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7월 25일 무솔리니는 두체(Duce, 지도자)에서 쫓겨났다. 수천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로마로 진군하여 파시스트 천하를 연 지 20년하고 9개월 만이었다. 하지만 그를 끌어내린 사람들은 분노한 민중이나 쿠테타를 일으킨 군대가 아니었다. 지난 20년 동안 무솔리니에게 온갖 아첨을 늘어놓으며 함께 권력을 누렸던 파시스트 지도자들과 장군들이었다. 그 중에는 심지어 오랜 심복이자 사위인 치아노도 있었다.
무솔리니의 몰락을 알리는 뉴욕 타임즈의 1943년 7월 26일자 기사. 무솔리니를 대신한 자는 기회주의자인 바돌리오 원수였다.
무솔리니는 마음만 먹으면 이들의 배신을 막을 수 있었다. 자신을 끌어내릴 음모를 꾸미고 있는 대평의회를 소집한 것도 무솔리니였고 이들을 체포하라는 아내 라첼레의 말을 무시한 것도 무솔리니였다. 무솔리니 스스로 음모자들을 위해서 최고의 무대를 마련한 꼴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뒤에야 그는 그동안 경멸해왔던 국왕에게 허둥지둥 달려가 구명을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로마에서 100km 떨어진 휴양지인 캄포 임페라토레(Campo Imperatore)에 감금된 채 닥쳐올 운명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무솔리니의 리즈 시절인 1930년대에 그를 찬양하기 위해 건설된 호텔은 이제 그의 감옥이 되었다. 그가 22년이나 파시스트들의 지지를 받으며 철권통치를 했다는 점에서 내전을 촉발할 수도 있었지만 정권 교체는 순탄했다. 무솔리니에게 충성하던 파시스트 단체들은 침묵했고 자신들의 수령을 구출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1940년 이후 무모한 도박이 매번 실패로 돌아갔던 무솔리니였지만 한 가지 예언만은 적중했다. 이제와서 이탈리아가 혼자 살겠다면서 빠져나가려고 한들, 히틀러가 놓아 줄 리 없다는 것이었다. 소련과의 싸움에만 집중하느라 동맹자가 완전히 파멸에 몰려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히틀러는 뒤늦게야 개입했다. 히틀러가 자랑하는 제1SS기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하여 동부전선에서 용맹을 떨치던 독일군의 정예 기갑사단들이 줄줄이 이탈리아로 들어왔다.
9월 8일 저녁 6시 30분, 라디오에서 이탈리아의 항복을 알리는 아이젠하워의 연설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이탈리아인들은 드디어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났다면서 기뻐하기에는 너무나 일렀다. 독일군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게다가 무솔리니를 끌어내린 자들은 더욱 무능하고 비겁했다. 국왕과 신임 총리 바돌리오, 군 수뇌부는 저항 대신 국민과 군대를 버리고 자기들만 살자고 달아났다. 로마는 사흘 만에 함락되었다.
이탈리아군의 일부는 연합군과 한편이 되어 독일군에게 총부리를 돌렸고 일부는 독일군과 함께 싸우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나 200만명이 넘는 이탈리아군 대부분은 무기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순한 양처럼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고 독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투입되었다.
로마 시내에서 이탈리아군과 교전 중인 독일 제2공수사단 병사들. 이탈리아군은 숫적으로 월등히 우세했기에 독일군도 어려운 싸움이 될 수 있었지만 지도부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채 달아나는 바람에 대혼란에 빠지면서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다.
무솔리니를 죽음에서 구해낸 것은 그의 오랜 추종자들이 아니라 독일군이었다. 9월 12일 오토 스코르체니 소령이 지휘하는 친위대 특수부대가 무솔리니의 위치를 알아낸 후 호텔을 급습했다. 전투는 없었다. 스코르체니와 동행한 로마 경찰 국장 페르난도 솔레티(Fernando Soleti) 장군 덕분이었다.
스코르체니는 이탈리아 장군이 기습에 참여한다면 이탈리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려 작전이 좀 더 순조로우리라 기대했다. 효과는 그 이상이었다. 200여명이 넘는 이탈리아 경비병들은 수적으로 기습자들보다 두 배 이상 많았지만 애초에 저항할 의지조차 없었던 이들은 솔레티 장군이 무기를 버리라고 소리치자 싸우지 않고 잽싸게 항복했다.
