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르 옵스퀴르 분석 칼럼: #5 최선의 답은 없었을까? (부제 : 정신 질환이 초래한 비극) - 상편
반갑습니다.
지난 한 주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이 게임을 여러 번 플레이하고, 레딧과 여러 커뮤니티에서 다양한 토론을 하며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 그 재미도 끝내고, 좋은 감정을 안고 현실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네요. 그러나, 아직 제가 할 일이 하나 남은 것 같군요. 바로 헌사입니다.
헌사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제가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창작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창작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아마도 ‘즐거움’과 ‘감동’일 겁니다. 희극을 보며 웃기도 하고, 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죠. 활극에서 활력을 얻기도 하고, 슬래셔물에서 짜릿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모든 감정들은 결국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니까요.
그리고 창작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또 다른 큰 선물은 “무엇이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내가 그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현실에 대한 질문을 던져준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관객들은 이를 통해 실제 삶의 선택 순간에 도움을 얻거나, 인생의 다른 가능성들을 고민해볼 수 있죠.
그래서 저는 ‘현실의 눈으로 바라본 Clair Obscur’이라는 주제로 몇 개의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Clair Obscur의 세계는 현실은 아니지만, 현실 사람들이 만들고 즐기는 만큼 현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이 모든 분석과 사유가 제가 이 게임과, 제작자와, 그리고 여러분께 진정한 경애와 존경의 마음으로 바치는 "헌사"이며, 저는 그것이 이 멋진 게임에 바치는 작별 인사로서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추가로, 이 글은 원래 레딧에 게시했던 글이며, 영어로 쓴 글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어투나 어순, 혹은 일부 용어가 어색하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최대한 다시 다듬기는 했지만, 보시면서 혹시 말이 좀 어색하게 느껴지시더라도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의도치 않은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서론을 살짝 길게 쓰고 있사오니 양해바랍니다. 이제 본론인 33 분석 논문 다섯번째 칼럼, “최선의 답은 없었을까? (부제 : 정신 질환이 초래한 비극)”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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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자가 원하는 것, 그리고 행동
└ 1-1. 르누아르
└ 1-2. 마엘
└ 1-3. 베르소
1. 각자가 원하는 것, 그리고 행동
알린이 캔버스 밖으로 쫓겨난 시점, 즉 게임의 최종 국면에서 주도권을 가진 인물은 세 명입니다. 르누아르, 마엘, 그리고 베르소. 이들은 각자 원하는 바가 있었고, 그것을 위해 다른 사람을 폭력적으로 제압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느 쪽의 결말이든 매우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지죠.
그렇다면 이들의 선택이 왜 그렇게도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졌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누구도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충분히 성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충분한 고민 없이 내린 선택은 결과만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 그 선택이 이루어진 과정 자체도 비극적입니다.
첫째, 세 명 모두 자신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뤼미에르 캔버스의 즉각적인 파괴’와는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둘째, 세 명 모두 서로를 증오하거나 감정적으로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합니다.
셋째, 이들 누구도 시간의 압박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즉, 이들에게는 타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고,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도 없었으며, 타협을 위한 시간적 여유조차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 모든 가능성을 내던지고, 마치 모든 것을 최악의 형태로 파괴하려는 사람들처럼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결코 일어날 필요가 없었던 비극이 그들을 덮쳐버립니다.
좋게 말하면 그들은 어리석게 행동했고, 현실적으로 말하면 셋 다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처럼 행동했습니다. 사실 저는 르누아르, 마엘, 베르소를 모두 사랑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지만요.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각자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1. 르누아르
르누아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A) 마엘이 캔버스 안에서 시체가 되지 않는 것
(B) 데상드르 가족이 해체되지 않고 하나로 모여 화합하는 것
르누아르는 가족을 위해 뤼미에르 캔버스를 파괴하려 하는 것이지, 그 캔버스 자체에 원한이 있거나 파괴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직접적으로 “나는 아들의 유품인 뤼미에르 캔버스를 파괴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도 하죠.
즉, 최종 국면의 르누아르에게 있어 캔버스의 파괴는 단지 마엘(+알린)을 현실로 데려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1-2. 베르소
베르소가 원하는 것도 두 가지입니다.
(A) 자신의 영원한 안식
(B) 마엘의 캔버스 중독 치료
알린이 캔버스 밖으로 쫓겨난 시점에서 베르소는 이 두 가지 외에는 특별히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나마도 (B)는 매우 부차적인 목적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마엘이 캔버스의 파괴를 반대하자, 그는 바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마엘에게 현실과 캔버스를 오가며 살아가라고 권유합니다.
그리고 베르소가 마엘에게 패배했을 때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이런 삶은 원하지 않는다. 제발 그만 그리게 해달라”고 간절히 말합니다. 이 장면에서 베르소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물론 ‘페이딩 보이’의 존재도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페이딩 보이는 “그림 그리는 것에 지쳤다”고 말할 뿐, “캔버스와 함께 자살하겠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전까지 꾸준히 그림 그리기의 즐거움과, 계속 그리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해 왔습니다. 다만 가족을 위해 잠시 멈추고자 했던 것이죠.
알린의 문제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이미 알린은 캔버스에서 쫓겨났고, 르누아르와 마엘이 그녀를 제압할 수 있는 상태에서 캔버스의 파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실제로 베르소 자신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마엘에게 “캔버스를 유지하며 드나들라”고 말한 것이겠죠.
즉, 최종 국면에서 베르소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죽음뿐입니다. 그에게 있어 뤼미에르 캔버스의 파괴는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1-3. 마엘
마엘이 원하는 것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A) 캔버스 안에서 고통 없는 행복한 삶을 사는 것
(B) 애정을 품고 있는 뤼미에르 캔버스를 계속 유지하는 것
심플하죠.
2. 폭력의 리스크
2-1. 르누아르가 폭력을 휘둘렀다가 제압에 실패할 경우
2-2. 르누아르가 폭력을 휘둘러 제압에 성공할 경우
2-3. 베르소가 폭력을 휘둘렀다가 제압에 실패할 경우
2-4. 베르소가 폭력을 휘둘러 제압에 성공할 경우
2-5. 마엘이 폭력을 휘둘렀다가 제압에 실패할 경우
2-6. 마엘이 폭력을 휘둘러 제압에 성공할 경우
2. 폭력의 리스크
앞서 1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르누아르·마엘·베르소 세 인물이 각각 원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베르소의 경우 다소 애매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최소한 이해 가능한 수준이죠. 그러나 엔딩이 비극으로 치닫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그들이 '무엇'을 원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얻으려 했느냐에 있습니다. 세 사람은 모두 ‘모두 얻거나, 모두 잃거나’의 극단적인 자세로 상대를 물리적으로 제압하려 들며, 바로 그 점이 결정적인 문제였습니다.
