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네페르 디자이너 다이어리
멘-네페르 한글판은 이번 가을 페스타에 출시될 예정입니다.
아래는 멘-네페르의 게임 디자이너 Germán P. Millán이 쓴 디자이너 다이어리를 번역해 보았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비토쿠, 사비카 및 여러 게임을 만든 게임 디자이너, Germán P. Millán이라고 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멘-네페르 제작 과정에서 얻은 제 의견과 성찰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게임 제작 과정
게임 제작이 쉽다고 말하는 디자이너는 없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동안 많은 게임을 출판했지만, 여전히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두렵고 무기력한 저 자신을 발견합니다. 제 생각엔 대부분의 작가가 어느 정도의 *가면 증후군을 앓고 있을 것 같습니다.
(*역자 주:자신이 사기꾼이고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는 불안)
어떤 게임이 안 그렇겠냐마는, 멘-네페르의 제작은 길고 험난했습니다. 이전 규칙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규칙을 수없이 갈아엎었습니다.
구버전의 게임 보드를 보니 그동안 수많은 메커니즘이 지나쳐 간 것에 놀랐습니다. 주사위, 전문화가 바뀌는 일꾼, 비대칭 능력, 비밀 계약서... 정말 많은 것들이 이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복잡한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이 중요한지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게임을 검증하고, 메커니즘을 좀 더 견고한 방식으로 바꾸고, 이 모든 것을 위해서는 수많은 플레이 테스트가 필요합니다.
멘-네페르는 지금까지 제가 출판했던 게임 중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았고 또, 자아비판을 가장 많이 했던 게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완성된 결과물을 본 지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습니다. 좋은 게임을 만들기 위해 시간과 노력은 필수적입니다.
프로젝트의 시작 그리고 자료 조사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2020년은 기억에 남는 해였습니다. 스페인 정부가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오랫동안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 시기에 저는 비토쿠와 사비카의 디자인을 마무리했지만, 동시에 고대 이집트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게임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습니다.
이미 수많은 게임이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에, 참신한 주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게 있어 이집트 테마는 게임으로 만들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었습니다.
당시 이집트에 관한 다양한 다큐멘터리를 찾아봤습니다. 또,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이라는 비디오 게임을 하기도 했습니다. 게임은 고대 이집트를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관광 가이드와 함께 특정 장소를 돌아다니며 흥미로운 사실들을 설명해 줍니다. 마치 게임 속에서 박물관을 방문하는 듯한 경험이었습니다. 정말 훌륭한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렇게 쌓인 정보들이 제 머릿속에 하나둘 쌓였고, 저는 조금씩 유로 게임 스타일의 새로운 게임을 구상해 나갔습니다. 플레이어들이 피라미드를 짓고, 스핑크스를 세우고, 귀족을 미라로 만들고, 신전에 공물을 바치고, 나일강을 항해하는... 요컨대 고대 이집트의 핵심을 담은 게임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만든 게임 보드를 다시 꺼내보니, 완성된 게임에서도 그 기본적인 요소들은 모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다만 게임 방식은 처음과 전혀 같지 않았습니다.
프로토타입 1
저는 보통 큰 변화가 있을 때마다 보드 파일을 따로 저장하곤 합니다. 멘-네페르 프로토타입의 마지막 보드 파일 이름은 "Board_V81"이었고, 그 시점에서 우리는 게임이 완성됐다고 판단했습니다.
아래는 제가 처음으로 디자인한 보드입니다.
그리고 아래가 최종 파일인 "Board_V81"입니다. 큰 변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두 게임은 전혀 다른 게임입니다.
게임 속 경제에 대해
최근에 제가 만든 게임들을 보면, 저는 플레이어가 하는 행동과 그에 따른 보상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게임에서 나무와 돌을 얻을 수 있는데, 나무가 돌보다 쉽게 얻을 수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 경우 나무는 2점, 돌은 3점을 주는 방식으로 경제 체계를 설정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입니다. 돌이 더 얻기 어려운 만큼 더 높은 가치를 지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르게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원 개념이 없는 게임에서는 행동 수 자체가 자원의 비용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플레이어가 더 많은 행동을 소모했다면, 더 적은 행동을 소모해 얻은 것보다 더 큰 보상을 줘야 합니다. 스테판 펠트(Stefan Feld)의 일부 게임들이 바로 이러한 방식을 적용합니다.
멘-네페르를 만들면서 저는 이 개념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꼭 행동이 "자원 얻기", "자원 사용하기"로 나뉠 필요는 없었습니다.
멘-네페르에서의 자원
디자인 초기 단계에서 게임은 스핑크스를 짓기 위한 화강암, 피라미드를 짓기 위한 석회암, 미라 제작을 위한 천연 소금과 유사한 나트론, 배를 짓기 위한 목재 등 다양한 자원을 사용했습니다. 자원의 종류가 많으니, 게임에 테마적인 깊이를 줄 수 있었지만 여러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행동 수는 제한적인데, 4번의 행동을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보상이 두 번의 행동으로도 충분히 구현될 수 있다면 과연 그 과정이 꼭 필요할까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하나의 교훈을 얻었습니다. 항상 효과적인 방법은 사물을 최소한의 본질로 단순화하는 것입니다. 무언가가 더 간단하게 작동한다면, 그것은 개발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원칙을 따르며, 저는 개발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 모든 자원을 제거하고 일꾼 시스템으로 교체했습니다. 스핑크스를 건설하려면 건축가가 필요하고, 귀족을 미라로 만들려면 방부사가 필요합니다. 그 결과 6가지 자원 대신 3가지 자원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경제 구조는 잘 작동했으며, 이후 더 개선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어떠한 작업에도 사용할 수 있는 만능 일꾼을 추가한 것입니다. 게임 요소에 다재다능함을 부여하는 것은 언제나 효과적이며, 게임의 복잡성을 줄여 줍니다. 조커가 등장하는 어떤 게임이든 떠올려 보세요. 플레이어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시스템을 기반으로 많은 테스트 플레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엔진"들도 다듬어지고, 개선되었는데, 이는 무엇보다 경제 구조 덕분에 게임이 잘 흘러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제 구조를 중심으로 모든 요소가 개선되자, 어느 순간부터 경제 자체가 오히려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게임의 흐름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해결책은 게임 경제를 더 단순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일꾼을 전부 제거하고, 그것을 게임의 행동 자체로 통합해 버린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 무언가가 단순해지는 방향으로 발전한다면 그것이 올바른 길입니다.
