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르 옵스퀴르 분석 칼럼 :#4 "베르소 엔딩은 굿 엔딩일까?"(부제:엔딩 논란의 이유)
반갑습니다.
지난 한 주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이 게임을 여러 번 플레이하고, 레딧과 여러 커뮤니티에서 다양한 토론을 하며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 그 재미도 끝내고, 좋은 감정을 안고 현실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네요. 그러나, 아직 제가 할 일이 하나 남은 것 같군요. 바로 헌사입니다.
헌사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제가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창작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창작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아마도 ‘즐거움’과 ‘감동’일 겁니다. 희극을 보며 웃기도 하고, 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죠. 활극에서 활력을 얻기도 하고, 슬래셔물에서 짜릿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모든 감정들은 결국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니까요.
그리고 창작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또 다른 큰 선물은 “무엇이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내가 그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현실에 대한 질문을 던져준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관객들은 이를 통해 실제 삶의 선택 순간에 도움을 얻거나, 인생의 다른 가능성들을 고민해볼 수 있죠.
그래서 저는 ‘현실의 눈으로 바라본 Clair Obscur’이라는 주제로 몇 개의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Clair Obscur의 세계는 현실은 아니지만, 현실 사람들이 만들고 즐기는 만큼 현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이 모든 분석과 사유가 제가 이 게임과, 제작자와, 그리고 여러분께 진정한 경애와 존경의 마음으로 바치는 "헌사"이며, 저는 그것이 이 멋진 게임에 바치는 작별 인사로서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추가로, 이 글은 원래 레딧에 게시했던 글이며, 영어로 쓴 글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어투나 어순, 혹은 일부 용어가 어색하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최대한 다시 다듬기는 했지만, 보시면서 혹시 말이 좀 어색하게 느껴지시더라도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의도치 않은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서론을 살짝 길게 쓰고 있사오니 양해바랍니다.
이제 본론인33 분석 네 번째 칼럼, "베르소 엔딩은 굿 엔딩일까?(부제:엔딩 논란의 이유)"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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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일단 두 엔딩을 먼저 살펴봐야겠죠. 먼저 이것부터 말하자면, 굿 엔딩은 없습니다. 정사도 없고요. 개발진들이 그렇게 밝혔어요. 하지만 여기 레딧을 포함, 여러 곳에서 엔딩에 대한 수많은 각론과 감정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두 엔딩 모두 배드 엔딩이며, 그 엔딩까지 가는 과정부터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저는 클레르 옵스퀴르:33원정대를 구매한거지, 클레르 옵스퀴르:데상드르 가문 이야기(부제:게임 중독 문제로 다투는 미치광이 초능력자 가족들)을 구매한 게 아니니까요.
이 게임은 광고에서 '내일은 온다'나 '모두 쓰러져도, 우리는 나아간다처럼 종말에 맞선 33원정대원들의 용기, 희생, 투쟁, 인내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엔딩은 비극이건 희극이건 어쨌든 33원정대의 이야기가 되었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러나 엔딩에서 33원정대원들은 '미치광이 초능력자 가족'들이 다투는 현장에서 입간판처럼 무기력하게 서있다가 한마디 자기 변호조차 하지 못하고 날파리처럼 으깨지거나, 열여섯 살 소녀의 인형극에서 단순한 소품으로 전락하여 '트루먼 쇼'같은 익살극의 배우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문제가 있어요. 아주 큰 문제가.
다만 일단 그 문제를 차치하고, 현재 게임의 두 가지 엔딩을 냉정하게 분석했을 때, 내용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마엘 엔딩 쪽이 훨씬 나쁘지 않은 엔딩입니다.