폭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시도는, 굳이 도덕적·윤리적 판단을 제쳐두더라도, 본질적으로 좋지 않은 전략입니다. 폭력은 감정적 반발과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설령 성공하더라도 이후 상당한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합니다. 반면 실패했을 경우에는 자신의 목적을 온전히 상실하는 것은 물론, 잔혹한 보복까지 감수해야 할 수 있죠.
이런 ‘폭력적 제압 시도’는 특히 3자 구도에서 더욱 위험해집니다. 둘이 연합하여 한 명을 공격하는 전략이 상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연합한 개인 각각의 승률은 33.3%에서 50%로 크게 상승하게 됩니다. 보통은 상대적으로 약한 두명이 연합해 가장 강한 한명을 제압하려 들게 되는데, 이는 당연히 강한 상대가 남으면 그만큼 자신의 뜻을 이룰 확률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바로 르누아르 씨가 이렇게 실패했죠.
실제 역사 속 삼두정치, 『삼국지』의 권력 다툼, 게임 이론, ‘세 명의 총잡이’ 문제 등 현실에서도 이러한 3자 구도의 불안정성과 폭력의 리스크는 수없이 입증되어 왔죠. 이런 점을 서사 속에 녹여 보여주는 것 또한 『클레르 옵스퀴르』의 강점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실제로 르누아르·베르소·마엘이 폭력에 의존했을 때 어떤 리스크가 있었고, 그들이 어떻게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1. 르누아르가 폭력을 휘둘렀다 제압에 실패할 경우
이 경우, 르누아르는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우선, 그의 딸은 확정적으로 캔버스 안에서 ‘시체’가 됩니다.
게다가 뤼미에르 캔버스를 파괴하지 못했기에, 알린의 재침입을 막는 것도 불가능해집니다. 만약 알린이 다시 캔버스로 들어가게 되면, 르누아르는 마엘과 알린 두 사람을 동시에 적으로 상대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상황에서는 데상드르 가족의 재결합이나 화합은 영원히 물 건너가게 되죠.
2-2. 르누아르가 폭력을 휘둘러 제압에 성공할 경우
이 경우, 르누아르는 일시적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입니다. 마엘은 현실에서 살아야 한다는 자각이나 감정적 승복 없이, 단지 물리적인 폭력으로 쫓겨난 것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그녀가 다시 캔버스에 집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엘을 감금해서 24시간 감시하지 않는 한, 그녀가 또 다른 캔버스를 창조해 거기에 빠져드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실제로 마엘은 마음만 먹으면 르누아르의 눈을 피해 새 캔버스를 만들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가출해서 그것에 몰입할 수도 있죠. 현실의 수많은 중독자들이 실제로 그런 식으로 통제를 벗어나면서 중증화됩니다. 게다가 르누아르는 마엘뿐 아니라 알린까지 신경 써야 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마엘이 르누아르에게 적개심을 품게 되어, 가족 관계가 완전히 붕괴될 가능성도 상당히 높아집니다. 실제로 현실에서도 중독자들은 중독 물질을 빼앗거나 공급을 끊으려는 가족에게 극심한 분노를 표출하곤 하죠.
이 점은 게임 내에서 어느 정도 명확하게 암시되기도 합니다. 마엘은 르누아르의 통제적인 성향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갖고 있으며, 이를 노골적으로 지적하기도 합니다.
결국, 르누아르가 진정으로 바라는 ‘데상드르 가족의 화합’은 설령 폭력으로 상황을 통제해도 실현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입니다.
2-3. 베르소가 폭력을 휘둘렀다 제압에 실패할 경우
이 경우 베르소는 모든 것을 잃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안식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고통 속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꼭두각시 인형’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다만 저는 이것이 그에게 가혹한 형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베르소는 어디까지나 그림 속 인물이며, 그가 캔버스를 파괴하려는 행위는 현실로 치면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이유로 핵전쟁을 일으키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실제 세계에서 “삶이 괴롭다”는 이유로 핵전쟁을 일으킨 인물이 있다면, 그에 대해 사지를 찢어야 마땅하다고 말할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많을 것입니다. 그냥 콘서트를 열어준다는 약속을 지킨 것으로 볼수도 있어요.)
게다가 이 시나리오에서는 마엘의 캔버스 중독 역시 아무런 해결을 보지 못합니다.
현실적으로도 베르소가 마엘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둘 사이의 전사로서의 역량 차이는 명확하지 않지만, 마엘은 캔버스 내에서 신적인 힘을 지닌 페인트리스입니다. 그녀는 고마주를 통해 그려진 인물을 단번에 죽일 수도 있고, 반대로 고마주로 죽은 그려진 인물을 되살릴 수도 있습니다. 또한 페인티드 알리시아가 시전한 시간 동결을 손쉽게 무력화한 점을 보면, 마엘은 캔버스 내의 시간을 조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과적으로, 베르소가 마엘을 폭력으로 제압하려는 시도는 그 위험성을 떠나 애초에 성공 확률이 매우 낮은 무모한 도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4. 베르소가 폭력을 휘둘러 제압에 성공할 경우
이 경우 베르소는 자신을 믿고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을 배신하고, 그들을 죽이는 결과를 낳습니다. 여기에 포함되는 인물들은 단순한 동료가 아니라, 성관계를 나눴던 루네와 시엘, 오랜 친구였던 모노코와 에스키에 등입니다.
또한 이 경우에도 그는 마엘의 캔버스 중독을 치료하거나 돕지 못합니다. 크랙 파이프를 부순다고 해서 중독자가 저절로 회복되지는 않듯이 말입니다.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될 수 있습니다. 만약 마엘이 새로운 캔버스에 빠지게 된다면, 그곳에는 이제 베르소처럼 그녀에게 조언하고 훈계해 줄 사람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2-5. 마엘이 폭력을 휘둘렀다 제압에 실패할 경우
이 경우 마엘은 뤼미에르 캔버스와, 그 안에서의 가족과 친구를 모두 잃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거나,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조만간 새로운 캔버스를 찾아 헤매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마엘은 아직 미숙한 페인트리스이기 때문에, 스스로 대체할 만한 캔버스를 창조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혹은 클레아 같은 다른 페인트리스가 만든 캔버스를 빌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캔버스를 선택하든, 새 캔버스에는 그녀가 ‘가족’이라 부르던 33원정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마엘이 영원히 그리움 속에서 고통받도록 만들 가능성이 큽니다.
2-6. 마엘이 폭력을 휘둘러 제압에 성공할 경우
이 경우, 마엘은 현실의 가족들을 떠나고, 뤼미에르를 자신만을 위한 꼭두각시 세상으로 변모시킨 채, 그 안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다만 칼럼#4에서 말씀드렸듯, 내용적인 측면에서 다른 두명의 경우처럼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른 가족들도 페인터이므로 뤼미에르 캔버스로 놀러올 수도 있고, 어차피 그녀는 중증 3도 화상 환자이기 때문에 현실에서도 고순도 모르핀에 푹 절여져 비몽사몽하면서 연명하게 될 가능성이 높거든요.(그녀의 현실에 대해서는 칼럼 #3을 참고해주세요.))