탈출에 성공한 무솔리니는 스코르체니의 호위를 받으며 뮌헨으로 향했고 먼저 피신해 있었던 가족들과 재회했다. 사흘 뒤 동프로이센 라스텐부르크(Rastenburg)의 볼프스 샨체(Wolfsschanze, 늑대 소굴)에서 히틀러를 만났다. 하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솔리니의 강철같은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던 히틀러는 그의 형편없는 몰골에 큰 충격을 받아야 했다.
탈출에 성공한 무솔리니는 스코르체니의 호위를 받으며 뮌헨으로 향했고 먼저 피신해 있었던 가족들과 재회했다. 사흘 뒤 동프로이센 라스텐부르크(Rastenburg)의 볼프스 샨체(Wolfsschanze, 늑대 소굴)에서 히틀러를 만났다. 하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솔리니의 강철같은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던 히틀러는 그의 형편없는 몰골에 큰 충격을 받아야 했다.
여전히 무솔리니는 히틀러 앞에서 허세를 부렸지만 더 이상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길 수 없었다. 사자의 가면이 벗겨지자 나타난 것은 겁에 질린 양이었다. 히틀러는 오랜 우정을 내세우면서도 나치의 전쟁에 끝까지 협조해 줄 것을 요구했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시골 마을인 샬로(Salò)를 새로운 수도로 삼고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건국과 파시즘의 부활을 선언했다.
로마로 복귀하지 못한 것은 전선에서 가깝다는 이유였다. 영토는 이탈리아 전체의 2/3, 인구는 2천만명에 달했으며 주요 산업시설이 집중된 이탈리아 북부를 차지했다. 독일군에 의해 해산된 이탈리아군도 '국가공화국군'이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4개 사단 5만2천명에 달했다. 후방의 치안 부대까지 합하면 최대 40만명에 이르렀다. 총사령관은 리비아와 에티오피아의 잔혹한 도살자이자 북아프리카의 무능한 패전지장이었던 로돌포 그라치아니 원수였다. 그 밖에도 2만명이 독일군의 외국인 의용군으로 입대했다.
1943년 11월 독일 장군 앞에서 사열 중인 국가공화국군. 독일군에게 철저히 종속된 괴뢰 군대였다. 게다가 군대라기보다는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오합지졸에 독일군의 힘만 믿고 약자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갱단이나 다름없었다. 일부 부대는 독일군과 함께 최전선에 투입되어 활약한 사례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은 후방에서 같은 이탈리아인들과 싸웠고 종전까지 약 10만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러나 아무런 실권도 없는 허수아비 정권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이탈리아를 지배하는 쪽은 독일군이었다. 히틀러는 독일군의 포로가 된 이탈리아군의 석방도 거부했다. 이탈리아인들을 더 이상 동맹국이 아니라 패전국으로 취급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무솔리니 자신도 독일군의 엄중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히틀러는 그를 해방하는 대신 자신의 죄수로 삼은 것이었다.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란 독일판 만주국이었다. 사위 치아노를 비롯하여 무솔리니 실각에 가담했지만 어영부영하다가 연합군 진영으로 달아나지 못한 파시스트 지도자들은 모조리 체포되어 무솔리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독일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딸 에다가 울면서 아버지에게 구명을 호소했지만 무솔리니에게는 배신자들의 처분조차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없었다.
1944년 1월 11일 베로나에서 총살당하는 파시스트당 지도자들. 왼쪽 세번째(뒤돌아보는 사람)가 치아노이다. 장인의 실각에 앞장섰던 그는 에다의 설득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독일로 망명했다. 무솔리니는 자신이 그토록 총애했으며 후계자로 여겼던 사위가 배신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도 에다의 호소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히틀러의 압력으로 처형 명령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무솔리니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깨닫자 한층 의기소침해졌다. 일부 측근들은 그가 자살하지 않을까 우려할 정도였다. 물론 그럴 용기조차 없었다. 한번 몰락한 무솔리니로서는 히틀러에 의해 두번째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지만 파멸을 잠시 늦춘 것에 지나지 않았다. 1945년 4월이 되자 두번째 몰락이 현실로 닥쳤다. 독일의 패망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었다. 연합군과 소련군이 양면에서 베를린을 향한 레이스에 한창이었다. 남쪽에서는 고딕라인을 돌파한 연합군의 총공세가 4월 9일 시작되었다. 추축군의 방어선이 붕괴되면서 연합군이 이탈리아 북부로 쇄도했다. 추축 진영의 최후가 닥치고 있었다.
