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하나 떠 있지 않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부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숲속에서 인형들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장 앞에 있는 건 철혈의 인형병이었다. 그녀는 불에 그슬린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넝마나 다름없이 군데군데 찢어진 옷 사이로 총알 자국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관절 부위에서 불똥이 튀는 두 다리가 주인에게 아우성을 치는 듯했다. 다리를 내디딜 때마다 조금씩 절뚝거리는 게 보였지만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인형병이 쓰러진 통나무를 뛰어넘었다. 말라비틀어진 잎사귀들이 부서졌다. 끊어진 인계철선들이 거미줄처럼 그녀의 발목에 들러붙었다. 바로 등 뒤에선 총알이 매섭게 날아오고 있었다. 총알들이 빈 가지만이 남아 있는 나무들을 때리면서 크고 작은 파편들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숲 끝에까지 들릴 만큼 요란한 총성이었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달아나지 않았다. 숲은 이미 차디찬 겨울 속에 깊이 잠든 지 오래였다.
인형병이 지나가는 곳마다 널브러진 철혈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그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던 인형들이 물웅덩이에 고개를 처박은 채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총들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쇠끼리 부딪치며 나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한쪽밖에 남지 않은 귀를 만지작거리면서 틈이 날 때마다 고개를 돌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여유를 비웃기라도 하듯 추격자들의 공격이 거세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든 유탄 한 발이 인형병의 코앞에서 폭발했다. 볼링핀처럼 튕겨 나간 그녀의 눈앞으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저격병의 머리가 뒹굴었다. 필사적으로 내민 그녀의 손에 잡히는 건 탄피뿐이었다. 추격자들의 고함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맞췄다, 빌어먹을 년!"
"빨리 다리부터 노려. 언니, 목표물이 쓰러졌어!"
인형병이 흙더미를 움켜쥐면서 꿈틀거렸다. 코가 반으로 찢어지고 깜짝 상자의 광대 인형처럼 튀어나온 눈알이 대롱거렸다. 간신히 일어서려는 찰나 총알들이 그녀의 다리에 꽂혔다. 땅밑으로 스며들던 물줄기에 피가 번졌다. 불빛들이 그녀를 비추었다. 힘겹게 내뱉는 숨소리가 단말마처럼 들렸다. 앞에서 불빛 하나가 인형병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거센 발길질이 그녀의 얼굴을 강타했다. 연이어 목과 등이 짓밟히고 튀어나온 눈알이 뽑혀나갔다. 추격자가 그녀의 머리채를 붙들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안녕, 골칫거리. 이제야 잡았네."
UMP45의 산뜻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인형병의 얼굴을 몇 번이나 패대기치면서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인형병은 얼굴이 부서지는 와중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UMP45가 그녀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밀고 직성이 풀릴 때까지 방아쇠를 당겼다. 피 묻은 부품들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가 빗방울과 함께 떨어졌다. UMP45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인형병의 주먹 쥔 손을 펼쳐냈다.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상자에서 꺼낸 메모리 카드를 훑어보고 내가 볼 수 있게 머리 위로 흔들었다. 그녀의 소대원들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UMP9는 처참하게 망가진 인형병을 보고 어린아이처럼 환호했다. 유탄으로 결정타를 날렸던 HK416은 꾸벅꾸벅 졸아대는 G11을 꿀밤으로 닦달해주고 있었다.
"좋아, 잘 했어." 내가 말했다. "놈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빨리 빠져나가. 헬리콥터가 기다리고 있어."
"그게 다예요? 섭섭한데요, 지휘관."
UMP45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위장용 잎사귀들이 들러붙은 후드 재킷 안쪽으로 빗물에 젖은 흰색 와이셔츠가 화면에서도 훤히 비쳐 보였다.
"아직 무사히 돌아온 게 아니잖아. 칭찬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네, 네. 이것도 나중에 가져다드릴 테니까 그런 줄 아세요."
"45, 나도 그것 때문에 한숨도 못 잤어. 제발 얌전히 돌아와 줘."
"누가 들으면 제가 사고치고 다닌 줄 알겠네요. 9, 집에 갈 시간이야."
그녀가 철수 지점으로 달려가는 걸 본 뒤에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나는 UMP45와 인형병의 시체를 비추고 있던 화면들을 헬리콥터 주변으로 전환했다. 그곳에도 쓰러진 철혈들이 한가득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한 광경이었건만 뜻대로 잘 안 되는 게 걱정이었다. 태연하게 시체를 넘어 다니는 UMP45를 보고 있자니 내 고민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숲 바깥에서 철혈들이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지만, 헬리콥터는 이미 떠나간 뒤였다.
나는 헬리포트 앞에서 수건을 들고 그녀들을 기다려주었다. UMP45가 헬리콥터 문을 열고 나왔다. 떠나기 전에는 윤기 있던 머리카락이 지금은 불린 미역처럼 축 처져 있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면서 내게 다가왔다. 온종일 전투를 치렀는데도 언제나처럼 꼿꼿한 자세였다.
"수고했어."
내가 수건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물기를 머금은 재킷에서 진한 풀냄새가 올라왔다. UMP9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달려와 수건을 가져갔다. 나는 남은 수건들을 HK416에게 던져주었다. 그녀는 졸고 있는 G11의 얼굴에 수건을 던져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UMP45가 내 곁에 붙어서 남은 물기를 털어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집무실까지 걸어갔다. 당직실의 복도 앞에서 잡담을 나누던 인형들이 UMP45를 보자마자 바짝 긴장한 채로 벽에 기대섰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나를 비롯한 보는 이들에겐 즐거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방 안에 열려 있는 창문들을 닫는 동안 주머니에서 상자를 꺼내 책상에 올려놓았다.
