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르 옵스퀴르 분석 칼럼 :#3 마엘은 행복할까? (부제 : 베르소의 선택이 가진 위험성)
반갑습니다.
지난 한 주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이 게임을 여러 번 플레이하고, 레딧과 여러 커뮤니티에서 다양한 토론을 하며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 그 재미도 끝내고, 좋은 감정을 안고 현실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네요. 그러나, 아직 제가 할 일이 하나 남은 것 같군요. 바로 헌사입니다.
헌사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제가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창작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창작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아마도 ‘즐거움’과 ‘감동’일 겁니다. 희극을 보며 웃기도 하고, 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죠. 활극에서 활력을 얻기도 하고, 슬래셔물에서 짜릿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모든 감정들은 결국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니까요.
그리고 창작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또 다른 큰 선물은 “무엇이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내가 그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현실에 대한 질문을 던져준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관객들은 이를 통해 실제 삶의 선택 순간에 도움을 얻거나, 인생의 다른 가능성들을 고민해볼 수 있죠.
그래서 저는 ‘현실의 눈으로 바라본 Clair Obscur’이라는 주제로 몇 개의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Clair Obscur의 세계는 현실은 아니지만, 현실 사람들이 만들고 즐기는 만큼 현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이 모든 분석과 사유가 제가 이 게임과, 제작자와, 그리고 여러분께 진정한 경애와 존경의 마음으로 바치는 "헌사"이며, 저는 그것이 이 멋진 게임에 바치는 작별 인사로서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추가로, 이 글은 원래 레딧에 게시했던 글이며, 영어로 쓴 글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어투나 어순, 혹은 일부 용어가 어색하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최대한 다시 다듬기는 했지만, 보시면서 혹시 말이 좀 어색하게 느껴지시더라도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의도치 않은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서론을 살짝 길게 쓰고 있사오니 양해바랍니다. 이제 본론인 33 분석 세 번째 칼럼, "마엘은 행복할까? (부제 : 베르소의 선택이 가진 위험성)"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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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시작하기 전에 베르소의 선택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고, 마엘의 선택이 잘못되었고는 이 글에서 논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칼럼에서 다룰 예정이에요. 또한 무엇이 "좋은" 엔딩인지에 대한 논의는, 개발자들이 직접 좋은 엔딩은 없다고 공언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 각자의 선택, 그리고 그 처참한 결과만 있을 뿐이죠.
참고로 저는 베르소의 엔딩을 선택했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결국 인간은 현실을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고통스러움이 어느 정도인지는 확인해 봐야겠죠. 선택한 저의 책임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아래의 글에서는 '베르소의 엔딩을 선택할 경우' 마엘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해 두었습니다. 이 글이 부디 당신에게 너무 고통스럽지 않기를 빕니다.
1. 마엘을 둘러싼 주변 환경
└ 1-1. 어머니
└ 1-2. 아버지
└ 1-3. 클레아
└ 1-4. 사회
1. 마엘을 둘러싼 주변 환경
많은 사람들이, 베르소 엔딩에서 마엘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으며, 그녀는 가족의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합니다. 고통스럽지만, 현실을 살아가며 그녀가 행복해질 수 있을거라 말하죠. 과연 그럴까요? 검증을 위해, 그녀의 주변 환경을 먼저 살펴봅시다.
1-1. 어머니
이 게임은 19세기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 프랑스 부유층은 평균적으로 20대 초반에 결혼했고, 결혼 직후 21~23세 사이에 첫 아이를 임신 및 출산했습니다.
데상드르 가문 2세대는 클레아-베르소-알리시아인데, 전체 가족 중 나이가 밝혀진 것은 둘째인 베르소가 사망 당시 26살이었다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면 클레아는 최소 27살이 되겠죠. 게임의 내용은 베르소 사망으로부터 1년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약 2개월간 진행됩니다. 즉 엔딩 시점에서 이 가족의 첫 아이인 클레아는 28세입니다. 출산 당시 알린이 22세였다고 가정하면, 현재 알린의 나이는 50세입니다.