사실 이것은 메타적으로만 봐도 굉장히 명백하고 간단한 사실입니다. 이 게임의 개발자들은 '결론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도록' 의도했다고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굳이 한 엔딩을 해피엔딩같은 따듯한 톤으로, 다른 엔딩을 공포영화같은 섬뜩한 톤으로 만들어야 했을까요? 당연히, 둘 다 따스하고 안온한 톤으로 마무리할 경우, 논쟁이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내용이 비대칭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베르소 엔딩의 논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분석 전에 다시 한 번 밝혀두자면, 저는 어느 쪽 엔딩이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점 꼭 참고해주세요.
1. 베르소 엔딩 : 논란거리
└ 1-1. 베르소 엔딩은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 1-2. 베르소 엔딩은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 1-3. 베르소 엔딩은 마엘이 오랫동안 살 수 있도록 해준다
└ 1-4. 베르소 엔딩은 가족이 모였으니 해피엔딩이다
└ 1-5. 베르소는 지쳤다
└ 1-6. 마엘 엔딩에서 베르소는 피아노 치는 꼭두각시가 된다
└ 1-7. 뤼미에르 사람들은 허구다
└ 1-8. 페이딩 보이는 그림의 삭제를 원한다
└ 1-9. 베르소 엔딩은 따듯한 톤이다
1. 베르소 엔딩 : 논란거리
먼저 베르소 엔딩이 '굿 엔딩'이나 '해피 엔딩'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 베르소 엔딩의 주요 논란 부분을 분석해드리겠습니다.
아래 내용은 지난 2주간 레딧에서 벌어진 엔딩 토론에서 가장 자주 등장했던 논란들을 현실적, 서사적으로 분석한 것입니다. 물론 이는 제 분석일 뿐이며, 다른 사람의 생각을 비하하거나 틀렸다고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게임의 어떤 부분에서 무엇을 느꼈든, 그것은 느낀 사람의 고귀한 자유이며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1-1. 베르소 엔딩은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먼저 다시, 또다시 말하자면, 그렇게 느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주 훌륭한 경험을 한 것입니다. 개인의 경험과 깨달음은 그 개인의 것이며, 다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베르소 엔딩에서 '슬픔은 극복하고 나가야 하는구나'라고 느꼈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진실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시각에서 볼 때, 베르소 엔딩의 구성은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에 대해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베르소 엔딩의 마엘은 폭력으로 제압되어 쫒겨났을 뿐, 딱히 슬픔을 다루는 법을 배우거나, 깨닫는 과정이 있진 않거든요. 베르소의 폭력에 짓밟힌 마엘은 마지막까지 간절히 애원하지만, 베르소는 그것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이 뭔가를(어떤 것이든 간에) 배우거나 깨닫는 이야기라고 하기엔 부족합니다.
만약 베르소 엔딩이 던지는 메시지가 '슬픔에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로만 설명될 수 있습니다.
1) 네 옆의 누군가 슬퍼하고 있다면, 그를 폭력으로 제압해서 더 이상 슬퍼할수 없도록 만들어라, 예컨대 그가 소중히 간직한 누군가의 유품을 때려부순다거나 하는 식으로.(베르소 입장)
2) 만약 내가 너무나 슬프다면, 누군가 나를 폭력으로 억압해서 내가 슬픔을 느끼지도 못하게 통제할수 없도록 힘을 길러라, 예컨대 통제병자나 자살지망자가 네 오빠의 유품을 빼앗아가 불태워버리려 할때 그들을 제압할 수 있도록.(마엘 입장)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두 메시지 모두 썩 교훈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베르소 엔딩은 '슬픔을 극복하는 법'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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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으로 보자면, 슬픔이나 우울 역시 인간에게(혹은, 생물에게) 필요한 감정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잃었을 때의 아픔을 알기에, 그 무엇인가를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슬픔은 자기 자신만이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옆의 누가 폭력적으로 제압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다시 말하지만 슬픔이란 상태, 생물의 뇌의 상태입니다. 세로토닌/도파민/노르에피네프린/옥시토신 등의 긍정호르몬이 줄어들고, 코르티솔 등의 스트레스 호르몬을 평소보다 많이 분비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총합적인 정신적 회복탄력성이 낮아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때 외부에서 신체적/정신적 충격을 가하면 멀쩡한 상태일때보다 훨씬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위험한 결과'의 예시를 들자면 대표적으로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1) 이모셔널 레이지
주변의 누군가가 별생각없이 건넨 한마디를 들은 사람이 미칠듯이 화를 내면서 광분하는 광경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혹은, 당신이 광분하는 입장이었을 수도 있겠죠. 이는 그 사람이 품고 있던 분노, 무력감, 우울감 등이 자극을 계기로 터져나오는 현상입니다. 이 폭력적인 자극에는 꼭 육체적 폭력이 아니더라도 살짝 찌르는 농담이나 험담 등도 포함됩니다.
