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은 지났지만 설산의 천년설은 도저히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조활은 무거운 마음과 함께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의 눈에 가장 좋고 양지바른 묘자리 하나를 골라 깊게 깊게 파내려갔다. 자신의 응어리진 미련마저 놓고 가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스승의 메마른 머리칼를 묶은 푸른 머리띠를 풀어내 자신의 손목에 감아냈고 묘자리 밖으로 나와 다시 한 번 스승의 마지막 모습을 정처없이 바라본다.
"......"
"......"
용상이 그에게 다가와 말없이 곁에 머문다. 그녀가 곁에 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는 움직이지 않는 차가운 스승의 모습이 계속해서 아른거린다. 하지만 더는 지체하지 않으리라. 이를 악물고 입술을 굳게 닫은 채 삽으로 정성스레 묘를 덮기 시작했다. 스승의 모습이 점점 사라질 때마다 찢어나가는 가슴앓이를 했지만 흐려지는 시야를 차마 어찌할 수 없어 괴로웠다. 용상은 그의 등을 어루만져주고, 그의 손목을 잡고 천천히 흙을 떠 묫자리를 채워주는 것을 도왔다.
"고맙소, 상 누님."
"......미안해."
"......뭐가?"
용상은 그저 미안했다.
"......미안."
체념한 듯한 그의 어깨가 살짝 흔들리더니 한숨과 함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누님이 미안할 것이 뭐가 있겠소. 그저 이렇게 와줘서 고마울 뿐이오. 어떻게 알고 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그의 넋을 잃은 한마디에 용상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나약한 자신의 내력을 탓하고 또 탓했다.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결과가 이 모양이었다. 자신을 탓하기를 끊임없이 했지만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 제자를 부탁합니다. '
그녀와의 마지막 대화를 곱씹었다. 모든 것을 단념한 그녀가 그녀의 제자를 자신에게 맡겼으나 어찌 해야할 지 갈피가 안잡혔다. 살아생전 이런 적은 처음이었으니 머리 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용상에게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조 동생."
"네."
"당문으로 돌아가자."
"......그러시지요."
스승을 차디찬 땅속에 묻어두고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던 조활은 용상의 손길 덕분에 천천히 움직일 수 있었다. 설산을 벗어날 때까지 둘은 경공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눈덮힌 길을 저벅저벅 걷고 걸을 뿐이었다. 미련이 남은 듯, 가끔 걸음이 멈춰섰지만 용상의 손길 덕분에 오래걸리지는 않고 금방 발걸음을 뗏다.
어느덧 둘은 설산의 영역을 벗어났고 곧바로 당문으로 향했다. 밤낮없이 경공을 펼쳐 수일을 보낸 끝에 당문에 도착했고, 그들을 반기는 당승 장문대리인을 만났다. 장문대리인은 안색이 좋지 않은 조활과 용상에 의해 단편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할 수 있었고, 사형제들과 함께 둘을 말없이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안전히 조활을 데려다준 용상은 곧바로 뒤돌아 길을 떠나기를 청했다. 조활이 떠나려는 그녀의 옷깃을 살짝 붙잡았다.
"이렇게 그냥 가실거요? 이제 막 도착했는데."
용상은 멈칫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 그게 있지..."
"?"
용상은 뜸을 들였다. 고개를 돌려 조활은 바라보았지만 부끄러움에 더는 볼 수 없어 이윽고 그의 눈을 피해 뒤를 돌았다.
"미, 미안. 아직은... 안되겠어."
조활은 그런 그녀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의아함을 보였다.
"뭐... 가 안 된다는 말이오, 누님? 그냥 간다고 해도 하루정도는 외성에서 쉬었다 가시지 어째서..."
용상은 뒤를 돈 채, 입술을 깨물고 목구멍에서 나오려는 소리를 간신히 참아냈다.
"벼, 별거 아니니까. 신경쓰지마. 나는 이대로 금향궁으로 향할 것이다. 그러니 당분간은... 당분간은 이별이야 동생아."
.
.
.
.
' 조 동생. 네 눈빛은... 나를 보지 않는구나. 너의 눈길에는 내가 있지 않아. '
.
.
.
"다시 만날 때 까지, 잘 지내거라."
조활은 그녀의 쓸쓸해보이는 등을 보고는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붙잡지도 못하고 떠나보낼 뿐이었다.