당시 프랑스 부유층 여성의 평균 수명은 55~60세입니다. 드물게 70~80세까지 장수한 경우도 있었지만 많지 않았어요. 즉, 알린의 남은 수명은 평균적으로 약 5년~10년 내외입니다. 심지어 알린 자신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녀가 다가올 죽음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그녀의 일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아들의 상실과 뤼미에르 캔버스로 인해 입은 손실을 감안하면, 그보다 훨씬 먼저 죽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2. 아버지
당시 부유층 남성의 평균 수명은 대략 60~65세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평균적으로 여성보다 남성이 조금 더 오래 살았습니다. 특히 당시 상류층 여성들에게 무분별하게 처방되던 모르핀(당시에는 생리통에도 모르핀을 처방했습니다)이나 손을 씻지 않고 수술을 하거나 출산을 보조하는 의사들 때문에 여성들이 많이 죽어서 평균연령이 남성보다 낮았습니다.
다만 르누아르와 알린을 비교하면 르누아르가 먼저 죽을 가능성이 높은데, 당시 부유층 남성은 대략 28세~35세 사이에 결혼하고 결혼 직후 임신 및 출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평균으로 계산했을 경우, 르누아르는 55세에서 60세 사이, 대략 57세 정도의 나이입니다. 다시말해 그의 남은 기대수명은 대략 3년~8년 정도밖에 되지 않죠. 물론 그 역시 알린처럼 많은 고초를 치뤘으니, 높은 확률로 그보다 일찍 죽을 겁니다.
또한 당시 부유층 남성은 대략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에 은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를 감안하면, 르누아르는 언제 죽느냐와는 별개로 작품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할 것입니다.
1-3. 클레아
작품 끝난 시점에서 짧으면 1년, 길어야 3년 내로 르누아르가 은퇴하면, 데상드르 가문은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여성이 가문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었거든요. 심지어 당시에는 여성에게 투표권도 주지 않았습니다. 혁명이나 전쟁 등 혼란한 시기를 틈타, 남성 가족이 모두 죽은 여성이 재산을 상속한 경우는 있었지만, 그들도 끝없는 사회적 비난과 압박, 견제에 시달려야 했고, 대부분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하거나 단체의 수장을 맡은 사람들, 예를 들어 수녀회장, 여성 미술가 연합장, 여성 노조위원장, 전쟁 군인을 지원하기 위한 구호단체장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죠.
엔딩 시점에서 클레아는 결혼하지 않았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반지도 끼고 있지 않고, 복식도 결혼한 여성의 것이 아니며, 귀걸이나 목걸이도 없이 머리도 생머리로 풀어헤치고 맨발로 다니고 있으니까요. 물론 클레아가 남자친구가 따로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평균 23세 결혼이 일반적이던 시기에 29세인 클레아는 상당한 노처녀이며, 결혼 상대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클레아는 당차고 똑똑한 여성이므로, 어떻게 상대를 찾아서 결혼할 수 있을 가능성은 있죠. 그리고 그 즉시, 데상드르 가문의 모든 권한과 재산은 클레아의 남편 소유가 됩니다. 이 시점에서 마엘이 바랄 수 있는 것은, (1)클레아의 남편이 자신을 평생 돌볼 정도로 '천사처럼' 착한 사람이거나 (2)클레아가 완전 바보인 사람을 남편으로 들인다음, 각종 계략과 술수로 남편을 후려잡아 실질적인 가장으로 활약하길 바라는 것 뿐입니다. 이 경우 마엘은 죽을 때까지 방안에 갇혀서 살게 될 것인데,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그것이 그녀가 바랄 수 있는 가장 희망찬 미래입니다.
그러나 딱 봐도 알 수 있듯, 두가지 모두 가능성이 높지 않죠. 그 가능성 낮은 도박에서 실패할 경우, 마엘이 가게 될 곳은 높은 확률로 정신병원입니다.
1-4. 사회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중증 화상자를 '정신병자'로 취급했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시엔 화상 흉터나 후두 장애가 있는 여성을 '저주받은 존재'나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 '마녀'등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사회 전체에 만연했습니다. 결국 끔찍한 화상 환자들, 특히 여성 환자의 경우, 가난한 집안이라면 버려져 거리를 배회하다 살해당하거나, 굶어 죽거나, 부유층 집안이라면 죽을 때까지 방안에 감금당하거나,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생을 마감했습니다.
당시는 정신병리학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프로이트의 초기 정신분석학도 발표되기 이전입니다. 현대와 같은 심리치료나 약물치료를 기대할수 있는 것은 대략 한세기 정도를 기다려야 가능한 일이죠.
