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대회 전전 밤.
한산한 밤에 조활은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뒤척이다, 뒤척이다. 스승님의 꿈도 꾸다가도 용상의 얼굴도 밟힌다. 아직 다잡지 못한 마음 때문에 심란하기만 하니 잠에 들다가도 깨어버린다.
"하아... 잠도 안오고. 내일, 모레가 당장 무림대회인데 죽겠군. 마음이 복잡할 뿐이라 힘들구만."
자신 뿐이 입을 움직이며 웅얼거리니 잠시 뒤에 찾아오는 공허함에는 부끄러움이 묻어났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빛은 어둠 속에서 붉어졌지만 이를 아는 이는 없었으니 그저 다행이었다.
"몸이라도 풀어야지...... 나가볼까."
찌뿌등한 몸을 이끌고 숙소 밖을 걸어나갔다. 굳어있었던 목의 근육을 풀며 달을 바라보니 당문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보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어... 사람?"
금향궁의 높은 공터에서 여성의 형상이 달을 등지고 유려한 몸짓으로 검무를 추는 모습에 그만 시선을 빼앗겨 버린 조활. 그 모습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는데 마치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모습이 눈에 밟혀 눈꺼풀을 비비적 거리고는 다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 어디갔..."
어느샌가 그 모습은 사라졌고 조활은 그저 환하게 비추는 달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혹시나 그 모습을 들킨 것을 부끄러워해 달로 도망가지는 않았나 싶어 바라본 것이었다. 그러나 달은 그저 노랗고 신비롭게 빛만 비추고 있었으니 조활은 애틋한 뒷통수만 긁적였다.
그때.
휙!
"......"
조활의 오른 얼굴에 달빛을 머금은 검날이 차갑게 자신을 겨누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긴장감은 없었다. 조활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뿌리내린 자신감이 있었다.
비록 뒤를 잡혔지만 조활의 머리 속에는 수십, 수백 가지 방법이 떠올라 있었고, 순순히 두 팔을 들고 싸울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금향궁입니다. 어찌하여 제 목을 노리시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본 협은 오늘 밤은 딱히 싸울 마음이 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물러주시겠습니까?"
"......"
차갑고 싸늘하게 식은 검날이 서서히 조활의 목에 닿았다. 그러나 검에는 살기가 없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기에, 검날이 목에 닿은들 그것은 도발도, 위협도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태평한 자세를 취할 수 있었고, 오히려 어떤 방법이 암살자를 놀래킬 수 있을지 궁리만 할 뿐이었다.
"하아... 안되겠어. 내가 졌다."
암살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활은 놀라서 얼른 뒤를 바라보았다.
"사, 상 누님?"
스르릉, 척.
용상은 멋쩍은 미소로 조활의 놀란 얼굴을 바라보며 빼어든 천상검을 옆구리의 검집에 꽂아넣었다.
"후우... 조 동생을 놀래킬 생각만 가득했어. 가뜩이나 스승님은 대련 전면 금지령을 내리셨으니 온 몸이 굳어가는 느낌이 들잖아?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참락성진강(斩落星辰纲)의 절초를 아무도 없는 곳에서 수련하고 있었지. 그런데 마침 눈 비비는 동생을 봤고, 놀래킬 겸... 왔지?"
용상은 너무나 구구절절이 이야기를 해버렸다고 생각했는지 말끝이 흐려지며 부끄러워했다. 조활은 그런 그녀의 말에 이미 굳어 있었지만 용상은 그것을 알아채지는 못했다.
' ......누님이 이리 귀여웠던가? '
늘 만나면 큰 웃음으로 사내대장부같이 털털하게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었던 그녀가 이상하리만치 달라보였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목선은 왠지 모르게 가냘프고 고와보였고, 눈은 수줍게 반짝이고 있었으며, 입술은 연분홍색이 기름바른 꿀떡처럼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용상은 조심스레 미소지으며 조활에게 다가가 물었다.
"응? 조 동생,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조활은 그녀의 물음에 표정이 살짝 풀어지며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나저나 밤 늦게 혼자 수련이라니, 진정 검성이 되려하는 것이오, 누님?"