"여깄어요, 고생한 만큼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으면 좋겠네요."
나는 온풍기를 틀어놓고 상자를 열었다. 흙이 좀 묻긴 했지만 메모리 카드는 멀쩡했다. 그리폰의 본사로 배송 중이던 드론이 격추되면서 떨어진 물건이었다.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는 점만 빼고 내가 이 물건에 더 신경 써야 할 여지는 없었다. 나는 상자를 보관함에 넣어놓고 보온병에 담겨 있던 커피를 머그잔에 따라서 UMP45에게 건네주었다. 장갑을 벗은 그녀의 손이 코끝처럼 새빨갰다.
"손 괜찮은 거야?" 내가 물었다.
"좀 차갑긴 하지만 이 정도는 문제없어요."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가린 채로 고개를 돌렸다. 재채기를 하고 있었다. 이틀 내내 비에 흠뻑 젖은 옷을 입고 다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샤워부터 하고 오지그래?"
"몸 좀 데우고 가면 괜찮아질 거예요. 다른 임무 들어온 거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니, 당분간 전투 임무는 없어. 있더라도 너희를 내보낼 리가 없잖아. 일 생각은 접어두고 푹 쉬고 있어."
"고마워요, 지휘관."
"뭘, 내가 더 고맙지."
UMP45는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다시 한번 재채기를 했다. 이번엔 기침도 섞여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온풍기 주변에 서 있기만 할 뿐 숙소로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손을 잡아봤더니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지휘관?"
"가만히 있어 봐."
나는 털옷만큼 무거워진 그녀의 재킷을 벗겨주었다. 홍시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양쪽 볼은 손이 얼얼할 정도였다. 이마에 열은 없었다. 갑자기 그녀가 입에 손을 갖다 대고 웃었다.
"지금 저 걱정해주시는 거예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숙소로 가는 동안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노크하는 걸 깜빡했지만 다행히 옷을 벗은 인형은 없었다. UMP9와 G11은 벌써 옷을 갈아입고 소파와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HK416은 우리가 들어와도 비가 오는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나는 UMP45를 샤워실까지 바래다주었다.
"지휘관, 저 괜찮다니까요."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안 보이니까 이러는 거야. 들어가서 감시하기 전에 빨리 씻어."
"그래 주시면 더 좋을 것 같은데요?"
나는 그녀의 도발을 무시하고 샤워실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녀는 샤워실에 들어가면서 내가 보란 듯이 셔츠의 단추를 풀어제끼고 스타킹을 훌렁 벗어 던졌다.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문을 닫았다. 바닥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나서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침대 옆에서 HK416이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라도 물어볼 줄 알았는데 숙소를 나설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서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 했다.
"45 감기 기운이 있으니까 자기 전에 상태가 어떤지 좀 봐줘. 너랑 다른 애들은 괜찮지?"
"내일 아침이면 멀쩡해질 걸요.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 계세요." 그녀가 말했다. "정말 휴식이 필요한 건 지휘관님이라고요."
집무실에서 거울을 보니 충혈된 눈 밑으로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의자에 앉아 남은 커피를 마시는 동안 조금 전에 보았던 UMP45의 모습들이 생각났다. 표정이나 음침한 기색은 평소와 같았지만 뭔가 이질적인 분위기가 감돌았었다.
어렸을 때 키웠던 개인 코코한테서 비슷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코코는 다른 개에 비하면 크기는 볼품없어도 곁에 두고 있으면 언제나 마음이 든든한 학창 시절의 동반자였다. 내가 불량배들에게 걸려 집 앞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 사납게 짖어주고 다리를 다쳐서 목발을 짚고 학교에 다녔을 땐 아버지가 허락해둔 한도에서 매번 마중을 나와주는 씩씩하고 똑똑한 녀석이었다.
그런 개한테도 늙고 병 드는 때가 오기 마련이었다. 대학교의 여름 방학으로 집에 돌아온 날 뒷마당에서 화사한 초여름의 햇살을 받으며 공을 멀리까지 던지던 중에 그 당연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코코는 몇 달 전과 달리 느릿느릿하게 뛰어갔고 힘없이 공을 물고 돌아와 한참을 낑낑거렸다. 이전보다 잘 먹이고 잘 재워줘도 예전처럼 나를 지켜주던 모습은 돌아오지 않았다. 병원에선 가망 없는 대답만을 들을 수 있었다. 코코는 아직 쌩쌩한 나를 두고 그렇게 늙어버렸다. 그 뒤로 주름이 늘어나면서 행동이 굼떠지다가 기저귀를 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곁을 떠나갔다. 지금까지도 그때 받았던 충격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막 지휘관으로 부임했을 때 UMP45는 나를 은근히 우습게 여겼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전술 인형인 그녀에 비하면 나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책상물림일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살벌한 미소를 곁에 두고 배운 대로 전투를 지휘하면서 조금씩 경험을 쌓아나갈 수 있었다. 그녀의 도움 없이도 지휘가 수월해진 뒤부턴 좀 더 부드러운 미소를 볼 수 있었지만 엄한 가정교사 같은 분위기는 여전했다. 그녀가 내가 하는 말에 웃어주고 내게 농담을 건네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만의 매력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것들이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녀는 언제까지나 결점이 보이지 않는 여유만만한 인형으로 남아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가 부은 손으로 머그잔을 들었을 땐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이마를 만져줬을 때도 그랬다. 샤워실 앞에서 나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의 '가녀린'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었다.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지만 그땐 정말로 그렇게 보였다. 몇십 년간 같은 자리에서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던 동상에 흠집이 생긴 것처럼.
