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3년 음력 7월 무렵 누르하치는 기존의 거점 퍼 알라에서 신거점 허투 알라로 세력 본거지를 옮긴다. 새롭게 건설된 허투 알라는 기존의 퍼 알라보다 훨씬 거대한 거점이었다. 누르하치는 허투 알라로 거점을 옮김으로서 본인의 행정통치능력을 강화하고 체제를 보다 진보시켰다.
그러나 허투 알라로 거점을 옮겼다고 하여 퍼 알라를 완전히 방기한 것은 아니었다. 퍼 알라는 후금 시기에도 일정 규모의 병력이 주둔하는 요충지로서 기능했다.1 퍼 알라 자체가 수비에 다소 용이한 지역이었으며, 허투 알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진 지점도 아니었다보니 계속해서 관리하며 유사시 방위거점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누르하치가 수도를 옮겼을 무렵, 누르하치의 부인중 한 명이자 홍타이지의 모친인 여허나라 몽고저저의 건강이 무척 악화되었다. 이 때 몽고저저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던지 본인의 모친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고, 누르하치는 그에 따라 친정인 여허측에 장모를 일시적으로 건주에 보내달라는 요구를 하게 된다. 그러나 몽고저저의 오라버니였던 동여허 버일러 나림불루는 누르하치측의 요구를 거부하고 대신 '난타'라는 보오이를 파견하여 몽고저저를 만나게 했다.2
청측의 사료는 여기서 나림불루의 입장을 거의 대변하지 않고 누르하치의 입장만을 대변하나, 사실 나림불루의 결정은 타당했다. 나림불루로서는 자신의 여동생이 그리 아프다는 것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설사 정말로 몽고저저가 아프다고 해도 당시 여허와 건주간 관계는 여전히 그리 좋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본인의 모친이기도 한 누르하치의 장모를 건주에 보냈다가는 자칫 모친이 인질로 잡히는 수가 있었다. 그리 된다면 안그래도 형국상 여허가 다소 불리한 상황에서 추가적인 패널티를 부여받는 셈이 되었기에, 나림불루로서는 본인의 여동생이 실제로 죽기 직전이라고 하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편 누르하치는 누르하치대로 나림불루가 본인의 장모를 건주에 보내지 않자 여동생(몽고저저)이 죽기 직전인데도 그 여동생의 부탁 하나 들어주지 못하느냐며 이 문제에 대해 나림불루를 비난했다.
뿐만 아니라 이전에 여허가 자신의 나라를 약탈하고 9개 부족의 연합을 구축하여 자신을 멸망시키려 한 것, 그리고 1597년에 자신과 자신의 차남 다이샨에게 여식을 시집보내겠다고 하고선 그것을 일방적으로 철회한 것들을 모두 열거하며 자신의 여허에 대한 분노가 임계점에 다다랐음을 내비쳤다. 누르하치는 위의 일들을 명분으로 여허에 적대선언을 하였는데, 그것은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요컨대 그것은 1593년 구국지전 이후로 양측간의 무력 충돌이 다시 터지게 된 것을 의미했다.
누르하치가 실제로 몽고저저를 얼마나 아꼈는지는 모르나, 실제로 이 문제에 감정적으로 대응하여 선전포고를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다만 충분히 힘을 모은 상황에서 해당 문제를 여허에 대한 선전 명분으로 삼고 여허를 침공하려 한 것으로 판단된다.
누르하치가 여허에 전쟁을 선포하긴 했으나 곧바로 두 세력간의 충돌이 일어나진 않았다. 음력 9월 무렵 몽고저저가 병사했고, 장례 문제로 다소 시간을 소모하다가 그 이후에야 본격적인 원정 준비를 시작한 탓으로 보인다.
누르하치는 몽고저저에 대해서 융숭히 장례를 치루었다. 그는 네 명의 시녀를 순장시키고3 말 1백여 마리와 소 1백여 마리를 제물로 바침으로서 자신의 부인의 마지막 떠나는 길을 배웅했다.4 이는 당시 몽고저저가 누르하치의 부인중 위상이 상당히 높은 위치5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몽고저저를 명분으로 하여 여허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 상황에서 그녀에 대한 장례의 수준을 각별히 신경써서 명분을 견고히 다지기 위함도 있었다. 정치적 의도를 제하고 보자면 그녀에게 남편으로서 미안한 감정도 어느 정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누르하치는 몽고저저의 장례가 끝나고 군대의 준비가 끝난 1604년 음력 1월 마침내 여허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때 누르하치가 여허에 대해 공세를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주변의 상황이 많이 안정화되어 자신이 먼저 공세에 나서더라도 다른 세력들이 건주를 공격치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여허를 제외한 가장 큰 상대여진 세력인 울라의 경우 이 시기에 조선의 6진 지역과 번호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6 건주와 여허간 분쟁에 신경을 쓸 세가 없었다. 그렇기에 누르하치는 이 틈을 타 여허와 1대1로 맞붙어 그들을 압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1월 8일 출정한 누르하치는 정예화된 군대와 본인의 뛰어난 역량을 기반으로 하여 11일 여허의 장과 아키란 두 성을 빼앗았으며 그 외에 7개의 부락을 손에 넣음으로서 성공적으로 작전을 끝냈다. 이 때 누르하치는 2천의 올지(노획)을 획득하여 건주에 내속시켜 세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7반면 여허 세력은 이 패배로 인해 더더욱 영향력이 위축되었다.
1.만문노당 1620년 음력 3월 5일 기사
2.청태조고황제실록 계묘년 음력 9월, 만주실록 동년 동월 기사조. 난타는 누르하치의 장모를 대신하여 건주에 파견된 인물이나 사신으로 보기에는 애매한데 일개 보오이(가속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림불루가 보오이에 불과한 이를 파견한 것은 아마도 '난타'라는 인물이 몽고저저 혹은 몽고저저의 모친과 각별한 사이였기에 그라도 대신 파견하여 상황을 무마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3.순장은 당시 여진족의 장례 관습중 하나였다. 다만 실제로 순장이 행해진 사례는 기록상 그리 많지 않다. 인구가 귀한 여진에서 순장까지 하는 것은 그리 잦은 경우는 아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정치적 의도가 실린 장례에서 주로 관측된다.
4.청태조실록 동년 동월
5.몽고저저는 대푸진이라는 설과 대푸진까지는 아니었다는 말이 공존한다. 그러나 두 견해 모두 몽고저저가 누르하치의 부인중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6.울라의 번호 공격과 6진에 대한 연속적이고 연계적인 공격은 1603년 음력 8월부터 음력 12월까지 계속되었다. 누르하치의 여허 공격과 시기과 완전히 일치하진 않으나 누르하치의 여허 공격이 1604년 음력 1월 초에 이루어졌으므로 당시 누르하치는 울라가 여허쪽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한편 부잔타이 역시 건주와 여허간의 갈등 분위기를 틈타서 번호 공략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후에 따로 주제로 설명하겠다.
7.만주실록 갑진년 음력 1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