연합군이 가까이 오면서 무솔리니는 4월 17일 수도를 스위스 국경에서 가까운 밀라노로 옮겼다. 여차하면 스위스로 튀겠다는 속셈이었다. 4월 25일에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총궐기에 나섰다. 노동자들은 무기를 들고 공장을 점거했다. 증오에 가득한 파르티잔들은 그동안 거들먹거리던 파시스트 당원들을 체포한 뒤 거리에서 집단 총살했다. 해방자를 자처하면서 도시에 들어온 연합군이건, 제 살길 급급한 독일군이건 어느 누구도 이들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 밀라노를 비롯한 주요 도시는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다.
무솔리니가 선택할 길은 세가지였다. 첫번째는 충성스러운 병력을 모아서 알프스 산맥에서 최후의 항전에 나서는 것이었다. 명예롭기는 했지만 불가능했다. 독일군은 연합군에게 항복할 태세였고 국가공화국군 역시 제 살길을 찾겠다면서 흩어졌기 때문이었다. 두번째는 연합군과 협상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파르티잔이 허용할 리 없다는 점이었다.
파르티잔은 무솔리니를 원했다. 무솔리니는 연합군과의 결전은 고사하고 게릴라를 제압할 능력조차 없었다. 무솔리니는 밀라노의 주교인 슈스터(Cardinal Alfredo Schuster)더러 연합군과 중재에 나서주기를 요청했지만 그는 허황되게도 조건부 항복을 원했고 슈스터는 중재를 거절했다.
게다가 밀라노 주지사인 셀리오(Signor Celio)는 도시에서 유혈을 피하려면 무솔리니가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솔리니도 싸울 의지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히틀러나 스탈린, 처칠과 같은 불굴의 의지와 거리와 멀었던 그는 그는 마지막까지 우유부단했고 안전한 곳에서 구차한 삶을 원했다. 일부 측근들은 차라리 밀라노에서 결사항전하자고 주장했지만 수령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남은 것은 한가지였다. 무솔리니는 스위스를 거쳐서 스페인으로 달아날 생각이었다. 그곳은 마지막 파시즘 신봉자 프랑코가 통치하고 있었다. 25일 저녁 무솔리니는 기관단총을 들고 차에 오른 다음, 북쪽의 코모(Como)로 향했다. 파르티잔에게 붙들리기 원치 않는 파시스트 지도자들과 가족들도 함께였다. 이들은 15대의 차에 나누어 탄 뒤 출발했다.
그라치아니 원수가 데려온 흑셔츠 1개 소대와 독일 친위대를 태운 2대의 트럭이 뒤따랐다. 그는 출발 전 밀라노의 흑셔츠 병사들을 한 자리에 모은 다음, 해산령을 내리고 각자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라고 지시했다. 무솔리니 제국이 일장춘몽마냥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밤 9시 코모에 도착했지만 이곳은 파르티잔의 활동지역이었기에 결코 안전하지 못했다. 무솔리니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안다면 대번에 습격할 것이었다. 사람들은 지쳤지만 휴식을 취할 만한 장소조차 없었다.
무솔리니는 잠시 눈을 붙인 다음 26일 새벽 4시 코모를 떠나 북쪽 25km 떨어진 메나지오(Menaggio)로 향했다. 속도는 한없이 느렸다. 밤 9시에야 메나지오의 흑셔츠 여단 병영에 도착했다. 스위스 국경까지는 불과 15km였다. 이곳에는 아직까지 무솔리니에게 충성하는 흑셔츠 여단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병사들을 불러모아서 싸우게 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무솔리니의 한없이 우울하고 의기소침한 모습은 그를 따라온 측근들을 더욱 실망시켰다. 파시스트 당서기인 알렉산드로 파보리니(Alessandro Pavolini)가 두 대의 장갑차와 함께 도착했다. 그는 무솔리니더러 군대를 데려오지 못한 것을 사죄했다. 한 줌의 호위병과 독일 친위대원들 이외에 더 이상 합류하는 이탈리아군은 없었다. 모두 달아났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무솔리니는 우연히 이곳을 지나는 200여명의 독일군 행렬을 발견했다. 독일 공군 소속의 고사포 부대원들은 총통의 명령에 따라 무솔리니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독일로 후퇴 중이었다. 베를린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히틀러는 옛 동맹자이자 더 이상 쓸모없는 하수인에게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27일 새벽 5시 무솔리니는 더욱 북쪽으로 향하기 위해서 독일군과 함께 메나지오를 떠났다. 그 때까지 그는 이탈리아 민병대의 회녹색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독일군복으로 갈아입었다. 이탈리아군보다는 독일군 행세를 하는 쪽이 파르티잔들로부터 좀 더 안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의 옆에는 소수의 측근 외에 33살의 애인 클라라 페타치(Clara Petacci)만이 남아 있었다. 무솔리니는 아내 라첼라와 자녀들을 한발 먼저 코모를 떠나도록 했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자신의 조강지처 역할을 충실히 한 아내에게 편지를 남기면서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유일한 여성"이라고 썼다.
