로 내 작품이 된다고. 그런 장인의 자존심이 있는 분입니다. '그렇겐 못해요, 무리'라고 하는건 간단하지만, 그렇게 바로 던져버릴거 같으면 감독이라는 직업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 자세는 본받아야 할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럼에도 당시 토미노 감독에게 고생이 있던걸 알게 된건 꽤나 훗날의 되어서야입니다. 왜냐면 제가 봤던 당시 현장의 토미노 감독은 굉장히 즐거워 보였거든요. 제34화의 콘티 회의때도 토미노 감독의 사무소에 불려가면, 자료가 빽빽한 책장에서 사진집 한권을 꺼내 "이런 거리의 느낌으로 그려달라"고 경쾌하게(웃음). 지금이라면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자료를 모을수 있지만 당시는 아니었죠. 그런 시대에 정확한 자료가 툭 튀어나오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달려나가는 연출의 앞에서 멋짐을 보여주자!' 같은 자기 연출도 있던걸지도 모르겠네요(웃음).
스튜디오에 울려퍼진 "이 콘티를 그린게 어느놈이야!?"
토미노 감독의 사무소에서의 미팅에서 수체적으로 영상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나요?
그림콘티로 메카닉이나 무대설정의 이미지를 전달할수는 있어도 연출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구체적 보여주기 지시는 없었습니다. '질문이 있으면 물어보겠다'는 대략적인 것으로, 나머지는 주로 잡담이었죠(웃음). 오히려 콘티가 올라가 체크가 끝난 뒤가 인상에 남았습니다.
거기부터 뭐가 시작되는거죠?
그림콘티를 제출한 며칠후, "내일 낮에 토미노 감독이 결정고를 내준다니까 대기해주세요"하고 제작스탭이 말해줘서 두근두근하며 기다리는데, 12시 정각에 스튜디오 문에 쾅! 하고 열리면서 "이 콘티를 그린게 어느놈이야!?" 하고 토미노 감독의 목소리가 울리고. 타이밍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인데" 하고(웃음).
모 미식가 만화같은...(웃음).
그래서 "죄송합니다. 접니다" 하고 이야기했더니 "너냐! 무슨 생각으로 이 콘티를 그린거냐!?"하고 혼나서. 이유를 모르는채로 스튜디오 한가운데 있던 응접 세트에서 마주보며 "어쨌든 그림 콘티는 고쳤으니까. 넌 도대체 어떤 애니메이션을 봐왔고, 어떤 학교를 나온거냐?"하고. 거기에서 처음으로 "성전사 던바인이 너무 좋아서, 일본대학 예술학부의 영화학과 출신입니다..."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했죠. 대학 후배라는건 쭉 침묵하고 있었네요. 그러자 "그렇군... 그럼 어쩔수 없지" 하고(웃음).
토미노 감독의 벼락이 떨어졌다고 하는 제34화의 그림콘티.
©소츠, 선라이즈
와하하
그리고 "앞으론 내가 말하는 것만 듣고 외워라"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웃음). 이게 첫번째 호통을 당했던 추억입니다.
기호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그리는걸 철저히
그때의 현물이 이번에 가져오신 이 그림콘티인 셈이군요.
네. 시나리오에선 미즈호라는 캐릭터가 더 활약했습니다만 이 아이의 출연이 대폭 줄어들었죠.
완성된 필름이면 거의 즉사죠.
그렇습니다. 웃소 역의 사카구치 다이스케 군은 그 미즈호가 좋아하는 타입이라고 했습니다만(웃음). 다른 바뀐거라고 하면, 최후에 핵폭발을 일으킨 것도 시나리오에선 웃소였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수정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큰 흐름도 있고, 세세한 수정도 대단하죠. 예를들어, 이 컷의 샤크티의 연기에 대한 지적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인형이다'라는 지적이 있네요.
가슴에 양손을 얹고 있는데, 손이 인간의 것이 아니라 인형같다고. 하지만 옛날 애니에 등장하는 대부분 여자아이들은 이런 포즈를 취했거든요. 그리고 이 V2 건담의 사격 장면 말인데..