이것을 왜 평소처럼 참지 못하는가? 인간이 스트레스 수치가 높은 상태, 정확히는 코르티솔 호르몬의 수치가 일정 이상 높은 상태를 유지할 경우, 그 인간의 뇌는 파이트 올 플라이트라는 생존용 모드로 전환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생존을 위한 최후의 발악 모드'가 되는 것인데, 이러면 개체가 신경질적이고 예민해져 주변의 맹수, 기후변화 등 위험요인을 빨리 알아채게 되고(위험 회피/사냥감 감지), 활동성이 줄어들며(에너지 보존), 공격적이고(안전 확보/식량 확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식량 보존)을 우선하게 됩니다. 그 상태일때 자극을 받으면 공격적으로 반응하게 되는거죠.
이 공격성은 신경계 반응이기 때문에 이성으로 억제하기가 어려워요. 똑같은 신경계 반응은, 예컨대 그렐린 작용인 배고픔, 아데노신 작용인 졸음이나 배변을 참기 어려운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모든 생물 개체의 뇌는 '개체의 생명을 보존할 것'을 가장 우선하기 때문에, 스트레스 수치가 높은 상태에서 폭력적인 자극을 받을 경우 이성을 잃고 최대한 발악하도록 되어있거든요. 그래야 개체가 위험요인을 없애고 생존에 성공할 가능성이 올라가니까.
특히 과거에 학대나 폭력, 조롱 등에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의 경우 갑자기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미친듯한 공격성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공격형 방어 반응 기재라 불리는 현상입니다. 네 맞습니다. 집에서 학대당하거나 학교에서 왕따당하는 학생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죠.
파이트 올 플라이트 스위치는 뇌의 이성을 담당하는 전전두엽과 대뇌피질의 활동을 억제하고, 감정과 반응을 담당하는 편도체의 활동을 촉진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상상도 못할 끔찍한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학교에서 종종 벌어지는 총기난사 사건이나 각종 테러가 있죠. 좀 다른 예로는 다이어트를 지속할 경우 반드시 발생하는 폭식 현상도 완전히 똑같은 뇌 작용으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슬픔과 우울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폭력적으로 접근하면 굉장히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살인이 일어나거나, 그 자리를 넘기더라도 원한이 남아 보복하거나. 말 한마디에 원한을 사서 패가망신하거나 살해당하는 일이 그래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 이모셔널 레이지는 심리학 용어인데, 한국어로 대체해서 번역할 단어가 없네요. '감정 폭주', '충동성 기반 분노'라는 비슷한 용어가 있는데 딱 맞다고 하기가 애매해요. 본문에 쓰인 이모셔널 레이지는 '감정적 분노'나 '격앙', '광분' 등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자기도태
반대로 슬퍼하는 사람이 폭력을 당하고 완전히 우울감에 매몰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 '나는 소중하지 않다'라는 식의 자기비하나 대인기피가 심해지기 때문에 자기보호본능이 줄어들게 됩니다.
이런 경우 중증 무기력증, 심각한 우울증, 대인기피 등이 생기게 됩니다. 물론 이는 자해 또는 자살을 시도하게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죠.
깊은 슬픔이나 우울 상태에서 공격적인 자극을 받을 경우, 생존 욕구를 강하게 발휘하는 형태가 되면 이모셔널 레이지가, 자기파괴 충동을 강하게 발휘하는 형태가 되면 자기도태가 되는 것입니다.
