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편 격인데 안읽어도 상관 없음 : 후금사) 번외 117편 : 1605년 인삼분쟁과 누르하치의 대응
누르하치 아래에 하나로 통일된 건주는 그에 의해 명나라와 하나의 세력으로 조공, 거래 관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1588년부터 본격적으로 입공과 일원체제 하의 거래를 진행한 누르하치 치하 건주는 인삼과 초피, 동주등의 무역상품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가장 각광받는 상품은 역시 인삼이었다. 누르하치의 인삼을 통한 수입은 계속해서 늘어났고 그로서 누르하치는 막강한 경제적 이익을 기반으로 건주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었다.
17세기 초 누르하치는 거래되는 인삼값에 대해 크게 인상을 요구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 이전부터도 인삼값의 인상은 수요측과 공급측이 끌어안고 있는 여러 요인으로 인해 꾸준히 존재했겠으나 17세기 초엽에는 이러한 인상이 두드러진다. 인삼의 거래가의 폭발적인 인상은 후금의 기록을 우선시하여 살펴보자면 1605년의 인삼 분쟁에서부터 기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따르면 당시까지 누르하치는 인삼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보았으나 명의 상인들은 누르하치의 경제적인 폭리 취득에 대해 반발심을 가지고 담합하여 인삼의 거래를 거부했고 그 결과 건주는 인삼을 대량으로 썩히는 동시에 급하게 처분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후 건주는 새로운 가공법으로 인삼의 보관기간을 늘림으로서 명측의 거래 담합을 꺾고 오히려 새로운 가공법을 통한 인삼과 독점적 거래망을 내세워 인삼값을 대폭 올려 받고 동시에 이전보다 더 많은 인삼을 판매하여 매상을 올리게 된 것으로 풀이된다.1 만문본 만주실록이나 고황제실록등에서는 새로운 가공법의 도입 이후의 인삼의 이익이 종전의 어느정도였는지 확실히 드러나지 않으나 무황제실록의 한문본을 살펴보자면, 비록 추상적인 표현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거의 종전의 2배에 가까운 이윤을 낸 것으로 보인다.2
요컨대 이 때 누르하치는 이전에 비해 훨씬 수고로운 방법으로 인삼을 가공하고, 동시에 그로서 보관기간이 늘어나고 효능도 늘어난 것을 내세워 인삼을 비싼 값에 살 것을 강요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인상값 인상은 자신들의 인삼 판매에 대해 불만을 품고 거래를 일시적으로 거부했던 명나라 상인들에 대한 보복 역시도 겸했던 것 같다.3
누르하치가 인상값을 올려받게 된 데에는 상인들에 대한 보복과 본인이 인삼의 가공에 들이는 수고로움, 그로 인해 늘어난 인삼의 효능과 그에 비례해 인상되는 상품적 가치도 분명 존재했겠지만 단순히 그러한 요인들 뿐 아니라 당시 누르하치가 명 조정에 대해 조공을 중지하고 있던 상황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판단된다. 누르하치는 1606년부터 명나라에 대한 조공을 일시적으로 중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경제, 정치적인 여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었다.4
그런데 조공을 중지하자면 조공을 받는 대상인 명나라만이 경제, 정치적인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조공을 하는 대상인 누르하치의 세력 역시도 정치, 경제적인 악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 누르하치는 실질적인 타격을 받았다. 조공을 중지하는 것은 곧 건주로서도 지금껏 입공을 할 때마다 존재했던 상물의 수여 및 교역을 통한 현물 및 은 확보가 불가능해지는 것을 뜻했다. 즉, 조공을 중지하는 것은 건주로서도 목적을 이루어 조공을 재개할 때 까지 연간 수입이 줄어든다는 것을 뜻한다.
누르하치와 건주로서는 조공의 중지로 말미암아 줄어든 경제적 수입을 다른 곳에서 충당해야만 했다. 그런데 자체적인 물자 생산 역량을 성장시키는 것은 단기적으로 힘든 문제였고, 타 세력과의 전쟁을 통한 물자 확보 역시도 다소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경제적 수입을 늘리기 가장 좋은 방법은 변경에서 이루어지는 호시에서 거래되는 상품이익을 늘리는 것이었다. 이 역시도 일반적인 방법이라면 단기간에 많은 이익을 늘리기는 무리였지만, 건주의 경우 여러 특산품이 존재했으며 독점에 가까운 무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품의 가격을 올려 폭리를 취하는 것이 가능했다.
여기서 인삼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삼은 원래도 건주의 주요 특산품이었지만, 당시-즉슨 조공이 중단된 시기 무렵에는 앞서 언급한 새롭게 개발된 가공법으로 보관기간이나 품질을 월등히 올라갔다. 누르하치로서는 그러한 신식 가공법을 적용한 인삼으로서 조공의 중지로 발생한 경제적 손해를 메꾸고자 했던 것 같다. 물론 필연적으로 거래대상들의 불만을 불러올 방법이었지만 누르하치는 조공까지도 중지한 마당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누르하치는 이 때 인삼의 가격을 올릴 뿐만이 아니라 강매에 가깝게 인삼들을 팔며 조공의 중단으로 말미암은 경제적 이득 손실분을 충당한 것으로 보인다.5
당시 인삼을 통한 막대한 수익 확보는 조공을 2년여간 중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누르하치가 경제적 문제에 크게 발목을 붙잡히지 않은 요인중 가장 큰 요인의 일획이었다고 생각된다.
1.만주실록 을사년
2.무황제실록 을사년, 太祖不徇眾言,遂煮曬,徐徐發賣,果得價倍常.
3.이상은 이전의 글,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2058535 과 연동/연계된다. 아래부터는 이번의 글에서 추가로 다루는 보강내용이다.
4.이에 관하여서는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4881041?search_type=subject&search_key=%ED%9B%84%EA%B8%88+%EA%B1%B4%EA%B5%AD%EC%82%AC&page=9
참조
5.김선민, 명말 요동 변경지역을 둘러싼 명-후금-조선의 삼각관계,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55, 2008, p.2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