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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바이오로이드의 반격이 시작된 지 몇 달째,
인류가 수천 년간 일구며 세워왔던 수많은 시설과 조직, 지식과 역사가
모조리 무너져 내리고 불타 없어지며 남은 잿더미 위에서도
그들은 이 거역할 수 없는 신의 징벌과도 같았던 전쟁의 전황을
기어이 자신들을 향해 되돌려 놓고 있었다.
신체를 완전히 회복한 밴시는 다시 날아올랐지만,
그녀를 포함한 다른 바이오로이드들 까지
공중은 물론 지상에서도 철충과 조우하는 일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반면, 자신의 유일한 장난감을 잃어버린 연구원은
간이 비행장을 오도 가도 못하고 그저 매일, 비행장 한켠에 죽치고 앉아
그녀들이 날아올랐다가 다시 돌아오는 모습을 구경이나 하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다들 꺼림칙하지만, 모처럼 찾아온 때아닌 평화를 누리고 있던 어느 날
저녁노을이 내려앉기 시작하던 간이 비행장의 격납고 옥상,
그날도 둠브링어의 낙오된 연구원은 난간에 팔을 기댄 채 홀로,
주간정찰을 마치고 돌아오던 바이오로이드들을 하릴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저, 저기…"
등 뒤에서 들려온 뜻밖의 목소리에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밴시가 우두커니 서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응? 언제부터 올라와 있던 거야? 무슨 일 있어?"
"그… 실례지만, 호칭을 좀… 알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미리 여쭤봤어야 하는 사안이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뭐… 보다싶이 내가 군인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겠지?
난 사실 둠브링어에 소속된 비행기술 연구원이었어…
세상이 이 지경이 되기 전까진 비행시험 쪽에서 일했었고…
그러니까 선임… 아니 그냥 연구원이라고 불러 하하…"
"그렇습니까?"
"그리고 그래… 난 군 소속 아니니까 너무 딱딱하게 경례 같은 거 안 해도 돼…"
"… 알겠습니다."
"...."
"...."
"그거 말고 다른 건…?"
"죄송합니다만, 무슨 말씀이신지…"
"다른 할 말은 없어?, 설마… 겨우 이 예기 하려고 찾아온 거야"
"아… 그… 실은… 불용품을 보관할 박스를 찾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옥상에 계시길레…"
실제로 옥상의 한쪽 구석에는 항전장비를 보관하는 빈 나무상자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고,
이미, 밴시의 손에도 몇 개가 들려 있는 것이 연구원의 눈에 들어왔다.
사실 그는 내심 기대했었지만,
- 그럼 그렇지!… 저 녀석이 재발로 찾아왔을 리가?!
- 하긴, 원래 저 모양으로 설계된 녀석일 텐데…
- 근데 1층에 있는걸 안 쓰고 왜 여기까지 올라온 거지…?
- 어쩌다 저런 말이라도 걸어 준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하나…?
그는 밴시가 저번처럼 다른 일이 있다며 떠나버릴까 싶어, 직접 그녀를 붙잡기로 했다.
"밴시, 혹시 지금 하는 일 있어?"
"개인 업무 말씀이십니까?,
최근 본대로부터 신품이 입고된 터라 재고품 정리를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거 언제까지 하면 되는 거야? 위에서 지시사항 내려온 거 있어?"
"추가적인 지시사항은… 없었습니다.
다만…, 재고정리 업무는 개인적으로 금일 저녁 내에 끝낼 계획입니다."
"그럼 그거 당장 안 해도 뭐라 할 사람 없는 거지?"
"네…? 그… 그렇습니다."
"잘됐네, 너도 여기서 좀 쉬었다 가. 복귀한 지 겨우 30분도 안 지났잖아?"
"네… 알겠습니다."
"일하고 싶은데 불편하게 하는 건 아니지?
혹시 나앤이 이걸로 뭐라고 하면 얘기해줘, 하긴 지금 여기 있지도 않지만,"
"아닙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은 아니어서 괜찮습니다.