뒷마당에서 지쳐 쓰러진 코코를 안아줬을 때 받았던 느낌이 그랬다.
UMP45는 다음 날 아침 점호 때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구겨진 곳 하나 없는 단정한 옷차림과 윤기 나는 머리카락과 함께 보면 볼수록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미소가 돌아왔다. 그런 깔끔한 겉모습에 기침까지 남아 있는 게 문제였다. 그녀는 점호를 끝마치자마자 뒤돌아서서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콜록거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자세만 봐도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있었다. UMP9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복도에 다른 인형들이 없을 때를 노려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픈 거 맞지?"
내가 물었다.
"그런 것 같네요." 또다시 잔기침이 쏟아졌다. "그래도 심하진 않아요."
심하지 않다니. 문득 그녀에게 심각한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졌다. 지금보다 더한 기침을 하고 있을 때일까? 숨넘어갈 듯이? 그러다가 이마에 열이 펄펄 끓기 시작하면 그제야 심하다고 말해줄까? 그걸 직접 시험해보고 싶진 않았다.
"일단 진료부터 받자."
"괜찮다니까요…."
"어제도 그 말 해놓고 이 상태가 된 거잖아."
"맞아, 언니." UMP9가 내 말을 거들었다. "어차피 오늘은 딱히 할 일도 없잖아."
UMP45는 나와 UMP9의 등쌀에 떠밀려 의무실로 향했다.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나오는 싸늘한 눈빛이 다시 보였다면 포기할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따금 기침만 할 뿐 내 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손은 이제 차갑지 않았지만 나보다 뜨거웠다.
의무실 앞 복도에서 군의관이 의자에 앉아 한가롭게 잡지를 넘겨보고 있었다. 애써 가르마를 낸 숱이 얼마 남지 않은 머릿밑으로 커다란 뿔테 안경이 고개 숙인 얼굴에서 금세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그는 우리의 발소리를 듣고 이마에 난 주름살과 함께 눈을 치켜세우더니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일거리를 가져오는데도 반기는 걸 보면 어지간히 따분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 것도 오 분이면 끝나는 시시한 일이었다. 그는 컴퓨터에서 사진을 몇 장 받아보는 것만으로 진단을 끝냈다. 나는 UMP 자매를 먼저 내보내고 그와 마주 보았다.
"감기입니다."
그가 말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다른 문제는 없습니까?"
"네, 전형적인 목감기에요. 목이 좀 부었고 열이 37.2도네요. 하루 이틀만 누워 있으면 열은 금방 내려갈 겁니다. 다 나으려면 일주일쯤 걸리겠지만요."
"약을 써도 일주일이겠죠?"
"감기가 다 그렇죠, 뭐. 다른 거였으면 더 편했을 텐데…."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어지간히 독한 질병도 주사 한 방이면 해결되는 요즘 시대에 가장 성가신 병은 단순한 감기였다. 군의관은 그 정도로 발달한 의학에 어울리지 않게 손으로 진단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지휘관님이 원하신다면 효과가 바로 나오는 거로 처방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리 추천하고 싶진 않네요."
"그러면 선생님 대신에 엔지니어들이 귀찮아지겠죠."
"전 좀 귀찮아져도 됩니다."
나는 약을 받아 들고 의무실을 나섰다. UMP45는 벌게진 얼굴로 입을 가리고 있다가 약 봉투를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지휘관, 이제 들어가 봐도 돼?"
UMP9가 언니의 손을 잡고 물었다. UMP45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고개부터 흔들고 보았다.
"아직 움직일 만 하다고요…."
"그러다가 정말로 못 움직이는 수가 있어."
내가 말했다. 평소엔 쉬게 해달라며 칭얼대놓고 지금처럼 정말 쉬어야 할 때 움직이려 드는 게 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럼 그냥 집무실에 있을게요. 숙소에만 있는 건 너무 따분해요."
기어이 내 감시를 받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고민 끝에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녀가 예전에 내게 해주던 것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으면 멋대로 돌아다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기침이 잦아들고 있었다. 정말 휴식이 필요해 보인다면 HK416의 감시를 붙여서라도 강제로 돌려보내면 그만이었다.
나는 온풍기를 세게 틀어놓고 창문에 커튼까지 쳐두었다. 날씨가 어제보단 훈훈해져서 나한테는 더웠지만 당장은 참을 만했다. UMP45는 다소곳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쳤다. 두께를 보아하니 소설책 같았다.
"여기가 숙소보다 훨씬 더 따분할 텐데…."
"상관없어요."
그녀가 책장을 넘기면서 말했다. 어째 내가 그녀의 감시를 받게 된 것 같았다. 나는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틈이 날 때마다 그녀를 흘깃거렸다. 인상을 조금 찡그리고 있긴 해도 기침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방 안이 뜨거워져서 삼십 분에 한 번꼴로 밖에 나갔다가 괜히 핀잔만 듣고 말았다.
"그래갖고 오늘 안에 다 할 수 있겠어요?"
그 뒤로 온풍기 온도를 낮춰놓고 업무에만 집중했다. 그녀의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사주고 감기에 효과가 좋다는 유자차를 미지근한 물에 끓여주는 동안 대화가 딱 한 번 있었다.
