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후지TV와 산케이신문의 내각지지율 여론조사 조작사건에서 실제 여론조사 작업의 하청을 맡았던 회사이름이 '일본텔레네트(日本テレネット)'라는 곳이었습니다.
회사 이름 보고 놀란 사람이 저 혼자만은 아닌지 일본쪽 트위터에도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회사와 이름만 같은 다른 회사라는 글들이 많이 올라오더군요.
물론 이번에 문제가 된 여론조사 회사는 80~90년대 겜돌이 들이 알고 있는 바리스 시리즈를 만든 그 '일본텔레네트'와는 이름만 똑같은 다른 회사입니다. 게임회사인 일본 텔레네트는 2007년에 약 10억엔의 부채를 남기고 도산해서 사라졌습니다.
일본 텔레네트는 굵직한 타이틀을 많이 남기기도 했지만, 현존하는 여러 게임회사들과 게임IP들의 원류이기도 하기 때문에 콘솔게임 역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회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테일즈 스튜디오, 트라이에이스, 네버랜드컴퍼니, 아이디어팩토리, 미디어비전(와일드암즈), 세가 칸사이 개발팀(드래곤포스), 넥스엔터테인먼트(신창세기라그나센티, 새턴판 바이오하자드), 그로디아(에메랄드드래곤), 위치크래프트(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월드), 트라이크레센도, 러브델릭(moon) 등의 개발사 혹은 개발팀이 모두 일본 텔레네트에 원류를 두고 있을 정도로 콘솔게임 역사에 많은 족적을 남긴 회사입니다.
그런데 이이야기를 조금 길게 페이스북에 쓰고 나니까 한명의 게임 기획자가 하루종일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니시켄이치(西健一)’. 현재는 Route24라는 개발사의 대표입니다.
이렇게 생긴 분입니다.
니시 켄이치는 일본 텔레네트에 아르바이트로 기획 보조와 시나리오 라이터 일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가 가장 처음 참여한 작품은 PC엔진판 Xak1・２ 였는데, 엔딩 스탭롤에서 ‘협력’이라는 항목에서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르바이트로 샤크1・2의 작업에 참여한 것이 그의 첫 작업입니다.
이후 일본 텔레네트에 정식으로 입사하여 여러 게임들의 기획, 시나리오, 디렉팅 등에서 활약합니다. 일본 텔레네트하면 ‘울프팀’의 이미지가 강한데, 그는 주로 RIOT(제1 개발부)에서 활약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일본 텔레네트에서 마지막으로 개발한 게임은 PC엔진의 명작 RPG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천사의 시'입니다.
그는 이 게임의 디렉터이자 시나리오 라이터이자 메인 기획자로 참여했는데요. 이때 보조 기획자로 참여했던 사람이 와일드암즈를 만든 '카네코 아키후미'입니다. 니시 켄이치는 카네코 아키후미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니시 켄이치는 천사의 시를 끝으로 일본 텔레네트를 퇴사하게 되고, 천사의 시 2는 카네코 아키후미가 디렉팅하게 됩니다.(카네코 아키후미도 천사의 시 2 발매 직전에 천사의 시 개발진들과 함께 퇴사하여 미디어 비전을 설립하게 되고, 크라임 크래커즈와 와일드 암즈를 만들게 됩니다.)
니시 켄이치는 일본 텔레네트를 퇴사한 후 스퀘어에 입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스퀘어에 입사하여 처음 참여한 작품의 이름은 '크로노 트리거'입니다.
크로노 트리거의 엔딩 스탭롤을 보면 FIELD PLANNER에 니시 켄이치의 이름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말하는 '플랜너'는 우리가 '기획자'라고 부르는 그 직종입니다.
크로노 트리거 개발이 끝난 뒤에 그가 스퀘어에서 참여한 작품은 지금까지도 슈퍼패미콤의 최고 명작 중 하나로 추앙 받는 바로 그 게임 '슈퍼마리오 RPG'입니다.
그가 슈퍼마리오RPG에서 담당한 역할은 MAP DATA COORDNATOR 입니다. 즉, 맵 데이터 제작을 이 분 혼자서 한 것입니다.
슈퍼마리오RPG에서 맵 데이터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굳이 여기서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게임을 해본 분들은 모두 잘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니시 켄이치는 슈퍼마리오RPG 제작을 끝으로 스퀘어를 퇴사하게 되고, '러브델릭(LOVEdeLIC)'이라는 게임 개발사를 직접 설립합니다. 그리고 이 회사에서 만든 첫번째 게임이 플레이스테이션의 명작 RPG인 'moon'입니다. moon은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상업적으로는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어서 내놓은 게임은 나이든 게임머 분들이라면 기억하실 수도 있는 개그게임 '돈데모 크라이시스'였습니다.
돈데모 크라이시스 다음에 내놓은 게임은 드림캐스트의 걸작RPG인 L.O.L ~Lock of Love~였는데, 이 역시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러브델릭은 L.O.L의 후속작인 DAH라는 게임을 만들다가 도산을 하게 되고, 곧바로 스탭들을 추스려서 닌텐도의 투자를 받아 스킵(Skip)이라는 회사를 만들게 됩니다.
스킵은 원래 '기프토피아'라는 게임의 샘플로 닌텐도가 주최한 게임 벤처 선정 프로그램에 뽑혀서 설립된 회사였기 때문에 닌텐도 하드웨어용 게임들을 주로 개발합니다. 여기서 기프토피아, 치비로봇 등을 개발했던 니시 켄이치는 2006년에 스킵을 퇴사하여 Route24라는 회사를 다시 설립합니다.(스킵은 현재로 살아 있는 개발사입니다)
니시는 스킵 퇴사 이후로도 여러 게임들을 개발합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타이틀이 2008년에 아이폰용으로 나왔던 뉴토피아(newtopia)라는 게임입니다.
아마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텐데, 이 뉴토피아는 이이노 겐지의 현역 복귀작으로 크게 화제가 되었던 게임인데요. 사실 뉴토피아의 기획자는 니시 켄이치입니다.
이후로도 여러 게임들의 디렉터나 시나리오로 참여하고, 브라우저 게임을 만들기도 했었는데 2015년에 스마트폰용 게임인 '마키이피크닉'을 끝으로 새롭게 개발에 참여한 작품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니시 켄이치가 스퀘어를 나와 러브델릭을 만든 이유는 틀에 박힌 게임을 만들기 싫어서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창의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입한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자기 회사를 만들고, 독특한 게임들을 만들어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게임들이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대중들은 많지 않은 것이겠죠.
아마 10년 정도 후의 세대로 태어났다면 좀 더 평가를 받았을 것도 같은데, 너무 빨랐던 것 같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