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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란 본래 펜과 종이로 퀘스트 로그를 자체 작성하는 열의가 없으면 진행조차 어려웠던 매니악한 장르다. 모눈 종이에 직접 맵을 그리지 않으면 던전을 돌파하지 못하는 게임이 대세로 자리잡기에 게이머들은 대개 나약했다. 시행착오 속에서 단순한 룰을 통해 문턱을 낮춘 JRPG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드코어 RPG의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 속에서 특히 드라마틱한 내용을 선형적으로 발췌하고 말초적인 전투 시스템에 집중하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RPG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드래곤 퀘스트가 불을 밝혔고, 파이널 판타지가 솟아올랐다. 두 작품은 JRPG의 쌍벽이라 불리며 장르를 이끌고 선도했다. 그 발생 과정에서 자격지심을 느낀 JRPG 제작자가 JRPG라는 장르 이름에 담긴 멸시를 한탄하기도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JRPG는 이미 온갖 장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숨길 필요가 없는 일이다. 서양 RPG 또한 JRPG의 영향을 받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긍정적인 일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하자면 그 나약한 게이머들을 위해 만들어진 장르가 JRPG라 하겠다. 손에 패드를 쥐고 캐릭터를 움직이는 방법만 알면 클리어할 수 있는 장르가 JRPG다. 파이널 판타지는 그런 장르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JRPG 의 극단을 설정하고 이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무척 귀찮고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내가 언제나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에 열광하고,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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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곡 안에서도 계속 변주되는 메인 멜로디.
뇌리에 박혀 한참을 고생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파이널 판타지의 BGM이 부실했던 일은 없었다.
이번에는 소켄 마사요시의 차례였을 뿐이다.
다만 나는 FF16이 제공하는 JRPG의 극단과 혁신은 게임 시스템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언급해야만 한다. 첨단의 절벽에서 아슬아슬하게 나아가는 파이널 판타지가 새로운 시도에 유독 인색한 분야가 있다는 뜻이다. 숨겨지지 않는다. 시나리오다. 기대를 모았던 정치 이야기와 군상극은 처음부터 무리수가 있었다. 요시다는 그런 이야기를 다룰 재능을 갈구하고 있었으나 FF16을 프로듀싱하는 과정에서 그 열매가 개화하는 일은 없었다.
그랬다. FF16은 참으로 이례적으로 성인 게임으로 기획되었으면서도 이야기 자체는 고전 FF로 돌아간 것 같은 평면적인 구성에 그쳐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요시다는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분야에 골몰하기보다 불굴의 정신과 선연한 이상으로 무장한 주인공이 신적 존재와 대결하는 오소독스한 이야기로 선회하고 만다. 파이널 판타지에 어울리는 이야기이긴 하나 이미 몇 번이고 사용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난한 이야기는 지탄을 받는 혹독한 시대다. 이 게임을 두 번이나 클리어한 팬 입장에서도 만족스럽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나마 요시다가 제 분수를 알고 있었다는 점은 평가해 줄 수 있겠다. 로즈필드 형제의 처절한 싸움이나 클라이브와 질의 아련한 사랑이 절절한 결말을 맞는 이야기가 먹혀들어간 것은 전적으로 요시다가 잘 할 줄 모르는 정치 이야기에 몰두하지 않고 늦지 않게 노선을 바꾼 덕분이기도 하다. 나는 FF16의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듬뿍 즐겼다.
상기와 같은 개인적인 평가와는 별개로 게임으로써 혁신의 주체가 게임 플레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은 두 번 강조할 필요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JRPG에 있어서 시나리오가 게임 진행에 강력한 동기로써 작용한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FF의 최신작이라면 양 쪽에서 특별한 경험을 제공해 주지 않으면 아쉬움이 생긴다. FF가 감당해야 할 무게란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파이널 판타지 16의 이야기를 지지한다.
잃어버린 시간과 경험. 불행한 과거와 불투명한 미래.
이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힌 서투르고 아련한 사랑.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요시다의 취향이 들어가 있겠지만 대사나 연출이 담담하고 절제되어 있는 편이다. 그런 만큼 JRPG 특유의 부담스러움이 완화되어 있으나 템포가 늦고 텐션도 낮아 침착한 대화가 몇 분이나 이어지는 컷씬이 부담스러운 경우가 생긴다. 클라이브나 요슈아, 질이 강적과 조우하고 강렬하게 맞물리는 메인 퀘스트의 연출는 웅장하고 압도적이지만 그 외의 경우에는 반대급부로 이 지리멸렬한 경향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이야기에 흡인력이 넘칠 때와 수준 이하인 때가 극명하게 나누어지는 것이다.