프로이트가 말했듯, 인간의 정신은 매 순간 생의 의지(에로스)와 사의 의지(타나토스)사이를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 중 어느 쪽이 강하게 발현되냐의 문제인 것이죠.
물론, 어느 쪽이든 그 결과는 끔찍합니다.
3) 성격변화
위의 두 변화와 같은 극단적인 변화가 아니더라도, 정신적 회복탄력성이 줄어든 상태에서 받는 폭력적인 자극은 인간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버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세뇌 역시 인간을 고립시키고 통제하여 정신적 회복탄력성을 줄인 다음 폭력과 보상을 반복해 공급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된 성격은 굳이 말하자면 냄비를 망치로 두들겨놓은 상태와 같습니다. 망치로 두들긴 냄비는 물이 새거나, 폭발하거나, 엎어지거나, 굴러갈 수 있죠. 폭력으로 변화된 성격도 똑같습니다. 그냥 보기엔 멀쩡해보여도, 실제로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확실한데, 그게 무슨 문제인지 알수가 없어요. 이런 상태를 바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속칭 PTSD라 부르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극단적인 행동들을 제외하더라도, 심각한 PTSD 환자들은 정상적인 인격 기능이 고장나거나 변화한 상태기 때문에 사회 안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가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심리치료, 약물치료, 복지 등을 통해 나아질 가능성은 있지만 그것은 '가능성은 있다' 정도의 이야기일 뿐이고, 그나마도 성공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결국 이런 사람들 대부분은 죽을 때까지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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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위의 이야기들을 통해 "폭력으로 슬픔을 교정한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이해하셨을거라 생각합니다.
바로 그래서, 베르소 엔딩이 '슬픔을 극복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1-2. 베르소 엔딩은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마엘은 현실에서 중증 3도(3-2레벨) 화상을 입은 환자입니다. 현실에서 이정도의 화상을 입은 환자에게는 100%확률로 모르핀(펜타닐이나 하이드로모르폰 포함) 류의 ㅁㅇ성 진통제가 처방됩니다. 일단, 다른 걸 다 제외하더라도 고통 때문에 쇼크사할 가능성이 높거든요. 쇼크사의 확률에 심장마비, 호흡부전, 면역억제, 거식, 탈수로 죽을 확률까지 합치면, 중증 3도 화상 환자에게 ㅁㅇ성 진통제를 투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상 '처형'의 완곡한 표현입니다. 실제로 WHO와 ABA(미국화상협회)에서는 '반드시, 무조건, 절대로' ㅁㅇ성 진통제를 처방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캔버스에서 쫒겨난 후, 마엘이 현실에서 모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면, 그녀의 현실은 곧 ㅁㅇ중독자의 인생입니다. 당연히 ㅁㅇ중독자의 현실이란 환상과 꿈결 속에서 멍하니 떠다니는 것이죠. 그나마 캔버스에서는 그녀가 맑은 정신과 자유로운 육체로 생을 경험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반면, ㅁㅇ에 취해있으면 그냥 뇌가 마비된채로 멍하니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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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ㅇ성 진통제를 완전히 배제하고 생각하더라도, 마엘의 '현실'이란게 과연 무엇인가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온 몸이 화상흉터 투성이에다가, 한쪽 눈이 없고, 말도 못하는 16세 여자아이가 과연 어떤 '현실'을 살아가게 될까요?
물론, 현대의 현실에서는 중증 3도 화상 환자가 사회에 복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략 1%에서 3% 사이의 확률이죠. 물론 이것은 현대 기준입니다. 19세기 프랑스 기준으로는 확정적으로 0%입니다. 아주 운이 좋을 경우, 죽을 때까지 방안에 감금되어 연명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운이 나쁠 경우는 칼럼 #3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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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엘의 심각한 현실까지 완전히 배제하고 생각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습니다. 마엘이 캔버스에 집착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녀는 현실에선 기형과 중증 장애를 가졌으나 캔버스 안에서는 섹시한 슈퍼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녀는 화가이며, 캔버스를 창조할 수도 있죠.