그리고… 대령님은 이런 일로 뭐라고 하실 분은 아니기에…"
"하하… 그래?
그나저나, 요즘 비행은 어때? 다들 총 한 발 안 쏴보고 들어오는 것 같던데?"
"확실히… 최근, 적기의 출현 빈도는, 크게 줄어든 상황입니다. 하지만…
지난번과 같은 사태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적기의 매복 가능성이 있는 지역을, 기습에 유의하며, 중점적으로 수색하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나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출격… 말씀이신 겁니까?, 송구스럽지만… 비행… 금지되셨다고 들었습니다"
"뭐… 엄밀히 말하면 금지까지는 아닌데…? 안 그래도 얼마 전에 회사에
항공기 하나 남는 거 있으면 보내 달라 하긴 했는데… 순순히 보내 줄지 모르겠네, 하하…"
"외람된 말입니다만, 적기의 출현 빈도가 줄어들었다곤 하지만,
여전히… 그때의 일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확률은, 낮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러니… 정찰 임무는 저희에게, 온전히 맡기시는 것이…"
"휴… 너도 그런 소릴 하는구나?
근데… 그게 아니면 할 게 없는데 어쩌지?"
연구원은 붉게 저무는 해를 넘어다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참… 쓰레기 같은 세상이었어… 공습 이전에도… 특히 너희들한텐 더더욱,
근데 나는, 이쪽 업계를 선택한 덕분에 어찌 보면 참 잘도 살았지…
뭐 폭동이니, 성 접대니… 이런 건 다 TV에서나 나오는 남의 예기였고…
전쟁도 뭐… 본사 직원이나 생명공학 하는 애들은 실제로 누가 죽었다고 하긴 하던데,
우리 같은 비행 장비 분야는 핵심 인력이 아니니까… 그냥 회사만 멀쩡히 다녔지 뭐…
그리고 난, 어떻게 보면 이게 특혜라고 생각했거든… 이 바닥에 몸담았던 것에 대한…
근데, 이젠 잘 모르겠어 하하…
덕분에 공습 때도 어찌 살아남긴 했는데…
대체 이러고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아마 회사 사람 몇 명 빼면 내가 아는 사람들은 다 죽었겠지…?"
밴시는 어느새 고개를 내린 채 그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도 내가 할만한 거라도 해야지 뭐 어쩌겠어? 하하…
사실 난 이런 거 좋아했단 말이야 사람이 직접 조종하는 거…
공습 이전엔 뭐… 너네 아님 AGS나 피 터지게 싸웠지,
군인이란 것들은 작전실에 퍼질러 앉아서 과자나 까먹고 있었잖아?!
참… 재미가 없었단 말이야… 뭐 어쩔 수 없는 발전 방향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니까 이때 아니면 이런 거 언제 타보겠냐?
그러다 격추돼도 뭐… 어차피 잃을 것도 없는데…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전력에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잖아? 하하…"
밴시는, 사실, 인간이 직접 작전비행을 수행하는 경우,
그를 호위하는 기동형 바이오로이드를 최소 2기 이상 따로 편성해야 하지만,
부대 사정상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달해 주려다 참았다.
"이 지경이 됐으면 누구 가릴 거 없이 전부 다 싸우는 게 맞지,
사실 원래부터 그랬어야 했던 거고…
참… 너무 쓸데없는 예기를 길게 했구나?"
"아… 아닙니다…"
둘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격납고 옥상 너머
임무를 마치고 하나둘씩 돌아오는 대원들을 지켜보았다.
어느새 태양의 고도는 떨어지고, 하늘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나저나… 밴시, 너도 비행시험대대 소속이었어? 근무하면서 한 번도 못 봤던 것 같은데…"
"예정대로라면, 그쪽으로 배치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발령 직후, 3차 연합전쟁이 발발하면서 대령님과 같이 임시 대대로 재편되었습니다."