그외에도 여러가지. 시나리오 면에서 중요한 대사가 그에 걸맞는 연출 없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통에 개연성이 훼손되는 경우도 있다. 클라이막스 연출에 집중한 나머지 전체적인 이야기의 얼개를 엮고 균형을 맞춰두는 작업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이따금 클라이브가 옷을 벗어서 해결될 일은 아니다.
온라인 게임을 만들던 제작진의 눈높이가 패키지 게임 유저들이 요구하는 AAA 타이틀의 기준에 미달하고 있는 점도 특히 안타깝다. 다름아닌 FF의 최신작에서 시각적 기호로써의 연출을 몇 번이고 봐야 한다니 곤혹스러운 일이다. 예를 들어 손을 보여주지 않은 상태로 물건을 주고 받는 연출이다. 클라이브는 똑같은 동작으로 간식을 전달하기도 하고 유품을 건네받기도 한다. 그 때 클라이브의 심정을 판별하려면 그 표정 해석에만 20 시간의 경험이 요구된다. 중요한 국면에서 연출을 끊고 전투에 대한 중간 정산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사소한 이야기를 하면 이야기가 길어진다. 온라인 게임에서는 통용되는 연출일지 모르겠지만 AAA 콘솔 타이틀인 FF16에서는 아니다.
메인 시나리오를 제외하면 이러한 기조가 만연해 있으니 서브 퀘스트는 진행하기 부담스러운 수준에 이른다. 서브 퀘스트는 연계 퀘스트로 이어지고 그 모든 고난을 뚫어야 진정한 결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 그리고 의미가 있는 부분은 대개 그 결말 뿐이라는 점이 무서운 부분이다. 넘버링 FF에서 예산의 문제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제작진의 시행착오에 해당하는 사안이라고 본다. 자신감이 지나쳤다. 콘솔 게임과 온라인 게임의 근본적인 차이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공부하고, 바닥부터 쌓아 올리는 노력이 필요했다.
메인 시나리오가 무난하긴 했으나 결코 나쁘지는 않았다는 점, 각종 클라이막스 연출은 호화스럽고 만족스러웠던 점을 고려하더라도, 결과적으로 플레이어가 FF16을 마지막까지 진행하게 만들 모티베이션에는 시나리오 이상으로 전투 시스템이 깊이 관여하게 된다. 다만 이는 FF 시리즈에 있어서 처음 있는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FF가 가장 잘 하는 일이기도 하다. FF 시리즈에서 시나리오가 돌출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많지만, 시스템이 불만스러웠던 일은 많지 않았으므로. 이는 FF16도 마찬가지다.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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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이 단순한 대신 연출과 컷씬으로 압도하는 소환수 대전.
보스전의 게임 플레이가 훼손될 것을 우려할 수도 있겠으나,
호화로운 성과품에는 취향을 넘어 압도될 수 밖에 없다.
FF의 전투 시스템은 전작과 다르다. 각자 다른 게임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는 FF 시리즈가 고집하고 있는 유일한, 그리고 강박에 가까운 전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FF는 3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시리즈로, 현재까지 JRPG로써 시도하지 않은 전투 시스템이 없을 지경이다. 늘 정력적으로 변화를 추구하고 있고, FF의 생명력은 이를 통해 발생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 FF12의 턴제 전투 시스템은 극도로 정돈된 자동 전투를 통해 이미 그 어떤 게임과도 구분된 영역에 있었다. 그리고 스퀘어는 이 특이하고 완성된 시스템을 다시 쓰는 대신 FF13에서 ATB에 바탕을 둔 전략적 파티 플레이를 구축했다. 뒤를 이른 FF13 트릴로지의 완결편인 라이트닝리턴즈의 시스템은 스퀘어 특유의 턴&액션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시발점이라 할만하다. FF15는 오픈 월드에 정확히 대응하는 캐쥬얼 액션 시스템을 통해 FF 시리즈의 액션에 대한 기준을 세웠으며, FF7R는 그 동안 발전시킨 하이브리드에 파티 플레이까지 녹여 그야말로 스퀘어 JRPG의 전투 시스템을 집대성한 작품이다.
