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03년, 해서 여진 세력중 하나이자 당시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던 건주(누르하치 세력)의 대항마중 하나였던 울라의 버일러 부잔타이는 누르하치가 또 다른 해서 여진 세력인 '여허' 세력과 갈등할 조짐을 보이자 그 틈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1 그 계획이란 조선 인근의 번호 세력들을 침공하여 그들을 철거, 확보하여 울라의 군민 수효를 늘리는 동시에 조선을 공격하여 영향력을 과시하고 조선으로부터 직첩을 얻어 교역로를 확보하고자 하는 계획이었다.
해당 계획의 기본 골자는 누르하치가 자신의 행동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틈을 타서 빠르게 번호들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1597년 무렵 부잔타이가 안출라쿠와 도르기 비라의 번호들을 복속만 시키고 자신의 세력에 완전히 흡수하지 않은 탓에 누르하치의 역공으로 안출라쿠와 도르기 비라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상실한 것에 대한 복기로 보인다.
부잔타이의 계획은 상당히 과감한 면이 존재했다. 그의 대립자라고 할 수 있던 누르하치의 경우 번호들을 흡수할 때에 조선과의 충돌을 철저히 회피하고자 하였고 혹 어쩔 수 없이 교전한다고 하더라도 선제공격은 최대한 자제하는 움직임을 보였다.2 하지만 부잔타이의 공격 계획에는 애초부터 조선이 포함되어 있었다.3
누르하치의 경우 당시 명나라의 번신이었던 만큼 같은 명나라의 번신이자 명나라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외교체제에서 외교적으로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었던 조선과의 마찰은 최대한 회피해야 했다. 하지만 부잔타이는 명나라를 중심으로 한 외교체제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운신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데다가 외교적 경험도 적었기 때문에 조선과의 전투를 굳이 회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전쟁 계획에 조선을 포함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부잔타이는 조선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방식으로 직첩을 얻어내고자 했기 때문에 무력행동은 사실 당연한 수순이었다.
부잔타이의 군대는 '만도리4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1603년 음력 7월 말~ 8월 초에 출병하였다.5여기서 만도리란 1601년 무렵 조선군에게 살해당한 울라의 지휘관인데, 조선 변경까지 진출했다가 조선군에게 정탐을 한다는 의혹을 받고 체포되어 살해당한 인물이다. 이 때 조선군에 의해 울라의 병사들이 일부, 혹은 전원 살해당했다.6울라로서는 나름대로 합당한 공격명분을 내세운 셈이었으나, 실제 울라군이 만도리의 복수를 그가 살해당한 지 2년이나 지난 뒤에 하려 한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작전을 위한 대외적 명분이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조선 국경에 진입한 울라군은 음력 8월 14일부터 본격적으로 작전에 들어갔다. 울라군은 세 개의 부대로 나뉘어져 하나는 울라에 우호적이었던 풍계 부락에 주둔하여 진군로 및 퇴로를 확보하였으며 나머지 두 군대는 조선의 6진중 하나였던 종성 방향으로 쳐들어가 종성을 포위공격하는 한 편 번호에 대한 공격작전을 개시하여 그들을 대거 살육, 포로화하였다.7
종성부사 정엽과 판관 이택준의 지휘하의 종성 주둔 조선군은 정엽 본인부터가 병이 위중한 상황이었던 데다, 병력이 워낙에 부족하여 종성을 지키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번호들을 전혀 지원하지 못했으며 다만 종성을 가까스로 지켜내는데에는 성공했다. 이 때 울라군의 경우 종성에 대한 본격적인 함락의지가 있었다기 보다는 종성의 조선군의 발을 묶어두고 번호를 철거하는데에 주력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으나, 그래도 정엽의 대처는 절대적인 열세 상황에서 나름 훌륭했다고 평할 만 하다.8
종성에 대한 울라군의 작전은 음력 16일 무렵 막을 내렸다. 그러나 울라군의 모든 작전이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 울라군은 음력 8월 19일 무렵 동관 역시도 공격했는데, 당시 동관을 지키던 동관첨사 권몽룡은 이에 대해 방어전을 펼치는 동시에 지원군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성과 온성의 지원군이 오자 울라군은 퇴각하여 이후 풍계로 물러남으로서 완전히 전투가 종료되었다.9
음력 8월의 종성, 동관 전투에서 조선군은 종성과 동관의 방어에 최종적으로 성공했으나, 상기에서 설명했듯이 울라의 목적은 조선의 요새들을 직접 함락하기 보다는 조선군을 묶어두고 그 사이 번호들을 철거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울라군은 실제로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여 사실상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이 목격한 울라군은 조선이 흔히 상대하던 이반 번호세력들이 일시적으로 조직한 어중이떠중이 군대가 아니라 잘무장되고 조직된, 하나의 국가체제 아래에서 운용되는 군대였다.10 그 탓에 조선군은 숫적, 전략적으로 완전히 압도되어 번호들을 구원하지 못했고 방어전만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조선에서는 이 사건 이후 울라군의 침입에 대해 반격을 가하고자 했다. 그러나 울라의 경우 그 거점이 조선으로부터 멀기 때문에 단기간에 원정을 준비할 수 없었을 뿐더러 울라군의 강약에 대한 제대로 된 판별이 서지 않았던 탓에 차선책으로 울라군의 중간기점 역할을 수행한 번호 부락인 풍계에 대한 정토를 통하여 번호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코자 하였다.
