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8년 4월 13일(음), 누르하치는 칠대한(七大恨)의 명분을 내세워 명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다. 2만의 군대가 출정하여 4월 15일 무순, 동주, 마근단등의 변경 거점들을 항복시키거나 함락했다. 무순 유격 이영방(李永芳)을 비롯하여 935명의 명군이 후금에게 항복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그 밖에 많은 인명과 물자도 후금의 손에 넘어갔다.
4월 16일, 후금/청측 기록인 『구만주당』과 『만문노당』 내지는 청태조계 실록들에 의하면, 누르하치는 자신이 포로로 잡은 16명의 명 상인들에게 자신의 전쟁 명분인 칠대한/칠종뇌한(七宗惱恨)을 기술한 서신과 함께 노자를 건네고 그들을 석방했다. 누르하치는 그들이 명 내지로 돌아가면서 요동 지역 내에서 자신의 명분과 전쟁 개전을 알리고, 그리하여 민간이건 군이건 요동아문 이건 간에 이반되거나 압박을 받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1
한편 누르하치가 상인들을 석방한 4월 16일로부터 9일 뒤인 4월 25일. 해당 일자의 『명신종실록』 기사에는 마치 누르하치의 해당 조치와 연결된 것처럼 보이는 기사가 있다. 신종실록에 실린 기사는 누르하치의 포로 송환, 그를 통한 명에 대한 서신 발송, 그를 통한 자신의 건국 사실과 명에 대한 전쟁 명분인 칠종뇌한의 전달, 그리고 화친의 제안에 대한 기록이다. 이에 의하면, 누르하치는 자신의 부하 장수 장태(章台)1로 하여금 장유신(張儒紳), 장동(張棟), 양희순(楊希舜), 노국사(盧國仕)등을 호송해 송환케 한 뒤 그들을 통해 건국과 칠종뇌한의 사실과 화친의 제안을 전달했다.2
명의 조야의 이에 대한 반응은 차치하고서, 명의 실록에 남은 이상의 기록은 후금측의 기록에 남은 '16명의 상인에 대한 석방과 칠대한 전달 요구'와 맞물려 해석하기에 큰 무리가 없다. 후금측에 의한 4월 16일의 상인 석방과 칠대한 전달 요구로부터 9일 뒤, 상대측인 명의 기록에 후금이 보내온 한인들과 그에 의한 칠대한 및 화친 제안이 보인다는 것은 동일한 사건에 대한 후금/명측의 관점과 해석으로 보기에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일부 학자들은 이 기록에 근거하여 누르하치가 무순을 함락하고 열흘도 되지 않은 시점에 명에 화친을 제안했음을 주목했고, 이에 대해 누르하치의 의도를 해석하기도 했다.4 필자는 감히 학자라 자칭할 권위도 없고 능력도 조야하나, 필자 역시 이에 주목하여 누르하치의 의도를 해석해 본 바가 있다.
하지만 실상, 『명신종실록』의 기록처럼 4월 25일 후금에 의해 송환된 장유신등에 의해 요동아문에 전쟁명분과 건국, 화친의 의사가 기술된 서신을 전달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는 시기가 착오되어 본래는 다른 일자에 일어난 일이 해당 일자의 기사로서 실록에 수록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만큼, 후금의 기록에 실려 있는 1618년 4월 16일의 16인의 상인 석방과, 『명신종실록』 4월 25일 기사의 포로 장유신등의 후금측 서신/의사 전달은 서로 하나의 사건에 대한 결부 기록이라고 보기도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가장 주요한 근거이자 첫 번째 근거로, 『구만주당』/ 『만문노당』 상의 무오년/천명 3년 윤 4월 22일의 기사와 『명신종실록』 4월 25일의 기록상 맥락의 상통을 들 수 있다. 두 사료상의 4월 22일 기사가 거의 일치하는 만큼 『만문노당』의 기사만을 통해 해당 기록을 살펴보자면 이와 같다.
['orin juwe de nadan amba koro i gisun be bithe arafi nikan han i lo taigiyan i hvdai juwe niyalma keyen i emu niyalma fusi emu niyalma be nikan han de takvrafi unggihe'(윤 4월) 22일에 칠대한의 말을 글로 써서 니칸 한(명 황제)의 노(lo, 盧) 태감의 상인 두 사람, 개원의 한 사람, 무순의 한 사람(에게 주어) 명 황제에게 보냈다.]