이처럼 쟁쟁하기 짝이 없는 과거 FF 시리즈의 전투 시스템과 다른 접근을 하고자 한다면 FF16의 선택지가 많을 수 없었다. 나는 이것이 FF가 16번째 작품에서 액션성을 최대한 강화하는 형태가 된 배경이라 본다. 걸출한 시리즈가 도리어 발목을 잡는 형세. 제작진은 고민이 크겠지만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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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싸울 때 공방일체의 무브를 제공하는 피닉스는 필수.
공격 패턴을 찔러 세팅하면 유리해지는 JRPG 특유의 구성.
다른 소환수의 조합이 더 좋다고 주장한다면 그 말도 옳다.
이것이야말로 파이널 판타지다.
물론 액션성을 강화한다 하더라도 폭주할 수는 없다. 전술한 바와 같이 JRPG는 라이트 유저의 장르이며, 이들과 액션 게이머가 겹치는 비율은 그다지 크지 않다.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는 그런 유저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의해 성장했으므로, 그들과 함께 나아가지 않으면 성공은 있을 수 없다. 말하자면 FF 최신작은 JRPG 그 자체와 다름 아니기에, 그러한 JRPG로써의 정체성을 컨셉으로써 녹여넣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액션 게임을 주로 만들어왔던 배틀 디렉터 스즈키 료타에게 이만큼 어려운 기획도 달리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배틀 디렉터가 내린 결론은 과연 이치에 맞고 명료하므로, FF16의 전투 시스템이 파이널 판타지 (JRPG) 답지 않다는 주장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FF16는 쿨타임에 의해 어빌리티 발동이 허용되므로 이에 대한 관리와 운용이 필요하다. 다만 그 발동에 있어 버튼 입력 타이밍 같은 엄격한 요소도 일절 없는데다 발동 즉시 수퍼 아머 판정으로 바뀌거나 막대한 무적 시간이 부여되거나 아예 시간이 멈추기도 한다. 대미지도 평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게다가 연출까지 화려하기 때문에 액션 조작에 자신이 없는 플레이어들도 그럴 듯 하게 움직일 수 있다. JRPG의 설계 개념이 가감없이 녹아 있는, 나를 포함한 라이트 유저를 위한 접근이다.
소환수 별로 4개씩 부여되는 어빌리티가 클라이브의 성장에 따라 각각 두 배로 강해진다는 점에서 FF16에 성장 요소가 없다는 지적에도 고개를 세로 젓기 어렵다. FF16은 그저 액션에 무게를 두면서 레벨업을 위해 필요로 하는 수고와 시간을 최소화시켰을 뿐이라고 이해한다. 게임 플레이 그 자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형식상의 파밍이나 시행착오에서 비롯되는 무의미한 시간 낭비를 최대한 배제하고 공부할 것이 많은 액션 시스템에 농밀하게 집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바람직하다. 나는 FF16을 통해 단순 작업이나 숙제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어빌리티 조합에 입각한 캐릭터 커스터마이즈에 따라 플레이 양상이 완전히 달라지는 구성에 와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플레이어의 의도에 적합한 3개의 소환수와 6개의 어빌리티를 선택해 클라이브의 성능을 조합하도록 되어 있고, 이는 전통적인 FF의 구성 그 자체인 것이다. 이를 통해 다른 게이머와 구별되는 플레이 방식을 고민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 FF5를 떠올릴 정도로 클래식하다. 올드팬으로써도 만족스러운 일이다.
FF16이 파이널 판타지(JRPG)가 아니라니 당치 않다. FF 시리즈의 최신작이 발매될 때면 언제나 반복되었던 쓸모없고 소모적인 언쟁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내 견해에서는 오히려 그런 논쟁이 없었던 파이널 판타지는 무난한 파이널 판타지였을 뿐이다.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에서 무난함이란 미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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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링에 익숙해지면 장차 어떤 플레이를 할 수 있게 되는지,
이 보스를 통해 미리 체험해볼 수 있게 된다.
FF16의 패링이 가진 독특한 매력을 공부하기에 최적이다.
액션 게임 배틀 디렉터 다운 노련함이 돋보인다.