"참 어제 가져온 물건은 어떻게 됐어요?"
"아침에 본사로 보냈어. 이번엔 잘 받았다고 하더라고."
"그거 잘됐네요."
그 뒤부턴 해가 질 때까지 서로의 영역에만 푹 빠져 있었다. 내가 업무를 마치고 어깨를 풀어주는 동안에도 UMP45는 책을 붙들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이제 보니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밤이 깊어갈 무렵 UMP45가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켜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갈피는 중간쯤에 끼워져 있었다. 얼굴이 아침때보다 더 그늘진 것 같았지만 그래도 기침은 하지 않았다.
"이제 들어가 볼게요, 지휘관."
그녀가 문을 열면서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나가고 나서 짧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곧장 펜을 내려놓고 복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이미 모퉁이 저편으로 사라진 뒤였다.
오밤중부터 기온이 뚝 떨어졌다. 선잠을 자는 동안 창밖에서 나무들이 흔들거리는 소리가 들렸었다. 나는 싸라기눈이 흩날리는 울적한 바깥 풍경을 벗 삼아 아침을 맞이했다. 며칠 전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아 잠자리를 방해하던 모기들이 떠올랐다. 녀석들이 전부 얼어 죽었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추운 날씨도 나쁘지만은 않아 보였다. 그날 아침 점호에서 UMP45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 전까진 그랬다.
"기침이 엄청 심해요." 숙소 앞에서 HK416이 나에게 따지듯이 말했었다. "어제 왜 집무실에 붙들고 계셨던 거에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순전히 그녀가 자처한 일이었지만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한 내 책임도 있었다. HK416이 떠난 뒤에 문을 두드려봤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문을 열자마자 침대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UMP45는 풀린 눈을 하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서랍장의 쟁반 위엔 귀에 쓰는 체온계와 물이 반쯤 남아 있는 컵, 찢어진 약봉지 그리고 물에 적신 수건이 올려져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지휘관?"
그녀가 물었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은 재봤어?"
"지금 막 재보려던 참이었어요."
그녀가 체온계를 집어 들면서 말했다. 체온계를 귀에 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뜻한 전자음과 함께 온도가 표시되었다. 38.2도였다. 다른 것보다 온도가 조금 더 높게 측정되는 제품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어제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게 분명했다. 윗단추가 풀린 잠옷이 땀에 젖어 있었다. 나는 수건으로 그녀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이미 여러 차례 닦아냈는지 수건의 한쪽 면이 뜨거웠다.
"오늘은 꼼짝 말고 있어야 해."
"알았어요…."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UMP45의 여린 모습이 당혹스러우면서도 안쓰럽게 느껴졌다. 저녁 전까지 처리해야 할 업무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그녀의 곁을 떠나는 게 꺼림칙했다.
"나중에 다시 들를 테니까 약 잘 챙겨 먹고 있어. 밥은 어떻게 할 거야?"
"9가 사 오기로 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괜찮아질 테니까…."
이틀 전부터 그 말을 숱하게 들어왔지만 한 번도 믿음직스럽게 들린 적이 없었다. 말과는 딴판인 그녀의 표정도 몸 상태 못지않게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멀쩡한 듯이 웃어 보이면서도 간절한 눈빛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마지 못해 숙소를 나선 뒤에도 그 얼굴이 눈앞에서 한참 동안 아른거렸다.
저녁 식사를 거르고 숙소를 방문했을 땐 UMP9가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국그릇을 들고 UMP45에게 숟가락을 들이대고 있었다. 완전히 질려버린 듯한 UMP45의 얼굴에서 그녀의 동생이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귀찮게 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언니, 기운을 차리려면 많이 먹어둬야지. 약만 먹어봤자 아무 소용없는 거 잘 알잖아."
UMP9가 말했다. 정작 자기 자신이 앓아눕게 되면 실천하지 않을 게 뻔한 잔소리였다.
"안 먹겠다는 게 아니라…." UMP45가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내가 알아서 먹을 수 있다니까."
UMP9가 국그릇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UMP45도 같이 손을 뻗었지만 부질없는 저항이었다.
"거짓말! 점심에도 내가 사 온 도시락 반도 안 먹었잖아!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다 먹는 거 보고 갈 거야."
UMP9가 다시 죽을 뜨면서 말했다. 부엌에서 자매들의 일방적인 대결을 지켜보던 HK416이 나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UMP9의 손에 들려 있던 그릇과 숟가락을 낚아챘다.
"9, 내가 대신해줄 테니까 가서 쉬고 있지 않을래?"
UMP9는 의외로 선뜻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녀는 내 옆에 의자 하나를 더 갖다 놓더니 드라마 감독이라도 되는 양 침대에 머리를 대고 흐뭇한 얼굴로 나와 UMP45의 사이를 올려다보았다. HK416이 그녀의 후드를 잡고 숙소 밖으로 끌어냈다.
"에이, 모처럼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는데…."
UMP9가 팔을 휘저으면서 투덜거렸다. HK416의 기나긴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지금 노는 거 아니야, 멍청아."
그들이 나가고 나서 떠들썩 했던 숙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졌다. G11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자고 있었다. 그녀의 코 고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워주고 있었다. UMP45에게 그릇을 건네주었더니 그녀의 시선이 흔들렸다.
"아, 저기…지휘관. 그…저 혼자서도 먹을 수는 있는데요…."
