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테오도라는 펜타폴리스의 행정관 헤케볼리우스의 정부로서 이집트에 살았다.
이 시기는 짧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헤케볼리우스는 테오도라를 버렸고, 분노한 테오도라는 그 길로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으니까.
수도에 돌아온 테오도라는 집을 한 채 장만해 베를 짜며 조신한 생활을 보냈다.
이는 베를 짜며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는 페넬로페를 모방한 행동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테오도라는 '오디세우스'가 누군지, 언제 올지도 알 수 없었단 것이었다.
얼마 간의 기다림 끝에 테오도라는 '오디세우스'를 만났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란 이름의 이 '오디세우스'는 여느 수도의 귀족 같은 식자 출신이 아니었다.
견실하고 활력 넘치는 트라키아 소작농 출신의 이 남자는, 시골사람이 으레 그렇듯 요샛말로 '진지충'이었으며, 할일이 없으면 안절부절 못하기 쉬운 워커홀릭이었다.
(물론 이 남자는 돈이 많았고, 테오도라는 가난한 자에게 동정심을 느낄지언정 부를 싫어하진 않았다.)
테오도라는 이 남자의 굳건한 신뢰도를 사랑했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는 줬던 돈을 뺏어가는 쫌생이도, 변했다며 말싸움하는 찌질이도 아니었으니까.
약속은 반드시 지켰고, 여성들이 매력을 느낄만한 소년다운 구석도 제법 간직했던 모양이었다.
결혼 전, 유스티니아누스는 호르미스다스의 집이라 불리는 저택을 보유하고 있었다.
히포드롬 남쪽 마르마라해 해변 인근에 위치해있던 집으로, 튼튼하고 방비가 잘될 뿐더러 부콜레온 항구와도 가까운 좋은 위치였다.
후일 '테오도라의 집'으로 더 유명해질 이 집에서 그 둘의 결혼 생활이 시작된 장소로 보인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테오도라를 가문의 일원이자 자신의 파트너로 공인받고 싶어했고, 호르미다스의 집에서의 동거는 이러한 회유 절차 중 하나였다.
(다만 무작정 결혼을 고집하기보다는 자기가 유력한 차기황제가 되기까지 기다리며 '존버'했다.)
이들의 말년을 보면 알 수 있듯 두 사람의 유대감은 피상적인 쇼윈도 부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여배우에게 돈 많은 젊은이가 품은 사랑의 열병도 아니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테오도라의 모든 매력에 감사했으나 외모의 탁월함보다는 깊은 지성과 괄괄한 성격에 더 매료됐던 모양이고, 테오도라 역시 이런 감사에 잘 반응을 보였다.
출처: G. P. Baker, Justinian: The Last Roman Emperor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기보단 좀 요약하거나 가다듬었습니다.
저자가 한니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술라, 콘스탄티누스 1세 전기도 낸 적이 있어서 나름 참고할 만하지 않나 싶어요.
부제가 개꼽긴 하지만. 어딜 봐서 마지막 로마 황제야.
(IP보기클릭)110.9.***.***
1. 테오도라가 이전에 사귀던 남자들은 어째 좀 안 좋은 구석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특히나 한번 줬던 돈을 빼앗아가는 건 정말 치졸한 행태인데... 그런 사람들에게 질려버린 테오도라 입장에선, 유스티니아누스가 더할 나위 없는 파트너였겠네요. 내성적이긴 해도 성격이 모난 데 없고, 돈도 많았으니까요. 2. 혼전 동거가 5~6세기 로마 제국에선 딱히 문제될 게 없었다는 점이 재밌네요. 시간이 많이 흐른 근대에는 혼전 동거가 큰 문제로 불거졌고, 현대로 들어와서야 곱지 않은 시선이 가라앉았으니까요. 가만 보면 근대인에게는 자기들이 그렇게나 깔보던 전근대인보다 못한 구석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3. 유스티니아누스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하면서도 현실적인 면을 감안했군요. 그렇게 동거하며 기다리다가 나중에 숙부이자 공동 황제인 유스티누스에게 귀천상혼을 완화하는 내용의 법안을 만들어달라고 할 정도니,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인내심도 강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고토 회복도 100%까진 아니어도 꽤 성공한 것 같고요. 그놈의 역병만 아니었어도... 4. 서유럽이나 미국 쪽 학자들은 최대한 잘 쳐줘서 유스티니아누스 대까지만 로마로 인정하고 그 뒤의 황제, 특히 이라클리오스 대부터는 그리스라 폄하하는 모양입니다. 로마 동서 분열 이전에도 일리리아 이남의 발칸 반도나 아나톨리아 일대, 이집트 등지에선 그리스어(정확히는 코이네 그리스어)가 쓰였는데 말이죠. 은연 중에 동유럽과 중동 지역을 깔보거나, 열등감의 표출 아닌가 싶습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중세 로마사 관련해서는 제가 아는 게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서, 새로운 내용을 많이 알고 갑니다. 동로마 게시판도 활성화되었으면 하네요. 이 글이 창작 활동에도 보탬이 되어 기쁘기도 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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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테오도라가 이전에 사귀던 남자들은 어째 좀 안 좋은 구석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특히나 한번 줬던 돈을 빼앗아가는 건 정말 치졸한 행태인데... 그런 사람들에게 질려버린 테오도라 입장에선, 유스티니아누스가 더할 나위 없는 파트너였겠네요. 내성적이긴 해도 성격이 모난 데 없고, 돈도 많았으니까요. 2. 혼전 동거가 5~6세기 로마 제국에선 딱히 문제될 게 없었다는 점이 재밌네요. 시간이 많이 흐른 근대에는 혼전 동거가 큰 문제로 불거졌고, 현대로 들어와서야 곱지 않은 시선이 가라앉았으니까요. 가만 보면 근대인에게는 자기들이 그렇게나 깔보던 전근대인보다 못한 구석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3. 유스티니아누스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하면서도 현실적인 면을 감안했군요. 그렇게 동거하며 기다리다가 나중에 숙부이자 공동 황제인 유스티누스에게 귀천상혼을 완화하는 내용의 법안을 만들어달라고 할 정도니,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인내심도 강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고토 회복도 100%까진 아니어도 꽤 성공한 것 같고요. 그놈의 역병만 아니었어도... 4. 서유럽이나 미국 쪽 학자들은 최대한 잘 쳐줘서 유스티니아누스 대까지만 로마로 인정하고 그 뒤의 황제, 특히 이라클리오스 대부터는 그리스라 폄하하는 모양입니다. 로마 동서 분열 이전에도 일리리아 이남의 발칸 반도나 아나톨리아 일대, 이집트 등지에선 그리스어(정확히는 코이네 그리스어)가 쓰였는데 말이죠. 은연 중에 동유럽과 중동 지역을 깔보거나, 열등감의 표출 아닌가 싶습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중세 로마사 관련해서는 제가 아는 게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서, 새로운 내용을 많이 알고 갑니다. 동로마 게시판도 활성화되었으면 하네요. 이 글이 창작 활동에도 보탬이 되어 기쁘기도 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