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플라워는 첨단 미사일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한 이스라엘과 이란의 군사적 공동 노력이었습니다. 1977년 4월 양국이 체결한 6건의 무기용 석유 계약 중 하나였습니다.
1970년대 중반 이란은 당시 암묵적인 군사 경제 및 정보 협력을 맺고 있던 이스라엘과의 협력을 통해 미사일 능력을 확장하고자 했습니다. 1977년 4월, 6건의 무기용 석유 계약이 체결되었는데, 그중에는 프로젝트 플라워가 포함되었습니다. 1977년 7월 18일 이란 전쟁부 차관 하산 투파니안 장군은 이스라엘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모셰 다얀 이스라엘 외무장관과 에저 와이즈만 국방부 장관을 만났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미사일 및 핵 개발에 대한 이란의 우려도 논의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사거리가 긴 가브리엘 대함 미사일과 향후 잠수함 발사형 미사일 개발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미국이 설계한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이스라엘산 부품을 장착하여[부적절한 합성?] 미국의 항법 및 유도장비를 탑재한 미사일을 재현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이듬해 이란은 이스라엘에 2억 8천만 달러 상당의 석유를 계약금으로 제공했습니다. 이란 전문가들로 구성된 팀이 이란 중남부의 시르잔 근처에 미사일 조립 시설과 라프산잔 근처에 미사일 시험장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1979년 2월 11일, 이란 혁명으로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 왕정이 전복되면서 프로젝트 플라워는 종료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엔지니어와 국방부 관리들은 이스라엘로 돌아갔고 모든 무기 시스템의 청사진과 도면은 외교 특사를 통해 반송되었습니다.
1975년부터 1978년까지 이란과의 협상을 담당했던 국방부 관리 야코브 샤피로는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이란에서는 우리를 왕처럼 대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엄청난 규모의 거래를 했습니다. 이란과의 관계가 없었다면 오늘날 이스라엘을 방어하는 최전선에 있는 무기를 개발할 자금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란은 미사일을 공동개발할정도 우방인적이 있었으나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으로 운명의 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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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망해서 미국이랑 친해진 러시아는 나토 가입을 희망했고, 그때 보면 러시아 회사가 미국 전차에 장착할 반응 장갑 수출하고 미국 반도체로 러시아 무기 만들고 뭐 그런거 엄청 많았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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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망해서 미국이랑 친해진 러시아는 나토 가입을 희망했고, 그때 보면 러시아 회사가 미국 전차에 장착할 반응 장갑 수출하고 미국 반도체로 러시아 무기 만들고 뭐 그런거 엄청 많았음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