당시의 정신병원에서는 환자들에게 수면제 투여, 얼음물 목욕, 전기 고문, 단식, 말라리아 감염, 강제 노동, 폭력, 통 안에 감금, ㄱ간, 성고문, 구속복, 독방에 방치, 거꾸로 매달기 등의 '치료'를 행했고, 환자들은 대부분 치료 도중 사망하거나, 치료 때문에 사망했습니다. 물론 그 '치료'를 버텨내는 환자들도 가끔 있었는데, 그런 환자들에게는 치사량의 마취제를 투여하는 '특별 치료'가 더해졌습니다. 사용된 마취제는 모르핀, 클로랄, 에테르 등이었으며, 그들의 사망 기록란에는 '약물로 진정 치료 중이던 환자가 원인 미상의 이유로 갑작스럽게 사망했음'이라고 적혔습니다.
이런 조치들이 취해진 이유는 정신병원 직원들이 특별히 가학적이어서는 아니었고, '치료 도중 사망한' 시체를 비싸게 거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까지, 프랑스에서는 해부학이 급격하게 발전했고, 연구 및 실험, 교육 목적으로 많은 시체를 필요로 했습니다. 제대로 기증된 시체, 예를 들어 사형수의 시체는 너무 비쌌고 수도 적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정신병원 환자", 빈민, 고아들의 시체가 활발하게 거래되었던거죠. 이는 명백히 기록된 사실이며, 당시 의사들은 "정신 질환 환자에게 모르핀을 투여하면 왜 사망률이 높아지는지"에 대한 연구까지 진행했습니다.
또한 남성에 비해 여성의 시체가 월등히 비쌌는데, 당연히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이유" 때문입니다. 당시 법률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여성의 시체에 "무슨 짓"을 하더라도 행위자는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많은 여성의 시체가 함부로 다루어졌고, ㄱ간당하거나, 특정 부위가 잘려나가 기념품이 되거나, 혹은 좀 더 끔찍한 일에 쓰이곤 했습니다. 당시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하급 직원들만이 아니라 지식인들(대표적으로 의대생들)도 그런 짓을 한다고 공공연하게 비난하는 기록들이 여럿 있죠.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쓴 알렉상드르 뒤마를 포함해서, 당시의 많은 문학에서도 이런 저열한 행위를 비난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곳이 바로 높은 확률로 마엘이 향할 곳입니다. 클레아나 그녀의 남편에 의해 정신병원행이 결정된다면, 마엘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기 발로 걸어갈지, 묶인 채 끌려갈지 정도입니다. 정신병원에서 걸어나올 수 있는 사람은 아주 경미한 스트레스나 산후 우울증 등으로 가볍게 진단을 받으러 간 사람들(이 사람들에겐 대부분 모르핀이 처방되었습니다), 혹은 귀족이나 부유층 중에서도 강력한 후견인이 있는 경우였습니다. 즉, 가족에 의해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사람이 제 발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게임의 엔딩에서 대략 40년 후, 정신병자들을 위한 획기적인 치료법이 발명됩니다. 바로 송곳으로 눈알 위쪽을 찔러서 뇌를 파괴하는, 인간을 좀비로 바꿔버리는 것으로 유명한 악명높은 시술인 로보토미, 전두엽 절제술입니다. 하지만 해당 시술이 보급되기 시작할 때 마엘은 50대 후반이므로, 설령 기적적으로 그 나이까지 정신병원에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예후의 위험성' 때문에 전두엽 절제술 시술을 거부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2. 마엘 자신의 문제
└ 2-1. 화상의 고통
└ 2-2. 후두 화상의 고통
└ 2-3. 정신 질환
2. 마엘 자신의 문제
위의 가정은 어디까지나 작품의 배경인 19세기 중반~20세기초 사이의 프랑스를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다만, 현실에 초능력자는 없으므로 게임의 프랑스가 현실의 프랑스와 다를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거기에 희망을 걸 수밖에요. 만약, 게임의 프랑스가 여성에게도 상속을 허용하고, 정신병자에 대한 대우가 21세기만큼 발달했다면, 과연 아무 문제도 없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2-1. 화상의 고통
마엘은 화상으로 인해 전신의 피부 및 한쪽 눈과 성대를 소실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중증 3도 화상(3-2 레벨)으로 분류되며, 그보다 높은 중증 4도 화상(4-2 레벨/미국에서는 6레벨)이 완전히 불타서 탄화되었음, 즉 '재가 되었음'의 완곡한 표현임을 감안했을 때, 마엘은 죽기 직전까지 태워진 것입니다. 이 상태의 환자가 사망하지 않고 생존한다는 것은 현대에서도 굉장히 드문 일입니다.