조활은 용상을 보내고 홀로 조용히 당문의 그곳으로 이동했다.
' 설산파 당문지부 '
조활과 당문 사제들이, 스승이 당문에 머물적에 제자의 도리를 다 하겠다며 만든 거처였다. 차분히 다가가서는 문 앞의 기둥을 어루만졌다.
' 바보같은 제자야.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 않느냐. '
머리 속을 스쳐지나가는 스승의 목소리가 가슴을 후벼판다. 살아생전 처음 자신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며, 너무나 화사하고 아름다워 눈을 떼지 못한 한명의 여인이었다. 비록 여마두라는 이름값에 모두가 그녀를 두려워 했으나 자신만은 그녀에게 가장 가깝게 있을 수 있었고, 연정을 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가 없다. 조활은 그녀를 사모했지만 이제는 없다는 사실에 힘없이 기둥을 등받이 삼아 앉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밝게 타오르던 태양은 어느새 건너편 산 너머로 그 모습을 감추려 붉은 색 노을을 태우고 있었고, 은은하게 부는 바람은 정처없이 차갑게 식어가며, 마음 속 빈 자리에는 스승이 없으니, 새까맣고 공허해져 텅 빈 속에는 울화 만이 가득하구나. 전에는 없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조활을 덮치자 다시금 떠오르는 스승의 모습에 또 다시 눈앞이 뿌옇게 번져갔다.
' 어딜 또 우는 것이냐. 스승은 어디가지 않는다. 사내놈이 줏대 없기는. 이리오너라. 스승이 직접 닦아주마. 무슨 설산파 대제자라는 사내가 애도 아니고 쯧. 그리 마음 약해서야 어디가서 제 구실 하겠느냐? '
스승의 매정하지만 따뜻했던 말 한마디가 떠오르자 얼른 소매를 들어 눈가를 비볐다. 하지만 비벼도, 비벼도, 번져가는 눈물자욱은 도저히 그치질 않으니 차라리 속시원히 울기로 마음 먹었다. 스승이 지금 이곳에 없으니 그 누가 자신을 다그치랴. 없으면 없는대로 속이 시원해질 때 까지 자신은 사내아이였다.
먼저 가보겠다고 말하고는 어느새 나무 위에서 그를 몰래 지켜보던 용상도 노을을 바라보며 조용히 그의 아픔을 공유하고 있었다. 가슴앓이 하는 동생이 마냥 불쌍하고 가엽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를 향한 마음이 무엇인지 몰라 혼란스러움에 용상도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 난... 도대체 모르겠어. 이 감정은 대체 뭐란 말인가... 난 동생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지? 가슴이 아프구나. 찢어질 것 같아. 그를 혼자 두고 금향궁으로 가는 것이 정녕 옳은 길일까...? 잘... 모르겠구나. '
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시간이 지나 어느덧 8월 중순. 당문에 손님이 왔다. 관아의 송비, 상관세가 창방의 전언을 받들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어수선한 무림계의 단합을 위한 무림대회를 연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금향궁에도 전해졌다.
"설아."
"제자가 궁주님을 뵙습니다."
금향궁주 소영향 온부인이 그녀의 제자 성설을 부르자, 그녀가 다가와서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예를 표하고 하명하길 기다렸다.
"상아는 그때 돌아오고 나서는 아직도 폐관수련 중이더냐?"
"그렇습니다."
온부인이 혀를 차며 아쉬워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멈추지도 않고 뭐하는 것인지..."
성설이 말했다.
"궁주. 상 사매가 이곳에 당도하고 나서 제자가 조사를 나름 해봤습니다만."
그녀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였다.
"뭔가 있더냐?"
"사매와 같이 있던 것은 당문의 조활 소협이었고, 한동안 설산 부근에서 활동 한 것 같습니다."
잘 모르는 이름이 등장하여 의아한 표정을 지는 궁주.
"조... 활? 당문제자라. 처음 듣는 이름이군. 하물며 당씨 성도 아니라니 뭐하는 자이지?"
"그는 당문의 외성제자이며 설산파의 제자라 합니다."
궁주는 생각치도 못한 이야기에 눈썹이 살짝 흔들리며 놀랬다.