"흠… 잘하면 회사에서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됐네…
그러고 보니 말이야, 오래 근무한 애들은 보통 비행시험 좀 해주다가 사회로 나가던데…
밴시 너는… 뭐… 이걸 지금 예기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싶긴 한데?… 아무튼,
전역하면 뭐 하고 싶었어?"
"딱히…
생각해 둔 건 없었습니다."
"흠… 너희 선배 기종들은 뭐 하고 사는지 들은 거 없어?
하긴…, 나도 잘 몰라서 물어보는 거긴 한데…?"
"제가 아는 저희 선임 기종은… 민간 업무로 전용된 사례가 없었습니다.
대부분 교관이 되거나…, 보급이나 행정과 같은 비전투 업무를 수행하다가도…
대다수가 다시 전투 임무로 복귀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공습이 없었더라면… 이곳에서 일정 기간 시험비행 임무를 수행한 이후,
다시 전술폭격 사령부로 돌아갔을 겁니다."
"그래도… 비행 그만두고 사회로 한번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해봤어?"
매번 대공포 뒤집어쓰면서 대지공격 하는 거 힘들잖아?
그러다 잘못하면 저번처럼 그렇게 될 텐데…“
"저는, 제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이자, 존재 가치입니다.
그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비행에 나설 뿐… 그 외 다른 생각은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밴시는 단호했다.
연구원은 그렇게 평생 실전에 투입되다가 소모가 되어야 비로써 자유로워질 수밖에 없는
밴시라는 바이오로이드의 일생에 연민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하긴… 저런 성격을 탑재하고, 인간 이하의 것들이랑 부딪치는 걸 생각해 보자니…
- 정말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 덜떨어진 물건 취급을 받을 바에야 전장에서 명예롭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 그러고 보니 잠깐…
"밴시!, 넌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희와 같은 기종에게는…"
"음… 아니 그런 거 말고, 죽으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본 적 없어?"
"제가 전장에서 소모된다면…, 다른 대원이 제 자리를 대체 할 것입니다."
"아니?! 하하… 네가 어떻게 될지 말이야, 죽으면 뭐 천국으로 간다던가…
듣자 하니 뭐… 싸우다 죽으면 발할라로 간다고 믿는 얘들도 있다던데
밴시… 너도 사후세계를 믿어?"
"…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밴시의 시선은 다시 아래를 향했다. 이윽고,
"너도… 별로 죽고 싶진 않은가 보구나…?"
"...."
약간의 긴 침묵이 흘렀다.
연구원은 저물어가는 태양을 등지고,
옅은 조명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밴시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정적을 깨고 밴시가 입을 열었던 그때,
"흥!, 하여간!… 우리 회사 총책이라는 놈들은 애들을 왜 이렇게 만들어 놨는지 몰라?!
대장이란 놈부터 나사가 빠져가지고… 특히 나이트앤젤 얘는?!…
그러고 보니 그 대령인가 뭔가 하는 걔, 네 상관이라고 했지?!
흐흐… 걔 처음 우리 부서로 들어올 때 어땠는지 아냐?"
그는 말을 가로챈 것도 모자라, 밴시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예기를 이어갔다.
"그 녀석 말이야!, 참… 대체 어떤 ㅁㅊㄴ이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누가 뽕을 사줬다는 거야?! 전역 선물로…
걔는 또 훗… 그걸 넣고 왔더라고?!
그래 봤자 거… 니 꺼 한 10퍼센트 사이즈나 나오려는 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그걸 좋다고…"
"그… 그렇습니까?"
"근데 비행시험 할 때도 그걸 넣고 왔길래, 빼라고 그랬더니
하르페이아도 스텔스 성능 지장 없이 멀쩡히 날아다니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따지더라고?!
너희 기종은 형상 최젖화 적용 안 돼서 RCS 값 올라간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그럴 리 없다는 거야?!