쿨타임 관리가 전투의 큰 지분을 담당하는 FF16에서는 어빌리티를 쿨타임이 돌아올 때마다 소모할수록 효율이 높다. 쿨타임이 긴 기술은 1분 이상 기다려야 하므로, 그 사이에 쿨타임이 없는 기본기들을 사용해 전투를 이어나가는 것이 또다른 핵심이 된다. 화려한 어빌리티의 쿨타임을 기다리는 동안 전투가 지루해질 것 같지만, 이는 아직 게임의 조작에 익숙하지 않은 게이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다. 노파심에서 언급하지만 FF16은 버튼을 연타하는 게임과 거리가 멀다. 게임을 클리어를 할 수야 있겠으나 FF16을 가장 재미없게 즐기는 방식이다.
각 소환수의 특수기 피트는 클라이브의 포지셔닝과 회피, 반격에 관여하는 핵심 기술이면서도 연사할 수 있으며, 검격과 마법에 모두 부여 되어 있는 차지 어택은 어빌리티에 버금가는 공격력을 가진다. 유일하게 엄격한 버튼 입력 타이밍을 요구하는 매직 버스트는 느릿하고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는 기본 콤보와 이동 특수기에 섞여 FF16에서 가장 즐겁고 상쾌한 움직임을 연출하는 동시에 준수한 실드 대미지를 보장한다. 어빌리티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화려하고 깊이 있는 플레이가 가능하고, 실드 대미지를 모두 깎아낸 뒤엔 때마침 쿨타임이 돌아온 어빌리티를 난사해 높은 대미지 딜링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RPG의 구성을 따르고 있는 액션 시스템으로써는 여러모로 한계에 가까운 조작 계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FF16의 전투 시스템은 액션 RPG 형식의 극단에 위치한다. 이 게임보다 조작이 어려운 액션 RPG는 기획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준점이 됐다고 본다.
치명적인 보스전 없이 FF16을 논할 수 없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믿는다.
이 모든 것을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보스전들은 FF16의 꽃이다. 초호화 퀵타임 이벤트에 가까운 이프리트의 소환수 배틀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FF16 액션 시스템이 제대로 반영된 보스전이라 하면 그 직전에 이루어지는 클라이브의 보스전을 의미하며, 실제로 하나하나가 무겁게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JRPG 팬들을 위해 조정되어 있어 어렵지는 않다. 어떻게든 페이즈만 넘어가면 중간에 쓰러지더라도 최신 페이즈에서 재도전이 가능하기에 누구나 클리어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다만 만족스럽게 싸우기 위해 숙달이 필요할 뿐이다. 정중하게 만들어진 보스의 패턴을 공부해 최적의 어빌리티로 화려하게 반격하는 것은 과연 쉽지 않은 일이다.
FF16이 묘사하는 보스들의 장엄하고 과장된 연출은 그야말로 JRPG스럽고, 빠르고 리드미컬한 공격은 어지간한 액션 게임도 빛을 잃을 지경이다. 패턴을 파훼하는 일에는 각별한 쾌감이 수반된다. FF16에서는 각 보스를 아케이드 모드를 통해 반복적으로 사냥하는 것을 종용하고 있는데, 한 두 번 전투로는 보스에 대한 최적의 대응이 어려울 정도로 적 패턴이 다채롭고 이에 대응하는 조합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FF16은 리얼타임에 액션성을 극한까지 강화했음에도 보스의 패턴을 공부해 RPG스러운 전략을 세워 대응할 수 있는, 그야말로 JRPG와 액션의 장점을 동시에 가진, 액션 RPG의 교과서적인 구성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평가를 뒷받침하는 최종 보스는 이제까지 배운 기술들을 충실히 활용해 멋진 합을 맞춰볼 수 있는 이상적인 보스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최종국면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웅장한 응원가부터 JRPG 스럽고 화려한 퀵 타임 이벤트까지 빈틈없이 녹아있으니 JRPG의 라스트 보스로써 더할 나위 없다. 이런 사양의 JRPG를 나는 경험해 본 일이 없다.
(보스 누설 주의)
(3:20) FIND THE FLAME. 이 곡에는 기승전결이 없다.
끓어오르는 투지 외에 아무것도 필요없는 까닭이다.
라스트 보스전을 장식하기에 완벽 이상의 곡이다.