"설산... 파? 과거에 별 시덥지않은 이유로 공동파와 싸우다 멸문된 그 문파?"
성설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야기를 마저 이어갔다.
"네, 궁주. 조 소협은 설산파의 제자로 설산 부근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이후에 상 사매와 둘이서 당문으로 하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좀 묘한 소문이 돕니다."
"무엇이더냐?"
"공동파 탈백문의 탈백유란이 설산에서 사망했다는 비보입니다."
궁주의 눈썹이 다시금 흔들렸다.
"그 여마두가 말이냐?"
"예. 그래서 공동파 주변 문인들의 흘러지나가는 이야기를 종합해 본 결과, 탈백유란은 과거 멸문된 설산파 출신이라고 하더군요."
궁주는 손으로 턱을 괴며 이야기의 앞뒤를 천천히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야기만 놓고보면 자연스럽게 그 조 소협이 탈백유란의 제자라는 이야기가 되겠구나. 그럼 상아는 왜 그곳에 있었다는 거지?"
"이전에 금향궁에서 떠나기 전에 상 사매가 제자에게 말하기를, 설산 부근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곧장 그 방향으로 간 모양인데, 이후, 조 소협, 하후 여협과 무슨 관계가 있는 느낌입니다."
궁주는 골똘히 그들의 사정을 머리 속으로 조합해보기 시작했고 명확한 답이 나오질 않아 제자에게 뒷 이야기를 물었다.
"......탈백유란의 사망에 상아 들이 관계가 있는 것인가?"
"그것까진 모르겠으나, 관계성에 있어서는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은 제법 큰 모양입니다. 게다가 탈백유란과 상 사매가 밤새 술을 끼고 담화를 했다는 근처 객잔의 제보도 있었습니다."
어째 사건을 파보면 파볼수록 더 들어봤자 의문점만 커질 것 같다는 마음에 직접 물어봐야 겠다고 생각이 되었다.
"......알겠다."
스승의 의도를 알았기에 탈백유란 사망의 건에 대해서 더는 이야기하지 않고 함구하는 성설이었다. 대신에 마침 들려온 무림대회의 소식을 물었다.
"궁주. 그나저나 이번 무림대회 건은 어찌 하시려고 합니까?"
궁주는 가지고 있던 비파를 들어 부드럽게 현을 몇가닥 튕기고는 눈을 뜨고 허공을 응시하였다.
"그들의 노림수에는 명분이 충분하다. 나로서도, 금향궁으로서도 물러서야할 이유가 딱히 없구나. 장소마련에 금향궁을 보란듯이 지목했으니 '그녀'가 개입한 것이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도 생각이 있다. 그녀의 개입에 결코 그냥 놀아나지는 않을 것이다."
무림대회에 짙게 깔린 의도적인 악의를 감지한 궁주는 자신들을 희롱하려는 의지를 상쇄시키기 위해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리고 준비가 필요했으니, 그것이 당문이었다. 쓰러져있는 당문장문인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소한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살리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으니 그 의지는 매우 선명했다.
"일단 그 전에 상아를 봐야겠다. 설아."
"네. 궁주."
"상아를 데려오라."
"말씀 받들겠습니다."
자신의 제자가 자리를 떠나자 눈을 감고 비파 몇가닥을 다시 튕기더니 보이지 않는 허공에다 누군가를 불렀다.
"중선아."
그녀가 부르자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화폭에 그려진 여인같은 사람이 나타나 여유롭게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호!호! 무슨 일이오, 언니?"
궁주는 그녀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모르는 것이냐, 모르는 척이더냐?"
그녀는 애매하게 표정 지으며 대꾸를 했지만 계속해서 툭 던져봤자 의미없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새끼손가락으로 머리를 이리저리 꼬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본 녀도 모르오. 단지 하나 이야기해둘 것이 있소."
그녀의 사뭇 진지해진 목소리에 비파의 현을 짧게 튕기고는 물었다.
"무슨 일이더냐?"
"금나라가 움직였소. 상 사매 때문에."
.
.
.
.
.
.
.
"......뭐?"
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용상은 그녀의 사저의 부름에 폐관수련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간만의 파란 하늘을 마주했다. 시원한 공기가 폐에 가득 차니 그제서야 개운함이 온 몸을 맴돌아 제법 기분이 나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 속에 몽우리진 그날의 기억들이 새겨져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것을 쉽게 건너 뛸 정도로 진정이 되긴 했다.