음력 9월 7일부터 본격적으로 의논된 정토에 대해 임금이었던 선조는 과연 실효성이 있을지, 또한 정토의 타당성은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며 신중론을 펼쳤으나 북병사 이용순등의 적극적인 정토 주장에 힘입어 결국 정토가 본격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했다.11그러나 풍계 부락 정토는 의논 단계에서 폐기되었다. 울라의 재침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음력 12월 울라의 군대는 다시 조선 경내로 진입해왔다. 이 때 진입한 울라의 군대는 조선의 평가에 따르면 5~6천에 이르렀으며, 총지휘자로는 울라의 버일러 부잔타이가 직접 나섰다. 울라의 군대는 온성과 유원, 경원과 미전의 번호들을 공격하여 대거 포로로 확보했으며 동시에 조선군과도 소규모 접전을 벌이며 그들이 자신의 작전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압박했다.12
조선군은 본인들이 주둔하는 성보들을 사수하는데 성공했으나 이 시기 부잔타이의 주요목적은 조선군 섬멸 및 조선군진의 함락이 아니었다. 이 때 각지의 조선군은 부잔타이의 주요목적인 번호 철거를 막아내지 못했다.13
음력 8월부터 시작된 약 4개월여간의 울라군의 침공은 조선 조정이 풍계에 대한 정토를 포기하고 당분간 수비에 일관하게 하였다. 부잔타이는 이듬해인 1604년에도 번호들을 철거했으나, 이 무렵에는 조선의 군진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진행하진 않았다. 다만 본인이 잡은 조선인 포로를 석방하여 조선에 직첩을 요구하는 한편 종성 인근에 중간거점인 건퇴보를 건설하여 번호에 대한 흡수 및 조선과의 전투 준비에 절치부심했다. 조선 역시도 이런 울라의 대응에 대해 군대를 북방으로 보내어 대응하였다.14
1603년에 있었던 약 4개월여간의 조선-울라간 전쟁의 전개는 전체적으로 조선의 북방 방어가 울라에게 완벽하게 농락당한 모양새를 띄었다. 울라는 비록 조선의 성보를 함락치는 못했으나 본인들의 주요 목적을 대부분 달성했고, 조선은 울라로부터 번호들을 지키지 못하였다.
이는 조선의 북방 방어가 약화된 탓도 있었으나, 울라가 지금까지 조선이 상대해왔던 여진 세력들과는 전혀 다른 역량을 지닌 세력이었던 탓이 보다 컸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부잔타이의 세력은 번호들 중에서 나름 큰 세력이었던 로툰보다도 훨씬 강력한 군대와 선진적인 군사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이것은 곧 조선군의 전투지역열세로 이어졌으며, 결국 조선군이 울라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하였다.
조선과 울라간의 1603년 북방 전쟁은 후일 이어지는 거대 여진 세력들과 조선간 전투, 전쟁의 체험판에 가까웠다. 이로부터 조선은 더욱 큰 전투, 더욱 큰 전쟁을 겪게 되었다.
1.건주의 누르하치와 여허의 나림불루간의 갈등 문제에 관하여서는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4123351
2.조선왕조실록 선조 33년 음력 7월 17일, 마적합에 대한 건주-로툰군의 공격에서 누르하치는 조선과의 전투를 철저히 회피할 것을 지시했다.
3.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음력 9월 1일, 음력 9월 3일. 조선의 요새에 대한 공격과 번호에 대한 공격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애초에 부잔타이는 번호와 조선에 대한 동시 공격을 전략으로 세웠음을 파악할 수 있다.
4.萬都里, 혹은 만두리(萬斗里)
5.울라와 조선 변경 지역간 거리를 기준으로 계산한 출병시기이다. 조선에서 울라까지의 거리는 병종과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8~11일 정도 걸리는 것으로 판단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음력 8월 24일, 선조 37년 음력 8월 8일등
6.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5월 15일
7.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음력 9월 1일, 이용순의 치계 내용 참고. 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음력 9월 3일 기사들 다수 참고
8.다만 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음력 9월 3일의 기사를 살펴보면 선조는 '종성의 적은 자중지란에 불과하며 처음부터 성에 다가와 서로 싸운 일이 없었는데, 감히 성을 에워쌌다고 계목에 쓰기까지 하면서 적의 형세를 장황히 썼으니, 매우 놀랍다.'고 말하며 종성의 전투에 대해 평가절하를 하였다. 종성의 상황이 보고만큼 치열한 상황은 아니었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교전 자체는 실제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또 정엽의 몸상태와 당시 울라군의 전력을 생각해보자면 정엽의 울라군에 대한 대처는 준수했다고 평해도 무리가 없을 듯 하다.
9.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음력 9월 1일 기사6
10.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음력 9월 1일, 3일 기사2
11.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음력 11월 11일
12.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음력 12월 28일 북병사 이용순의 장계 참조
13.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음력 12월 28일 북병사 이용순의 치계내용 참조. 이에 관한 선행연구는 10월중에도 온성과 유원이 침공당한 것으로 판단했다. 장정수, 선조대 대여진(對女眞)방어전략의 변화 과정과 의미, 조선시대사학보 67, 조선시대사학회, 2013, p.184. 한성주, 조선 선조대 후반 忽剌溫 부잔타이[布占泰]의침입 양상, 역사와 경계 100, 부산경남사학회, 2016, p.283. 해당 논문들은 1603년 음력 12월 28일의 1차 보고서의 기입 날짜에 주목하여 10월 14일에 부잔타이가 온성과 유원을 공략했다고 판단했다.
14.조선왕조실록 선조 37년 음력 8월 8일, 8월 1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