그녀가 내 앞에서 말을 더듬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이불 속에 넣은 손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내가 알던 그녀와 전혀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나는 죽을 한 숟가락 떠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조금 전보다 더 붉어진 얼굴로 잠깐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물었다. 죽이 아직 뜨거운지 입술을 달싹이면서 천천히 씹고 있었다. 나는 내 어머니가 해주던 대로 입으로 후후 불어가면서 죽을 떠주었다. 기침 때문에 잠깐씩 쉬어줘야 했지만, 죽이 그녀의 목으로 넘어갈 때마다 희미했던 미소가 다시 밝아지는 듯했다.
'하룻밤만 자고 나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겠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물론 내가 생각해오던 그녀의 매력은 지금의 모습과는 다른 것들이었다. 냉철한 성격에 걸맞은 똑 부러진 일 처리 능력과 겉으론 드러나지 않는 나에 대한 관심 표현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좋은 파트너로서 말이다. 지금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는 냉철하지도 강하지도 않았지만, 파트너 이상으로 나를 설레게 해주고 있었다. 그녀가 하루빨리 낫기를 바라는 한편으로 새로 발견한 그녀의 매력들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지휘관, 이제 됐어요."
UMP45가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만 집중하느라 이미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을 숟가락으로 훑고 있었다.
"덕분에 잘 먹었어요.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아니, 괜찮아. 나도 좋았거든."
얼떨결에 본심이 나와버렸다.
"뭐가요…?"
"한가해서 좋았다고."
평소 같았으면 이런 엉성한 둘러대기는 씨알도 안 먹혔을 텐데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나는 그녀가 약을 먹는 것까지 지켜보고 숙소를 나섰다. 이번엔 그녀도 만족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어서 미련이 남지 않았다. 복도의 창틀이 요란스럽게 흔들렸다. 눈발이 거세졌지만 앞서 내린 비 때문에 쌓이지 않고 있었다. 일기예보대로라면 내일부턴 다시 비가 내릴 예정이었다. 잠깐의 눈요기와 고된 제설 작업으로 몸과 마음을 다 지치게 할 바에야 흉한 진눈깨비를 감상하는 편이 더 나았다.
내 마음속은 내일 보게 될 UMP45의 모습이 어땠으면 좋을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예상대로 아침부터 진눈깨비가 왔다. 밤새도록 퍼부은 끝에 간신히 손톱 크기만큼 쌓였던 눈이 빙판 너머의 진흙에 뒤섞이고 수렁에 빠져들었다. 눈삽을 들고 나가는 수고는 덜었지만, 옥외 시설들을 점검할 때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길가의 빙판 위에 뿌려진 염화칼슘을 확인하고 UMP45의 숙소로 향하는 동안 발걸음이 무거웠다. 나는 그녀의 동생이 울먹이면서 했던 말이 틀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지휘관, 언니 몸이 더 안 좋아진 것 같아. 깨울 때 이마가 엄청 뜨거웠어."
한순간 품었던 내 멍청한 바람 때문이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란 걸 알면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UMP45는 예상과 달리 얌전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약은 전부 챙겨 먹었고 죽도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이마는 무서울 만큼 뜨거웠다. 그래도 심심해할 여유는 있었는지 쟁반 옆에 지난번에 보던 소설책이 있었다. 거의 끝부분에 책갈피가 꽂혀 있었다.
그녀를 다시 의무실에 데려가야 했지만 당장은 곤히 자는 걸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은퇴한 형사인 주인공은 일에만 치여 살다가 아내와 이혼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전처와의 재결합을 조언해주는 익명의 편지를 받게 된다. 처음엔 편지를 무시했지만, 이후의 편지에 사진이 포함되고 내용이 점점 더 자세해지자 전처를 찾아가 편지의 내용을 실행에 옮긴다. 그렇게 전처와의 관계가 이전처럼 회복되고 다시 받은 편지는 아내가 끔찍하게 살해되는 걸 암시하는 내용으로 바뀌게 되는데….
"재밌어요?"
UMP45가 몸을 일으키면서 물었다. 그 듣기 좋은 목소리가 쉬어버린 게 안타까웠다. 눈빛은 흐리멍덩했지만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는 있었다.
"그럭저럭 읽을만한데…."
"나중 가면 별로예요. 범인이 뻔하거든요. 더 읽을 필요도 없어요."
이미 거의 다 읽긴 했지만, 그녀에게 책 내용이 따분해서 다행이었다. 책을 붙들고 있어봤자 몸만 더 나빠질 뿐이었다.
"지휘관,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뭐 필요한 거 있어?"
"아뇨, 어제부터 안에만 계속 있었더니 좀 답답해서요."
나는 당연히 환기 좀 해달라는 줄 알고 창문 쪽으로 걸어갔는데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오면 안 될까요? 아주 잠깐만요…."
"안 돼."
대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그녀의 시무룩해진 눈빛에 실망감이 묻어나왔다. 설마 이런 식으로 날 괴롭힐 줄이야.
"혼자 가겠다는 게 아니에요. 아무나 붙여주시면…."
설령 내가 같이 가더라도 절대로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었다. 그녀의 동생이었다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말릴 게 뻔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눈빛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 눈빛을 마주 보는 게 작전 중에 듣던 그녀의 잔소리보다 몇십 배는 더 괴로웠다. 후환이 두려운 건 아니었다. 그녀가 말끔하게 낫기만 한다면야 나중에 무슨 괴롭힘을 받더라도 상관없었다. 따라서 그녀와 함께 가야 할 곳은 밖이 아니라 의무실이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나는 끝내 그녀의 외출을 허락해주었다.
