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6년 음력 5월, 후금에 의해 동해 여진으로 파견되어 그 곳에 대한 복속 작업을 진행하고 있던 후금의 대리인 보지리는 반 후금 성향의 후르하계 암반들과 사할리연 암반들의 설득과 회유로 말미암아 누르하치와 후금에게 반기를 들 것을 결정했다.
후르하계 암반들과 사할리얀계 암반들은 보지리에게 반란을 종용하면서 현재 그와 함께 하고 있던 후금의 상인들과 누르하치에 의해 파견된 후르하계 암반들을 살해할 것 역시 권유했고, 보지리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물론 제대로 된 방어 준비를 하기도 전에 그들로 말미암아 후금에 반란 소식이 들어갈 것을 경계하였기 때문이었다. 방어 준비를 갖추기도 전에 후금이 소식을 전해듣고 재빠르게 대응한다면, 아무리 후금의 상황 탓에 대규모 원정군이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승산이 크게 줄어들었다. 보지리로서는 안그래도 그리 높지 않은 승산을 여기서 더 줄일 수 없었다.
보지리는 음력 5월 중에 자신과 함께 동해 여진 세거 지역으로 온 후금 상인들과 후르하계 암반들을 기습하여 후금에 소식이 전해지지 않도록 차단하고자 했다. 이 공격으로 인해 약 70여명에 이르는 후금 상인들과 후르하계 암반들 중에서 대부분이 몰살당했고, 그것으로 보지리와 반란 세력의 걱정은 일단락 되는 듯 했다.1
하지만 보지리의 계획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반드시 대상을 전멸시켰어야 할 기습 공격에서 9명의 생존자가 살아남아 도주하는데에 성공하고 만 것이다. 그들은 불의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뒤 곧장 보지리의 영역에서 이탈을 시도, 후금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도망친 이들은 보지리의 공격이 이루어진 5월로부터 최소 1달, 길게 잡자면 2달 가량의 시일이 지난 음력 6월 28일에야 허투 알라에 도착했다. 그리고 누르하치에게 보지리가 주변 세력들과 연대하여 후금을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킨 사실을 고변했다.2
5월달에 습격을 당했는데도 허투 알라까지 도망치는데에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아마도 말들을 모두 잃은 상황에서 도보로 이동해야 했던 데다가 추격대까지 따라붙어 그들을 떼어내는 과정에서 꽤 오랜 시간을 소모한 탓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동해 여진 세거 지역의 경우 지형이 험난하고 길도 잘 개척되어 있지 않아 더욱 더 도망치는데에 오랜 시간이 소요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서, 살아남은 이들 중 후르하계 암반들이 거의 없었다면, 요컨대 생존자 대부분이 후금 상인들이었다면 해당 지역의 지리에 눈이 밝지 않아 도주에 더욱 시간이 오래 걸렸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그들은 6월 28일에 허투 알라에 당도하여 사실을 고변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누르하치는 그 소식을 듣고 극히 분노하였다.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동시에 정략혼을 요청하여 그 혼인을 인정, 자신의 휘하 신하의 딸3을 내주고 이후 지난 17년간 중용하였으며 심지어 자신이 겅기연 한에 즉위한 뒤에는 동해 여진 세거 지역에 대한 사실상의 전권을 맡긴 인물인 보지리가 일을 맡긴지 5개월여만에 자신을 배신한 것에 대한 누르하치의 분노가 어떠했을지는 짐작키 어렵다.
누르하치가 진노를 표출한 것과는 별개로, 보지리의 반란 문제는 소식이 알려진 그 즉시 누르하치에게 큰 걱정거리가 되었다. 보지리가 후금을 상대로 공격을 가해올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애초에 보지리와 그의 연합 세력의 전력은 후금에 비할 바가 전혀 안되었다. 하지만 그가 후금을 공격하지 않더라도 그의 반란 문제는 심대했다. 그가 그저 독자적인 영향권만을 사수하는 것 만으로도 동해 여진 세거 지역에 대한 후금의 영향력은 철퇴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상황은 곧 국가적인 악영향 초래로 이어졌다. 동쪽에서 나는 자원의 수급이 힘들어질 뿐더러, 인구의 유입도 차단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동쪽 변경이 상시적인 위험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것은 후금으로서 도저히 감수할 수 없는 부담이었다.
보지리의 반란 문제는 그 자체도 문제였지만 당시 후금이 겪고 있던 다른 문제들과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정국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당시 후금은 식량 문제를 겪고 있었다.4 더불어 명나라 월경인 살해 사건으로 말미암아 한참 명나라와 외교적 마찰을 벌이고 있었다.5 이상의 문제들은 부정적인 상호작용을 일으켜 누르하치와 신생 후금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동해 여진 지역에서의 반란 문제까지 누르하치에게 가중된 형국이었으니, 그로서는 무척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요컨대 당시 그는 삼중고를 겪는 상황이었다.
보지리가 일부러 누르하치가 고충을 겪고 있던 시기를 틈타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닌 것 같다. 자연재해의 경우라면 몰라도 애초에 후금과 명간의 국경/월경인 문제의 경우 보지리가 반란을 결심하고 자신 주변에 있던 친후금인사들을 숙청한 뒤에야 벌어진 일이었다. 즉, 보지리로서는 당시 누르하치의 형국이 평상시 이상으로 어려웠던 것을 감지치 못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지리의 반란은 무척이나 시의적절할 때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었다. 누르하치가 범상한 군주였다면 보지리의 난과 겹친 여러 문제들 탓에 얼마간 보지리에게 신경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지리와 그와 연대한 세력들에게는 불행하게도, 또한 후금으로서는 다행이게도 누르하치는 범상한 역량의 군주가 아니었다.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여러 문제가 자신을 짓누르는 상황에서 누르하치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사방에서 자신을 짓누르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월경인 살해 사건과 관련한 명나라의 협상대상자인 요동순무 이유한과 계속해서 협의를 진행하는 한 편 동해 여진에 대해서는 원정군을 파병하여 보지리의 난을 진압코자 했다.
누르하치는 소식을 들은 거의 그 즉시 원정군 준비를 지시했다. 일단 상황이 터진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빠르게 해결하는 것만이 답이라고 여긴 것이었다. 실제로 보지리가 가장 두려워한 상황이 바로 누르하치에게 자신의 반란 소식이 빠르게 알려진 탓에 자신이 준비를 채 끝내기도 전에 후금의 원정군이 들이닥치는 상황이었으므로, 즉슨 후금이 시간을 끌 수록 보지리에게 이득이 되므로 누르하치의 결정은 타당했다.
그런데 여기서 누르하치 휘하의 버일러들과 암반들이 너무 조급한 공격이라는 의견을 내며 누르하치의 즉각적인 원정 지시에 대해 반대의 뜻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1.만문노당 병진년 음력 5월
2.만문노당 병진년 음력 6월 28일
3.해당 암반의 여식은 누르하치의 양녀로 유추되기도 한다.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9269468참조
4.조선왕조실록 광해군 9년 음력 2월 13일
5.이와 관련하여서는 이전의 후금 건국사 시리즈에서 언급한 '1616년 음력 6월. 명-후금 경계 충돌' 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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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아 | 22.12.20 21:29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