라첼라는 스위스 국경에 도착한 뒤 망명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녀는 코모로 다시 돌아와야 했고 파르티잔에게 붙들렸다. 그나마 남편과 그의 정부(情夫)보다는 운이 좋았다. 파르티잔은 그녀를 총살하는 대신 미군에게 넘겼다. 라첼라는 수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 후 풀려났고 고향에서 식당을 하다가 1979년에 89살의 나이로 죽었다. 이탈리아 공군 비행사 출신의 장남 비토리오는 비행기를 타고 아르헨티나로 달아났다.
그는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67년에 이탈리아로 돌아와 1997년에 죽었다. 장녀 에다는 진작에 스위스에 망명했다. 단물이 다 빠진 상전을 쫓아가봐야 재미가 없다고 판단한 그라치아니는 저항군을 조직하기 위해서 자신의 사령부로 돌아가겠다는 핑계를 대고는 달아났고 며칠 뒤 연합군에게 투항했다. 무솔리니는 클라라에게도 떠나라고 권유했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마지막까지 두체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것이었다.
1945년 4월 25일부터 28일까지 무솔리니 일행의 도피 경로
무솔리니에게는 불행히도 그의 앞에 파르티잔이 기다리고 있었다. 25살의 젊은 파르티잔 지휘관 피에르 루이지 스텔레(Pier Luigi Bellini delle Stelle)가 이끄는 제52돌격여단 '루이지 클레리치(Luigi Clerici)'는 여단이라는 거창한 명칭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수십여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훈련도 거의 받지 못했고 무기 또한 소총과 수류탄이 전부였으며 식량과 보급품이 없어 굶주리고 있었다.
전날 담배와 식량을 구하려고 산에서 내려온 파르티잔 대원들은 기왕 하산한 김에 우연히 지나가는 파시스트 부대의 수송차량을 습격할 요량으로 도로를 봉쇄했다. 게다가 이들이 매복한 메나지오 북쪽 10km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 무소(Musso)는 메나지오에서 스위스나 오스트리아로 후퇴하려면 반드시 지나지 않으면 안 되는 유일한 퇴각로였다.
이 날에도 아침 일찍부터 만만한 먹잇감을 찾아나온 파르티잔 대원들은 뜻하지 않은 횡재를 만나게 되었다. 무솔리니 일행이 메나지오를 출발한 지 1시간 반 뒤인 새벽 6시 30분, 선두의 장갑차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파르티잔이 설치한 장애물에 가로막혔기 때문이었다. 산 위에서 총탄이 날아오자 장갑차도 응사했다. 몇 분 동안 짧은 전투가 벌어졌다. 사상자는 없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 날에도 아침 일찍부터 만만한 먹잇감을 찾아나온 파르티잔 대원들은 뜻하지 않은 횡재를 만나게 되었다. 무솔리니 일행이 메나지오를 출발한 지 1시간 반 뒤인 새벽 6시 30분, 선두의 장갑차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파르티잔이 설치한 장애물에 가로막혔기 때문이었다. 산 위에서 총탄이 날아오자 장갑차도 응사했다. 몇 분 동안 짧은 전투가 벌어졌다. 사상자는 없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싸울 의지가 없는데다 지상전 훈련을 받지 않은 독일 고사포병들은 이탈리아인들의 싸움에 휘말리기 원치 않았다. 이들은 백기를 내걸고는 사격을 중지시키고 협상을 요구했다. 스텔레는 독일군이 무기와 이탈리아인들을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면 자유롭게 지나가도 좋다고 말했다. 독일군은 연합군과 싸워야 하기 때문에 무기를 버릴 수 없다고 맞섰다. 무솔리니 일행을 습격한 파르티잔은 불과 27명이었다.
