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中
거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요사』를 비롯한 사료이다. 기초적 기반이 되는 『요사』에 더하여 『거란국지』, 『구오대사』, 『신오대사』, 『자치통감』, 「속자치통감장편』, 『송사』,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의 사료는 거란사를 이해하고 연구하는데에 있어 골자가 된다.
일반적인 사서 뿐만이 아니라 송-거란간 외교에서 활동했던 송의 사신들이 작성한 기행록 역시도 거란의 역사를 이해하는데에 큰 도움을 준다. 비록 외국인의 입장이지만 엄연히 한 국가의 조정 관료로서 그들이 거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작성한 기록은 송의 입장에서 본 거란을 이해하는데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는 거란의 역사의 빈 틈을 채우는데에도 도움을 준다.
노진(路振)의 『승초록』 역시도 그러한 사료 중 하나이다. 1008년 송의 거란에 대한 생신사 사절로서 거란에 파견된 노진은 본인의 행정록에 당시 거란의 풍습이나 상황등을 기록하여 당시의 거란을 이해하는데에 도움을 주고 있다. 해당 사료는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에 의해 번역되어 출간되기도 한 만큼,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해당 행정록에는 당연하게도 당시 거란의 최상위 관료이자 황실 세력이었던 소배압(蕭排押) 역시도 언급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본 사료에는 노진이 거란서 들은 소배압의 나이가 언급되고 있다.
[(전략)是虜無將帥, 遂以寧統之, 年五十, 勇略不及韓, 虜咸憂焉。/(전략) 이로서 거란에 장수가 없게 되자, 마침내 녕(寧)이 군을 통솔하게 되었는데, 그 나이가 쉰이었으니, 용략이 한(韓)에 비해 부족하여 거란의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였다. ] -路振, 乘軺錄
여기서 말하는 '녕'은 소녕(蕭寧)을 지칭한다. 소녕은 곧 소배압이다. 이는 승초록에 등장하는 소녕이 곧 소씨성을 가지고 있는 '부마도위'인 동시에 왕호가 '난릉군왕'이라는 점, 『요사』 본기에 소녕이 곧 소배압과 동일인물로 취급된다는 점1 등을 근거로 유추할 수 있다.
해당 기술의 전후 맥락과 배경은 이러하다. 본래 거란의 '한통군(韓統軍)'이라는 장수가 그 실력이 대단하여 거란군을 통솔하였는데, 그가 거란군을 이끌고 송을 공격할 때에 송의 쇠뇌를 맞고 죽어버린 탓에 그의 뒤를 이어 소배압이 군권을 얻었다. 그런데 한통군에 비하여 그 실력이 부족하여 거란의 모두가 그에 대해 걱정한다는 것이었다.
한통군은 이름이라기 보다는 '한씨 성을 가진 통군/사령관'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통군'이라는 것 자체가 관직의 약칭으로 쓰이기도 하며 그대로 해석하더라도 군의 통솔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황을 유추해 보자면 해당 장수는 1004년 거란의 송에 대한 대규모 침공 당시 군을 지휘하던 중 전주 전투에서 뜻 밖의 기습 저격으로 전사한 소달름(蕭撻凜)을 의미한다고 보여진다.
