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실록 삽화 中, 이영방의 항복
1618년 음력 4월 15일의 전투 결과로 무순의 수장 이영방이 누르하치에게 투항했다. 이영방의 항복에 대한 기술은 사료마다 다르나, 가장 원전에 가까운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자면 그는 말을 타고 누르하치를 접견하여 예를 표했다. 그것은 이전 1613년 말에 누르하치와 이영방간의 인사의 복기였는데, 아마도 누르하치의 의도에 따른 듯 하다. 1
누르하치는 이영방을 항복시킨 뒤 무순을 점령, 병사와 민간인들을 억류하는 한 편 전리품을 확보했다. 이후 또 다시 군을 움직여 동주, 마근단에 대한 공략을 원호한 후 밤이 되었을 무렵 본인은 무순으로 회군하여 그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작전에 투입된 다른 후금군, 바유트군, 사할차군의 경우에는 전역 대상이 된 지역 곳곳에서 숙영했다.
(웹툰 칼부림 中, 누르하치에게 자신의 항복 경위를 설명하는 이영방)
다음 날인 음력 4월 16일 누르하치는 무순 인근 야지에 작전에 투입된 전군을 소집하였다. 이로 보건대 이미 지난 날에 숙영 후 무순 인근에 집결할 것이 공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대가 집결하자 누르하치는 4천여명의 군대를 따로 차출하여 무순의 성곽시설 및 활용가능 시설들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2
이는 향후 후금과 명간 전쟁이 이어진다면 무순이 명의 후금에 대한 최전방 요새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순은 비록 후금군에 의해 함락되었을 지언정 시설은 상대적으로 멀쩡히 남아 있었다. 대구경 화포를 통해 포격을 당한 것도 아니었던 데다, 성벽이 점거되기 시작하자마자 이영방이 항복의사를 타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비교적 멀쩡한 상태의 무순의 시설을 그대로 남겨두면 해당 지역을 거점으로 삼아 명군이 후금에 대한 역습을 보다 원활히 준비할 수 있을 것이 확실했기에, 누르하치는 무순의 시설들을 파괴하여 명군의 역습을 최대한 지연시키고자 했다.
물론 명군이 해당 지역을 회복하면 점령지를 꾸리고 성을 복구할 수도 있을터나, 성을 복구한다는 것 자체가 노동력과 재원을 필요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명으로서는 힘이 들어갔다. 누르하치로서는 성을 파괴해서 나쁠 것이 없었다.
이후 누르하치는 본인, 그리고 후금이 판단하기에 명과 후금의 경계 지역인 기야반 야지에 이르러 다시 군영을 설치했다. 대규모의 노획물과 포로들을 확보한 상황에서 허투 알라로 복귀하기 전에 포로와 노획물의 결산을 깔끔하게 끝내고 필요한 외교적 조치를 행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누르하치는 무순, 동주, 마근단, 그외 진보에서 확보한 군병, 민간인 포로 1천여호를 정리했고 '올지' 30만을 나누었다.3
여기서 '올지'는 단어의 의미상 포로로 해석할 여지가 다분하나, 실상 당시 요동의 인구와 누르하치의 공략 범위, 후금의 인구부양력 한계등을 생각해 보자면 30만명이나 되는 포로가 후금군에 의해 잡혔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당시 후금에서는 노획물, 전리품을 모두 '올지'라고 표현하였으므로 해당 '30만의 올지'는 전 노획물의 합산이 합당한 해석이라고 판단된다. 30만이나 되는 포로가 잡혔는데 고작 1천여의 호(boigon)이 편성되었다는 것 역시 이를 반증한다.4
노획물과 포로를 나누는 동시에 누르하치는 본인이 잡은 포로들 중 일부를 차출하여 명나라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전쟁 선포와 그 전쟁의 명분인 칠대한을 알리고자 했다. 누르하치는 후금의 기록상 16명의 상인들에게 노자와 함께 칠대한의 명분이 쓰여져 있는 서한을 쥐어주고 요동 깊은 곳으로 가서 해당 문서를 전하게 했다.5
교차적으로 검증해 보자면, 이는 국내에 대한 전쟁 개전선언에 이은 명나라에 대한 정식적인 선전포고이자 선전(宣傳, propaganda)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 영화 덩케르크 中, 독일군의 프로파간다 삐라.)