무엇보다 현실의 마엘은 평균적으로 보았을 때 채 3년도 살아남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캔버스에 다이브한 채로 단 1년만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실제로 체감하는 시간은 100년에 달할 수 있습니다. (캔버스와 현실의 시간 비율에 대해서는 칼럼 #1을 참고해주세요.)
그렇다 해도, 캔버스 안에서의 자살이 ‘가장 나은 선택’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게다가 마엘은 뤼미에르 캔버스 안에서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르누아르가 언제 마음을 바꿔 돌아올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려야만 합니다. 르누아르는 가족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서슴지 않는 인물이고,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통제하려 드는 권위주의적 성향도 강하며, 마엘 역시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마엘이 뤼미에르 캔버스 안에서 천천히 죽어가는 동안-다시 말해, 마엘이 캔버스 밖의 현실에서 빠르게 죽어가는 동안- 그 모습을 눈으로 보고 있는 르누아르는 다시 마엘을 현실로 끌고가려고 노력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엘도 그걸 알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것을 희생하면서 얻어낸 뤼미에르 캔버스 생활도 맘편히 즐길 수 없을 가능성이 높죠.
물론 르누아르는 마엘을 믿는다, 불을 켜고 기다리겠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그가 마엘에게 두들겨맞고 쫒겨나면서 한 말입니다. 실제로 그는 베르소 엔딩에서 마엘을 기다리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 마엘이 캔버스에서 쫓겨나자마자, 뤼미에르를 불태워버렸죠. 마치 자기 자신의 말을 비웃는 것처럼.
3.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최선의 방법'이었을까?
└ 3-1. 르누아르
└ 3-2. 마엘
└ 3-3. 베르소
└ 3-4. 과연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
3.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최선의 방법'이었을까?
먼저 말씀드리지만, 어떤 경우에도 들어맞는 완벽한 해결책은 없습니다. 애초에 그런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죠. 하지만 ‘더 나은’ 해결책은 분명히 존재하며, 특히 게임의 최종 국면에서는 여러 가지 더 나은 방법이 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게임의 스토리가 이미 완결되어 고정된 이상, 더 나은 해결책을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가 게임의 세계 속에 들어가 경험을 할 때, 단순히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무엇이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혹은 ‘내가 그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같은 고민을 해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성찰이 현실의 삶 속에서 맞닥뜨린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힌트가 되거나 위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최선의 해결책’이 무엇이었을지에 대한 제 생각을 적어봅니다. 물론 이 생각이 절대적인 정답은 아니며, 더 나은 선택이 존재했을 수도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저 역시 더 나은 해결책을 보고 싶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으며, 각 인물들의 해결책과 타협 가능성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3-1. 르누아르
르누아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마엘과 타협하여 뤼미에르 캔버스를 존속시키는 대신, 그녀가 현실과 캔버스 생활의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노력하도록 권유하는 것입니다.
르누아르가 타협에 성공할 경우, 마엘의 캔버스 중독 위험은 크게 줄어듭니다. 캔버스의 위험은 누군가 지나치게 빠져들어 ‘너무 오래’ 머물 때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르누아르 자신도 수많은 캔버스를 창조하고 시간을 보내왔지만 큰 문제는 없었죠. 즉, 마엘이 뤼미에르 캔버스에서 잠깐씩 벗어나 회복 시간을 가진다면 큰 위험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마엘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여 캔버스 파괴를 철회한 아버지에게 깊은 감사를 느낄 것입니다. 폭력으로 억지로 끌어내 현실로 데려오는 과정에서 생기는 적대감 또한 사라집니다. 따라서 가족의 회복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집니다.
이와 더불어 르누아르에게는 또 다른 장점이 있습니다. 마엘을 마크하는 부담이 줄어들면서 온전히 알린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그의 부담을 줄이고, 알린의 돌발 행동을 막을 가능성도 높여 가족의 회복 가능성을 더 높여줍니다.
소소한 장점으로, 이 경우 그는 죽은 아들의 추억이 담긴 유품을 파괴하지 않아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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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해 르누아르가 제시할 수 있는 조건도 간단합니다. 마엘에게 ‘당장은 캔버스를 파괴하지 않을 테니 우선 진정하고 충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뒤에 나와서 이야기하자’라고만 말하면 됩니다.
베르소가 마엘에게 비슷한 제안을 했을 때, 마엘은 자신이 나가면 르누아르가 곧바로 캔버스를 불태워버릴 거라며 거부했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르누아르가 캔버스를 파괴하지 않는다고 확실히 약속한다면 마엘이 현실로 돌아올 이유는 충분합니다.
물론 마엘이 어리광을 부리며 계속 캔버스에 머무를 수도 있겠지만, 이때 르누아르는 캔버스 파괴 경고를 통해 타협을 강력하게 강권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제발 5분만 더요!’ 혹은 ‘이번 스테이지만 깨고요!’라고 외칠 때 부모들이 하는 그 ‘쓰읍…’ 같은 경고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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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르누아르는 굳이 베르소와 타협할 필요도 없습니다. 베르소가 원하는 건 완전한 안식이니, 그 조건만 제시하면 됩니다. 물론 르누아르는 베르소가 협력하면 마엘과 알린, 뤼미에르 사람들까지 돌보겠다고 약속할 수 있습니다. 이는 베르소가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일 것입니다.
더불어 이 경우 루네와 시엘도 마엘을 설득하는 데 힘을 보탤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이 폭력에 패배하는 순간 자신들까지 포함한 모두가 위험에 처할 상황에 쉽게 배팅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따라서 르누아르가 뤼미에르 캔버스 파괴를 철회하는 순간, 그들에게 마엘의 현실 복귀를 반대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어차피 뤼미에르 캔버스가 멀쩡하다면, 마엘은 언제든 돌아와 만날 수도 있으니까요.
3-2. 마엘
마엘이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르누아르와 타협하여, 뤼미에르 캔버스를 하루에 몇 시간 정도 즐기는 취미 생활로 삼는 것입니다.
만약 마엘이 하루에 네 시간(240분)을 캔버스 안에서 보낸다면, 그녀는 약 400시간(약 20일)을 캔버스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후 그녀가 현실로 돌아와 20시간(1,200분)을 현실에서 보낸다면, 캔버스 내에서는 약 2,000시간(120,000분), 즉 약 세 달(83.25일)이 흐르게 됩니다.
또는 욕심을 내어 하루에 10시간(600분)을 캔버스에서 보낸다면, 캔버스 내에서 41일을 보내고 현실에서는 58일을 건너뛰게 됩니다. 현실세계의 마엘은 그 58일조차 경험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단지 하룻밤 잠든 것뿐이니까요.