용상은 그의 칭찬섞인 반응에 주먹쥔 손으로 수줍은 입술을 가린채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그게 아니야! 검성이라니... 백운화(白雲花)라는 별호를 가지게 된 것도 황송할 뿐인데 검성이라니...! 난 아직 그정도는 아니야......"
조활은 수줍어하는 그녀의 모습에 슬쩍 미소가 지어졌다.
' 재밌군. 저런 표정도 지을 줄도 알고. '
용상은 난감했지만 그의 의도대로 가지 않으려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조활에게 물었다.
"그, 그러는 너는 왜 밖으로 나온거야?"
조활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잠이 잘 안옵니다. 이전에 궁주를 만나 대담하게 이야기한 경력이 생겼는데도 긴장이 아직 다 풀리지도 않았는지 심장이 밤새 두근거리오. 이렇게 당문의 대표로 와있는 사실도 아직도 꿈만 같고. 게다가... 가끔이지만 꿈을 꾼다오. 스승님의 굳은 표정 뒤에 나오는 용...... 아."
조활은 하후란의 모습이 비친 뒤에 나오는 용상의 얼굴이 떠오른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어 입이 다물어졌다. 용상의 눈치를 살피려 슬쩍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왠지 뭔가가 있는 듯, 굳게 다문 그녀의 입술과 표독해진 표정이 눈에 밟혔다.
"미, 미안하오, 누님. 스승님은 이미 지나간 일인데 괜한 이야기를..."
그때 용상은 표정을 일관되게 유지하고는 점차 조활의 앞으로 다가갔다. 조활은 다급하게 변명을 한다.
"쉬, 쉽사리 잊혀지지가 않소. 그래도 스승인데 아직도 꿈 속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미련이 끊이지가 않... 어?"
턱!
그때 조활의 손목이 용상의 손에 잡혔다.
"누님? 갑자기 왜 내 손목은..."
용상의 눈빛을 바라본 조활은 그제서야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죽일 듯한 눈빛은 아니었으나, 과거 둘이 처음만나 적이라고 판단하고 노려보았던 눈빛이 눈앞에 펼쳐졌기에 자신이 무언가 잘못 말한 것인지 머리 속으로 계속해서 생각을 굴리기 시작했다.
용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조 동생."
"왜, 왜 그러시오...?"
용상은 무슨 말을 꺼내야하나 판단도 서지 않은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입에서부터 터져나왔다.
"아직도... 란 언니를 잊지 못 한 거야?"
"그, 그야......"
조활은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뭔가 반박하려해도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름 금향궁주 앞에서는 당당히 소리내어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하고 역으로도 질문을 했거늘, 한 명의 여자 앞에서는 꿀먹은 벙어리가 된 듯 소심해져 버린 자신이 조금 이상했다.
' 뭐지? 나 지금 왜 입이 떨어지지 않는거지? 어째서? '
조활은 자신의 손목을 쥔 용상의 손이 점점 강하게 조여오자 한 쪽 눈이 찡그려질 정도로 고통이 몰려 들어왔다.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지만 그만 짤막하게 탄식이 나와버렸다.
"아으... 누, 누님?"
용상의 표정은 여전히 무거운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를 이끌고 어디론가 가려고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누님?? 지금 어디가시려는 거요??"
용상의 답은 단호했다.
"......입 다물어."
"누님!? 억!!"
용상은 자신의 완력 하나만으로 조활의 손목을 붙잡은 채 그대로 경공으로 뛰어올라 어느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조활은 자신을 단순히 힘 만으로 끌고가는 용상에 놀랐고, 아무런 대꾸도 없이 끌려와 버린 자신에게 벙쪄 그녀와 도착한 곳에서조차 입을 열지 못했다. 비단 놀라서만이 아니라 그녀의 손에 미세한 떨림을 느껴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는 것이 이유기도 했다.
"......"
용상은 조활을 등지고 서서 차분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거리는 것을 억지로 들키지 않으려 꾸욱 누르면서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에 그가 놀라지는 않았을까 반쯤 걱정했다. 그러나 여협의 입장으로서, 또는 여자로서 할 말은 해야했다고 생각했기에 최대한 숨을 고르며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조활이 걱정스레 물었다.
"누님...?"