1004년 당시 소달름의 직책은 남경통군사(南京統軍使)로서 '통군'이라고 불리기에 적합했으며, 당시 거란의 지휘부 내에서 중책을 맡은 것, 송을 공격하던 중 전사한 것, 쇠뇌에 맞아 죽은 것등이 모두 일치한다.2 비록 '한씨 성'은 아니지만, 이에 대해서는 외부인이던 노진이 착각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소배압은 객관적으로 절대 무능하다고 할 수 없는 인물이다. 오히려 평가하자면 준수한 인재라 할 만 했다. 그러나 송을 몇 차례고 위협한 걸출한 명장인 소달름에 비해서는 군사 분야에서의 위명과 세간의 평가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것 같다. 실제로, 소달름이 세워온 전공들을 생각해 보자면 두 사람의 실제의 역량 차이가 어떻던 간에 가시적으로 소배압에 비해 뛰어나다고 평가될 만 하다. 그렇기 때문에 거란에서 이와 같은 평가가 돌았고, 그것이 노진의 귀에 까지 들어간 것 같다.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소배압의 나이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소배압은 노진에 의하면 50세의 나이라고 한다. 당시가 1008년이었으니 이를 통해 생각해 보자면 당시의 나이셈법을 감안하여 소배압의 출생연도가 959년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생각해 보자면 1010~11년의 2차 고려거란전쟁 때에는 52세~53세이며, 1018~1019년의 6차 고려거란전쟁 때에는 60세~61세의 나이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감안해야 할 것은, 이미 소배압에게는 969~970년경 태어난 딸이 있었다는 점이다. <<고귀비소씨현당지명>>의 성종의 귀비 소씨가 소배압의 딸이며 969년 또는 970년 출생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3, 이렇게 된다면 소배압은 고작 10~11세에 딸을 가진 인물이 되어 버린다. 당시의 결혼 연령대를 생각해 보아도 이는 지나치게 어려 인과적인 성립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만한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노진의 기록을 다시 살펴보자.
[是虜無將帥, 遂以寧統之, 年五十, 勇略不及韓, 虜咸憂焉。/이로서 거란에 장수가 없게 되자, 마침내 소배압이 군을 통솔하게 되었는데, 그 나이가 쉰이었으니, 용략이 한(韓)에 비해 부족하여 거란의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였다. ]
소달름이 전사한 뒤에 소배압이 거란군을 통솔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뒤에 소배압의 나이가 언급되고 있으며, 그 뒤에 거란인들이 소배압이 소달름의 뒤를 잇게 된 것에 근심하고 불안해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소달름이 전사한 시기는 1004년이다. 노전의 기술 맥락을 볼 때에 소달름이 전사한 그 때서부터 소배압이 소달름의 뒤를 이어 통솔권을 행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기록에서 언급되는 소배압의 나이 역시도 소달름 사후 그의 역할을 대행하기 시작할 때인 1004년 당시의 나이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1004년에 소배압이 50세였다면, 소배압의 생년은 955년이 된다. 이렇게 된다면 그의 장녀인 소귀비의 출생연도와 비교해서도 큰 문제가 없어진다. 15~16세면 당시를 기준으로 충분히 첫 아이를 둘 만한 나이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1008년에는 54세, 1010~1011년에는 56~57세, 1018~1019년에는 64~65세가 되므로, 필자가 이전에 추정했던 2차 고려거란전쟁, 6차 고려거란전쟁 당시의 소배압의 나이의 범주에도 일치하게 된다.
물론, 노진의 기록에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 그가 지칭한 '소달름'과 '한통군'은 성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요컨대, 노진의 기록은 여러 측면에서 '외국의 사신'으로서의 한계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의 기록에 언급된 소배압의 나이 역시 그의 기술이 틀렸을 가능성이 있기에, 과연 정녕 소배압이 955년에 태어났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노진이 이러한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자신이 실제로 만나보기도 했던 소배압의 연령에 대해 큰 의심을 하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자면, 소배압은 노진의 기록에 언급된 나이가 아니라 할 지라도 그에 근사한 나이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필자의 이전의 추정과 맥락상 상통한 부분이 있다.
1.『요사』 권15 본기15 개태 원년 3월 을유
2.『요사』 권85 열전 15 소달름 열전
3.王善军·王迎辉, 「辽代《故贵妃萧氏玄堂志铭》考释」, 『中国边疆史地研究』 31, 中国社会科学院中国边疆研究所, 2021 ;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434479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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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전쟁이라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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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ㅇ이네;;; | 25.07.13 22:0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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