독일군은 300여명에 달했고 수십여명의 흑셔츠 대원과 두 대의 장갑차도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간단하게 격퇴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치고 지레 겁먹은 이들은 자신들이 파르티잔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고 여겼다. 지리한 협상 끝에 오후 3시 타협이 이루어졌다. 독일군은 무기 대신 이탈리아인들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탈리아인들 역시 싸울 마음이 없었다. 그렇다고 독일군이 파르티잔과 8시간에 걸친 협상을 하는 동안 달아나지도 않았다. 자포자기한 셈이었다.
이들은 순순히 무소에서 1km 떨어진 동고(Dongo)의 파르티잔 사령부로 향했고 그곳에서 파르티잔들의 수색을 받았다. 파시스트 지도자들은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했지만 금방 들통났다. 클라라도 체포되어 끌려 나갔다. 하지만 월척은 따로 있었다. 파르티잔 대원들은 한 트럭에서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한 독일 군인을 발견했다.
이들은 순순히 무소에서 1km 떨어진 동고(Dongo)의 파르티잔 사령부로 향했고 그곳에서 파르티잔들의 수색을 받았다. 파시스트 지도자들은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했지만 금방 들통났다. 클라라도 체포되어 끌려 나갔다. 하지만 월척은 따로 있었다. 파르티잔 대원들은 한 트럭에서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한 독일 군인을 발견했다.
수상하다고 여긴 스텔레의 부 지휘관인 우르반 라자로(Urbano Lazzaro)는 그를 일으켜 세운 다음 철모를 벗겼다. 철모 아래에는 머리가 완전히 벗겨진 한 노인이 있었다. 이탈리아인이라면 결코 모를 수 없는 얼굴이었다. 무솔리니였다. 그는 체념한 듯 "나는 저항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무릎 사이에 끼고 있었던 기관단총을 순순히 넘겨 주었고 양팔을 붙들린 채 트럭에서 끌려 나왔다.
훗날 라자로는 "그의 영혼은 완전히 죽은 것처럼 아무런 의지가 느껴지지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파르티잔들은 어쩌면 주변의 독일군이 무솔리니를 지키기 위해 발포하여 전투가 재개될지도 모른다고 여겼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무솔리니 이외에도 체포된 파시스트 지도자들은 50여명이 넘었다. 무솔리니는 스텔레가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말하자 그제야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심문을 위해서 동고의 시청사로 끌려갔고 방으로 들어가자 독일군 외투를 벗어던지면서 이렇게 외쳤다. "독일은 이제 질렸어! 그들은 두번째로 날 배신했어!" 심문자가 어째서 장갑차가 아니라 트럭에 탔냐고 물었지만 무솔리니는 혼자서 중얼거릴 뿐이었다.
파르티잔들은 무솔리니와 포로들을 학대하거나 분풀이에 나서지는 않았다. 스텔레는 거친 무뢰배가 아니라 귀족 출신이었고 법률을 전공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무솔리니를 최대한 정중하게 대하면서도 무솔리니가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인근의 파시스트 부대가 이들의 구출에 나설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날 저녁 7시 무솔리니는 동고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작은 마을 게르마시노(Germasino)로 옮겨졌다.
파르티잔들은 무솔리니와 포로들을 학대하거나 분풀이에 나서지는 않았다. 스텔레는 거친 무뢰배가 아니라 귀족 출신이었고 법률을 전공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무솔리니를 최대한 정중하게 대하면서도 무솔리니가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인근의 파시스트 부대가 이들의 구출에 나설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날 저녁 7시 무솔리니는 동고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작은 마을 게르마시노(Germasino)로 옮겨졌다.
그로서는 인생에서 가장 고되고 파란만장한 하루였을 것이었다. 그는 스텔레에게 클라라의 안부를 확인해 달라고 했다. 스텔레는 동고로 돌아가서 클라라에게 신분을 확인하자 그녀는 울면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무솔리니와 함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스텔레는 게르마시노로 돌아가서 무솔리니를 데리고 동고로 돌아왔고 무솔리니는 클라라와 재회했다. 두 사람은 인근의 농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농부는 무솔리니를 알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대와 먹을 것을 주었다. 무솔리니와 클라라에게는 마지막 밤이었다.
다음날인 28일 낮 몇몇 장교가 마을에 왔다. 그 중 한 사람은 스스로를 밀라노의 북부 이탈리아 민족해방 위원회(CLNAI)에서 파견된 '발레리오(Valerio) 대령'이라고 밝히고는 스텔레에게 무솔리니와 체포된 파시스트 지도자들의 신변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발레리오 대령의 본명은 발터 아우디시오(Walter Audisio)였다. 그는 여러 차례 반 파시스트 운동으로 투옥된 적이 있었고 이탈리아 북부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 파르티잔의 고위 간부였다. 아우디시오는 서면으로 된 명령서를 제시할 수는 없었다.