마엘은 조금 더 욕심을 낼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그녀는 16살 아이인데다, 심각한 3도 화상 환자 특성상 학교를 가거나 외출을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닙니다. 그런 짓을 하다간 감염되어 곧바로 죽게 될 테니까요. 게다가 19세기 말 프랑스라는 배경을 생각하면, 그녀가 집 밖으로 나가면 정신질환자, 마녀, 괴물 취급을 받으며 돌멩이나 침 세례를 맞거나 체포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마엘이 하루 8시간 자고, 식사 및 가족과 보내는 2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캔버스에서 보낸다면, 캔버스에서 58일을 보내고 현실로 돌아가 잠든 뒤 다음날 아침, 41일이 지난 캔버스로 다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들이 친구들과 ‘하루 종일’ 함께 있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그런 작은 타협조차 거부한다면 마엘이 치르게 될 대가는 ‘자신의 죽음’이나 ‘친구들의 완전한 소멸’뿐입니다. 따라서 현실과 캔버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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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르누아르나 마엘은 뤼미에르 캔버스 내 시간을 멈추거나 흐름을 조절하는 능력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페인티드 르누아르와 페인티드 알리시아는 시간을 멈추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마엘 역시 멈춘 시간을 간단한 손짓으로 다시 흐르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간이 정지된 상태에서도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며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완벽한’ 시간 정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의 시간은 완전히 멈춘 것으로 보입니다. 페인티드 르누아르와 페인티드 알리시아가 33원정대를 정지시키고 10분 넘게 움직이고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만약 진짜 시간 정지가 아니라면 베르소를 제외한 모든 인물이 질식사했을 테니까요.
따라서 마엘도 캔버스 내 시간 흐름을 늦추거나 멈출 수 있을 가능성이 크고, 이 경우 마엘이 캔버스에 들어가지 않을 때 시간을 멈추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이렇게 되면:
1) 페이딩 보이는 편안하게 휴식할 수 있고
2) 마엘은 친구들과 '하루 종일' 같이 놀 수 있으며
3) 뤼미에르 캔버스는 평화롭게 유지됩니다.
말 그대로, 모두가 행복해지죠. 마치 게임의 순기능처럼.
이 행복한 결말을 위해 마엘이 해야 할 일은 르누아르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베르소는 이미 비슷한 타협안을 마엘에게 제시했으므로, 르누아르만 설득하면 됩니다.
마엘이 르누아르에게 제시할 수 있는 조건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가정의 화합
르누아르가 바라는 것은 가족이 단순히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는 것입니다. 이 화합의 가장 큰 걸림돌은 마엘입니다. 그녀는 어머니와 언니로부터 정서적 학대를 당했고, 진짜 베르소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받았으며, 아버지 르누아르의 사랑도 몰랐습니다. 심지어 가업인 그림보다 글쓰기에 더 관심이 있다는 암시도 있습니다.
따라서 데상드르 가문의 화합은 마엘이 알린, 클레아, 르누아르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할 때만 가능합니다. 마엘은 이를 타협안으로 제시할 수 있으며, 이는 르누아르에게 매우 매력적인 조건이 될 것입니다.
2) 알린의 회복을 보조
알린은 캔버스 탐닉으로 육체 건강이 매우 나빠졌고, 정신 건강은 더욱 심각합니다. 페인트리스 석상이 하는 말을 보면 조현병 증상이 일부 보입니다. 현실 인식을 명확히 하지 못하거나 의심이 많고, 언어가 파편화되어 있으며, 캔버스에서 쫓겨난 후에도 죽음을 무릅쓰고 최종전에 다시 나타납니다. 게임 내에서 알린의 등장이 너무 적어서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정신적으로 심각한 질환이 있다는 사실만은 틀림없습니다.
이는 가족을 깊이 사랑하는 르누아르에게 큰 고난입니다. 마엘은 이러한 르누아르를 적극적으로 돕는 역할을 맡는 조건을 제안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르누아르가 한눈 파는 사이 어머니가 캔버스에 들어가는 것을 막거나, 어머니에게 애교를 부려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가족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하는 일입니다. 이는 데상드르 가문의 막내딸인 마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조건 또한 르누아르에게 무척 매력적일 것입니다.
3) ㅈ살방지
많은 경우, 적절한 타협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베네핏을 제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협상이 무산될 경우의 부정적인 리스크 또한 제시해야 합니다. 친절한 말에 총을 더하면, 친절한 말만 건넸을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죠.
마엘은 르누아르가 캔버스를 파괴할 경우 자신이 빠질 깊은 실의에 대해 설명해 그를 주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알린이 베르소를 잃고 실의에 빠진 것처럼, 마엘 역시 캔버스와 가족을 잃으면 큰 절망에 빠질 것이 분명합니다.
마지막 순간, 마엘은 르누아르에게 이를 설명하려 하지만 아직 어린 아이이고 말솜씨도 부족하며 사회성도 발달하지 않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엘이 좀 더 명확하게 사태의 위험을 짚어준다면 르누아르가 “음... 잠깐만, 이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닐지도 모르겠군”이라며 재고할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또한 마엘이 베르소와 연합해 르누아르를 쫓아내고 캔버스 안에서 ㅈ살할 가능성까지 내비친다면, 르누아르는 자신의 생각을 다시 고민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3-3. 베르소
베르소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마엘과 르누아르 사이의 타협을 돕는 것입니다.
게임 내에서 베르소와 같은 불멸성을 가진 인물이 또 있습니다. 바로 페인티드 르누아르와 페인티드 알리시아인데, 이들은 각각 르누아르와 마엘에게 고마주되어 사망합니다. 르누아르 역시 3막 초반에 베르소에게 사과하며, 그의 고통에 대한 대가로 고마주해주려 합니다. 또한 베르소가 페이딩보이가 있는 거울 공간에 들어섰을 때, 그는 천천히 고마주되고 있었고, 마엘이 이를 막으며 위험하다고 경고합니다.
이 점을 고려해보면, 베르소는 일반적인 범위형 무차별 고마주로는 죽지 않지만 페인터들이 정확하게 지목해서 사용하는 고마주 기술에는 죽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그는 1)르누아르에게 고마주당하거나 2)마엘에게 고마주당하거나 3)거울공간에서 멍하니 있는 것으로 안식을 취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르소가 고마주당해서 죽는 후에, 다시 살아나는 것도 막아내야 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마엘 엔딩에서 베르소는 마엘에게 고마주되어 소멸하지만, 그녀가 다시 되살려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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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베르소는 르누아르에게 제시할만한 조건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가 최선의 성과를 내는 방법은 르누아르와 마엘 사이를 중재하는 것입니다.