용상은 두근거리는 가슴이 어느정도 진정이 되자 슬슬 입을 열었다.
"여기는 말이지."
용상이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한다. 조활은 입안에 모인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위해 입을 굳게 닫았다.
"여기는 내가 어릴 적 금향궁에 거두어진 장소야."
"여... 기가?"
주변을 둘러봐도 온통 숲속이었다. 확실히 현재 장소는 공개적이기보단 매우 폐쇄적이며, 누군가를 은밀히 만나 밀담 만을 나눌만한 장소로 보여지긴 했다. 그렇게 생각 될 정도로 용상의 금향궁으로의 귀의는 중요하고 비밀스러웠다는 것을 의미 할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 싶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 조활을 바라보며 용상이 말했다.
"내 아버지가 전 무림맹주 용연(龍淵)이라는 것은 알고 있니?"
조활은 과거 자신이 그녀의 아비를 만난 사실에 잠시 눈썹이 흔들렸지만 그와의 약속도 있고, 그것에 대해 일단은 함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덧붙여 적당히 둘러댈 준비도 곧장 했다.
"알다마다. 극락교주 이인우를 처단하고 이 무림계의 평온을 가져온 영웅아니오? 게다가 누님의 이름과 풍채만 보아도 그분의 그림자가 보일 정도인데 예상하지 않고서는 모를 일이 없지 않소?"
고개를 휙 돌리며 여전히 표독한 표정으로 조활을 바라보는 용상. 그녀의 표정에 다시 한 번 놀라서 흠칫하는 조활에게 한 걸음 더 무겁게 다가가는 그녀였다. 그의 너무 뻔하단 반응에 미심쩍어 용상의 표정은 더욱 도드라졌다.
"너, 제대로 놀라는 눈치는 아닌데... 고작 예상만 했다는 식으로 반응이 미적지근한걸 보면 역시, 나에게 숨기거나 무언가 알고 있는거 아니야?"
조활은 그녀의 예상치 못한 추측에 뜨끔했다.
"무, 무얼 말씀인지? 분명 나도 조금이긴 하지만 노, 놀라긴 했소. 단지, 그럴 것이다 라는 확신 만큼은 이미 가득했을 뿐이오. 게다가 용(龍)씨는 내 주변에 그리 흔하지도 않고, 오로지 누님 뿐이었소. 무공도 가전무공이며 그 이름이 용연칠절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것은 누님이잖소? 게다가 누님의 검이 천상검이라고 한다면 그것 역시 용연의 무기로 유명하고 말이오. 그걸로 이미 가르쳐준 것과 진배없는데 당연히 그리 생각하지 않겠소? 영웅이 쓰던 검 이름이 마침 그것이라고 무림계에 소문이 파다하거늘..."
용상은 가만히 생각해보니 조활의 이야기에는 딱히 문제는 없는 것 같아 표정을 한꺼풀 풀었다.
"그래. 동생의 말, 믿어줄게."
조활은 순간의 기지로 인해 겨우 숨통이 틔였다.
' 바, 박력하나는 진짜 엄청나군. 누가 영웅의 딸 아니랄까, 그 풍채가 괜히 풍기는 것이 아니구만. 게다가 이리도 쉽게 믿어주다니... 누님의 앞이 걱정이로세. '
용상은 자신의 이야기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스승님께 의탁되어 길러진 이유는, 아버지의 위상도 있었지만, 그 뒤에는 금나라라는 흑막이 있어."
뜬금없는 연관성에 조활은 흠칫한다.
"금... 나라? 저번 습격도 금나라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연유를 밝힌다는 것은 분명 무엇인가 있는 듯 하오?"
용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버지 용연은 현 금나라 황제 완안순의 둘도 없는 의형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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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활은 잠시 인지부조화가 왔다.
"응??"
아직도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를 보며 또다른 사실을 덧붙여 고백했다.
"그리고 나는 그 금나라 기국공주(沂國公主)인 완안몽의 딸이다. 그러하니 나에게 있어 금나라 황제는 외숙부가 된다."
번쩍! 우르르 쾅! 쾅!
