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평 : 지쿠악스=오타쿠다.
'오타쿠를 위한 작품'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타쿠 그 자체다. 현실에서 오타쿠들을 만나본 사람들은 아마 공감할걸?
오타쿠들과 비오타쿠(숨덕 포함)들이 교류하게 되면, 아래와 같은 수순이 아주 일반적으로 반복된다.
A) 오타쿠들은 대부분 첫 만남 때 기가 약하고 말수가 적다. 특히 일대일이 아니라 다수가 모인 자리에서, 오타쿠들이 구석자리에 낑겨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경우도 빈번하다. 이 단계에서 오타쿠는 대부분 수줍거나 약간 매너있어 보인다.
B) 그러나, 이런저런 계기로 이 오타쿠들과 안면을 트고, 특정 주제(대부분 *오타쿠 작품*)에 대해 대화를 나누게 되는 순간, 그들은 자신을 제어하던 모든 빗장을 풀어버리고 각종 언어와 감상을 홍수처럼 쏟아낸다.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신기한 것은, 그렇게 떠들고 있는 순간 오타쿠는 자신이 무적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C) 그리고 그렇게 한참(최소 1시간 이상) 자신만의 언어를 주루룩 풀어놓고 나서는, 또 마무리는 부족해서 다시 머뭇머뭇하는 A)상태로 돌아가버린다.
D) 반복.
지쿠악스가 딱 이렇다. 처음에는 조근조근 뭔가 이야기하려는 듯 하다가, 갑자기 퍼스트 건담 이야기를 줄창, 계속, 끝없이, 열정적으로 풀어놓다가, 마무리해야 할 때가 되니까 대충대충 펼쳐놓은거 수습하면서 머뭇머뭇하다 끝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솔직히 나는 이제 건담 별로 보고싶지 않다. 지쿠악스 볼 때는 꽤 재밌게 봤는데, 솔직히 다시 볼 생각 전혀 안들어.
내가 지쿠악스를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영 좋지 않게 보는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1) 퍼스트 좀 그만 빨아라.
이거 만든 사람이 안노든 다른 누구든 퍼스트 건담 엄청 좋아한다는 거는 잘 알겠다. 아 물론 나도 좋아해. 근데 지쿠악스에서는 지쿠악스 이야기를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퍼스트 건담 없이 지쿠악스의 이야기가 어떻게 성립되나?이 작품은 좋아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때만 말이 많아지는 오타쿠 그 자체다. 순간순간의 임팩트, 매 주마다의 기대감만을 가지고 놀면서, 정작 내용은 텅 비었다.
그래서 이 작품이 말하고 있는, 말하고 싶은게 대체 뭔데? 내용이 없어, 지쿠악스, 지프레드, 마츄, 냐안, 마츄 엄마 죄다 그냥 깊이없이 소비되고 끝나버린다.
2) 좀 스토리는 어느 정도 구성한 다음 만들어라.
엔딩까지 일단 구성을 한 다음 만들어라 좀. 일본 애니 업계에서는 그게 안되나? 시뎅, 철혈, 수마, 지쿠악스 죄다 똑같다.
A) 괜찮은 소재로 기대받으면서 시작한다. 초반에는 힘도 좋고 밀도도 꽉꽉 들어차서, 이번에야말로 맛도리라는 기대를 받는다.
B) 쓸데도 없고 원 주제와도 별 상관없는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나오더니, 정작 큰 스토리 자체는 거의 진행되지 않는 느릿한 톤이 한참 유지된다. 슬슬 시청자들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C) 엎질러놓은거 주워담아야 하니까 헐레벌떡 허접지겁 천방지축 한두화만에 그간 쌓아온 빌드업 죄다 허접하게 회수한다. 이 과정에서 이전에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주제들은 이미 온데간데 없고, 이 정신없는 와중에서 주인공은 별 계기도 없이 타락하거나, 성장하거나, 아무튼 뭔가 사람이 바뀌는데 왜 바뀌었는지 아무도 모름.
D) '그리고 모두들 행복하게 살았습니다'하고 끝.
지쿠악스가 총 12화인 걸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감독은 느릿-느릿한 전개를 계속해서 이어나간다. 작품의 밀도라는 측면에서, 지쿠악스는 굉장히 공허하게 날아가는 시간이 많다. 얼굴 클로즈업한 상태로 한 3분동안 입만 오물거리면서 이야기하거나, 멋진 풍경 비추면서 '사실 그거는 그랬단 말인가?'하면서 별 쓸데도 없는 설정 나불거림 하는 장면이 작품 총 재생 시간의 절반을 훌쩍 넘는다. 특히 뉴 타입 단톡방, 시간은 무진장 잡아먹는데 정작 제대로 된 내용 설명은 하나도 없어, 그냥 서로 한두마디씩 떡밥 던질 뿐.
3) 등장인물은 어떻게 활용할지 먼저 생각좀 하고 구성해라.