이전에 필자는 『명신종실록』 만력 46년 4월 25일 기사에 실려 있는 누르하치의 포로 한인 장유신 등의 석방 파견과 '건국, 칠종뇌한, 화친'의 의도를 담은 서한의 전달이, 『만문노당』외의 후금/청측 사료에 실려 있는 이상의 사건을 의미한다고 이해했다. 1618년 4월 16일에 상인들에게 '칠대한이 담긴 서한'을 맡기고서 그들을 석방했다는 후금측의 기록과, 그로부터 9일 뒤인 동해 동월 25일, 누르하치가 '칠종뇌한(칠대한)'과 건국, 자신의 즉위를 알리며 자신의 전쟁명분을 선전하는 동시에 화친의 의사를 제안했다는 명측의 기록이 상호간에 맞물려 부합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장정수 역시, 후금의 해당 조치를 거론하지는 않았으나 누르하치가 무순을 함락한 뒤 4월 25일에 명에 서신을 보내며 해당 서신에 건국의 사실과 칠종뇌한을 열거했다고 보았다.6 그는 누르하치의 장유신을 통한 화친 서신의 송부를 명의 정벌을 늦추기 위한 기만전술이라고 이해했으며 필자는 여기에 더해 가능하다면 실제적인 외교 관계 수립과 명 조정의 후금의 위상, 권위 인정의 의도가 존재했을 것이라고 여겼다.7
하지만 여러 사료를 통해 해당 사건을 해석해 볼 때, 만력 46년 4월 명 조정 내지는 요동아문 측은 공식적으로 후금의 '국서'라 할 만한 외교적 서한 전달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1618년 4월 무순 전투 직후에 있었던 후금의 포로 상인들에 대한 노자 지급과 칠대한 선전 요구와, 신종실록에 기술된 후금의 장유신의 파견 및 화친의 제안은 서로 다른 일시에 이루어진 사건이며, 단지 여러 조건들이 맞물리고 부합하여 동일한 사건으로 보였을 뿐으로 판단을 수정한다.8
상인들을 통해 실제적인 국서를 보낸 것이 아닌 만큼, 누르하치의 상인 포섭은 외교 행위라기 보다는 군사 행위에 가까웠으며, 그들에게 문서를 맡긴 것 역시 '명 조정 내지는 아문에 대한 송부'가 아닌 '살포' '선전'이라고 보기에 합당하다.
명의 상인들을 통해 요동 지역으로 보내진 후금의 포고에, 칠대한/칠종뇌한 외에 무슨 내용이 기술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명의 기록에 그 단서가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칠대한 자체가 후금의 전쟁 대의명분의 집합체인 만큼, 그 밖의 내용 역시도 후금의 명분을 드러내고 항복이나 협조를 권유하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상인들은 후금으로부터 선전에 대한 대가로 노자까지 지급받긴 했으나, 실제로 자신들이 후금의 명분을 선전했다가는 요동아문과 명군에 의해 이적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처형될 것을 두려워 해 대부분 후금의 의도대로 행동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설사 몇몇 상인들이 실제적으로 행동했다고 하더라도, 일부 지역에만 알음알음 선전이 퍼진 덕에 덕분에 명 조정 역시도 해당 사건을 크게 주목하지 않은 것 같다. 즉, 당시 후금의 선전의 영향력은 광범위했다기 보단 제한적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상인들을 통한 칠대한의 선전으로 누르하치가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명 조정이나 관부에 보낼 의도로 상인들을 포섭한 것이 아니었던 만큼, 해당 선전은 외교를 통한 화친이나 명의 군사대응 지연등의 의도라기 보다는 명의 요동 지역 군대와 지역민들을 상대로 한 심리전의 의도가 보인다. 그런 만큼 공포의 조장을 통한 사기 저하와, 선전을 통한 요민(遼民) 내지는 명에 투속한 여진인들의 후금 귀부가 누르하치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영화 남한산성 中, 초항기)
실제로 명-특히 요동에는 여진인 내지는 몽골인 출신이거나, 아니면 그 혈통/가문으로서 명에 귀부하거나 협력하는 이들도 많았다. 경계인으로서 명의 요동 체제에 협력하고 내속된 퉁기야(tunggiya)/동(佟)씨 가문은 그 대표적인 예시다.9 누르하치가 상인들을 석방한 4월 16일로부터 5일 뒤에 벌어진 요동총병 장승윤(張承胤)과의 전투에서, 후금군이 상대한 명군 중에도 이정(夷丁)이 다수 존재했기도 하다.10