그때 조활의 머리 속이 폭풍우처럼 몰아쳐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 뭣...?! 아, 아니 그러면 조, 족보가 어찌되는 거요?? 금나라 기국공주와 송나라 무림계의 영웅 용연의 자식이라니?? 외숙부?? 금나라랑 이리 엮인다고?? 무, 무슨 소설이라도 쓰는 거요??"
용상은 잠시 눈을 굳게 닫고 얼마 안있어 서서히 떴다.
"아버지는 금나라 황제의 의형제이자, 전 극락교 토벌전에서 반드시 힘을 보태주겠다는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버린자의 피해자이다. 그의 변심은 곧, 가족을 위협하기에 충분했어. 그래서 아버지는 나를 미리 스승님께 의탁하고 그 뒤로는 자취를 감추셨지. 어머니는 그 과정에서 돌아가셨다고 들었고, 나는 아직 어려 목숨줄 만큼은 금향궁의 은혜를 받아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다."
조활은 탄식했다.
' 그럼 이전에 뵈었던 그분이 왜 누님을 멀리하는지 이제야 알겠군. 혹여나 둘이 만나 금나라가 그 모습을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표적이 되어 금향궁마저 끌어들일 것이 분명할 것이니, 멀찍이 떨어져 관찰하는 것을 택하신 게로구나. 그럼 그때 누님이 당한 금나라의 습격은 당최 어떻게 되는 것이지? 지금 일과도 연관이 있나? '
용상은 말을 이어갔다.
"내가 어느정도 장성하여 첫 무림초출의 시절, 너와 처음 만난 그때 기억하니?"
"기억하다 마다요. 워낙에 뇌리에 꽂히는 사건이라 아직도 기억하오. 그 덕분에 누님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으니 이는 아주 좋은 인연이라 나에게도 이런 행운이 싶을 정도 였다오."
용상은 살짝 흔들렸으나 표정을 다잡고 말했다.
"뒤늦게 알아낸 정보였지만, 그때 만난 불륜의 공자가 금나라, 송나라를 전전하며 표적이 된 상황이라고 들었지. 그때 이후 나를 알아보는 무리가 있었고, 그놈들이 금나라 놈들이라는 것을 알아냈어. 아마 나에 대한 정보는 금나라 황제에게 처음 전해졌을테지만, 이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어. 나는 당시 무림초출 이면서 그들에게 큰 위협꺼리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 중론이었어. 나에게 위해를 가하는 금나라 인물은 그때까지는 없었지."
조활은 그녀의 너무나 겸손한 이야기에 벙쪘다.
' 우, 웃기는 군. 그때는 이미 대사형이 진땀 흘릴정도로 버거워하던 실력을 뽐내던 때 였는데 위협꺼리가 되지 않았다고? 우리 누님은 너무 겸손하다니까. 세상을 몰라도 유분수지...! '
용상은 계속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후에 터져. 강릉포위사건이 일어났을 무렵에 문득, 나는 금나라 황제가 아버지를 배신한 것에 생각을 하던 때였지. 나는 생각 끝에 단신으로 황제를 암살하려했지만, 나보다도 먼저와 금나라 군사들을 유린하던 사내가 있었어."
조활은 니교 축생도 왕이장의 강릉포위사건과 대사형과의 일이 갑자기 떠올랐다. 대사형 역시 금나라의 움직임에 무리가 있었음을 깨닫고 황제를 암살할 생각으로 단신으로 쳐들어갔을 무렵이었다.
"그거 설마... 대사형... 아니오?"
용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들었겠지만, 당포의는 황제의 목숨을 거두기 바로 직전이었지. 그때 내가 난입하게 된다."
"누님이?"
"그래. 나는 황제를 죽이려 하기 직전에 아비를 배신한 이유를 물었고 욕심에 눈이 멀어버린 외숙부를 목도 할 수 있었지. 그래서 그를 참으로 불쌍히 여겨 치마자락을 베어내고 외숙부와의 인연을 끊어, 그 이상의 상황을 키우지 않도록 끝을 맺었어."
조활은 그녀의 대담하고도 황제를 가엾이 여겨 내린 결단에 감탄했다.