결과적으로 FF16의 전투 시스템은 높은 수준의 게이머들을 의식하는 한편, 액션에 익숙하지 않은 오랜 FF의 팬들도 숙달해서 즐길 수 있는 액션의 한계점을 고심한, 거기에 RPG로써의 시스템도 잊지 않고 녹여 넣은, 높은 수준에서 균형을 유지한 구성으로 완성되어 있다고 판단한다. JRPG와 액션이 가진 상극의 밸런스를 맞추는 일은 누구나 할 수는 없는 일이라, 과연 액션 시스템에 조예가 깊은 배틀 디렉터가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다고 이해한다. 그럼에도 그 줄타기가 과연 아슬아슬하지만, 이 완성도를 감당해야 할 후속작이 기대되는 동시에 걱정되는 최선의 성과품을 발매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게임 구조에 화려한 액션과 콤보가 섞여 있는 이상, 그저 보스를 쓰러뜨리는 것만이 아닌, 조작을 숙달해 누릴 수 있는 화려함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나는 이것이 FF16에서 대미지가 높고 리스크가 적은 기술을 난사해 적을 쓰러뜨리는 것보다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턴제 FF에서 각종 아이템과 스킬을 활용해 보스의 전술을 파악하고 약점을 찔러 게임을 효율 좋게 클리어 하는 것에 해당하는 일이다. FF16의 전투 시스템을 마음 깊숙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플레이에 취해 더 멋진 장면을 연출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 지점을 넘어선 플레이어는 보스를 상대로 타임 어택을 시도해 볼만 하다. 적의 공격을 분석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파고들고, 실드 게이지를 의식하면서 적 공격 패턴 사이의 빈틈에 한계까지 공격을 끼워넣는 것이다. 나아가 한계에 가까운 적을 테이크 다운 시키려면 쿨타임이 동시에 돌아온 어빌리티 중 어떤 어빌리티가 더 유효한지, 테이크 다운 상태에서 대미지 배율을 높이는 전략까지 계산해 선택한다. 쿨타임이 제각각 돌아오는 어빌리티를 관리하면서 적의 공격 패턴과 실드 게이지를 의식하고 최적의 공격 루트를 찾아내며, 끊임없이 일어나는 돌발 상황에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전투가 FF16의 지향점인 셈이다. 이를 통해 전투는 자연스럽게 화려해지고, FF16은 다른 어떤 게임으로도 치환할 수 없는 보스전의 경험을 제공한다. 이 대목에서 FF16의 포텐셜은 깊고 무궁무진하다. 순수하게 재미있다.
이러한 구성이 모든 JRPG 플레이어들을 포용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점이 발견된다. 하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 다른 사람과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또한 이를 위해 최대한의 시스템적 지원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것이 FF16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라고 판단한다. 보스전을 통해 게임 플레이에서 서사가 만들어지는 경지로, 최대급의 찬사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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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판타지 16은 2회차 부터가 진짜다.
다른 파이널 판타지는 몰라도, 파이널 판타지 16은 그렇다.
이러한 제작진의 의도에 공감한 플레이어가 2회차를 이어나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무엇보다 제작진은 2회차 하드 모드를 파이널 판타지 모드라는 도발적인 이름으로 명명했다. 그렇다. FF16의 전투 시스템을 제대로 향유하기 위해 1회차로는 부족하다. 1회차 이후로도 수십 시간의 숙달과 고찰을 통해 보스전이 한층 더재미있어지는 구성이다. 파이널 판타지 모드에서는 적의 구성이나 증원 패턴도 달라지기 때문에 2회차는 1회차 이상으로 긴장감 넘치는 전투를 즐길 수 있도록 안배되어 있다. 놀랍게도 이는 FF16의 썩 만족스럽지 못했던 시나리오에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대죄인의 오명을 쓰면서도 어째서 머더 크리스털을 파괴해야만 하는지, 바르나바스의 기괴한 정신 세계가 어떻게 암시되는지, 상브레크의 성왕이 어째서 둘째 아들에게 집착하는지, 어째서 바하무트 챕터의 제목이 통곡의 하늘이며, 메가 플레어가 왜 하늘에서 눈물처럼 떨어지는 연출인지. 1회차에서 적당히 넘어갔던 대사에 충분한 복선이 제시되고 있었다는 것을 2회차에서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클라이브가 같은 대사를 하더라도 질에게는 부드러운 어조를 사용하는 감미로운 설정도 2회차를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요소다. 일반적으로는 1회용으로 끝날 퀵타임 이벤트도 FF16의 소환수 대전 정도의 수준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법이다. 게임 구성상 적당한 시기에 2회차를 즐긴다면 많은 부분에서 1회차 이상의 가치가 있는 셈이다.