19세기말 프랑스의 화상 치료법은, 화상을 당한 피부에 양파즙을 바르는 파레법(파레식 시술) 정도였습니다. 후두에 입은 화상을 치료하는 방법 따위는 없었고, 화상 후유증을 줄이는 방법도 없었습니다. 결국 당시 의사가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처방이라고는 '인도적'인 것들 뿐이었는데, 많은 돈을 받고 치사량까지 모르핀을 처방하거나, 돈을 받지 않고 튼튼한 밧줄을 구매할 수 있는 가게를 가르쳐 주는 방법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또한 심한 화상을 입은 환자들은 화상이 완전히 아물어도 감염에 굉장히 취약합니다. 하지만 항생제라는 개념은 19세기 말에 막 보급되기 시작했으므로, 마엘은 죽을 때까지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을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의사들이 공용 변기를 만지거나(당시에 집 안에 화장실이 있는 경우는 대단한 상류층의 저택 뿐이었습니다, 대부분은 공용 변기를 쓰거나, 요강에 싼 후 창문밖으로 쏟아내거나, 길바닥에 그대로 쌌습니다. 이 오물을 피하기 위해 발명된 높은 굽의 신발인 '패턴'-초창기 하이힐이라고 잘못 알려진-도 있습니다.), 혹은 자동차를 수리하던 손을 씻지도 않고 수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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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서 이정도로 끔찍한 화상을 입은 사람의 10년 기대 생존율은 약 15%로, 이는 간암이나 폐암 진단을 받은 사람의 10년 생존율과 동일한 수치입니다. 이는 카프카스 룰렛(6연발 리볼버에 5발을 채우고 약실을 회전시킨 후 격발)에서 생존할 확률(16.6%)보다도 낮은 수치입니다. 의학적으로 보자면 "가망없음"의 완곡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죠.
물론 이는 기대수명이고, 평균 생존년수는 치료에 성공했을 경우에 한해 수개월~2년 사이입니다. 사망 원인은 대부분 피부가 없어져 발생하는 감염에 의한 패혈증, 타버린 신체조각이 몸안을 순환하면서 장기(특히 신장)을 막히게 만들어 생기는 장기부전, 그리고 자살입니다. 현실에서 중증 3도 환자의 자살율은 일반인의 약 12배 정도로, 이는 심각한 우울증, 조울증, 조현병 환자와 비슷한 수치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현대 기준'입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중증 3도, 그것도 흡인성 화상으로 목소리를 잃을 정도로 심각한 화상을 입은 사람의 1년 생존율은 사실상 0%입니다. 당시에는 흡인성 화상을 치료할 방법이 없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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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엘에게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노령자에 비해 좀 더 오래 생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대신, 그녀는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더 심각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녀는 아직 성장기 한가운데에 있는 청소년입니다. 불에 의해 녹아내린 피부는 섬유화되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지만, 뼈와 근육은 계속해서 성장합니다. 그 결과, 피부가 내부에서 당겨지다 못해 찢어지거나, 몸이 등쪽으로 말리면서 구부러지는 기형이 생깁니다. 2차 성징이니 허리와 엉덩이, 무릎이 급격하게 부풀어오를테고, 특히 여성이기 때문에 엉덩이가 커지면서 허리가 뒤쪽으로 꺾입니다. 이걸 내버려두면 척추 골절로 반신불수가 되거나, 죽겠죠.
이를 치료하려면, 성장할 때마다 그에 맞춰 피부를 잘라내거나, 절개하거나, 긁어내어 일부러 손상시킨 후 다시 회복시키는 과정을 반복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박피하듯이 가죽을 통째로 벗겨낼수도 없는 노릇이니, 최대한 얇게 저미듯이 피부를 긁어내어 손상시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넵, 회 뜨는 것처럼요. 그것도 전신화상이니 전신의 피부를 전부.