그래서 좋다!, 그렇게 비행시험 해보고 배면 RCS 값 측정했을 때
(RCS : 레이더 반사 표피면적, 작을수록 스텔스성 높음)
증가량 8% 이하면 아예 수술을 시켜 주겠다고 했어.
대신 초과하면 영원히 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그래서… 그… 어떻게…?"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밴시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뭐 결과야 뻔하지…
생각보다 꽤 높게 나오던데?
나도 참… 겨우 그거 하나 넣었는데 이렇게까지 나오나 싶더라고 하하…
근데 그거 보고 걔가 너무 상심하는 게 눈에 보여서…?
그래도 시험 할 때 만 빼고, 평상시에만 하고 다니라고 봐주기로 했었어…
그런데 그 뒤로 통 그걸 안 하고 다니더라고…?
그래서 내가 언제 한번 그거 어디다 팔아먹었냐고 물어봤는데…?
이젠 허망한 꿈에 대한 미련은 버렸다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실리콘 덩어리 따위 개나 줘버렸다고…
회사 경비 보던 하치코한테 그걸…"
"푸흡…!"
"어?… 허어?! 너 이거… 대령님한테 다 이른다?!"
"어엇!… 그… 그… 그… 대…, 대령님한테 얘기하는 건 조금…"
"하하하… 농담이야"
이제껏 보지 못했던 그녀의 당혹스러운 표정과 말투가 드러나자
연구원은 내심 뿌듯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야! 인간!"
불현듯 옥상의 입구 쪽에서 들려온 따가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그리폰과 함께, 평소에 함께 다니던 블랙하운드가 둘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연구원님. 소령님도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헤헤…"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소령님 얼굴은 또 왜 이래?
설마… 뭐 이상한 거 시키고 있었던 거 아니지?… 응?"
블랙하운드가 해맑게 안부를 물어오는 반면 그리폰은 특유의 삐딱한 말투로
다짜고짜 전후 사정을 캐물어 왔다.
"아… 아닙니다… 그저… 부대 사정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뭐야… 칫…"
밴시가 곧바로 해명했지만, 그리폰은 여전히 꺼림칙 한 표정으로
연구원과 밴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블랙하운드의 탄성 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이쁘다! 저희 저기서 같이 사진 찍어요, 네? 헤헤…"
블랙하운드의 목에는, 여유가 생기자 반입한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
"자, 디들 저기 한번 서주시겠어요?"
상황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연구원이 먼저 난간으로 걸어가 몸을 기대었고,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던 그리폰도 마지못해 그의 옆으로 걸어가는 듯했으나,
이내, 표정을 풀더니 은근슬쩍 자세를 잡아보기 시작했다.
블랙하운드는 적당한 높이의 상자 위에 카메라를 올려놓고는, 곧장 그리폰에게 달려갔다.
"소령님도 어서 들어오세요~ 빨리!"
"네…? 저는…"
"빨리 안 오고 뭐 하는 거야?!
어휴… 하여간 누가 보면 내가 상관인 줄 알겠다니까?"
"밴시!, 너도 이쪽으로 와"
블랙하운드와 그리폰의 그리고 연구원의 재촉 끝에
밴시는 조심스럽게 연구원의 옆으로 다가갔고, 조금 어색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모두가 카메라의 앵글 안에 들어서자, 블랙하운드는 카메라 리모컨을 꺼내고는…
"자, 찍겠습니다~ 하나, 둘~!"
‘찰칵’
해가 붉게 저무는 노을 아래,
그들은 저녁 내내 사진을 찍으며 만담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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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오류가 하나 있었군요 올리면서 다시 검수하면서 올리고는 있었지만, 저런부분에서 미스가 나올줄은 몰랐군요.. 시간적 배경은 이전작과 머지않은 시점이고, 사실, 한창 작성을 하던 중에 밴시 계급을 대위에서 소령으로 바꿨던 일이 있었는데 그때 발생한 오류같군요.. 수정 했습니다 ㅠㅠ | 21.12.15 09: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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