' 금나라 황제를 가엾게 여기고는 치마자락을 직접 베어 인연을 끊었다라... 누님답지 않게 깔끔한 마무리군. 대사형보다 일을 먼저 마무리했다면 진작에 황제는 죽었을 텐데 이걸 다행이라 여겨야하나... '
용상은 고개를 내려 손에 잡은 천상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문제는 당포의에게 있었지."
그렇다.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의 황제를 시해하려고 했던 장소였다. 이상했다.
' 생각해보니 그렇군. 대사형은 거길 어떻게 빠져나온거지? 단순하게 생각해도 어떻게 누님과 그 한복판을 빠져나온지 예상이 가지 않는군. '
용상은 검을 들어 검집에 차분히 넣으면서 말을 계속했다.
"황제는 나를 조카의 정을 생각하여 역사에 내 이름을 지우면서까지 보내주려 했지만, 당포의는 이미 나보다 먼저 금나라 수뇌 몇을 죽인 뒤라 살아돌아가서는 안됐어. 그래서... 대신에 내가 그를 찔렀지. 내장을 빗겨 찌르는 검법을 이용해서."
조활은 그녀의 말에 감탄했다. 어찌되었든 찔러 죽인 것을 위장시켜 송나라로 다시 송환했다는 것이 성립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그녀의 검술은 그 깊이를 함부로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대사형을 찌르는데는 성공하셨구려, 누님? 그래서 그날, 대사형이 비석방주와의 일을 끝마치고 왜 누님을 보고 아파하는지 전혀 몰랐는데, 이런 뒷 이야기가 있었구려?"
용상은 주먹을 들어 입을 가린채 헛기침을 했다.
"흠흠. 일이야 어찌되었든 당포의와 내 이름은 금나라 역사 안에서 지워졌고, 송나라로 돌아와서는 너도 알고 있는 그대로야. 문제는 여기서 생기게 돼. 금나라의 역사에는 황제가 습격당한 사실이 사라졌지만, 나를 공격할 명분이 생긴 몇몇이 있었지. 수뇌를 죽인 당포의가 사라졌으니 그들의 복수를 하려고 움직이려던 자들이 자연스럽게 나를 표적으로 습격한 거야."
조활은 손바닥에 주먹을 내려치며 말했다.
"이제야 그날의 진실이 밝혀지는 군. 그래서 금나라 자객들이 누님을 노린 것이군?"
용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금나라 안에서는 직접 움직이지는 못하니 자객을 써서 나를 해하려 한 것이다. 그것도 잔챙이들로 나를 재보기라도 하려는 듯 말이지. 그 때문에 나는 습격에 의해 죽을 뻔했지만 다행히도 조 동생을 만난 덕에 죽지 않았고, 란 언니도 우리와 합쳐 그 사건이 일단락되었지. 이것이 그날의 전모야."
조활은 식은 땀을 흘리며 드디어 그날의 전모를 마주했다.
"그, 그렇군."
그때 용상은 갑자기 조활에게 깍듯이 허리를 굽히며 예를 갖추듯이 말했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감사를 하려한다."
용상은 조활의 앞에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조활은 그런 그녀의 갑작스러운 표현에 놀라 서둘러 곁으로 다가가서 두 팔을 잡고 일으켰다.
"가, 감사는 무슨!! 고개 드시오, 누님! 나는 그때 마침 의술을 익혔었고, 도움을 청하는 누님이 앞에 보였을 뿐이오. 만약 의술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누님을 이렇게 두 번 다시 못 봤겠지. 하지만 그것은 이미 정산된 것 아니었소? 그날을 잘 헤쳐냈기에 우리는 이렇게 살아있지 않소??"
용상은 그의 부축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떨궈 차마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 가진 것이라곤 가전무공과 사내같은 힘 뿐이라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렇게나 어리석고 생각이 깊지 못하다. 게다가 다니는 곳마다 민폐나 끼치는 몸이다. 그러니 네게는 이런 은혜도 따로 없지. 조 동생에게는 한없이 감사할 뿐이야. 내 목숨을 구해줘서... 다시 한 번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제서야 조활은 용상의 행동에 어느정도 납득이 되었다. 하지만 완벽히 납득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용상을 구한 것에 대한 주제일 뿐이었다.
