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다 위짤 보고 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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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휘관을 만났을 때 그는 철없는 장난꾸러기였다.
어떤 인형이 나와도 예쁘면 좋아하고 그렇지 않아도 좋아하는 천진난만한 청년.
그는 내가 비싸다(?)는 이유로 부관에 앉혔고 얼떨결에 나는 다른 인형들의 시기와 부러움을 받게 되었다.
그때는 다시 생각하면 힘든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잠은 언제나 종이상자 위에서 잤고 식사는 탄약통 위에 접시 몇개를 놓고 먹었다.
가구도 없고 벽지도 냉랭한 쓸쓸한 숙소. 하지만 당시의 우리는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반년이 지날 무렵 지휘부는 완전히 바뀌었다.
숙소는 무려 8개나 늘었고 곳곳에 화려한 장식과 가구들이 보석처럼 번쩍였다.
인형들 또한 수준급으로 늘었다. 모두들 외모만 예쁜 게 아니라 다양한 옷으로 몸을 치장하였다.
이때쯤 나는 벌써 부관에서 물러나 군수만 하는 잉여인형에 불과했다.
지휘관과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눈 게 언제였을까?
사실 이제는 그를 보는 것마저 쉽지가 않다. 나는 쓸모없는 2성 인형. 그는 백여명이 넘는 인형을 가진 지휘관.
우리 사이는 흡사 왕과 서민과도 같아서 나는 이따금 그의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때는 그것만으로 좋았다.
나는 여전히 그의 인형. 그는 나의 사랑스런 지휘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형은 행복하다. 설령 그 사람이 관심을 끊었을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했다. 나는 여전히 지휘관의 인형이니까.
1년이 지날무렵 지휘부는 더 이상 변하지 않았다. 대신 내게 변화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지휘관은 키도 크고 표정도 남자다웠다. 그는 능숙하게 일과를 끝내고 내게 다가와 서류를 하나 건넸다.
그것은 나의 전역증서였다.
나는 웃는 얼굴로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지휘관은 여전히 따뜻한 사람이었다. 퇴역하는 인형을 직접 찾아와줄 정도니 말이다.
그는 순진하고 겁쟁이였지만 여전히 인형을 좋아했다. 다만 그 인형이 내가 아닐 뿐 지휘관은 변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문을 나서며 지휘부를 돌아봤다.
한쪽 구석에서 인형들이 상자침대와 탄약통 식탁을 반품하는 모습이 보였다.
몰래 그것들을 몇 개 들고 나왔다. 이정도는 기념품으로 가져가도 괜찮겠지.
누가 뭐래도 나는 지휘관과 가장 오래있었던 인형이니 말이다.
새로운 집에 와서 서둘러 가구들을 배치했다.
칙칙한 회색 벽지에 차가운 바닥. 거기에 상자와 탄약통을 놓으니 얼추 그때의 숙소와 비슷해보였다.
이날은 기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창밖을 보니 보름달이 환한 빛을 내고있었다.
지휘관도 지금쯤 침대에 누웠겠지. 그 옆에는 다른 인형이 있겠지만 창문에는 같은 달이 떠있을 것이다.
나는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려 얼굴이 빨개졌다. 금방이라도 옆에서 지휘관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는 손을 잡고서 춥다고 말하겠지. 그럼 나는 그를 안고서 말하곤 했다.
"어때요? 이러면 따뜻하지요?"
그러면 지휘관은 얼굴이 빨개져서 입을 꼭 다물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웠는지 매번 웃음이 나왔다.
이날은 결국 상자이불을 머리까지 덮고 잤다. 온 몸 가득히 지휘관과의 추억을 품고서.
***
그리고 시간은 또 흘러서 어느 봄날.
겨울이 지났는데도 날씨는 춥고 바람이 가득했다.
나는 이날 지휘관의 사망소식, 부고를 들었다.
편지함에서 꺼낸 종이를 읽으며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중에 알아낸 바에 의하면 지휘관은 오래 전에 지휘부를 떠났다고 한다.
떠나기 전 유언마냥 남긴 한마디는 "질렸어." 인형들은 처음에 충격 받았지만 계속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도리어 영영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한참을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다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지휘부에 있었다.
그렇게나 화려하고 시끄러웠던 지휘부는 이제 눈만 수북이 쌓인 폐허나 다름없었다.
복도에 널려있는 물건들을 피해서 나는 지휘관실로 향했다.
쓸쓸하게 책상과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지휘관실. 그곳에서 나는 멀뚱히 눈만 껌뻑이며 자리에 앉았다.
오래 전에 지휘관이 했던 말이 있었다. 가족이 다 죽고 나서 집에 오니 의자는 네 개인데 앉은 사람은 혼자였더라.
그래서 전부 없애버렸댄다. 팔고 버리고 구석에다 보이지 않게 치웠댄다. 왜냐하면 이제 누구도 사용하지 않을테니까.
그것을 회상하고서 나는 다시 눈을 떴다. 머리에 쌓인 눈이 지나간 시간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처분한다. 그래, 아직 처분할 것이 하나있다. 나는 눈을 털고서 지휘부 밖으로 나왔다.
내가 발걸음을 향한 곳은 어느 외진 산구석이었다. 마른 나뭇가지가 무성한 이곳은 인적이 드물어 뭔가를 버리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버려진 무덤이 혼자 쓸쓸히 지키고 있었다. 사교성이 없는 게 지휘관다운 무덤이었다. 나는 조용히 곁에 누워 무덤을 보았다.
"어때요? 이러면 따뜻하지요?"
나는 한마디 말을 건네며 눈을 감았다.
곧 지휘관이 다가와 내 손목을 잡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휘관의 인형이니까.
그러니 그때까지 조용히 기다리자.
온몸 가득히 추억을 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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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