물론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멘-네페르는 자원이 전혀 없는 게임도 아니었고, 그중 대부분이 행동 관리로 전환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로토타입 2
아래는 제가 일꾼 시스템을 도입했을 당시의 플레이어 보드입니다. 테스트 플레이는 금세 끝났습니다. 플레이 도중 우리는 곧바로 일꾼을 자원처럼 활용하는 방식이 기존 방식보다 훨씬 잘 작동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때로는 테스트 플레이가 금방 끝나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작가와 테스트 플레이어 사이에 흥미로운 논의가 오가곤 합니다.
시계와 톱니바퀴에 관하여
저는 보드게임과 시계를 연결하는 것이 늘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여러 개의 톱니로 작은 톱니바퀴를 돌리고, 결국 하나의 기계를 움직이듯, 보드게임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느낍니다.
보드게임에서는 대부분 하나의 큰 핵심 톱니바퀴(게임의 메인 메커니즘)가 있고, 여러 개의 작은 톱니바퀴(게임의 행동)가 붙어 있습니다. 이 작은 톱니바퀴들이 더 작은 톱니들을 움직입니다. 예를 들어 동전을 얻거나, 트랙을 전진하는 것과 같이요. 크게 보자면 이게 보드게임의 작동 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로 하는 것은 쉽지만, 막상 그 핵심 톱니바퀴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저는 늘 고민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고, 완성도 높고, 단순하지만 더 좋은 게임을 만들까. 그래서인지 테스트 플레이어들은 농담처럼 종종 제가 만든 프로토타입이 다 다른 게임같다고 얘기하곤 합니다.
핵심 메커니즘
멘-네페르의 첫 번째 메커니즘은 주사위에 적힌 수만큼 주사위가 이동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후에는 모든 플레이어가 공유하는 주사위 공급처에 주사위를 굴린 뒤, 그 결과로 행동을 선택할 수 있도록 바뀌었습니다.
설명만 들으면 꽤 멋져 보였지만, 실제로는 잘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보드게임을 디자인할 때 자주 있는 일입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게임에 적용해 보지만, 막상 시도해 보면 상상했던 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죠. 하지만 이는 보드게임을 디자인할 때의 매력 중 하나입니다. 끊임없이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이죠.
멘-네페르의 핵심 메커니즘은 수없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장 많이 스트레스를 받은 게임이었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사위를 핵심 메커니즘으로 유지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결국 깨달았습니다. 무언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과감히 버리고 다른 접근법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요.
주사위를 제거하고 전문화 마커를 도입한 순간, 게임은 마치 마법처럼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게임의 기계장치를 튼튼하게 움직일 수 있는 핵심 톱니바퀴를 얻은 셈이었습니다.
프로토타입 3
제가 게임을 만들 때는 방대한 양의 아이콘을 만듭니다. 처음에는 늘 깔끔하고 조화롭게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용하지 않는 아이콘들이 뒤섞여 점점 혼란스러워지곤 합니다. 아래 그림은 제겐 마치 게임의 성장 과정을 보는 것같은 느낌을 줍니다.
점수 시스템
마지막으로 멘-네페르의 점수 시스템에 관해 이야기하고 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제 게임은 대체로 비슷한 구조를 따릅니다. 대부분의 게임들은 게임 도중에 얻는 점수와 게임 종료 후에 얻는 점수 사이에 균형이 있었습니다 . 이 구조는 보통 2가지 전략을 만들어냅니다. 단기적으로 점수를 쌓아가는 전략이 있고, 장기적으로 점수를 노리는 전략이 있습니다. 물론 둘을 절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멘-네페르에서는 이 방식을 새롭게 재구성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개발 후반부에야 비로소 확정된 요소이기도 합니다. 게임은 3시대로 나뉘며, 각 시대가 끝날 때마다 게임의 모든 요소를 점수화합니다. 플레이 도중에는 점수를 적게 주고, 모든 무게 중심이 시대 종료 시의 점수 계산에 실려 있습니다. 저는 이 순간이야말로 반전과 긴장감이 있는 흥미로운 순간이라 생각합니다.
이 시스템은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서로를 끊임없이 견제하고 관찰하게 만듭니다. 한 곳에서 상대가 나보다 3점이 앞서 있다면, 나는 반드시 다른 곳에서 4점을 앞서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즉, 이 게임은 효율적인 **스노우볼 효과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영역을 최대화할 수 없도록 설계했기에 플레이어는 특정 전략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역자 주: 어떤 일이 계속 커지거나 불어나는 효과)
마치며...
여기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멘-네페르의 개발 과정을 명확한 구조로 기억하지 못해, 떠오르는 대로 흩어진 생각들을 적어 내려간 거라 글이 조금 어수선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회고와 곁가지 이야기에 너무 자주 빠져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다이어리를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언젠가 멘-네페르를 플레이하게 되신다면 즐겁게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boardgamegeek.com/blog/1/blogpost/163238/designer-diary-men-nefer
사진 출처: 인스타그램 @tabletopp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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