"그럼 이러자고 이렇게 나를 붙잡고 온 것이오? 됐소. 감사치레는 됐소. 나는 누님이 살아있는 것에 하늘과 신명께 감사드릴 뿐이오. 내가 이렇게 누님에게 고개 숙여 가며 감사를 받을 것이 되지 못하오. 누님마저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면......"
생각만해도 아찔한 기분이 드는 조활이었다.
' 나는 홀로 남겨진채로 어찌했을지...... '
조활은 아찔한 생각이 들어서 그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용상은 자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가슴 속에 무언가 저릿해지더니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도망만 다녔던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듯, 두 눈이 떠졌다.
' 그렇구나. 나는 조 동생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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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를 부탁합니다. '
용상은 고개를 숙인 조활을 갑자기 끌어안았다.
조활이 놀라 소리쳤다.
"헉!? 누, 누님! 지, 지금 뭐하는...?"
조활이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그녀의 따뜻한 품을 차마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는 조심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 누님?"
용상은 그제서야 조활을 풀어주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란 언니에게 연심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옆에서나, 멀리서나, 언제나 너는 그녀를 사랑하고 떠올렸어. 하지만 나로서는 너의 감정을 이해... 할 수는 없다. 너를 동정하지도 못하겠어. 그 감정... 나는 잘 모르니까. 하지만 그녀는 이제 없다. 나는... 나는 언제까지 너 때문에 가슴앓이를 해야 하는 거니?"
조활은 그녀의 뜬금없는 고백에 놀라 입이 튀어나올 정도로 허둥댔다.
"무, 무슨 소리요? 내가 라, 란 사부를 연모하긴 했지만... 지, 지금 이 상황은 대체... 어?"
조활은 그녀의 눈빛과 마주쳤고, 그 덕분에 용상의 얼굴 빛이 붉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밤이었지만 달이 밝게 밝히는 빛에 의해 그녀의 얼굴이 보였고, 제대로 마주한 그녀의 눈과 수줍게 달아오른 홍조를 볼 수 있었다.
조활은 매우 놀랐다.
"누, 누님 설마 진짜...?!"
용상의 얼굴은 달빛을 머금고 여전히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어리석어. 그리고 생각도 깊지 못해 주변에 민폐를 끼치기 일쑤다. 내가 손 하나 까딱 잘못하면 의도치 않은 일들이 발생하고, 주변이 어수선해지기 딱이야. 하지만 너는 나보다 훨씬 낫다. 의술도 알고, 똑똑하며, 현명해. 네가 제아무리 못난 용모를 가졌다고 세상을 탓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네가 그리 환멸하는 용모는 나에게 결코 중요치 않아. 나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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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동생을 진심으로 연모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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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순간 그녀의 수줍지만 당찬 고백에 숨이 넘어갈 듯 놀라 허둥댔다.
' 마, 말도 안돼. 이, 이걸 어떻게 해야... 나, 나는 상 누님을 어떻게... 아, 아니 나는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
용상은 당황해하는 조활의 모습을 보며 그저 한없이 자애스러웠다. 안타깝기도 했고, 가슴깊이 그를 원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어째서 하후란이 자신에게 그를 맡겼는지는 모른다. 하후란은 알고 있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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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 소저는 제자를 어찌 생각하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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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상은 지난 짧은 만남의 그녀와 나눈 또다른 한 마디가 떠올랐다. 용상은 당시 그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리기 바빴다. 게다가 자신의 붉으스름하게 물든 뺨을 몰랐지만 하후란 만큼은 그것을 선명하게 보았다.
하후란 자신도 제자를 애정했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까지는 차마 소녀같은 마음속에 담을 수 없었다. 이미 속세의 미련을, 제자를 만나기 이전에 정리했기에, 자신의 미련에 애정어린 제자가 묶이길 원치 않았다. 그와 동일된 아픔을 나누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고민했다. 어찌하면 제자에게 자신을 잊게 해줄지. 어떻게 해야 자신이 처한 운명과 달리 할 것인지. 그리고 마침내, 그와 함께 동행하고 서로의 등 뒤를 지켜주는 진정한 인연을 발견했다. 자신의 일이 치뤄지길 고작 며칠 전에.