마엘은 스스로 깨닫거나 중독을 이겨내어 현실로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폭력으로 제압당해서 쫒겨난거죠. 그렇기 때문에, 마엘이 새로운 캔버스를 창조해내면 그녀는 다시 거기에 중독될 것입니다. 현실에서도 ㅁㅇ 중독자의 ㅁㅇ 파이프를 빼앗아 부순다고 해서 ㅁㅇ 중독이 치료되는 일은 없습니다.
결국 베르소의 행동은 친애하는 루네와 시엘, 에스키에와 모노코를 포함한 뤼미에르 시민들을 학살한 것일 뿐, 마엘의 캔버스 중독을 해결할 어떤 방법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이는 한가지 문제를 더 발생시킵니다. 마엘이 뤼미에르 캔버스에 잔류할 경우, 그곳에는 마엘에게 조언과 따끔한 훈계를 선사할 베르소, 루네, 시엘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마엘이 새 캔버스 세계를 창조하면, 그 캔버스에는 그런 인물이 없을 가능성이 높죠. 즉, 베르소의 행동은 캔버스 중독을 치료하지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더 위험하게 만들었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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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 중독 문제까지 제외한다고 쳐도, 여전히 또다른 문제가 남습니다. 사람이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캔버스를 일종의 게임, 즐거운 취미로 분류해봅시다. 그럼 베르소의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는 모든 종류의 여가생활, 취미활동을 금지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그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이니까요. 많은 플레이어 분들이 여기서 움찔하셨을거라 봅니다. 사실, 저도 그랬고요. 왜냐하면 그 말을 듣고 있는 플레이여 역시, 게임이라는 가상현실을 통해 현실에서 도피중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게임, 소설, 영화, 연극 등 많은 취미생활들은 가상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경험하는 것은 '현실에서'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여기까진 가짜, 그 이상은 현실이라고 딱 잘라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마엘이 캔버스 안에서 경험하는 시간과 캔버스 밖에서 경험하는 시간은 모두 현실의 시간입니다.
물론 베르소의 과격한 주장 안에서 '취미에 푹 빠져서 생활이나 생존이 어려워지는 것은 좋지 않다'같은 건전한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그 메시지를 취미생활 도구를 통째로 불태우면서 '그만한 가치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전하려 했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메시지 전달 방식이 아닙니다.
1-3. 베르소 엔딩은 마엘이 오랫동안 살 수 있도록 해준다
다시 한 번, 마엘은 현실에서 중증 3도(3-2레벨) 화상을 입은 환자입니다. 현대에서 이정도로 끔찍한 화상을 입은 사람의 10년 기대 생존율은 약 15%로, 이는 말기 간암이나 폐암 진단을 받은 사람의 10년 생존율과 동일한 수치입니다.
물론 이는 기대수명이고, 평균 생존년수는 치료에 성공했을 경우에 한해 수개월~2년 사이입니다. 사망 원인은 대부분 피부가 없어져 발생하는 감염에 의한 패혈증, 타버린 신체조각이 몸안을 순환하면서 장기(특히 신장)을 막히게 만들어 생기는 장기부전, 그리고 자살입니다. 현실에서 중증 3도 환자의 자살율은 일반인의 약 12배 정도로, 이는 심각한 우울증, 조울증, 조현병 환자와 비슷한 수치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현대 기준'입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중증 3도, 그것도 흡인성 화상으로 목소리를 잃을 정도로 심각한 화상을 입은 사람의 1년 생존율은 사실상 0%입니다. 당시에는 흡인성 화상을 치료할 방법이 없었거든요.