누르하치는 무순을 침공하면서 해당 일족의 상인으로서 무순에서 장사를 하던 동양진(佟養眞)과 동양성(佟養性) 등 여진 혈통의 대명 귀부자들을 포섭하는데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런 만큼 그 자신감의 고취로 명에 투속한 또 다른 여진 내지는 몽골 혈통의 인민들, 명의 입장에서 경계인으로 생각될 만한 이들을 포섭하는 것을 시도할 만 했다.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했듯 명에 불만을 가지거나 후금을 두려워하는 요민들 역시도 그의 포섭 대상으로 고려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후금에는 인력이 필요했고, 그렇기에 점령지이던 무순의 항복 한인들 역시도 좋은 대우를 약속하며 내속시킨 만큼 후금의 선전에 한 명이라도 자발적으로 귀부한다면 나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인들의 선전은 그들이 품고 있던 두려움이나 다른 문제들로 인해 최소한 귀부의 촉진의 측면에선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한 것 같다.
한편 공포와 압박의 측면에서 보자면, 누르하치는 선전을 통해 요동 변장 지역에서 근무하고 있는 명의 지휘관들과 병사들에게 실제적인 위협과 압박을 가하려 했던 것 같다.
만력 46년 6월 강서도어사 설정(薛貞)이 언급하는 양호의 상주에서, 당시 요동에 배치되어 있던 명의 지휘관들이 후금의 기세에 대단히 두려워 하면서 전투를 회피하거나 전출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한다.11 지금까지 빈번히 타세력과 충돌해 온 요동의 명군이 이렇게 급격히 사기가 하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후금에 의해 그때까지 쌓인 직접적인 교전 결과에 의한 바이기도 할 테지만, 그 때 까지 이루어진 후금의 선전에 의한 바로 인한 동요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에 4월 16일의 상인 석방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앞서 언급했듯 해당 선전의 진행과 효과는 제한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 동단 변장의 명군 지휘관들은 마음이 흔들렸을 가능성은 존재하며, 그것은 누르하치가 의도한 바였으리라고 본다.
어쨌건 이런 작업을 통해 누르하치는 명의 변경 방어를 약화 시키거나, 나아가 명군의 이탈과 항복을 유도하고자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618년 5월의 2차 대명 침공에서 보여지는 송산둔(松山屯/崔三屯)의 항복은 항장 이영방(李永芳)의 설득과 후금의 직접적인 군사적 기세의 역할도 컸을 테지만, 이런 선전의 효과 역시 조금은 작용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1.이영방의 항복에 대한 서술 차이는 추후에 서술
2. 『만주실록』 천명 3년 음력 4월 16일
3. 『만문노당』무오년 음력 4월 16일, gvsin tumen olji be dendeme minggan boigon araha
4. 예컨대 어허 쿠런 공략전에서 건주/후금은 1만의 올지를 획득했다. 멜리코프(Г.В Мелихов)는 이를 모두 온전히 포로로 해석했으나 실제로는 가축과 전리품이 포함된 것이었고 실상 포로로 잡힌 인구는 5백여호 정도였다.
5. 『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4월 16일.
6.장정수, 2020, 「조선의 대(對)명 후금 이중외교와 출병(出兵) 논쟁의 추이」, 『한국사연구』 191, 한국사연구회, 295쪽.
7.장정수의 해당 서신에 대한 해석은 장정수, 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44쪽 참조.
8.이에 대해서는 독립된 주제로 작성함.
9. 이에 대해서는 임경준, 2021, 「明代의 衛所軍官에서 淸代의 八旗旗人으로 — 퉁기야(Tunggiya)~撫順 佟氏 일족의 사례를 중심으로—」, 『만주연구』 31, 만주학회 참조.
10.『명신종실록』 만력 46년 6월 22일.
11.『명신종실록』 만력 46년 6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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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이전에 올렸던 글의 60% 이상의 내용을 대폭 날려버리고 수정하였음을 밝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