다음날인 28일 낮 몇몇 장교가 마을에 왔다. 그 중 한 사람은 스스로를 밀라노의 북부 이탈리아 민족해방 위원회(CLNAI)에서 파견된 '발레리오(Valerio) 대령'이라고 밝히고는 스텔레에게 무솔리니와 체포된 파시스트 지도자들의 신변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발레리오 대령의 본명은 발터 아우디시오(Walter Audisio)였다. 그는 여러 차례 반 파시스트 운동으로 투옥된 적이 있었고 이탈리아 북부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 파르티잔의 고위 간부였다. 아우디시오는 서면으로 된 명령서를 제시할 수는 없었다.
그 때까지도 밀라노의 위원회는 누가 붙잡혔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텔레는 그에게 순순히 총 49명에 달하는 명단을 넘겨 주었다. 아우디시오는 그 중에서 무솔리니와 클라라, 파볼리니를 비롯한 거물급 인사 19명을 추려냈다. 그 중에는 클라라의 오빠 마르첼로 페타치(Marcello Petacci)도 있었다. 그는 스페인 외교관 행세를 했지만 아우디시오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스텔레는 아우디시오에게 클라라가 무솔리니의 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처형할 수는 없다고 항변했지만 아우디시오는 그녀가 무솔리니에게 조언과 영감을 주었기에 똑같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우디시오는 무솔리니와 클라라를 차에 태운 다음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들은 동고에서 남쪽으로 20km 떨어진 줄리노(Giulino)라는 시골 마을에 멈추어 섰다. 호수가 보이는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그것을 즐길 여유는 없었다. 무솔리니와 클라라는 차에서 끌어내려졌고 벽에 세워졌다. 어안이 벙벙했던 두 사람은 총살형에 처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아우디시오는 무솔리니를 향해 다섯 발을 쏘았다. 무솔리니는 그대로 쓰러졌다. 이어서 클라라도 처형되었다. 오후 4시 30분 경이었다.
동고로 돌아온 아우디시오는 자신이 추려놓은 나머지 17명의 포로들도 끌어냈다. 인근 수도원에서 온 수도사가 이들을 위해 기도할 시간을 달라고 하자 아우디시오는 3분안에 끝내라고 못 박았다. 포로들은 등을 돌리라는 지시를 받은 후 처형대가 이들을 향해 발포했다. 마르첼로는 울면서 자비를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재빨리 호수로 뛰어들어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총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날 밤 10명이 더 처형되었다. 처형이 끝나자 시신들은 트럭에 실린 뒤 밀라노로 향했다. 그곳에는 성난 군중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형된 다음날 아침 밀라노의 로레토 광장(Piazzale Loreto)에 매달리는 무솔리니와 클라라, 파시스트 지도자들의 시신. 이곳은 무솔리니 치세 동안 수많은 반 파시스트 운동가들이 처형당한 악명 높은 곳이었다. 세상만사 사필귀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었다.
만약 무솔리니가 살아 있었다면 이탈리아판 뉘렌베르크 전범재판이 열렸을 것이었다. 무솔리니의 죽음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전범 처벌도 흐지부지되었다. 무솔리니의 처형을 강행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 기회에 자신들의 존재감과 파시즘의 천하를 끝장냈음을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시신을 로레토 광장 근처 한 주유소 건물에 거꾸로 매달아서 구경거리로 삼았다. 사람들은 조롱하고 침을 뱉고 돌을 던졌다. 이유가 어떠하건 무솔리니로서는 그동안 권력을 남용한 대가를 죽은 뒤에도 톡톡이 치른 셈이었다. 20여년 전 로마 진군에 성공하여 이탈리아의 독재자가 되었을 때 자신의 말로가 이럴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한낱 선동가이자 삼류 소인배였던 그는 군림할 줄은 알아도 권력에는 반드시 책임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통치 내내 신처럼 행세했던 무솔리니는 마지막 순간에야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인간인지 깨달았을 것이다.
이틀 뒤인 4월 30일, 히틀러는 자살했다. 그는 무솔리니의 최후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은 그런 꼴이 되지 않겠다고 맹세한 히틀러는 자기가 죽은 뒤 반드시 시체를 불태우라고 엄명을 내렸다. 명령은 지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