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요사』를 비롯한 사료이다. 기초적 기반이 되는 『요사』에 더하여 『거란국지』, 『구오대사』, 『신오대사』, 『자치통감』, 「속자치통감장편』, 『송사』,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의 사료는 거란사를 이해하고 연구하는데에 있어 골자가 된다.
그러나 거란사를 이해하는데에 있어 사료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기본 모토가 되는 『요사』의 편찬 자체가 졸속으로 처리되어 빠진 내용이나 오류 역시 많다는 점, 타국의 사료를 통해 본 거란의 내부적 사건과 인물 역시 적지 않은 한계가 존재한다는 점은 거란사의 이해에 있어 방해가 되는 부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고학적 유물의 발견과 연구, 특히 금석문의 연구는 거란사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중국학계에서는 이러한 금석문 연구를 통해 거란사에 대해 깊은 이해를 추구하고 있으며, 한국 학계에서도 거란사 연구에 있어 금석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기에 1앞으로의 활용이 기대된다. 특히 한국학계에서도 묘지명을 통한 거란사 연구 보완을 한 걸음씩이나마 떼고 있다는 점에서, 해당 분야는 더더욱 기대되는 면이 있다.2
감히 필자의 지식이 오랜 경험을 통해 지식을 쌓은 뛰어난 연구자분들께 비교될 수는 없으나, 필자 역시 거란의 묘지명에 관한 연구중 하나를 참고하여 짧은 글을 써보고자 한다. 근래 중국에서 발굴되고 나아가 연구된 <<고귀비소씨현당지명>>에 관한 논문을 통해 소배압의 실제 나이 연령대를 추정해 보고자 한다. 소배압의 실제 연령대의 추정은 이전에도 한 차례 한 적이 있으나3, 당시에는 『요사』의 기록만을 모토로 했다면 이번에는 금석문과 그에 관련한 논문을 모토로 한 추정으로 해당 글을 보론코자 하는 것이다.
2015년 내몽고자치구에서 발굴된 <<고귀비소씨현당지명故贵妃萧氏玄堂志铭>>의 존재 덕분에 『요사』등의 사료를 통해서 확인될 수 없었던 여러가지 사실이 파악되었다. 특히 큰 소득 중 하나는 거란 성종의 귀비였던 소씨가 거란의 명신(名臣) 소배압의 장녀라고 확인된 사실이다. 이는 왕선군과 왕영휘의 논문을 통하여 논증되었다 .4
또한 <<현당지명玄堂志铭>>을 통해 파악된 바로 성종의 첫 귀비 소씨는 993년 통화 11년 24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를 통해서 귀비 소씨의 나이를 추정할 수 있는데, 본 논문에서는 보령 원년 즉 969년에 출생했다고 기술한다.5 하지만 당시의 나이 계산법을 생각해 보자면 보령 원년이기보다는 보령 2년(970년)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소배압이 첫 딸을 얻었을 때를 통하여, 소배압의 출생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물론 소배압의 정확한 나이를 콕 짚을 수는 없다. 그가 첫 아이를 10대에 얻었을 수도 있으며, 20대에 얻었을 수도 있는 노릇이기에 소귀비의 출생년만 가지고서 부친의 나이를 확실히 규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략적인 범위는 좁혀질 수 있다.
당시의 혼인시기를 고려해 보건대 소배압은 대략 15세 가량에서 30여세 부근 사이에 자신의 첫 딸을 얻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렇다면 938~9년에서 954~5년의 범위 내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 범위는 상당하지만, 이는 최대 범위로 잡은 것이고 그가 죽은 시기(1023년 또는 그로부터 얼마 뒤)등을 고려해 볼 때 가능성이 높은 시기는 944년에서 954년 사이, 즉 22세를 전후로 하여 +- 5년 정도가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기가 아닐까 한다.
여전히 모호하고 두루뭉술한 바가 있지만, 그래도 창작물에서 소배압의 출생 시기와 그가 활약했을 당시의 나이나 외모등을 고증하는데에는 나쁘지 않은 도움이 될만한 정보일 것이다. 이를 통해 생각해 보자면 소배압의 나이는 986년 송 태종의 거란에 대한 북벌과 그에 대한 거란의 방어전 당시에 30대 초중반에서 40대 초중반, 1010~1011년 2차 고려 거란 전쟁 당시에는 50대 후반에서 60대 후반, 1018~1019년 6차 고려 거란 전쟁 당시에는 60대 중반에서 70대 중반 정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6차 고려 거란 전쟁 당시 고려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상원수 강감찬과 비교하여 마찬가지의 노장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봄 직 하다.