이를 통해 FF16의 리플레이 가치는 유구한 FF 시리즈의 역사 속에서 보수적으로 평가하더라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고 단언할만 하다. 파이널 판타지를 좀 더 깊고 오랫동안 즐기고 싶어하는 팬들에게 이 이상의 파이널 판타지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FF16의 액션 시스템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었다면, 언젠가 기회가 닿을 때 2회차를 시도하는 것을 추천한다. 특이하게도 FF16의 립싱크가 영어 대사에 맞춰 설계되어 있음을 상기하는 것도 중요하다. 대사 또한 전반적으로 일어판에 비해 정제되어 있고 성인 취향에 맞춰져 있으니 이 또한 참조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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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진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흉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지금까지 해온 것 보다 많이 남아있다.
다른 훌륭한 FF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이런 FF는 없었다.
나는 JRPG의 극단을 설정하고 제공하는 FF를 신뢰하고 존중한다. 그 어떤 JRPG도 FF 시리즈 만큼 진지하게 JRPG로써의 게임 시스템을 고민하지 않는다. FF 시리즈의 전투 시스템은 항상 최전선에 서있고, 이를 통해 스스로를 증명한다. FF16의 제작진들이 온갖 잡음에 굴하지 않고 초심을 잃지 않아 흡족하다. 이와 같은 면에서 FF16은 파이널 판타지의 궁극점에 도달해 있다. 다름아닌 파이널 판타지의 아버지가 인정한 사실이다.
파이널 판타지는 앞으로도 이 스탠스를 고집할 것이다. 다시금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파이널 판타지가 아니라는 평을 듣게 될 테다. 하지만 파이널 판타지는 그 자체를 훈장으로 삼아 끊임없이 변해가리라. 그 모든 불협화음을 감안하더라도 파이널 판타지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다른 그 어떤 것도 필요없다. 앞으로도 파이널 판타지는 파이널 판타지가 아니기를 바란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파이널 판타지가 될 수 있기를. 마음 속 깊이 바라건대, 그렇게 이 역설이 언제까지나 계속되기를.
그리고 나는 다음 파이널 판타지를 기다린다. 어떤 작품일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몇년이나 걸리겠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내 수중에는 서로 다른 파이널 판타지가 열 여섯 작품이나 있으므로. 수십년에 걸쳐 내가 파이널 판타지의 극성팬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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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필력이 어머어마합니다. 다른 파판 리뷰글도 함께 읽었는데 무척 공감가는 글이라서 즐거웠네요. 최애 파판이 5라서 5에 대한 글이 특히나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IP보기클릭)218.238.***.***
하드코어한 RPG를 누구나 즐길수 있게끔 최대한 쉽게 풀어낸게 JRPG의 기원인걸 생각하면 파판16의 방향성도 아주 납득이 안되지는 않네요. 콜드블루님의 리뷰를 읽다보니 오히려 초심으로 돌아간거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다만 JRPG도 시대가 거듭하면서 심화된 육성 시스템이라던지 파고들기 요소 같은 것들이 추가되기도 했었기때문에 아쉬운 말들도 나오는건 어쩔수 없었던거 같기도 해요. 전 파판 시리즈를 비교적 늦게 입문했기때문에 파판 시리즈에 대한 팬들의 반응 같은건 몇 작품밖에 보지 못했습니다만은 13이건 15건 16이건 이건 파판이 아니다 내지 파판치곤 아쉽단 말은 세 작품 모두 나왔던걸로 기억합니다. 아마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였겠죠? 그 오래된 파판7(1997)조차 파판답지않단 소릴 들었다는걸 얼핏 본거 같습니다. 파판7의 시스템을 훌륭하게 재해석한 파판7 리메이크 리뷰도 꽤 인상깊게 봤던 기억이 있는데 리버스도 어떻게 느끼셨을지 궁금해지네요. 언젠가 리버스도 리뷰 볼수 있게되길 희망합니다. 오랜 팬의 남다른 소회가 느껴지는 리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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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5는 최고의 FF 중 하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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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어그로 진상이니 그냥 무시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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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취향이 다 달라서 평가가 갈리지만 저한테는 10 이후에 최고로 재밌게 한 파이널판타지였습니다
(IP보기클릭)211.54.***.***
개인적인 취향이 다 달라서 평가가 갈리지만 저한테는 10 이후에 최고로 재밌게 한 파이널판타지였습니다
(IP보기클릭)39.7.***.***
만듦새가 극단적인 FF라 그런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해요. 오랫동안 즐길 수 있는 FF가 한 편 더 생겨서 기쁠 뿐입니다. | 24.09.20 07: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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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필력이 어머어마합니다. 다른 파판 리뷰글도 함께 읽었는데 무척 공감가는 글이라서 즐거웠네요. 최애 파판이 5라서 5에 대한 글이 특히나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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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5는 완전하죠. 너무 좋은 FF 입니다. 