'이 관계, 전혀 모르겠다! 이 빔은 위에서 온거? 아래에서?' 아, 토미노 감독의 서적(영상의 원칙)에 쓰인것 처럼, 上手, 下手의 법칙이나 몽타주(컷 구성)를 생각하라는 이야기군요.
그렇습니다. 上手, 下手의 이야기는 28화때부터 인상적이었어요. 그 화수의 마벳과 올리퍼의 키스씬. 감방 2층침대의 위에 마벳이 있는데 화면 위치가 下手입니다. 올리퍼는 바닥에 있고, 하지만 화면 위치는 上手. 즉 마벳이 왼쪽 위이고 올리퍼가 오른쪽 아래인데, 필름 상의 역학관계는 균형이 잡혀있는 거죠. 이 컷에서 해야할 연기는 '아내가 된지 얼마 안된 마벳에게 올리퍼가 키스를 해간다'인데, '올리퍼의 행동을 난폭하게 보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는게 좋은가? 그걸 생각해 이 위치 관계로 하고 있다'라고 연출 풀이때 설명되었습니다. 높은 위치에 있는 마벳을 올리퍼가 아래에서 그렇게 키스함으로서 억지스러운게 아니라 부드럽게 보인다는 아이디어입니다. "이런 식이 항상 절대라고 할순 없지만, 이런식으로 생각하도록 하면 앞으로 그림콘티를 그려나가는데 야마모토 군도 고민하지 않아도 되겠지'하고 말씀하신걸 3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 장면을 다시봐도 '자연스럽게 보인다'고 생각하거든요.
(역주 : 上手, 下手는 공연 용어기도 한데, 보는 시선에서 왼쪽을 上手, 오른쪽을 上手라고 표현한다고 합니다)
©소츠, 선라이즈
굉장하네요...
제34화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서, 어머니를 발견하고 웃소가 머뭇거리는 컷. 그림콘티 수정에는 '이런건 적당히 해라'고 토미노 감독으로부터 코멘트 받고 있습니다(웃음).
웃소가 보고있는 어머니의 표정의 컷 수정지시로, 이런건 '자식을 보는 어머니의 표정이 아니다'라는 뉘앙스군요.
네. 수정전의 그림콘티와 비교하면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저같으면 절대 그리지 않을 표정이네요.... 어떤 코멘트도 엄하지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애니메이션의 정해진 패턴으로 그리지 마라'라는걸, 표현을 바꿔 어느 연출가한테도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애니메이션 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는걸 만들려고 하고 계셨다고 할수도 있겠네요.
방금전 야마모토씨의 이야기에도 있었지만, 90년대라면 '애니에서 희노애락이나 남자아이, 여자아이를 표현한다면 이런 느낌'이라는, 정해진 패턴화된 처리가 좋다고 여겨지던 시절이었던거 같습니다. 적어도 토미노 감독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네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애니에선 위기일때 괴롭게 한쪽 눈을 감는다는 표정이 많이 쓰였는데, '그건 코믹 표현.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다'고 절대 금지했습니다. 게다가 하늘에 빛나는 크로스 투과광(※)도 '너무 편하니까 절대 쓰지 말라'고 하시더라구요. 편한, 애니메이션의 약속과 같은 표현을 쓰지 말고, 우주를 멀리 날아가는 모빌슈트를 표현하라고. 그렇게 하면 연출로서 자주 쓰는 수법 중 하나가 봉인당해 곤란합니다. 다른 표현을 어떻게 하나 고민했어요. 토미노 감독은 아마 '루틴 워크를 하지 말라. 고민하고 연출하라!고 말하고 싶던게 아닐까요.
※종이에 작은 구멍을 내고 안쪽에서 빛을 비춰 표현하는 십자 형태의 투과광.
그건 그렇고 수정 지시의 말이 꽂히네요. '여자라는 강한 동물을 더 상상해주세요' 라거나..
'샤크티의 열린 입을 작게 그리지 말라'는 주의도 받았죠. 듣고나서 애니메이션에서의 여성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어떤 작품을 만들고 있어도 '여자는 그렇게 약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남자인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한' 존재라는건 지금도 늘 의식하고 있습니다.
후속편은 14일 공개예정입니다.
(번역은 나중에 다시 검토하고 수정할게 있으면 다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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