르누아르는 베르소에게 깊은 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그는 아들의 복사본이며, 알린이 정성을 들여 만들어냈고, 데상드르 가문 때문에 오랜 기간 고통받았으며, 르누아르 역시 가문의 이름으로 그에게 사과한 바 있습니다. 즉, 르누아르는 베르소에 대한 호감과 죄책감 때문에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엘이 베르소에게 느끼는 감정은 삼촌 같은 든든함, 오빠 같은 다정함, 그리고 성인 남성으로서의 성적인 매력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어, 총체적으로 매우 깊은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엘 역시 베르소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할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베르소는 섹시한 외모와 깔끔한 매너, 우수에 젖은 낭만적인 분위기, 교묘한 말솜씨로 사람들을 매혹하고 속이며 이용하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입니다. 시엘과 루네조차 그에게 완전히 빠져들어 성관계를 먼저 제안할 정도였죠.
게다가 베르소의 중재에는 자신의 진정한 안식과 마엘의 구원이라는 부가적인 요소들까지 걸려 있으니, 그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르누아르와 마엘을 설득할 만한 충분한 동기도 있는 셈입니다.
4. 과연 최선의 답에 이를 수 있었을까?
└ 4-1. 타협의 가능성
└ 4-2. 타협의 방법
└ 4-3. 타협이 실패할 경우
└ 4-3. 마엘의 캔버스 중독이 나을 가능성
4. 과연 최선의 답에 이를 수 있었을까?
위 3.에서 살펴봤듯, 셋이 딱 한걸음씩만 양보해서 타협한다면, 충분히 모두가 행복한 결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세 명중 단 한명이라도, 사랑하는 상대의 모든 이야기를 한 귀로 흘리며 폭력으로 제압하려 드는 대신, 이야기를 들어주고, 진지하게 고려하기만 했다면 아주 많은 것들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물론 “과연 그런 타협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라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타협안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살펴봐야겠죠.
4-1. 타협의 가능성
현실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서로 조금씩 양보해 최대한의 행복을 실현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반대로 서로를 배척하다가 공멸하는 사례도 많죠. 특히 ‘죄수의 딜레마’와 내쉬 균형 등 게임 이론에 몰두한 사람들은 “인간은 배신으로 얻는 이득이 크면 반드시 배신한다”는 주장을 흔히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배신으로 얻는 이득의 총합’보다 ‘협력으로 얻는 이득의 총합’이 반드시 더 크기에, 양보와 타협이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상호작용하는 공간이고, 한 번의 배신은 향후 주변 여러 사람의 협력을 무산시키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 사람이 너무 강력하다면—예컨대 부자 한 명과 다수의 빈민, 혹은 초강대국과 여러 빈곤 국가처럼—‘힘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게임 이론의 예측이 힘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온건한 양보와 협상을 위해서는 양측 모두 1) 양보로 얻을 수 있는 이득과 2) 배신 시 받는 손해라는 두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1번이 없으면 협상의 필요성이 사라지고, 2번이 없으면 배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까지 게임 이론을 언급한 것에서 눈치채셨겠지만, 위 3.에서 제가 제시한 타협안은 팃포탯이 가능하도록 하는 1.양보와 협력 조건 2.배신과 징계 조건의 투트랙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르누아르와 마엘은 둘 다 서로에게 건넬 좋은 조건과, 상대가 배신할 경우 보복할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론적인 측면에서 협력의 발생 가능성은 굉장히 높습니다. 그들이 충분히 생각을 하고 행동한다는 전제 하에.
아, 베르소요? 베르소는 입장이 다릅니다. 그는 제시할만한 조건이 없어요. 현실에서는 이런 경우, 조건 없는 제3자가 양자 사이를 중재하며 이득을 얻기도 합니다. 오히려 중재를 통해 양자보다 더 큰 이득을 얻는 경우도 있죠. 현실의 인간 관계나 국가 관계에서도 자주 벌어지는 일입니다. 아, 방금 ‘스’로 시작해 ‘스’로 끝나는 나라가 떠오르셨다면, 정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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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어서 협력이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이는 매우 어리석은 생각인데, 첫째로 인간은 감정보다도 강력한 이성을 지녔으며, 둘째로 ‘멕시칸 스탠드오프’를 피하는 감각은 이성 이전의 본능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 '멕시칸 스탠드오프(멕시코식 대치)'는 미국식 관용어인데, 한국어로 대체할만한 단어가 없어서 그냥 그대로 썼습니다. 아쉽네요. 보통은 '절벽 위의 싸움'이나, '벼랑 끝 대치'같은 식으로 번역되는데, 정확하게는 서로 코앞에서 총구를 겨눈 상태, 즉 '공멸 직전의 대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먼저 감정을 살펴보면, 분노, 증오, 질투 같은 부정적 감정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이 하나의 실체이며, 그것이 실시간으로 변화한다고 오해하지만, 실제로는 뇌 속 수십만 개의 스위치가 상황에 따라 켜졌다 꺼졌다 하며 판단을 만듭니다. 분노나 증오 역시 편도체 반응의 일종일 뿐, 명확한 실체라기보다는 신경 반응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차분하고 침착하게 대처하면 이성으로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앞선 칼럼을 읽으셨다면, 편도체 반응을 활성화시키고 전두엽 반응을 억제함으로써 인간을 광분하게 만드는 생존모드, 파이트 올 플라이트 스위치에 대한 언급도 보셨을거라 생각합니다. 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좋은 협상은 기본적으로 충분히 먹고, 충분히 자고, 편안하고 느긋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전전두엽이 최대한으로 활성화되면서 이성적이고 고차원적인 사고가 가능해지니까요.
최종 국면에 있는 세 사람은 감정과 아집도 있지만, 그만큼의 이성도 지니고 있습니다. 또 충분한 시간과 대화 환경도 갖춰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단지 순간의 감정 때문에 타협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는 아래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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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멕시칸 스탠드오프"를 피하는 것은 본능적인 반응입니다. 애초에 우리 인간이 이성이라 말하는 것도, 감정이라 말하는 것도, 사실은 자연 세계에서 종을 이어가기 위해 발달시킨 '판단 체계'의 일종입니다. 그리고 "본능" 역시 그 판단 체계의 일종입니다.
대칭형 얼굴일수록 아름답게 보이는 것, 거미나 뱀을 혐오하는 것, 가슴이나 어깨, 엉덩이 등의 부위에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것, 행복을 추구하는 것, 불행을 피하려는 것 모두 개체의 생존과 유전자 전달을 위한 거대한 프로세스의 일부입니다.
심지어 짐승들에게는 우리가 말하는 '이성'이 없고 본능만 있는데도, 그들 역시 자신이 지금 공격해 들어갈 때인지, 방어할 때인지, 타협할 때인지를 판단합니다.