"아직까지도 용연칠절의 마지막 단계에서 허덕이는구나. 과연 천하제일이라 할 법하군. 아버지는 어떻게 이런 절기를 하나하나 정리하셨는지... 사뭇 굉장하게 느껴지는구나."
자신의 천상검을 쥐고 그간 수련의 결과를 되짚어보니 가전무공의 섬세하고 유려함을 다시금 깨닫고 있었다. 그때 용상의 수련을 멈춰세운 성설이 물었다.
"상 사매, 수련의 성과는 어때?"
용상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목표치에 가까운 것도 아니니 평이합니다, 사저. 그런데 갑자기 수련을 멈춰세운 이유가?"
"스승님께서 찾아.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도 계신 듯 하고."
"그런가요? 무슨 일이시지."
성설은 용상이 폐관수련에 들어가지 전, 좋지않은 표정을 읽었었기에 그녀의 뒷 조사를 하게된 것이었다. 평소에는 천진난만하게 닭다리부터 찾던 그녀였기에 갑작스럽게 변한 태도와 눈빛을 보고는 필히 무슨 사건이 있었음을 짐작했었고, 조사와 함께 심상치 않은 결과가 용상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성설은 그녀가 흔들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나 묻겠는데. 사매."
용상은 이전의 기억이 수련 덕분에 잊혀진 모양이었는지 의심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물어보시지요?"
"당문 조 소협과는 무슨 관계니?"
성설에게서 의외의 이름이 나오자, 용상은 처음에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자 입가에 잠시 머물렀지만 이내 깨닫고는 조심히 답했다.
"당문 조...? 아... 조 동생 말씀이신겁니까? 그건 갑자기 왜...?"
그 이름을 듣고는 용상의 반응이 다시 조심스러워지자 성설은 되려 걱정되는 마음에 더 묻는 것은 포기하고 궁주가 되묻기를 바라며 말했다.
"...아니다. 무림계에 들려오는 이야기가 좀 있어서 그래. 별거 아니니까 궁주께 가봐."
겨우 잊고 있었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인지 표정이 다시 굳어져 가다가도 이윽고 이겨내려 하며 웃어넘겼다.
"......알겠어요. 하... 하..."
.
.
.
.
.
' 겨우...... 잊고 있었는데.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래서, 설산으로 갔다?"
"예. 스승님께 말씀 드린 그대로입니다."
용상은 스승인 금향궁주에게 설산부근으로 간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녀가 용상의 상황을 알고 있으니 금나라와 관련 되어있다고 여겼지만, 그들은 금나라에서 보낸 자객이라고는 생각치 않는 오합지졸에 가까워서 그날은 아직도 혼란스럽다고 이야기했다. 금향궁주는 그 이야기를 들은 후, 곰곰히 생각에 빠졌다.
"뭐, 네가 갑자기 당했다는 것은 방심했다고 쳐도 이상한 부분이 있긴 한 것 같구나."
"너무 허술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당했다고 생각하니 제자는 다시 부끄러워 지는군요."
궁주는 그녀에게 다가가 슬쩍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낌새를 지울 줄 아는 집단은 맞는 것 같구나. 네가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도 그렇고. 하지만 그게 전부였던가... 그럼 그 당문의 조활 소협은?"
그의 이름이 나오자 순간 흠칫하며 눈빛이 흔들렸지만 스승의 물음에 감히 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 조 동생은 우연히 마주친 것입니다. 근처 설산파에서 할 일이 있다고..."
.
.
.
.
.
.
' 제자를 부탁합니다. '
순간 머리 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잠시 말이 멈췄다. 궁주는 용상의 멈춤에 잠시 갸웃 했지만, 자신의 뺨을 탁탁 때리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자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을 지금 굳이 묻지는 않았다.
"서, 설산파에서 할 일이 있다고 해서 온 것이며, 생필품을 사러 잠시 나온 사이에 저를 발견 한 것입니다. 조 동생은 제자를 도와준 것 밖에 없으니 그는 의인이며 협을 추구하는 무림인입니다."
"그래. 그런 것 같구나."
궁주는 그 말을 끝으로 용상에게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기 시작했다. 용상은 그녀의 뜬금없는 다가옴에 도망치지 못하고 엄숙한 스승의 눈빛을 마주했다.