『구만주당』과 그 복간개수본인 『만문노당』에 있어서, 해당 기사는 4월 16일의 명 상인 석방에 이은 명에 대한 두 번째 칠대한 통지였다. 명의 기로과는 다르게 서신에 칠대한 외의 다른 내용을 썼다는 언급은 없다. 아마도 서신에 명에 대해 먼저 화친 등을 운운한 점을 일부러 기록에서 배제하여 기록상 누르하치와 국가 위신을 지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인원수'와 '소속'이다. 『청태조무황제실록』을 비롯한 청태조실록에서는 '무순의 한 명'이 생략되어 당시 후금이 송환한 총 인원이 세 명으로 보인다.5 하지만 위에서 드러나듯, 실상 원당과 노당에서는 이들의 인원이 4명인 것이 드러난다. 이는 『명신종실록』 만력 46년 4월 25일 기사에 누르하치가 장유신등 네 명의 한인들을 송환하고 인장이 찍힌 문서를 전하게 했다는 서술과 인원수가 일치한다.
『만문노당』 4월 16일 기사의 16명 석방 기록 역시 이들 중 4명만이 요동아문에 서신을 전달했다고 해석할 수 있긴 하나, 애초부터 4명을 보냈다는 『만문노당』 윤 4월 22일의 기사는 『명신종실록』 만력 46년 4월 25일 기사와의 지칭 사건의 일치성이 상대적으로 훨씬 높다.
'소속'에 있어서도 그렇다. 4월 16일 후금에 의해 석방된 명 상인들이 명의 7개의 지역에서 온 상인들이었다면, 윤 4월 22일 석방된 한인들 중 중점이 되는 것은 '명 황제의 노 태감 하의 상인들'이다. 후금은 이들 중 2명의 신원을 환관들에 의해 파견된 이들로 파악했고, 그렇기에 명 중앙과 연결된 이들에게 인문(印文)을 맡기고 돌려보낸 것이다.
여기서 『명신종실록』을 살펴보자. 만력 46년 6월 2일 하남도어사 당세제(唐世濟)는 이상의 장유신등의 송환과 누르하치의 문서 전달을 거론하면서 이들의 무순 파견이 동창(東廠)에 의한 바임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이들의 후금과의 내통 여부와 관련한 법사(法司) 심문을 요청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동창태감 노수(盧受)는 그들의 파견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대신 장유신등은 가죽을 구입하기 위해 파견된 차관일 뿐이며 누르하치가 이들을 풀어주면서 이서(夷書)를 맡긴 것은 겁박에 의한 것일 뿐 내통과는 무관하다고 하였다.6
의혹에 대한 지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만력 47년 9월 17일에 국자감박사 서대상(徐大相)은 노수와 장유신간의 상관 관계와 장유신의 누르하치의 의사 대행의 문제를 지목하면서 노수를 법사에 맡겨 심문할 것을 요청하며 그를 탄핵했다.7
한편 『삼조요사실록』에서도 역시 장유신의 송환과 이서의 전달로 말미암은, 노수에 대한 언관의 내통 의혹 탄핵을 기술하고 있다.8
이상에서 살펴볼 수 있듯, 장유신 등은 동창태감 노수에 의해 장사를 위해 무순으로 파견된 이들이다. 그리고 『만문노당』에 기술된 윤 4월 22일의 석방자들은 '노 태감'에 의해 파견된 이들이 중심이 된다. 명의 기록에 언급된, 후금의 문서와 함께 송환된 '태감 노수'에 의해 무순에 파견된 장유신과 세 사람, 그리고 후금의 기록에 언급된 '노 태감'에 의해 무순에 파견된 한인 네 사람. 이들은 사실상 동일 존재라고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이들은 후금의 기록에 의하면 윤 4월 22일에 석방, 송환되었다.
물론, 명과 후금 양측 모두 당사국인 만큼 무조건 명보다 후금의 기록이 옳다고 볼 수는 없다. 명의 기록만이 착간과 오류 문제가 존재할 뿐 아니라 후금의 기록 역시 기사의 착간과 오류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후금이 송부자이기에 후금이 기록한 윤 4월 파견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윤 4월 22일의 기사가 실상 4월 22일의 일이 착간된 결과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명신종실록』의 4월 25일 기사와 결부되게 되어, 4월 22일 누르하치에 의해 송환된 장유신 등이 4월 25일 요동아문에 누르하치의 서한과 뜻을 전달했다는 분석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4월 22일 후금과 누르하치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면, 누르하치가 4월 22일에 장유신등을 송환해 인신이 찍힌 문서와 함께 돌려 보내는 것은 여건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4월 20일 누르하치는 선행 복귀 부대를 허투 알라로 복귀시켰다. 그들은 4월 15일의 공격전에서 얻은 대부분의 포로와 노획물을 이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뒤 누르하치는 4월 21일 시여리 근교인 두카(duka) 고지~단다(danda) 지역에서 장승윤과 일전을 벌여 승리했으며, 그 날 그 곳에서 숙영하며 노획물을 정리하고 전후 처리를 진행했다. 4월 22일에는 부상자들에 대한 논공행상과 노획물 처리를 이어나간 뒤 두카에서 숙영했다.9
이러한 시간선을 보건대 이런 상황에서 누르하치가 포로로 잡은 잡은 장유신 등에게 인신이 찍힌 문서를 쥐어 주고 명에 보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미 무순, 동주, 마근단 공격전에서 항복하거나 생포한 포로들을 허투 알라로 먼저 보낸 만큼 누르하치의 군영에 장유신등이 있었을 가능성도 희박할 뿐더러, 군대의 재정비와 전후 처리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외교 활동까지 하기에는 모든 것이 촉박했다. 그러므로, 『만문노당』과 『구만주당』의 무오년/천명 3년 윤 4월 22일 기사가 4월 22일 기사의 착간일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보여진다.