초원에서 하이에나들은 종종 사자가 먹고 남긴 것을 먹는데, 사자의 사냥감을 강제로 빼앗으려 하면 싸움이 일어나고, 그 싸움에서 구성원들이 많이 죽으면 이후 생존이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사자 역시 배를 채우고 남은 먹이는 하이에나에게 양보하는데, 사자 역시 하이에나와 싸우다 상처를 입거나, 새끼나 약한 구성원이 당하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사람이든 짐승이든, 누구나 본능적으로 '맥시칸 스탠드오프'를 피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그 대치가 공멸로 끝난다는 사실은 이성이 없더라도 쉽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역으로 이용하는 전략이 바로 상호확증파괴전략, 속칭 미치광이 전략입니다. 한쪽이 미친척하면서 적극적으로 공멸을 유도하면, 다른 이들이 본능적으로 공멸을 피하려다보니 미친 척하는 쪽에 휘둘리는 현상을 유도하는 전략입니다.
현실에서 "멕시칸 스탠드오프"를 피한 가장 유명한 사례는 바로 냉전입니다. 누구나 핵전쟁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 수많은 핵미사일이 생산되었음에도 핵미사일은 발사되지 않았죠. 쿠바 핵미사일 위기는,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일 것입니다. 진짜로 세계 공멸 직전이었어요.
이처럼, 감정 이전에 본능의 영역에서 인간은 '최악의 상황'을 피하려는 본능을 지닙니다. 이는 명백한 '타협의 가능성'을 시사하며, 따라서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므로 타협이 있을 수는 없다'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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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르누아르, 마엘, 베르소는 서로를 미워하거나 증오하거나 분노한 상태가 아닙니다. 세 사람의 본능, 감정, 이성 모두가 타협 가능성을 모색 중인 셈입니다.
문제는 세 사람이 갑자기 각자의 욕심만 내세우며, 상대를 폭력으로 제압하거나, 상황을 일부러 망치려는 정신 질환자 같은 행동을 하면서 사태가 꼬인다는 점입니다. 냉정히 보면, 이 부분은 서사적으로 매우 작위적입니다. 꼭 그렇게 될 필연성이 있는 부분도 아닙니다. 이 서사적 문제는 칼럼6에서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니 일단 여기서는 넘어가겠습니다.
4-2. 타협의 방법
앞서 저는 "그들에게는 충분한 시간과 대화하기 좋은 여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현실에서는 이성이나 감정 따위의 문제보다는, 시간과 여건이 부족해서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타협 가능성은 유의미하게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주어진 시간과 여건을 활용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1) 르누아르와 마엘이 서로에게 겨누었던 칼을 천천히 옆에 내려놓고, 손이 닿지 않는 먼 거리까지 걷어차 날려버린 뒤, 서로 간의 긴박한 긴장을 풀고 포옹과 키스, 미소를 나눕니다.
(2) 스트링 매도우 해안에서 휴가를 즐기며 캐치볼, 탁구, 장애물 건너기, 모래성 쌓기 등 여러 레크리에이션을 함께 하며 서로를 충분히 이해할 시간을 가집니다. 단, 배구는 빼야 합니다. 이 세계관에서 배구는 사람의 인격을 지나치게 피폐하게 만드니까요. 좀 더 덜 어렵고 스트레스 없는 활동이 좋습니다.
(3) 충분히 휴식한 후, 커다란 칠판과 달콤한 간식, 향기 좋은 커피를 준비해 워크숍을 열고 각자가 주장하는 바와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며 타협점을 찾습니다. 어쩌면 제가 제안한 타협안보다 더 나은 방안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4) 루네와 시엘을 포함한 뤼미에르 시민들은 이 행사가 즐겁게 진행되도록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그들에게 있어 세계의 존망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의할 것은 오직 16살인 마엘에게 알콜을 권하는 등의 중범죄를 자제하는 것 뿐입니다.
(5) 베르소는 르누아르와 마엘 사이를 중재하고 워크숍 사회자를 맡으며, 루네와 함께 음악을 연주하면서 좋은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그의 역할이 가장 중요합니다. 연주 말고, 중재하는 거요.
이 전체 과정에 걸리는 시간이 설령 한 세 달쯤 걸린다 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 세 달(100일)은 현실의 단 하루에 불과하니까요.
4-3. 타협이 실패할 경우
물론 현실에서는 예측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사건들이 아무 개연성 없이 무차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위 타협안이 반드시 성공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언급한 타협 가능성과 방법도 단지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일 뿐,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타협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실패할 경우, 폭력으로 제압을 시도할 때에 비해 리스크가 훨씬, 거의 대부분 줄어듭니다. 앞선 칼럼들에서 꾸준히 언급했온 것처럼, 위험한 상황에 빠진 당사자가 공격적인 처우를 당할 경우, 패닉에 빠지거나, 증오를 느끼거나, 극단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게임에서도 그렇게 진행되었죠.
많은 국가의 경찰들은 다음과 같은 교육을 받거나, 현장에서 선배가 후배에게 조언합니다: 누군가 위험한 행동을 하고 그것을 반드시 막아야 할 때, 곧바로 총을 겨누며 “손들어, 이 새끼야!”라고 고함치는 것은 오히려 최악의 상황(예: 총격전)으로 번질 위험이 크다고요.
따라서 현재가 확실한 최악의 상황(예: 이미 총격전이 벌어진 상태)이 아니라면, 상황이 악화되고 최악이 임박했더라도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을 돕고 싶을 뿐입니다.”, “친구여, 나는 자식이 있어요.”, “아직 되돌릴 수 있어요, 치명적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친근하고 공감 어린 말을 부드럽게 전하는 것이 최악의 사태를 막는 강력한 안전장치가 됩니다.
위험한 상황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파괴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짓을 하기 직전 건네지는 따듯한 한마디만으로도 "어...잠깐만, 이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거 같은데?"하면서 사라졌던 자제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그가 단 3초 머뭇거리는 것으로도 정말 많은 것이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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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러한 타협 시도는 '멕시코식 대치'를 피해서 최악의 상황을 발생시키지 않도록 하는 것에도 탁월하지만, 폭력에서 패배했을 경우 높은 확률로 발생하는 잔혹한 보복의 가능성 또한 대부분 줄여줍니다.
예를 들어, 르누아르가 충분히 타협을 시도한 후 폭력에서 패배했다면, 마엘은 잠시라도 현실로 돌아올 가능성이 매우 높아집니다. 마엘이 극단적이고 파멸적인 ‘캔버스 안 고립사’ 선택의 명분, 즉 자신이 나가면 르누아르가 캔버스를 태울 것이라는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충분히 진정한 후에 생각을 바꿀 수도 있고, 주변에서도 그녀를 설득할 여지가 커집니다.
마엘이 충분히 타협을 시도한 후 폭력에서 패배했다면, 르누아르는 캔버스를 파괴하기에 앞서 여러 번 재고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의 입장에서도 캔버스를 파괴한 후 알린과 마엘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불안요소가 있고, 그 캔버스는 죽은 아들의 추억어린 유품이므로 감정적으로 부수고 싶지 않거든요. 오히려 마엘이 뤼미에르 캔버스를 알린으로부터 지키고, 알린을 마크하고 회복시키는 것을 도움으로써 최선의 상황을 이끌 가능성도 분명히 고려할 수 있습니다.