오프닝에서 소돈 멤버들은 꽤 중요한 것처럼 나온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얘네들이 서사에서 맡은 역할? 하나도 없다.
라시트 중령은 끝내 시트에서 단 한번도 일어나지 않고 그저 불평 불만만을 늘어놓을 뿐이다. 저러다 치질이 걸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얘네들 나오는 장면은 거의 전부 쓸모없는 장면, 그냥 설정놀음하는 장면 뿐이다.
코모리? 얘도 10화 내내 한쪽 구석에 서서 불평불만만 늘어놓다가, 11화가 되서 스토리 수습해야 할 때쯤 되니까 갑자기 설명충이 되서 뭔지 알아듣기도 어려운 설정놀음을 다다다다 쏘아낼 뿐이다. 설정을 그 시점에서 다다다 풀어내서 대체 뭐하자고?
어쩌구저쩌구 하는 샤론의 장미가 저쩌구그렇구를 반복해서 먼 세계에서 왔는데 그게 제크노바가 요리조리 되는거고... 11화 시점에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이거, 그야말로 에반게리온 리피트 그 자체다. 가프의 방이 어쩌구저쩌구, 네온 제네시스가 뭐 어떻게 되서 쁘띠 임팩트가 요래조래 한다는 식의 이야기. 설정은 이야기에 녹여냈을 때 의미가 있다. 그걸 등장인물 입으로 일일이 설명하는 것만큼 짜치는 것도 없지. 그렇다고 그 설정이 현실 세계의 것도 아니고, 그냥 쓰여진 이야기일 뿐인 거잖아.
이그자베? 그래서 얘가 뭐 했는데. 얘가 키시리아를 보호하려는 이유가 대체 뭔데? 이 캐릭터가 대체 무슨 역할을 맡은건지 아무도 모를걸? 그냥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적 캐릭터 필요하니가 끼워넣었다는 느낌이다. 이그자베가 '그렇게 행동해야 할 만한' 당위, 즉 개연성 있는 중간 과정이 없어.
안키? 그렌라간에 나올 법한 비주얼과 캐릭터성으로 얘네들이 하는거? 생각해봐. 얘네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안에서 클랜배틀 보면서 놀았을 뿐이야. 서사적 역할이랄게 없다고. 얘네가 마츄를 타락시켰나? 아니야. 그냥 마츄가 원래부터 맛이 좀 가 있었어. 얘네가 냐안을 변화시켰나? 아니야, 냐안이 알아서 맛이 갔어.
두? ...어, 음.
전체적으로 여러 등장인물들이 그럴듯하게 가오 잡으면서 등장하긴 하는데, 전부 대충 사용되고 대충 버려져. 깊이 있게 다뤄지는 것은 오로지 샤아, 키시리아, 샤리아 불 셋 뿐이다. 얘네의 공통점? (다른 이들과 다르게) 퍼스트 건담의 등장인물이라는 거지. 퍼스트 이야기가 하고 싶으면 퍼스트를 리메이크하든 다시 만들든 해야지, 왜 아닌 척 지쿠악스를 만들고 있지?
4) 평행 세계 좀 그만해.
평행세계가 등장하고, 이렇게 평행세계를 널뛰듯 건너뛰는 능력이 주요 소재로 다루어지는 작품은 여럿 있다. 대표적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그렇지. 그렇지만 건담이 그러면 안된다. 왜냐하면 진짜 평행세계 그 자체인 외전들이 수두룩 빽빽한 작품이잖아. 그 세계관 사이를 널뛰게 되는 순간 생기는 부작용은 '이야기가 엷어지는 것'이다.
역습의 샤아에서 사야는 아무로와 함께 사망한다. 이 사망을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서 감동이, 슬픔이, 메시지가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평행세계를 건너뛸 수 있게 되는 순간, 사망 자체의 무게감과 사망한 인물의 무게감이 동시에 사라진다. 평행세계에서 다시 시도하면 되잖아? 이번에 실패했어? 다음에 잘해봐. 죽은 인물? 평행 세계에서 데려오면 되고.
건담의 테마는 오래 전부터 반전이었고, 전쟁을 반대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전쟁으로 죽은 사람의 목숨은 되돌릴수가 없기 때문'이다. 근데 그런 작품에서 초능력자 한명이 이얍!하고 세계를 수십번씩 리셋한다는 이야기가 되면 원래의 테마는 의미가 없어지지. 거기서 수십번씩 죽은 수십억명의 인물들한테 무슨 의미가 있어?
샤아가 죽는 각각의 세계선에서, 옆에 가까이 있던 인물들(대표적으로 샤리아 불, 드렌 등등)도 대부분 같이 죽었을걸? 걔네의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나? 없어. 종이인형만큼이나 얄팍할 뿐. 오히려 이런 얄팍함이 등장인물에 대한 애정을 더 깎아먹는다.