이 게임의 세계관은 캔버스로 세계를 만드는 초능력자들이 있으니, 회복이나 치료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 내에서는 전혀 그런 언급이 없죠. 거기다 치료 능력자가 있으면 '왜 지금까지 마엘을 치료하지 않았는지'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즉, 현실로 돌아온 마엘의 남은 인생은 굉장히 고통스럽기도 하겠지만, 그리 길지도 않아요. 그리고 그녀가 현실에서 얼마나 살 수 있든, 캔버스에서는 딱 그 100배의 시간을 살 수 있습니다. 현실과는 달리 고통 없이, 행복하게. 그녀를 학대했던 가족들과 떨어져서, 그녀가 가족으로 여기는 사랑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1-4. 베르소 엔딩은 가족이 모였으니 해피엔딩이다
가족의 사랑은 아주 중요하고 훌륭한 가치입니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마법의 열쇠는 아닙니다. 사실, 현실에서는 오히려 가족 때문에 수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문제가 심화되기도 합니다.
데상드르 가족의 사랑이 마엘을 치유할 수 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애초에, 가족의 사랑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마엘이 '가족 다 버리고 캔버스 안에서 살다가 죽겠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리가 없잖아요. 마엘의 어머니와 언니는 그녀를 대놓고 면전에서 비난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폭력으로 그녀의 애착하는 세계를 부숴버리려 합니다. 이런 가족들이 단지 한 장소에 모였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최대한 긍정적인 시각으로 봐도 그것은 무리입니다.
르누아르는 자신의 통제병자 기질을 수정하거나 반성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는 베르소가 마엘을 폭력으로 제압하자마자 뤼미에르 캔버스를 불태웠죠. 즉,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알린은 그녀가 그토록 애착하던 캔버스가 빼앗긴 후 불태워지는 것을 보았을 뿐, 마엘에 대한 관점을 바꾸거나, 그간의 행동을 반성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클레아는 애초에 캔버스를 단순한 게임용 콘솔로 보고 있었고, 거기 중독된 가족들이 빠져나온 것만 보았을 뿐, 마엘에 대한 폭언이나 억압받는 장녀 특유의 시니컬하고 가족을 한심하게 보는 태도를 반성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마엘은 폭력으로 제압당한 후, 자신이 애착하던 뤼미에르 캔버스를 빼앗기고 불태워지는 광경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녀가 가족의 사랑을 깨달을 만한 사건이라면 르누아르가 '너를 믿는다, 불을 켜고 기다리겠다'라고 말한 것 정도인데, 사실 르누아르는 그 직전까지 마엘을 폭력으로 제압하려다가 두드려맞고 쫒겨나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베르소 엔딩의 르누아르는 마치 자신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마엘을 기다리지도 않고, 마엘을 믿지도 않고, 마엘이 베르소에 의해 쫒겨나자마자 뤼미에르 캔버스를 불태워버렸죠.
즉, 이 가정의 모든 구성원은 처음부터 심각한 문제를 여럿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게임 내에서 겪는 어떤 사건이나 상황도 그 문제를 해결하거나, 반성하거나, 수정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모든 문제는 그대로입니다. 오직 친애하는 루네, 시엘, 에스키에, 모노코를 포함한 뤼미에르 시민들이 싸그리 학살당했다는 것만 빼놓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요.
1-5. 베르소는 지쳤다
베르소가 긴 시간 고통받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삶을 포기하는 것을 넘어 전 세계를 멸망시킬 타당한 사유가 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베르소의 입장은 다른 데상드르 가문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데, 그는 캔버스 안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현실'은 뤼미에르 캔버스에요.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우리 세상을 만든 창조신이 진짜로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그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어떤 사람이 핵미사일을 무차별로 날려 전 세계를 멸망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과연 올바른 일일까요?