끔찍한 형벌 중에 이런 식으로 피부부터 조금씩 잘라내는 '능지처참'이란 것이 있는데, 고통스럽기로 유명한 형벌입니다. 혹은 공포 영화에서 살인마가 희생자를 고문하는 방식일수도 있겠죠. 마엘은 그걸 치료로 받아야 합니다. 이는 현대 의학에서도 극도로 고통스럽고 어려운 치료입니다. 그러나 19세기 프랑스에서는 더욱 심각한 문제인데, 당시에는 레이저 메스는 커녕 일반 메스도 보급되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소독도 되지 않은 무딘 칼로 피부를 잘라내고, 긁어내는 과정을 반복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겪으며 마엘이 느낄 고통은, 쇼크사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만큼 극심할 것입니다. 죽기 직전까지 모르핀을 투여해서 완전히 비몽사몽 상태로 만들어도 여전히 고통을 느낄 가능성이 높죠. 말기 암 환자나, 골반뼈 골절 환자는 꽤 강력한 모르핀을 투여받아도 여전히 고통을 호소합니다. 당시에는 리도카인 같은 현대적 마취제가 없었고, 클로로포름이나 에테르 등의 마취제는 있었지만 이런 출혈을 동반하는 시술에서 썼다간 심장마비나 질식을 유발해서 '치료 중 사망'을 고의적으로 유발하는 행위가 되어버립니다. 19세기말 프랑스에서 수술시 마취제로 가장 많이 쓰인 것은 코카인인데, 코카인(고양성)은 모르핀(완화성)과 길항하는 종류의 ㅁㅇ이므로 모르핀 중독자가 코카인을 흡입하면 심근경색이나 부정맥으로 즉사할 수도 있어요.
결국 고통을 줄일 방법은 없습니다. 물론 시술 중 쇼크로 사망할 가능성도 적지 않으므로, 최악의 경우 그녀가 즉사할 위험을 감수하면서, 뒤통수를 내려치거나, 트라이앵글 초크로 기절시켜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시술하는 것 정도가 당시의 최선입니다.
2-2 후두 화상의 고통
후두 화상은 다른 화상과 차원이 다른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피부 화상의 경우 아문 다음에는 통증이 거의 없고, 마엘같은 중증 3도 화상의 경우 아픔을 느낄 신경까지 녹아서 상대적으로 통증(정확히는 모든 감각)이 마비되는 반면, 후두 화상은 그런 자비를 베풀지 않습니다. 짤없이 모든 고통을 느껴야 하죠. 죽을 때까지.
발성 기능을 소실할 정도로 심각한 후두 화상을 입은 환자는 현대에도 거의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피부와 달리 점막 조직은 불에 의해 소실된 후에는 재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숨을 쉴 때마다, 대략 3 초 단위로 목 안쪽을 칼로 긁어내는 듯한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물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을 때는 고통이 몇배 정도 늘어날 것이고요.
이 고통을 버티는 유일한 방법은 모르핀입니다.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는 부유층 여성에게 모르핀을 무분별하게 처방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돈만 충분히 준다면 모르핀을 처방받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당연히, 오래가지 않아 모르핀 중독자가 되었겠죠.
즉, 남은 평생을 모르핀 중독자로 사는 것이, 현실로 돌아온 마엘이 바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삶입니다. 돈을 클레아(혹은 그녀의 남편)이 무한정 대준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만.
2-3 정신 질환
현실에서 심각한 화상 환자들은 만성 통증, 우울증, 사회적 고립 등으로 인해 자살 위협이 굉장히 높은 고위험군에 해당됩니다.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2021년에 발표한 논문에서는 대략 12배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심각한 우울증, 양극성 장애, 조현병 환자들과 비슷한 수치입니다.
현대 기준으로 보자면 마엘은 '각별한 관찰이 필요한 자살 고위험군'으로 분류됩니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문의 명예를 위해 그녀에게 자살을 종용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명예를 지키기 위한 자살은 군인, 귀족, 정치인 남성에게만 허용된 일종의 특권이었으니까요.
또한, 주로 나무와 천연 섬유로 지어진 19세기 프랑스 저택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한 흡입 손상 사례는 유독 가스 흡입을 의미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산화탄소입니다.