UMP45는 내게 나가달란 말도 하지 않고 잠옷을 벗기 시작했다. 나는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그런다고 전부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레이스가 달린 검은색 속옷 차림으로 옷장 앞에 서서 태연하게 옷을 꺼냈다. 간간이 기침이 터져 나올 때마다 그녀를 다시 눕혀놓고 싶었지만 일어서려고 하면 그녀와 눈이 마주쳐서 꼼짝없이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스웨터에 흰 남방을 받쳐 입고 양털 코트를 걸쳤다. 짧은 스커트는 그대로였다. 내가 그 점을 지적하려던 찰나 그녀가 침대로 돌아와서 요염한 자세로 스타킹을 신기 시작했다. 끽해야 며칠 만에 다시 보는 장난이었는데 그렇게 정겹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마는 여전히 뜨거웠다. 나는 다른 인형들의 눈에 띄지 않게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멀쩡한 나조차도 얼굴이 시릴 만큼 찬바람이 들이닥쳤다. 그녀의 얼굴은 두툼한 목도리와 토끼털 귀마개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다. 마스크가 없는 게 유일한 흠이었다.
나는 장갑 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장갑 너머로 온기가 느껴졌다.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타고 막 도착한 빗방울들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UMP45는 하얀 입김을 불어가면서 산책길을 쳐다보았다. 만약을 대비해 우산을 들고 오긴 했지만 나는 정말 바람만 쐬고 갈 계획이었다. 그녀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나와 맞잡은 손을 놓지도 않고 처마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나까지 자연스럽게 우산을 펼쳐 들고 있었다.
"걷는 건 문제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찔리는 구석은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보이는 곳까지만이야."
내가 왜 그랬을까? 소설 속 주인공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전처를 찾아갔었다. 아마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칙칙한 잿빛 하늘에서 쏟아지는 진눈깨비 때문에 낭만적인 분위기 같은 건 기대조차 할 수 없었건만.
음산한 겨울을 보내면서 시들어버린 담쟁이들이 눈에 띄었다. 가을에 멋들어지게 나이 든 모습을 뽐내던 가로수들은 볼품없이 앙상한 가지만을 흔들고 있었다. UMP45는 보일락 말락 한 미소를 짓고 내 시선과 다른 곳을 둘러보며 말없이 걷기만 했다. 조심해서 걷는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산책길을 절반쯤 걸었을 때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눈앞이 동전 모양으로 좁아졌다. 그녀는 나와 맞잡은 손을 꼭 붙잡고 멈춰 서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쓰러진 줄 알았는데 다행히 아니었다.
"잠깐 쉬었다 가요." 그녀가 말했다. "따뜻해서 좋네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만 봐도 뜨겁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고 기지로 돌아갔다.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는 동안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뿐이었는데 지뢰밭을 건너는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이 위험하게 느껴졌다. 다시 처마 밑에 도착했을 땐 그녀의 호흡이 거칠어져 있었다.
'의무실부터 들러야겠어. 그러고 보니 열도 안 재봤잖아.' 뒤늦은 생각이었다. 머릿속에 바보가 들어앉은 것 같았다.
"고마워요, 지휘관.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그녀가 목도리를 풀면서 말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스웨터 앞섶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의 기분은 좋아졌을지 몰라도 몸은 그렇지가 않았다. 나는 우산을 털면서 휴대폰을 꺼내보았다. 그때 그녀가 소리 없이 다가와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나중에 어떤 느낌이었는지 생각나지도 않았다.
"왠지 지금이 아니면 못할 것 같아서요."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의무실에서 새로운 약을 받아오고 숙소로 돌아왔다. UMP45는 이번에도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앉아 내가 건네주는 물수건을 받아들었다. 오래 걷지도 않았는데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그녀는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눕자마자 눈을 감았다. 식사할 때를 빼고는 죽은 듯이 누워만 있었다. 일과 시간이 끝나고 UMP9가 옆에서 호들갑을 떠는 동안 HK416이 내게 커피를 끓여주었다.
"지휘관, 빨래통에 외출복이 있던데요." 그녀가 눈총을 쏘면서 말했다. "혹시 45 데리고 밖에 나갔다 오셨어요?"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욕설만 빠져 있는 그녀의 신랄한 잔소리를 듣는 내내 변명거리를 떠올려 봤지만, 구구절절 맞는 말들뿐이어서 눈도 마주칠 수가 없었다.
"하여간에 나중에 무슨 일 터지면 전부 지휘관님 잘못인 줄 아세요."
"알았어. 그래도 45가 걱정되긴 하나 보네?"
"저 혼자서 애들 챙겨주는 게 귀찮을 뿐이에요."
정작 끼니마다 죽을 끓여주고 이마에 얹을 물수건을 짜주는 건 그녀였지만 나는 조용히 넘어가 주었다.
나는 인형들이 모두 잠든 뒤에도 의자에 버티고 앉아 UMP45를 지켜보았다. 이유는 몰라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면 안 될 것 같았다. 밤하늘에 환한 초승달이 뜨는가 싶더니 다시 먹구름이 드리웠다. 그녀의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이불 위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따라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지휘관…."
G11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한쪽 팔로 베개를 끌어안고 서서 눈을 비비고 있었다. 그녀의 축 처진 눈을 보고 있자니 졸음이 더 쏟아졌다.
"좀 자두는 게 어때…? 내가 보고 있을게…."