그가 오랫동안 고통받았다는 것도 생각해볼만한 일입니다. 그가 불멸의 인생을 겪은 것은 대략 100년 남짓입니다. 이게 짧은 시간이라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자살을 갈망할 정도의 긴 시간도 아닙니다. 현실에서 100세를 넘은 수많은 사람들의 인터뷰 중 어디에서도 자살을 갈망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고려했을 때, 100여년의 인생이 베르소로 하여금 자살을 결심하게 만들만한 시간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많은 창작물에서 불멸로 고통받는 이들은 대부분 가족과 지인들의 죽음을 계속해서 겪는 것에 진저리를 칩니다. 하지만 베르소는 사회 속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고, 친구도 수명이 없는 모노코와 에스키에 뿐입니다. 그의 진정한 가족인 페인티드 르누아르와 알리시아는 극히 최근까지 살아있었죠. 그가 자신과 모든 것을 죽이려고 결심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입니다.
베르소가 경험한 죽음이란 동행한 원정대원들의 죽음 뿐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그는 동행한 원정대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죽이기 위해 동행했던 것이죠. 그리고 그 중 여러 원정대원들은 직접 살해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죠.
또한, 베르소는 그리 불행하게 산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는 강력한 전사이며, 또한 불멸이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도 없습니다. 사이는 좋지 않지만 자신을 가족으로 사랑하는 아버지도 있고, 사이도 좋고 서로 사랑하는 여동생도 있습니다. 인간은 아니지만 친구들과 시간도 보내고, 가끔 새로운 사람들과 모험도 합니다. 좋은 와인을 얻어서 숨겨둘 정도로 물질에 대한 부족함도 없죠. 좋아하는 음악도 실컷 즐기고, 레코드도 수집하고, 매력적인 여성들과 성관계를 즐기기도 합니다.
그가 정체성 문제로 고통받은 건 맞지만, 그 이외의 모든 부분에서는 그다지 고통받은 것 같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부족함 없이 매우 즐겁게 사는 걸로 보입니다.
1-6. 마엘 엔딩에서 베르소는 피아노 치는 꼭두각시가 된다
이 '피아노 치는 망가진 꼭두각시 형벌'은 실제로 얼마나 끔찍한 형벌일까요? 사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비로운 형벌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현실에서 삶에 지쳤다는 이유로 온 세상을 멸망시킬 핵마시일 발사 버튼을 누르려 하고, 그걸 위해 자신 주변의 수많은 인간을 속이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살해하고, 마침내 그것에 성공해서 온 세계를 멸망시킨 사람이 있다 칩시다. 현실에서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를 달리는 말 뒤에 밧줄로 묶어 죽을 때까지 끌고다닌다 해도, 수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 자비로운 처분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결국 베르소는 마엘 엔딩에서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습니다. 마엘 역시 '피아노 치는 망가진 꼭두각시'를 형벌의 일종보다는 배려의 일종으로 해주었을 가능성이 높죠.
1-7. 뤼미에르 사람들은 허구다
우리는 종종 "현실이 진짜 존재하는가?"에 대한 대화를 하고는 합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살아있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통 속의 뇌나 가상현실 이론이 그런 의심에서 시작하는 것이죠.
우리가 다른 사람이 진짜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감각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며, 우리의 감각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 다른 사람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캔버스의 사람들이 '진짜로 살아있는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자유 의사를 지니고 있어요. 클레아에게 흰색 네브론들의 제거를 명받았지만 거부해버린 네브론 느와르, 클레아에 의해 덧칠되어 조종당하다가 조종이 풀리자마자 자살한 페인티드 클레아, 클레아에 의해 유혹되었음에도 베르소에게 시모소를 건네주는 시몽 등을 보면 명확하죠.
특히 마엘의 엔딩에서 마엘이 되살려 낸 '늙은 베르소'는 괴로움, 고통, 회한에 가득 차 있습니다. 마엘이 만약 베르소를 '프로그래밍'해서 살려낸 거라면, 왜 그녀는 그가 고통받도록 만들었을까요? 마엘이 "고통받는 남자"에 대한 뒤틀리고 음습한 페티쉬를 지니고 있어서? 이렇게 해석하면 앞뒤는 맞지만, 이야기가 이상해지죠. 따라서 가장 합리적인 추론은 '캔버스의 인물은 자유 의지를 지니고 있으며, 설령 페인트리스라도 그것을 조종할 수는 없다'입니다.