"스, 스승님? 제자가 뭔가 잘... 못 이라도?"
궁주는 용상의 눈빛을 세세히 읽어내기 시작했다. 뭔지 모를 흔들림, 불안함이 보여 걱정이 되었지만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뭔가를 물어봤다.
"당문의 조 소협은 어떤 인물이더냐?"
순간 용상의 눈빛이 변했다. 불안함이 미세하게 깔리긴 했지만, 흔들렸던 눈동자는 어느샌가 차분해져 있었다. 그러나 뭔지 모를 애매한 눈빛에 확신을 읽을 수 없었으니 제자가 하는 이야기를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조 동생은 동문 사매의 부탁으로 버려진 사당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남궁의 제자를 사칭하던 금나라 출신 무뢰배에 관련하여 일처리를 했다가 실명될 위기에 처한 때가 있었는데, 그날 처음 도움을 받았지요. 그 이후로 당문 비협의 문제로 그 근방에 머물렀는데 제자가 견식이 얕아 뒷주머니를 강탈당한 것을 돌려받는 등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의해 버림받았다고 여기고 있는 사내이지만, 끊임없이 의와 협을 추구하는 참된 무림인입니다. 그래서 제자는 그의 옳고 바른 형태에 감명받아 여태까지 친분을 쌓고 관계를 이어온 것입니다."
궁주는 용상의 거침없는 조활의 소개에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았다. 이는 그를 향한 무한한 신뢰를 말하는 것이었으니, 그 사내는 그녀의 말미암아 매우 믿을만 하다 여겼다.
"듣자 하니 그는 당문의 외성제자이자 설산파의 제자라고 하던데 아는 것이 더 있느냐?"
흔들리지 않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설산파의 제자이며 그의 스승은 공동파 탈백문 탈백유란이라고 합니다. 그녀와 마주하고, 그녀는 강했으며, 또... 또..."
갈피를 잡지 못해 흔들리는 용상의 불안해진 눈동자를 보고는 성설이 보고한 내용이 진실이었음을 느낀 궁주는 이 이상 묻는 것은 문제가 있음이라 여겼고, 곧바로 질문을 거두었다.
"그래. 이쯤하면 됐구나. 상아, 네가 말한대로 조 소협은 참으로 믿음직하고 큰 일을 맡겨도 될 정도로 인물 됨을 알 수 있을 것 같구나."
궁주가 조활을 칭찬하자 용상은 그제서야 불안한 눈빛이 사라지고 입이 떨어쳤다.
"그, 그렇습니까?"
궁주는 용상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언제 한 번 만나보고 싶구나."
용상은 기뻐하며 말했다.
"분명 스승님도 만나면 마음에 드실 겁니다! 조 동생은 믿음직하고 협심이 강하니 분명 스승님의 마음에 들 것입니다!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래."
.
.
.
.
.
.
' 잘은 모르겠으나 이 아이가 이정도로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아하니 남자로서도 무언가 느끼는 것 같구나. 전에 느낀 애매한 눈빛이 애정인지 경외심인지가 확실하지 않는 것인가? 참으로 궁금하군. 뭐하는 자 이길래 이 아이의 마음을 이리도 뒤흔들게 만들었는가. '
궁주는 그만 용상에게서 멀어지고 본격적으로 그녀에게 명을 내리기 시작했다.
"상아."
갑자기 변한 스승의 어투에 몸가짐을 다잡고 물었다.
"네, 하명하십시오."
"곧, 금향궁에서 무림의 안녕을 위한 무림대회가 열리게 될 것이다."
"무, 무림대회...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러니 금향궁 제자 용상은 들으라."
용상은 고개를 들어 궁주와 눈을 마주치고 명령을 기다렸다.
"지금부터 당문으로 가서 그들을 초대하여 금향궁으로 직접 모셔오도록 하라."
망우협려전(忘憂俠侶傳) (4). 끝.
https://ruliweb.com/family/212/board/300068 (연재소설 게시판)
https://ruliweb.com/family/212/board/300068?search_type=member_srl&search_key=574330 (모음)
개인작과 활협전 팬픽을 번갈아 연재중 입니다.
다음 순서는 개인작입니다.
링크 남기니 관심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