위 두 상황보다는 별로지만, 베르소가 충분히 타협을 시도한 후 폭력에서 패배했다면, 마엘은 그에게 '망가진 꼭두각시 인형' 형벌보다는 나은 처우를 해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가 고통받지 않도록 처우를 한다든가, 완전 고마주하는 대신 시간을 멈춰준다던가, 방법이야 많아요. 어떻게 하느냐는 단순한 수단일 뿐, 중요한 것은 그를 돕고 고통을 덜어주려는 마엘의 의지입니다.
4-4. 마엘의 캔버스 중독이 나을 가능성
많은 사람들이 ‘마엘의 캔버스 중독은 ㅁㅇ 중독과 같아서, 뤼미에르 캔버스를 파괴하지 않으면 고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저 역시 앞선 칼럼에서 마엘의 캔버스 중독을 ㅁㅇ 중독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ㅁㅇ과 캔버스는 1:1로 대응하지 않습니다. 캔버스는 단순 사용만으로 현실의 ㅁㅇ처럼 중독되거나, 단 한 번의 사용으로 신경계나 내장에 손상을 입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캔버스의 위험성은 오직 누군가 캔버스에 ‘지나치게’ 탐닉해 ‘너무 오래’ 머물 때 발생합니다. 르누아르도 수많은 캔버스를 창조하고 그 안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아무 문제가 없는데, 그는 본질적으로 그것이 ‘가상현실(예를 들어 게임)의 일종’임을 인지하고, 현실을 침식해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이해하며, 안전한 놀이로 즐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현실의 게임도 캔버스만큼 안전하지만, 게임에 중독되어 삶이 무너지거나 목숨을 잃는 사례가 꽤 많습니다. 이런 중독자들이 ‘현실을 직면하며 모든 게임을 끊거나’, ‘그냥 게임 속에서 죽는’ 선택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명백히 게임 사용을 줄이고, 현실과 균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많은 의사와 학자가 이를 연구하고 있으며, WHO가 게임 중독을 질병 코드로 분류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강조하는 중요한 점은, 이 연구자들이 제안하는 치료법에 ‘강제로 게임기를 빼앗아 박살 내는’ 방법은 없다는 아주 명백한 사실입니다.
ㅁㅇ이든, 게임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인간은 애착과 집착을 가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예컨대 수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이유 역시 ㅁㅇ을 자발적으로 끊을 수 없는 이유와 '물리적으로' 똑같아요. 혈당이 급격히 상승할 때 활성화되는 도파민이 그들에게 행복감을 주고(슈가 하이), 그것이 급격히 단절되었을 경우 끔찍한 고통을 주기 때문에(슈가 크래쉬), 수많은 다이어트 식품과 방법이 있음에도 '여전히'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삶이 대부분인 것입니다.
그것을 이겨내고 다이어트에 성공하는 방법은 오로지 그 자신이 이겨내는 방법 뿐입니다. 옆에서 그 사람들의 먹을 것을 전부 압수할 경우, 그들은 온갖 방법을 통해 먹을 것을 찾아내고, 심한 경우 그 과정에서 물리적인 폭력도 거리낌없이 불사하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그 사람 자신만이, 자신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으며, 타인의 간섭은 오히려 감정적인 반발로 다이어트 실패 확률을 유의미하게 상승시킬 뿐입니다.
인간이 어떤 대상에게 애착을 가지고, 그것이 상실되었을 경우 겪는 일명 '애정의 금단증상(혹은, 아드레날린 금단증상)'의 기전은 애착의 대상이 ㅁㅇ이든, 술이든, 커피든, 식사든, 게임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완전히 똑같이 일어납니다. 다만 ㅁㅇ은 다른 모든 것들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훨씬 더 급격하게, 훨씬 더 과격하게 도파민을 만질 수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ㅁㅇ과 달리 '상대적으로 안전한' 캔버스 생활은 캔버스와 현실을 왕복하면서 점차 줄이는 방식으로 치료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경우, 캔버스는 마엘에게서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줄 환상적인 취미생활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르누아르가 그 산증인이니까요.
+. 정신 질환의 문제
└ +1. 르누아르
└ +2. 클레아
└ +3. 페인티드 베르소
+. 정신 질환의 문제
이 부분은 본 칼럼의 원래 주제와는 좀 거리가 있지만, 앞서 ‘정신 질환’이라 언급한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고, 각 인물이 가진 문제점에 대해 덧붙일 필요가 있어보여 추가합니다.
+1. 르누아르
표면적으로 볼 때, 르누아르 씨는 굉장히 품위있는 신사로 보입니다. 그의 태도는 정중하고, 말솜씨는 차분하며, 심지어 그의 입장에선 손짓 한번으로 쓸어버릴 수 있는 '피조물'들과 대화할 때조차도 예의를 잊지 않습니다. 사실, 현실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기는 극히 어렵죠. 우리 모두는 신사가 된다는 것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신사가 꼭 훌륭한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베르소가 마엘에게 '너는 캔버스와 현실 사이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으니, 나갔다 들어와.'라고 했을 때, 마엘은 '내가 나가는 순간, 아버지(르누아르)가 뤼미에르 캔버스를 태워버릴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아이를 폭력적으로-또한 정서적으로- 학대하는 부모가 그러하듯, 마엘이 '모든 타협 가능성을 포기하고 캔버스에서 죽도록 몰아붙인 사람'이 바로 르누아르라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가 마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와는 완전 별개로 말이죠.
르누아르가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통제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는 공감 능력도 썩 좋지 않고, 그래서 아내가 죽음의 공포에 고통스러워할 때조차 달래주지 못했죠. 아내나 딸을 이해해보려 노력하고 타협을 제시하기보단, 폭력적으로 그들의 손에서 아들의 유품을 빼앗고, 그들을 속이고, 제압하려고만 했습니다.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데도 말이죠. 그가 집착하는 모습은 약간의 편집증적 성향도 짐작할 수 있게 만듭니다.
물론, 이는 그가 19세기 프랑스의 상류층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문화는 여성이나 아이를 남성의 소유물, 심하게 말하자면 재산의 일부 정도로 취급했으니까요. 대표적으로 당시에는 여성 교육이 출산과 육아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상식이었습니다. 여성에겐 가문과 재산의 상속권도, 투표권도 주어지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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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르누아르가 왜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그가 데상드르 가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입니다. '시체와는 더이상 하루도 살 수 없다.'라던 르누아르가 선택한 방법이란 것이 또 하나의 시체를 만들어내는 미치광이같은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알린을 봅시다. 33원정대의 활약으로 캔버스에서 쫒겨났을 때, 그녀가 멀쩡해지던가요? 아뇨, 당시 그녀는 완전히 ㅁㅇ을 금지당한 중독자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그 모습을 똑똑히 보면서 르누아르는 "오, 훌륭해. 이제 딸에게도 똑같이 해야겠군."이라고 결심했습니다. 과거 르누아르의 부모가 어린 소년이었던 그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어떤 식으로 그의 인성을 망가뜨렸는지 얼핏 짐작가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르누아르는 결국 일어나지 않았어도 될 비극, 좀 더 관용적이고 넓은 마음으로 자신의 가족을 이해하거나 이해받으려 했다면 사라졌거나 최소한 축소되었을 온갖 비극을 만들어낸 다음 "오, 어쨌든... 결국 내 가족은 모두 현실로 돌아왔군. 훌륭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어."라는 식으로 넘어갑니다.