동지를 만나 기쁩니다. | 24.09.20 11: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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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16에서 가장 파이널 판타지 스러운 부분이지요. 몇 번이고 할 수 있는 게임 특유의 포만감이 있습니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24.09.21 10:3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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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코어한 RPG를 누구나 즐길수 있게끔 최대한 쉽게 풀어낸게 JRPG의 기원인걸 생각하면 파판16의 방향성도 아주 납득이 안되지는 않네요. 콜드블루님의 리뷰를 읽다보니 오히려 초심으로 돌아간거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다만 JRPG도 시대가 거듭하면서 심화된 육성 시스템이라던지 파고들기 요소 같은 것들이 추가되기도 했었기때문에 아쉬운 말들도 나오는건 어쩔수 없었던거 같기도 해요. 전 파판 시리즈를 비교적 늦게 입문했기때문에 파판 시리즈에 대한 팬들의 반응 같은건 몇 작품밖에 보지 못했습니다만은 13이건 15건 16이건 이건 파판이 아니다 내지 파판치곤 아쉽단 말은 세 작품 모두 나왔던걸로 기억합니다. 아마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였겠죠? 그 오래된 파판7(1997)조차 파판답지않단 소릴 들었다는걸 얼핏 본거 같습니다. 파판7의 시스템을 훌륭하게 재해석한 파판7 리메이크 리뷰도 꽤 인상깊게 봤던 기억이 있는데 리버스도 어떻게 느끼셨을지 궁금해지네요. 언젠가 리버스도 리뷰 볼수 있게되길 희망합니다. 오랜 팬의 남다른 소회가 느껴지는 리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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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 최신작으로써 FF16의 파고들기는 건재합니다. 다만 그 방향이 게임 플레이 그 자체에만 집중되어 있을 뿐이고, 그 깊이는 역대 FF 시리즈에 비해서도 돌출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바쁜 조작을 요구하는 만큼 어렵기도 하구요. 분명 이질적이기는 한데 이제 이런 FF가 하나 쯤 있어도 괜찮은 시대가 됐지 않았나 싶어요. 그게 파이널 판타지의 본질이기도 하구요. 저는 '이건 파이널 판타지가 아니'라는 말은 FF6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됐다고 보는 편입니다. 디렉터가 사카구치에서 키타세로 바뀌면서 크리스탈이 삭제됐거든요. 그리고 FF7에서 그런 목소리가 극대화됐었습니다. FF7은 파이널 판타지가 아닌 파이널 판타지의 필두였던 거죠. 그리고 다름아닌 최고의 파이널 판타지이기도 하구요. 말하자면 파이널 판타지가 아닌 파이널 판타지가 최고의 파이널 판타지인 셈입니다. 사카구치가 늘 강조하는 이야기기도 합니다. FF7 리버스는 FF7 리메이크 이상으로 재미있게 즐긴 게임이라 반드시 (하지만 시간을 두고) 쓰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4.09.23 21:3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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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저팬
FF5는 최고의 FF 중 하나예요. | 24.09.25 15:5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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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는요? | 24.09.25 15:5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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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dBlue
유명한 어그로 진상이니 그냥 무시하세요 | 24.09.25 15:5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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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ruliweb.com/news/board/300577/read/96703?search_type=member_srl&search_key=64993 이 글에서 FF5 항목을 참조해 주세요. | 24.09.25 16: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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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덕에 FF5 이야기를 한 번 더 할 수 있으니 만족합니다 ㅎㅎ | 24.09.25 16: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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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최고의 파판은 13탄이라고 생각하고 최악의 파판이 5라고 생각하는데 저랑 많이 생각이 다르시네요 | 24.09.25 16: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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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둘 다 좋아합니다. 루리웹에서 저만큼 FF13을 좋아하는 사람도 찾기 어려울 거예요. | 24.09.25 16: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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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통하네요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용? | 24.09.25 17: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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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많아요...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지만 찾아보면 역산 가능할 자료가 있을 겁니다. | 24.09.25 20:1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