즉, 캔버스 내의 인물들은 '창조된' 것이기는 하지만, 명백히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 점에서 현실의 인물과 전혀 다르지 않죠.
1-8. 페이딩 보이는 그림의 삭제를 원한다
페이딩 보이와 대화하다보면, 그가 그림그리는 걸 꽤 좋아했고, 즐거워했으며, 캔버스를 유지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가 지쳤다고는 하지만, 지친 이유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거기다 그 질문 자체가 꽤 교활한데, "그림 그리는 것에 지쳤지?"라는 질문은 "그러니 그림 그리는 것을 그만두고 우리 같이 죽는게 어떨까?"라는 함의를 내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는 데 지쳤지만 계속 그리고 싶을 수도 있는거고, 좀 쉬다 그리고 싶을수도 있는 거니까요. 하지만 베르소는 "지쳤다"를 "자살하고 싶다"와 비슷한 뜻으로 간주해버립니다.
제가 보기에, 소년은 가족들이 하나둘씩 그림 속에 찾아와 난장판을 벌이는 상황에 지친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는데, 그 가족들이 옆에서 “거기서 회피를 눌러야지!”, “패링을 하란 말이야!”, “그 기술을 쓰면 어떻게 해!"라며 온갖 훈수를 두다가, 그것도 모자라 컨트롤러를 빼앗아가고, 제멋대로 빌드를 바꾸고, 서로 컨트롤러를 빼앗기 위해 물리적으로 다투기 시작하면, 그 사람도 게임을 포기하고 싶어질 겁니다.
그러니 소년의 영혼을 진심으로 위하려면, 우선 가족들을 캔버스에서 전부 내보내고, 그가 충분히 쉬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차분히 “그래도 계속 그리고 싶지 않니?”라고 물어봐야 하는 것이죠. 마치 법정에서, 실조 상태에 빠진 증언은 신뢰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1-9. 베르소 엔딩은 따듯한 톤이다
개발자 대담에서, 사회자가 딱 이렇게 질문했는데, 그는 오직 개발자의 깊은 웃음만 돌려받았을 뿐입니다. 냉정하게 봅시다. 색감이 따듯하다고 반드시 좋은 엔딩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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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재미를 드릴 수 있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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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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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칼럼들 :
분석 칼럼 :#1 현실과 캔버스의 시간 비율(부제 : 캔버스의 시간은 거꾸로 가는가?)
분석 칼럼: #2 캔버스의 위험성(부제 : 왜 화가들은 위험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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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칼럼: #6 왜 결론에 대한 논쟁이 생기는가? (부제 : 이 게임의 엔딩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 중편
분석 칼럼: #6 왜 결론에 대한 논쟁이 생기는가? (부제 : 이 게임의 엔딩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 하편
분석 칼럼: #7 이 게임은 좋았는가? (부제 : 빛과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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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절절 공감합니다 전 그래서 2막 들어서 갑자기 베르소로 주인공 교체되고, 동료들과'유대'를 쌓으며 그라디언트 스킬을 획득했어야 했다는게 짜증나더라구요 이미 속으론 몰살을 생각하고 있는데 무슨 유대 하면서요 이 게임 하면서 가장 안 좋았던 경험으로 남습니다, 차라리 2막부턴 마엘이 주인공 하면서 그 역할 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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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절절 공감합니다 전 그래서 2막 들어서 갑자기 베르소로 주인공 교체되고, 동료들과'유대'를 쌓으며 그라디언트 스킬을 획득했어야 했다는게 짜증나더라구요 이미 속으론 몰살을 생각하고 있는데 무슨 유대 하면서요 이 게임 하면서 가장 안 좋았던 경험으로 남습니다, 차라리 2막부턴 마엘이 주인공 하면서 그 역할 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