성대가 심하게 화상을 입어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면 일산화탄소 중독도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경우 가장 흔한 증상은 인지 기능 저하, 기억 상실, 파킨슨병 증상, 마비, 무도증, 보행 장애, 언어 장애, 요실금입니다. 당시 프랑스에서 화상 환자들이 왜 정신 질환자로 취급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죠. 흔히 말하는 연탄가스 중독입니다. 마엘 또한 그러한 후유증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3. 중독의 해소
└ 3-1. ㅁㅇ과 캔버스의 공통점
└ 3-2. 가족의 사랑
└ 3-3. 캔버스와 현실의 비교
3. 중독의 해소
많은 사람들이 "마엘은 치료되었다, 마엘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족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가족의 사랑으로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것은 어느 정도의 현실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3-1. ㅁㅇ과 캔버스의 공통점
일반적으로 ㅁ약 중독의 정도를 판별하는 ICD11기준(혹은 미국의 DSM5)으로 보자면, 마엘의 상태는 가장 심각한 수준의 캔버스 중독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그녀가 그토록 중독된 캔버스를 단숨에 소실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현실에서 ICD11기준 심각한 정도의 중증 ㅁ약중독자가 단숨에 모든 ㅁㅇ을 단절당할 경우, 결과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금단증상의 고통 때문에 사망하거나, 또는 금단증상의 고통 때문에 자살하거나. 따라서 의료적 개입이 없는 중독물질의 단절이란 사실상 "처형"의 완곡한 표현에 가깝습니다.
이 ㅁ약들이 그토록 중독적인 이유는 도파민을 제어하여 기쁨, 행복감, 안온함, 안락감, 고양감, 전능감 등 여러 감정들을 급속도로 느끼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중독자들은 이를 "인간이 평생 살아가며 조금씩 느낄 행복을 한번에 모아서 주입해주는 느낌"이라고 표현하곤 하죠.
자, 마엘을 봅시다. 현실에서 중증 3-2도 화상 환자가 "진짜 현실과 똑같은 느낌의 판타지 세상속 슈퍼걸이 되어 동료들과 함께 가족을 꾸린다"는 경험을 하게 되면, 그것이 주는 쾌감은 결코 ㅁ약보다 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역으로 말하자면, 뤼미에르 캔버스 세계가 사라졌을 경우 그녀가 겪을 고통이 ㅁ약 금단증상보다 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만들 것입니다.
마엘은 페인트리스이며, 새로운 캔버스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녀가 성장해 새로운 캔버스를 그려내면, 그녀는 거기에 다시 중독될 위험성이 높습니다. 현실에서 중독자의 크랙 파이프를 빼앗아 박살낸다고 해도 중독이 치료되는 것은 아니듯, 그녀가 중독된 이유는 '뤼미에르 캔버스'보다는 '캔버스에서의 삶'이기 때문에 엔딩 시점에서 중독은 치료되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다.
3-2. 가족의 사랑
많은 중독자들이 가족의 사랑으로 중독에서 탈출합니다. 심지어 실험실의 쥐들에게서도 이러한 경향이 공통적으로 관찰됩니다. 본질적으로 ㅁ약이 주는 행복감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주는 행복감이나 생리학적인 기전은 완전히 똑같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마엘은 가족의 사랑으로 중독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요? 사랑으로 중독을 탈출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은 A. 가족이 마엘을 사랑해야 하며 B. 마엘 또한 가족을 사랑해야 하며 C. 서로를 대하는 방법이 적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A. 엔딩 시점에서 마엘의 가족 구성은:
(1) 아버지 르누아르: 그녀가 깊이 사랑하던 뤼미에르와 그녀의 아바타를 한마디 물어보지도 않고 박살낸 사람
(2) 어머니 알린:베르소가 죽은 책임을 알리시아에게 향하며, 뤼미에르 캔버스에 그녀를 그릴 때 화상 흉터에 목소리까지 그려넣은 사람
(3) 언니 클레아: 베르소가 죽은 책임을 알리시아에게 향하며, 눈앞에서 대놓고 그녀에게 신경질을 부림, 추가로 가족 모두를 한심하게 생각함
...입니다.
B. 특히 이 중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르누아르인데, 중독자들은 중독 물질을 폭력적으로 단절한 사람에게 강한 적개심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머지 둘도 큰 차이는 없어요. 무엇보다, 만약 이 가족이 서로를 사랑으로 대했다면, 마엘이 '그림 속에서 살다가 죽겠다'라고 결심했을 리가 없잖아요.
C. 그럼, 방법은 적절했을까요? 마엘이 캔버스에서 나오는 과정은 스스로 나온 것이 아니라, '폭력을 수반한' 억압으로 끌려나온 것입니다. 현실에서 16세 아이에게 그런 '잔혹한' 폭력이 가해질 경우, 이는 영구적인 트라우마를 남길 위험성이 높으며, 그런 일이 벌어진 가정은 높은 확률로 붕괴합니다.