심지어 그 '온갖 비극'에는 내가, 그러니까 플레이어가 사랑하고 아끼고 애착을 가졌던 33원정대들이 마치 으깨진 날파리마냥 허무하게 사라진 점도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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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았을 때, 진짜 베르소의 죽음으로 시작된 일련의 비극이 데상드르 가족의 급격한 붕괴를 유발한 것은 사실이지만, 데상드르 가족은 그 이전에도 썩 훌륭한 가정은 아니었으며 이미 서서히 붕괴하고 있었습니다.
현실에서도 이런 가정들은 손대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가족 구성원, 특히 아버지가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거든요. "가족의 사랑으로 뭐든 이겨낼 수 있을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특히 부모들은, 독립한 자식에게 가차없이 버려진 다음에야 울면서 상담사를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이미, 사태를 돌이키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식들이 상담에 응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부모들은 항상 말합니다. "난 자식을 위해 모든 걸 바쳤고, 그것이 옳은 길이었어."라고. 그들이 그렇게 주장할 때, 돌아가는 대답도 항상 똑같습니다. "옳은 길은 없습니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라고요.
따라서, 아주 유감스럽지만, 진짜 베르소의 비극이나 캔버스 문제와는 완전 별개로 데상드르 가족이 회복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고 보는 것이 통계적 진실입니다.
+2. 클레아
일단 알린은 넘어갑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정신적으로 멀쩡하길 바라는 사람은 사이코패스입니다. 그녀가 멀쩡하지 않고, 멀쩡해질 가능성도 높지 않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죠.
그래서 알린을 논외로 두더라도, 데상드르 가족의 문제는 클레아의 성격적 특성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클레아는 유난히 냉소적이고 잔혹하며 타산적인 성격을 보여줍니다. 이는 권위적인 다자녀 가정에서 억압받고 자란 장녀가 흔하게 지니는 성격적 특성입니다.
첫째 아이이므로 부모의 기대와 억압을 많이 받게 되고, 이것을 힘으로 돌파할 수는 없으니 냉소적인 면이 발달합니다. 어린 동생들을 통제해야 하기에, 통제 방식도 권위적인 부모를 본떠 권위적이고 잔혹해지기 쉽습니다. 또한 부모에겐 자식 대표, 동생에겐 부모 대리자로서 이중적이고 계산적인 태도를 갖게 됩니다. 차녀나 차남이 비굴하고 순종적인 면이 발달하거나, 막내가 자유분방하고 순진하며 이기적인 면이 발달하기 쉬운 것도 똑같은 이치입니다.
물론 인간의 성격 특성은 단순한 부모형제 관계 이외에도, 타고난 것을 포함해 수많은 요소가 동시에 작용하므로 '장녀는 반드시 저런 성격이 된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일반론, 가능성의 영역에서 장녀가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그리고, 지금 단락에서 이야기하는 핵심은 장녀의 그런 성격은 가족의 문제, 특히 권위적인 부모 때문에 발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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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클레아가 최소 28세인 나이까지 결혼도 못했으며, 망가진 가족을 어떻게든 구해보려 발버둥치는 점, 복식에서 드러나는 자유분방한 성격에 비해 온갖 책임을 떠맡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그녀 역시 남은 인생이 썩 유쾌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녀를 상징하는 '운반자' 엑손이 짐을 잔뜩 짊어지고 있으며, 이미 '죽었다'는 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도 의미심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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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르누아르와 마엘 뿐만 아니라 클레아를 고려해봐도 데상드르 가문의 미래가 훌륭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습니다.
+3. 페인티드 베르소
베르소의 경우, 그가 정신적으로 멀쩡하길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입니다. 그는 명백히 편집증적인 성향을 지녔으며, 세계의 멸망과 자신의 자살을 집요하게 갈망합니다. 2막까지는 자신이 ‘어머니’라고 믿는 인물, 물론 진짜 어머니는 아닌 알린을 위해 노력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에 어느 정도는 그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그의 행위에 일관성도, 뚜렷한 동기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는 영원한 안식을 바란다고 말하면서도 마엘에게 협력하고, 그렇다고 해서 뤼미에르 캔버스를 존속시키려는 적극적인 의지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정말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조차 알기 힘들 정도로, 그의 사고와 행동은 뒤죽박죽입니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원래 인물의 기억을 물려받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점, 정체성의 혼란, 그리고 100년에 걸친 고통 등으로 인해 그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그의 모습만을 바탕으로 판단했을 때 그는:
(A) 중증 정신질환자와 아주 흡사한 사람
(B) 중증 정신질환자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의 정신병리적인 특성이 수많은 비극을 초래하죠.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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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게임의 두 비극적인 엔딩은 모두 충분히 피할 수 있었고, 더 나은 결말로 나아갈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만큼은 어떤 상황에서도—꼭 제가 말한 방식이 아니더라도—보다 나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읽으시며 느끼셨겠지만, 저는 이 일련의 비극 속에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인물로 르누아르를 꼽고 있습니다. 베르소는 상황을 바꿀 권한이나 의무가 지나치게 적었고, 마엘은 너무 어렸기 때문입니다. 르누아르는 셋 중 가장 나이가 많으며, 아버지이고, 가장 강력한 힘과 권한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렇기에 바로 그가 누구보다 신중하고, 개방적인 태도로 상황에 접근했어야만 했습니다.
물론, 르누아르 역시 가족의 비극과 캔버스 문제로 인해 깊은 고통을 겪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그에게 면죄부를 부여할수 없다는 점 역시 명백합니다.
만약 르누아르가 현실 속 인물이었다면, 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제발, 당신이 가족을 사랑한다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 타협하려 하세요. 언제나 그럴 수는 없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최소한 그들이 지독하게 집착하던, 죽은 아들의 유품을 빼앗아 불태워버리려 하고 있는 도중이라면, 내 말을 믿으세요, 반드시, 꼭, 절대로 먼저 타협을 시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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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재미를 드릴 수 있었기를 바랍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다른 분들도 보실 수 있게 추천 한번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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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그렇습니다. 다들 너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기적이고, 극단적인 행동만을 반복하죠. 저는 그것이 좀 지나치게 작위적이라고 느껴집니다. | 25.06.02 07:3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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