그리고 촛불을 눈앞에 두고 나눴던 용상과의 진심 어린 대화를 통해 자신을 향한 불붙은 작은 질투의 심지를 발견했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용상 자신이 누굴 원하고 있는 것인지. 그것이 조활을 향한 연민의 감정인지도. 풋풋한 진달래 향내가 은은하게 풍겨오는 그녀의 모습에 내심 다행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하후란은 결심을 품을 수 있었다.
이제 그를 마음 놓고 떠나보내리라.
' 제자를 부탁합니다. '
용상은 드디어 마음의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자신의 모습을 조활에게 당당히 보이기 시작했다. 매우 용상다운 고백이었다.
"나는 조 동생. 아니, 조활. 너를 연모한다."
"누, 누님......"
용상이 조활에게 다가간다.
한 걸음. 한 걸음.
조활은 너무 갑작스러운 분위기에 당황해 뒷걸음질 쳤지만 뒤에는 그를 떠밀듯 나무 한 그루가 있어 더는 벗어날 수 없었다.
달빛이 선명하게 비췄다.
그녀의 목소리는 괄괄하여 시원시원하다. 검을 휘두르는 팔 힘은 마치 건장한 사내 같고, 훤칠한 키 아래 그림자에 가려져 몰라본 섬세하고도 비단결 같은 그녀의 휘날리는 머리칼이 조활의 코를 스쳐 지나갔다.
조활은 황홀했다.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다. 지금 이순간 만큼은 오로지 용상, 오로지 그녀에게만 집중해야 했다.
스물 셋 청년은 스승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미련은 버리기로 했는데 용상을 앞에 두고 그런 마음은 더는 가져서는 안되는 것을 깨달았다. 문득, 어떤 한 마디가 떠올랐다.
.
.
.
' 그녀를 잡거라. '
스승의 넋이 남긴 농담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아니,
그 의미를 깨달은 이상, 그것은 더는 농담이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미련을 가지지말라고 죽어서도 그의 등을 떠민 것이었다. 조활은 용상의 맑고 투명한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반듯하게 용상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용상은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조활의 얼굴도 따라서 어느샌가 붉어졌다.
그리고.
둘은 서로를 껴안았다.
조활은 껴안긴 채로 다급히 말했다.
"미안하오, 누님. 미안하오. 정말... 정말 미안하오."
용상이 껴안은 채로 물었다.
"뭐가 미안한데?"
조활이 말했다.
"동생이 바보라서, 의미없는 미련 때문에 누님이 구태여 이런 결정을 하게 만들었소. 참으로 웃기지도 않는군... 사내로 태어나 숙녀의 마음을 외면하고, 이제는 존재치 않는 미련 하나에 꽂혀 그저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 신세였다니. 게다가 이런 연민의 고백을 누님이 하게 만들었소. 사내로서 부끄럽군. 나도... 나도 누님을 연모하오. 과거부터 그랬지만 스승에 대한 정이 깊어 누님에 대한 연정을 생각하지 못했소. 참으로... 참으로 미안하오."
그의 말을 듣고 용상은 너무나 기뻤다. 그래서 더욱 그를 끌어안았다.
"그럼 나를 더 안아줘. 그 소심한 부끄러움이 사라질 때까지. 나도 너에게 말하고 보니 온몸이 떨려. 내 몸이 아닌 것 같아. 더... 더, 너의 심장 고동을 느끼고 싶어."
조활도 그녀가 원하듯, 자신의 심장 고동을 느낄 수 있도록, 그녀의 심장 고동을 느낄 수 있도록, 더욱 세게 끌어 안았다.
시간이 멈춘 듯 했다.
서로의 몸은 따뜻했고, 심장 고동은 두 남녀가 동일하게 느꼈으며, 밤하늘에 비친 달빛은 그 둘의 작고 소중한 사랑을 잠시 구름 속에 숨어 부끄럽게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는 뒤돌아 걷듯, 구름은 잠시 달빛을 가렸다.
너무나.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망우협려전(忘憂俠侶傳) (7). 끝
* 저는 연재소설 게시판에서 개인작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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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작과 활협전 팬픽을 번갈아 연재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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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순서는 월영전입니다. 개인 소설은 수정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