이 작품에는 치열함, 진지함, 분노나 복수같은 '감정'이 없다. 그저 설정만이 얄팍하게 나풀거릴 뿐. 아 물론 감정을 보여주는 애가 있지. 마츄라고. 근데 걔가 왜 그런 감정을 보여주는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다. 얘는 갑자기 ㅁ쳐서 ㅁ친 짓을 한다는 것 말고, 감정이 제대로 발달하는 서사 자체가 없다. 냐안? 수십만명을 죽여놓고도 아무 감흥도 없는 사이코패스에게 어떤 '감정'이 있는게 맞지?
샤리아, 샤아, 코모리, 이그자베 다 똑같다. 이야기의 수단으로서 소모될 뿐, 제대로 된 감정을 그리 보여주지 않아. 감정선이 제대로 사건과 맞물려 돌아가는 유일한 인물은 라라아 옆의 죽은 눈 하고 있는 꼬마 메이드 뿐이다. 걔는 왜 그러는지 알겠어. 근데 이 세계선의 라라아는 어떤가? 꿈 때문에 정신이 나갔는데, 마츄가 같이 가자고 해도 거부한다. 이거 왜 그러는지 이해가는사람? 그냥 '뉴타입이라서 뭔가 그럴수도 있겠지'라는 식이야. 뭐가 제대로 앞뒤가 맞는게 없다는 이야기를 그래서 했던 거지.
5) 뉴타입 좀 그만해.
초능력자가 어쩌고저쩌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어쩌고저쩌고. 이야기의 흐름이 애매해지면 어김없이 뉴타입이 나와서 '그래, 뉴타입이면 그럴 만한지'하고 떡밥던지면서 지나가 버리는거 진짜 너무 싫음.
제대로 이야기가 앞뒤선후 기승전결 맞게 돌아가질 않아.
거기다 뉴타입 한명이(아무리 강한 뉴타입이래도) 막 세계를 리셋해버리는 초능력을 보여주는 시점에서 이건 뭐...
6) 떡밥 좀 그만 던져.
지쿠악스는 끝날 때까지 떡밥, 그것도 퍼스트 건담 떡밥만 줄창 던진다. 정작 지쿠악스 이야기는 거의 하지도 않아. 걔가 입 벌린게 무슨 의미였는데? 안나옴. 마츄는 왜 그렇게 행동했는데? 안나옴. 슈우지는 결국 누구였는데? 안나옴. 냐안은 수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그 죗값은 어떻게 치르는데? 안나옴. 코모리랑 이그자베는 사귀는 거야? 안나옴.
그냥 줄창 뭔가 있어보이는 떡밥만 잔뜩 던지고, 끝에 가서 아무것도 없는 공허함만 남아있지.
나는 지쿠악스를 보면서 진심으로 실망했다. 재미가 없었냐고 물으면 재미가 있긴 했는데, 다시 볼 생각도 전혀 없고, 안노든 츠루마키든 같은 감독의 다른 작품도 볼 생각 안든다. 또다른 '건담' 후속작이 나와도... 글쎄... 수마, 철혈, 지쿠악스 전부 싸다 끊고 안닦은 더러운 느낌만 잔뜩 있었으니, 다음 건담 작품이 나오면 '개쩐다'라는 후기가 나오기 전엔 안볼거같다. 아니, 퍼스트건담 좋다는거 인정하는데, 79년도에 나온, 저작권도 슬슬 만료되어가는 작품보다는 더 나은 게 하나쯤은 나와야 할거아냐.
진짜로 건담 프렌차이즈가 이런 식으로만 진행될거라면, 나는 망하는게 맞다고 본다. 할배들 척추세워주는 거 좋지. 아주 찬성이야. 근데 그거 말고 아무것도 없다면, 할배들이랑 같이 사라지게 되는 것도 당연한 거 아니냐?
(IP보기클릭)125.130.***.***
40년 넘게 퍼스트 건담에 매몰된 늙은 오타쿠들이 만든 고퀄리티 동인지 이상도 이하도 아님 정작 본인들이 추앙하는 토미노는 작품 활동에서 끊임없이 자기 파괴와 탈피를 반복하고 있지만...
(IP보기클릭)125.130.***.***
40년 넘게 퍼스트 건담에 매몰된 늙은 오타쿠들이 만든 고퀄리티 동인지 이상도 이하도 아님 정작 본인들이 추앙하는 토미노는 작품 활동에서 끊임없이 자기 파괴와 탈피를 반복하고 있지만...
(IP보기클릭)210.126.***.***
79년에서 벗어나질 못하고있음... | 25.06.25 07:49 | | |
(IP보기클릭)211.216.***.***
(IP보기클릭)210.126.***.***
아주 세부적인 부분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내용을 어떻게 정해놓고 어떻게 분배할지는 작품 제작전에 생각했어야 한다고 봄... 그게 안되니 이렇게 소드마스터 야마토가 반복되는 거 같구. | 25.06.25 07:50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