여기에 더해, 실상 『만문노당』과 『구만주당』, 청태조계실록들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료들 역시도 장유신등이 1618년 윤 4월에 귀환했다는 데에 힘을 보태준다. 앞서 언급한 『삼조요사실록』에서도 역시 장유신은 윤 4월에 누르하치에 의해 송환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모서징(茅瑞徵)의 『동이고략』에서도 역시 장유신의 귀환 시기는 윤 4월로 비정되고 있다.10 『명계북략』과 『명사기사본말보유』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국각』 과 같이, 『신종실록』과 일치하는 시기를 비정하는 사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각』의 경우 신종실록의 오기를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데다가, 근거 측면에서 4월보다 윤4월을 비정하는 사료가 근거수량 면에서 압도적으로 방대하며, 『국각』이 당대가 아닌 후대에 쓰인 것과 비교해 『삼조요사실록』과 같은 당대 사료들이 윤 4월을 비정하는 만큼 신뢰성 역시도 우세하다.
물론 앞서 언급한 『명사기사본말보유』와 같은 사료들 역시 후대에 쓰인 것이나, 해당 사료들 외 당대 사료들 역시 폭넓게 윤4월을 비정한다는 부분을 지목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신종실록의 국가편찬실록 으로서의 위상조차도 이 모든 사료들로부터 '4월 25일 장유신등이 누르하치에 의해 인문을 가지고 돌아왔다'는 기술을 지키긴 힘들다.
『신종실록』의 4월 장유신 송환과 다른 수 많은 기록들의 윤 4월 장유신 송환이 합치될 수 있는 가능성은, 본래 『신종실록』윤 4월 25일의 기사로 들어갔어야 할 장유신 송환 및 누르하치의 서신 송부의 기사가 실록 편찬 중의 모종의 문제로 인해 착간되어 4월 25일 갑인(甲寅)일의 기사로 잘못 들어갔을 가능성이다.
후금의 기록상 윤 4월 22일 장유신외 3명이 송환되었다면, 말을 타고 보내졌을 시 윤 4월 25일 장유신등이 장대의 호위를 받아 요동아문 관할 지역에 도착하는 일정이 충분히 완성된다. 그런 만큼, 실록 편찬의 와중에 모종의 문제가 발생하여 윤 4월 25일의 기사로 넣었어야 할 기록이 그냥 4월 25일로 착간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후금에 의한 장유신, 장동, 양희순, 노국사 송환은 명의 실록 기록의 4월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후금/청의 기록과 당대 명의 다른 기록 내지는 청대 기록상에서 나타나는 윤 4월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신종실록』에서 해당 사건이 4월 25일로 기술된 이유는 모종의 이유로 인한 착오로 생각되며, 이로 미루어 보건대 장유신등은 1618년 윤 4월 22일 송환되어 윤 4월 25일 명에 신병이 이관된 것으로 생각된다.
1.『구만주당』 무오년 4월 16일 『만문노당』 천명 3년 4월 16일, 『만주실록』 천명 3년 4월 16일 등. 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9326046 참조
2.후금의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3.『명신종실록』 만력 46년 4월 25일.
4.장정수, 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44쪽.
5.『청태조무황제실록』 천명 3년 윤 4월 22일, 遣魯太監下商人二名,開原人一名,書七大恨付之,令回國
6.『명신종실록』 만력 46년 6월 2일.
7.『명신종실록』 만력 47년 9월 17일.
8.왕재진, 『삼조요사실록』 권1, 윤 4월, 장유신 석방의 건
9.『구만주당』 무오년 4월 20일~4월 22일.
10.모서징, 『동이고략』, 「建州女直通攷」, 閏四月,奴兒哈赤歸漢人張儒紳等賫夷文請和,自稱建州國汗,備述惱恨七宗,大畧以護北關,嫁老女,及三岔、柴河退墾為辭。葢張儒紳等係東厰差役,奴酋藉以間帝座,謀最秘
11.계육기, 『명계북략』 권1, 閏四月大清主歸漢人張儒紳等賷文請和,自稱建州國汗。『명사기사본말보유』 권1, 「遼左兵端」 閏四月,建州令歸漢人張儒紳等致書議款,自稱可汗,備言七宗恨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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