3-3. 캔버스와 현실의 비교
마엘은 캔버스를 탈출하더라도 언젠가 죽습니다. 당연히.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녀가 '언제' 죽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그렇다면, 마엘이 현실에서 살게 될 경우와 캔버스에서 살게 될 경우,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을까요?
(1) 현실에서 살 경우
- 삶의 질: 언어 장애, 신체 기형, 사회적 고립, 가족 간의 불화, 정신 질환, 미래 불안정, 화상 후유증, 취약한 질병저항력, 공식적으로 미치광이 취급
- 기대수명: 현재 16세이며, 평균 수명을 기준으로 약 40년 생존 가능, 그러나 화상 합병증으로 인해 1년 내 사망 확률 매우 높음
- 특기사항 1: 최소 3초 간격으로 성게 한마리를 생으로 삼킨듯한 고통이 반복됨. 죽을 때까지.
- 특기사항 2: 모르핀 중독 가능성 매우 높음, 사실상 확정.
- 특기사항 3: 집밖으로 나가면 높은 확률로 욕설 및 가래침, 돌 등이 날아옴. 공식적으로 마녀, 정신병자, 미치광이로 간주되므로 체포당할 수 있음
- 특기사항 4: 외출하거나 타인과 접촉시 감염되어 패혈증에 걸릴 가능성 높음.
- 특기사항 5: 타서 조각난 신체조직이 체내를 순환하면서 장기를 막아 염증 유발, 피부가 없으므로 체온 조절 불가, 피부가 없어 감염에 취약하므로 컨디션이 좋은 날은 거의 없을 것이고, 항상 고열과 염증에 시달릴 가능성 높음. 죽을 때까지.
(2) 캔버스에서 살 경우
- 삶의 질: 싸움 깡패인 슈퍼 섹시걸, 신과도 같은 능력, 친애하는 친구들
- 기대수명: 현실에서의 1년당 캔버스에서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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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현실적으로 판단했을 때 '현실로 돌아온' 마엘의 이후 남은 삶은 대략 이러합니다. 물론 계속 말씀드렸듯, 게임 내의 현실이 정확히 19세기말 프랑스와 얼마나 똑같은지는 알수 없습니다. 다를 가능성도 있어요. 예컨대 치유 능력자가 있다거나. 그러나 게임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상상으로 구현한 것이기 때문에 현실과 같은 밀도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묘사되지 않은 빈 부분'은 현실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특히 현실을 기반으로 한 창작물에서는요.
예를 들어, 게임 내의 어떤 인물도 화장실을 가지 않습니다. 캐릭터 모델링에도 항문이 구현되어 있지 않죠. 하지만, 게임 내의 인물들은 '현실의 인간'을 모델로 한 것이므로, 그들에게 항문이 있고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되, 다만 화면에 나오지 않는 것뿐이라고 가정하는 쪽이 합리적입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게임의 배경 역시 '설명되지 않은 부분'은 그 모델인 현실의 19세기말 프랑스를 기준으로 가정하고 해석하는 쪽이 합리적입니다. 정확히는, 그것 이외에는 합리적인 방법이 없죠.
물론, 다시 말하지만, 초능력자의 존재나 다른 여러 요소들을 고려할 때, 사회 문화가 현실과 완전히 다를 가능성은 분명히 있습니다. 치유능력자가 있을 가능성도 있고요. 혹은 화상을 치료하는 신박한 방법이 따로 있다거나. 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그게 전부 (제작사에서 따로 발표하기 전까지는) 합리적 근거가 없는 추측일 뿐이라는 사소한 문제가 있긴 하지만. 마엘을 좋아하고, 그녀의 미래를 응원하신다면 그 가능성에 희망을 거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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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재미를 드릴 수 있었기를 바랍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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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엘만 딱 놓고 보면 마엘 엔딩이 행복할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이미 마엘이 아니라 알리시아라서 이 행복이 거짓된 거라는걸 알고있는데 과연 그 행복이 얼마나 갈지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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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ㅎㅎ | 25.06.02 08:4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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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엘만 딱 놓고 보면 마엘 엔딩이 행복할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이미 마엘이 아니라 알리시아라서 이 행복이 거짓된 거라는걸 알고있는데 과연 그 행복이 얼마나 갈지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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