"괜찮은데…."
"그거 45가 하던 말이랑 똑같잖아…."
그녀답지 않게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나는 순순히 백기를 들어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G11은 금세라도 침대 위에 엎어져 버릴 것 같은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을 했다.
"한 시간 있다가 깨워줘."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지만,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꿈에서 UMP45가 홀로 산책길을 걷는 게 보였다. 다가가고 싶었지만, 꿈속의 나는 실체가 없었다. 그녀가 멀어질수록 구름 사이에서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산책길의 끝에서 그녀가 나를 향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는데 얼굴이 보이기 직전에 눈앞이 도로 깜깜해졌다. 허공에 작은 불씨 하나가 타오르다가 삽시간에 큰불로 번지더니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한참 뒤에 나를 깨운 건 G11이 아니라 휴대폰의 기상 벨소리였다. 나는 이불을 뒤척이면서 휴대폰을 꺼냈다가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놀랍게도 G11은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졸고 있긴 했지만, 고개를 거칠게 흔들어가며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볼펜과 메모지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내가 다가오는 걸 보고 메모지를 내밀었다. 메모지 끝에 '39'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열이 또 올랐어…."
그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날 일정을 전부 접어두고 UMP45와 함께 병실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볼일이 급하거나 군의관이 얼음찜질을 하러 들어왔을 때만 잠깐 나가 있었다. 그녀가 일어날 때마다 발작적인 기침이 터져 나왔다. 목이 잠겼지만 이제야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 내가 정비팀을 부르는 일로 군의관과 의논하는 동안 뜻밖에도 그녀가 나를 말렸다.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뜻은 확고했다.
"열이 내려가고 있으니까…조금만 더 지켜봐 주세요."
아직 위독한 건 아니라는 군의관의 형식적인 말을 믿었던 걸까. 나는 도무지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집무실에 끝까지 버티고 있던 것과 나와 함께 산책을 강행했던 것 그리고 더 간편한 해결책을 두고 굳이 고통을 감내하려는 지금의 모습도 쓸데없는 고집처럼 보였다. 그것들을 전부 허락해준 나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시 밤이 찾아왔다. 온종일 한 일이라곤 UMP45의 손을 잡아준 것뿐이었지만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 가버렸다. 복도에서 보았던 창밖 풍경은 그녀의 몸 상태를 대변해주듯 어제보다 평온했다. 눈과 비가 전부 그치고 조금씩 걷혀가는 먹구름 사이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오래간만에 새소리를 듣고 나니 묵은 피로가 싹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내일 또다시 눈이 온다는 소식이 있었다.
나는 병실에 돌아와서 UMP45의 물수건을 다시 적셔 주었다. 그녀에게 먹여주려고 대야 옆에 한 컵 가득 담아두었던 얼음 부스러기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체온계의 숫자는 다시 37로 돌아와 있었다. 한 시간 전쯤에 나보다 지쳐 보이는 얼굴로 그녀를 진단해본 군의관이 이제 괜찮다고 말해줬었다. 귀에 와서 박힐 정도로 지긋지긋한 말이었지만 UMP45의 입에서 듣던 것보단 훨씬 믿음직스러웠다. 그녀의 이마에 수건을 올려주려는 순간 그녀가 내 팔목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만하셔도 돼요." 그녀가 말했다. "주무시긴 한 거예요?"
"누구 덕분에 잠이 다 달아나버렸거든. 돌아오려면 아마 몇 시간쯤 더 있어야 할 거야."
"업무 하나도 안 하셨죠? 오늘 돌아오면 안 될 것 같은데요."
UMP45의 미소 지은 얼굴을 보고 나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녀의 산뜻한 목소리와 시니컬한 농담들을 조만간 다시 들을 수만 있다면 며칠 정도 밤을 새우는 것쯤은 얼마든지 참아줄 수 있었다. 마음 한구석이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전했지만 건강한 그녀의 모습들로 다시 채워 넣을 자신이 있었다.
"지휘관…."
그녀가 말했다.
"응?"
"제가 볼에 뽀뽀해드렸을 때 기분 어땠어요?"
무시무시한 금기어를 듣기라도 한 듯 팔에서 닭살이 돋았다. 그녀도 부끄러운 건 아는지 얼굴이 머리 꼭대기까지 새빨개진 채로 입술을 오므렸다.
"마음에 안 들었나요?"
"그럴 리가." 내가 손사래를 쳐가면서 말했다. "음…그게 그러니까…나쁘진 않았어…아니, 좋았어."
"그래요? 그거 아쉽네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말을 더듬은 게 실수였던 걸까? 내가 뭘 잘못했는지 고민하는 동안 그녀가 내 얼굴에 입술을 들이댔다. 그녀의 짙은 머리 냄새가 향긋하게 느껴졌다. 입술과 혀로 들어온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내 목을 타고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목덜미에 들러붙었다. 나도 그녀의 목과 머리카락을 간질이면서 부드럽게 혀를 적셔주었다. 그녀의 몸이 떨리는 만큼 내 몸에도 전율이 일고 있었다. 몇 시간 같았던 수십 초가 지나고 나서 그녀가 입을 떼고 입맛을 다셨다.
"지금 같은 기분이면 그것보다 더한 것도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거든요. 설마 여기서 멈추실 거에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이불을 들치면서 말했다.
"저기…45…."
"좋아해요, 지휘관." 그녀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감기 걸리기 전까진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아요."
"아직 몸이 다 나은 것도 아닌데…."