이를 두고 생각해 보자면, 6차 고려 거란 전쟁은 양국의 노장(소배압, 강감찬)이 자신들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쌓아온 경험-그것이 군사이던 정치이던 외교이던-등을 총동원하여 맞붙은 싸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별을 품은 아이>, 6차 고려 거란 전쟁 중 소배압. 작품 연출상 실제 추정 나이보다 훨씬 젊은 나이로 각색되었다.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2차 전쟁 중의 소배압. 실제와 비슷한 나이로 고증되었다.
1.권용철, 「한국학계의 거란-遼史 연구에 대한回顧 그리고 課題」. 『역사문화연구』 71,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9, 362쪽.
2.류병재, 「《상국도감태부묘지명(上國都監太傅墓志銘)》에 보이는 ‘신라(新羅)’와 거란문자 ‘sh-ul-ó-úr’ 관계 일고찰」, 『몽골학』 63, 한국몽골학회, 2020;권용철, 「고려-거란 관계사에 등장하는 거란제국의 인물 검토」, 『중국학연구』 100, 중국학연구회, 2022 등.
3.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3913501 드라마 <고려거란전쟁>과 웹툰 <별을 품은 아이>의 거란 명신(名臣)소배압의 인상 비교, 그리고 실제 소배압과의 비교 참조
4.王善军·王迎辉, 「辽代《故贵妃萧氏玄堂志铭》考释」, 『中国边疆史地研究』 31, 中国社会科学院中国边疆研究所, 2021, p.88~89.
5..王善军·王迎辉, 앞의 논문, 2021,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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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교천의 이펙트가 커서 귀주대첩이 수공으로 이긴 전쟁인 줄 알지만 귀주대첩은 거란 중장기병이랑 벌판에서 회전 맞다이 떠서 이긴 전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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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 어림도 없지 수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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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이랑 거의 동년배로 보는게 나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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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여요전쟁은 전개를 보면 거의 처음부터 작전을 읽히고 당한 전쟁에 가깝지... 진짜 소배압에게든 요나라 에게든 최악의 치욕 이었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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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통 어찌하여 냥이가 되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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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사 전문가님! 정묘호란부터 산해관 넘기 전까지 만주족에게는 어떤 내부 문제들이 있었나요? 정치적적인 것 뿐만 아니라, 경제적 역량이나 이런 것도 포함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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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 어림도 없지 수둔!!! | 23.12.30 22:2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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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메탈러 도미누스
삼교천의 이펙트가 커서 귀주대첩이 수공으로 이긴 전쟁인 줄 알지만 귀주대첩은 거란 중장기병이랑 벌판에서 회전 맞다이 떠서 이긴 전투임 | 23.12.30 22:3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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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여요전쟁은 전개를 보면 거의 처음부터 작전을 읽히고 당한 전쟁에 가깝지... 진짜 소배압에게든 요나라 에게든 최악의 치욕 이었을걸... | 23.12.30 22:2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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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이랑 거의 동년배로 보는게 나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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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라리맨👊🏻
도통 어찌하여 냥이가 되셨소 | 23.12.30 22:2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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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메탈러 도미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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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역사양산기
민주사 전문가님! 정묘호란부터 산해관 넘기 전까지 만주족에게는 어떤 내부 문제들이 있었나요? 정치적적인 것 뿐만 아니라, 경제적 역량이나 이런 것도 포함해서요 | 23.12.30 22:3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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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걸 설명하려면 박사학위논문은 필요하지만 댓글로 간결하게 설명하자면 '몽골계 세력들에 대한 정치적 우위관계의 확실한 관철' , 1과 연동되는 '차하르와의 대치' , '고질적인 농업생산성 문제', '옷감과 기타 재화 문제', '여전히 가도에 주둔한 명군의 문제' , '홍타이지의 정치적 중앙집권이 이루어지지 않은 문제' '요서회랑의 명군 방어선과 원숭환의 존재 문제' '후계자 문제'등이 존재하는데 이 모든 문제들을 홍타이지는 차근차근 해결해 나갔지만 죽을 때 까지 완벽히 해결치 못한 문제도 있습니다. 급사한 바람에. | 23.12.30 22:3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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