"뜨거운 게 더 좋잖아요."
내 머릿속에서 뭔가가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성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UMP45의 몸 위에 엎드려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내 숨이 그녀보다 더 가빠졌다. 내 몸에서 빨리 밀어붙이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나는 간신히 고함들을 잠재워가며 천천히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갔다. 그녀의 뒷덜미에 가 있던 손가락들을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환한 미소를 머금은, 이제는 귀여운 걸 넘어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그녀의 입술에 나름대로 정성 들인 키스 세례를 퍼부어가며 손을 밑으로 내렸다. 손이 가슴, 배, 허벅지, 엉덩이를 거쳐 땀에 젖은 바지 속에 이르는 동안 그녀의 바짝 마른 입술이 꿀맛같이 달콤했다. 그녀는 단추를 뜯다시피 하며 상의를 벗어 던지고 음흉한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제 뜨거워지셨네요."
그녀의 말에 나는 실없이 웃고 말았다. 정말 웃겨서 그런 건 아니었다. 꿈 같은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그랬다. 나는 둥둥 떠다니는 기분으로 그녀를 감싸 안고 마지막 한 꺼풀을 벗겨냈다. 몸을 앞으로 움직이기 무섭게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접시만 해진 그녀의 눈에서 별안간에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몸을 뒤로 빼려는 순간 그녀가 내 목덜미를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멈추지 마세요. 생각했던 것보다 강렬하네요."
그녀가 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피차 마찬가지였다. 영상으로 접해둔 것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철저하게 욕망과 본능만을 따라 움직였다. 황홀경에 젖은 몇 분이 지나가는 동안 턱밑까지 숨이 차올랐다. 우리의 격렬한 움직임에 이불이 벗어둔 옷 위로 떨어졌다. 가슴을 움켜쥐었을 때 그녀가 얼굴을 붉혔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속궁합만 좋으면 됐지 그깟 크기가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조용히 숨을 헐떡이면서 내 가슴에 고개를 파묻었다. 내 어깨를 붙잡은 그녀의 손이 떨리다가 만족스러운 듯이 꽃처럼 활짝 펴졌다. 나는 그녀를 내려놓고 식은땀을 훔쳐냈다. 그러곤 이런 걸 쉬지 않고 몇 번씩 한다는 건 전부 정신 나간 헛소리라고 생각하면서 잠에 빠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목덜미에 닿은 UMP45의 머리카락이 나를 깨워주었다. 그녀는 내 배 위에 올라타서 상기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휘관, 아직 더 할 수 있죠?"
나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어차피 거절할 생각도 없었지만.
거사를 연달아 치른 뒤에야 그녀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떼주면서 체온을 재보았다. 이제는 거의 정상이었다. 군의관이 들이닥치기 전에 옷을 입혀둬야 했지만 무방비한 그녀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 일단은 내버려 두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병실을 나섰다. 그녀의 속살처럼 새하얀 뭉게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끊은 지 몇 년이나 지났건만 지금처럼 담배 생각이 간절했던 때가 없었다. 아쉬움을 달래며 찬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재채기가 나왔다.
늦은 아침이었지만 나는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머리가 띵하고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요즘 일기예보는 너무 정확해서 탈이었다. 창밖에서 어김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알이 굵은 함박눈이었다. 눈송이들이 타르처럼 눌어붙은 진창 위에 쏟아졌다. 처음 오는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이 기세라면 금세 메워버릴 것 같았다. 산책길에서 어린 외형의 인형들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빙판에 넘어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휴지에 대고 가래침을 뱉었다. 누렇고 탁한 색이었다.
꿈만 같았던 하룻밤이 지나고 나서 감기가 주인의 열기를 피해 내게로 달아나버렸다. 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 같았지만 만사가 한없이 귀찮게 느껴졌다. 바보 같은 머리를 두드려가며 침대에서 일어나도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부엌을 돌아다니는 게 고작이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캔커피를 꺼내 침대로 돌아왔다. 옷걸이에 걸어둔 정복에 어제 처방받은 약이 있었다. 나를 진찰하는 내내 UMP45처럼 입꼬리를 올렸던 군의관이 떠올랐다. 그냥 그렇게 보인 걸 수도 있었지만, 허를 찔린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약봉지를 뜯는 동안 문이 열렸다. UMP45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아프기 전과 같은 후드 재킷에 스커트 차림이었다. 쟁반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그릇과 물잔이 올려져 있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내 손에 들려 있던 캔커피를 서랍장에 내려놓았다.
"그걸로 약 드시게요?" 그녀가 말했다. "정말이지 아직도 챙겨드려야 하는 게 많다니까…."
"뭐 어때서 그래, 이제 서로 챙겨야 할 일이 더 많아질 텐데."
그녀는 내 말에 웃으면서 나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번엔 내 온기가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여전히 달콤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말이죠?" 그녀가 숟가락으로 죽을 휘저으면서 말했다. "순서가 뒤죽박죽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챙겨주는 거 잊으시면 안 돼요."
나는 조만간 그녀에게 선물할 반지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약을 하고 나면 그녀는 내게 어떤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게 될까? 냉정한 파트너? 그게 아니면 수줍은 연인? 그녀가 어느 쪽을 선택하건 간에 별 상관은 없었다. 앞으로는 변함없이 사랑스럽게 보일 테니까.
그녀가 떠주는 죽을 받아먹는 동안 눈 부신 햇빛이 이불 위를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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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신하시군요. | 18.06.13 10:4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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