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힐F 분석 칼럼-1: 여우의 혼례식
반갑습니다.
지난 한 주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사일런트힐F 4회차를 플레이하며 즐겁게 보냈습니다. 이제 그 재미도 끝내고, 좋은 감정을 안고 현실로 돌아갈 때가 되었군요. 다만, 아직 제가 할수 있는 일이 하나 남은 것 같습니다. 바로 남겨두는 일 말이죠.
여러분들은 사일런트힐F의 스토리를 어떻게 이해하셨는지 궁금하군요. 이 게임의 스토리는 '해석의 여지'라는 말을 아주 폭넓게 응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스토리를 해석하는 과정이 없으면 제대로 즐기기가 어렵죠. 아무 생각하지 않고 진행하면 이야기의 앞뒤가 하나도 안 맞으니까요. 제작진들은 일부러 여러 해석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고 이야기했으며, 엔딩 역시 각자가 결정할 일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나름대로 해석하며 각자의 정답을 찾아 안개 속을 헤매이게 되었죠. 물론 저도 그 헤매는 사람들 중 하나였고요.
그리고 이제, 저는 4회차 플레이를 통해 저 나름의 답을 찾아냈고, 제가 찾은 답을 정리해 이곳에 남겨두려 합니다. 제가 게임을 하며 찾아냈던 것, 해석했던 것, 그리고 고찰했던 것에 대해 정리해 남겨두는 이 몇 개의 칼럼은 사일런트힐F에게 바치는 제 작별 인사이며, 이 커뮤니티의 다른 분들께 바치는 선물입니다.
* 추가로, 이 글은 원래 레딧에 게시하기 위해 작성한 글이며, 영어로 쓴 글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어투나 어순, 혹은 일부 용어가 잘못 쓰였을 수 있습니다. 최대한 다시 다듬기는 했지만, 보시면서 혹시 말이 좀 어색하게 느껴지시더라도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의도치 않은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서론을 살짝 길게 쓰고 있사오니 양해바랍니다. 이제 본론인 "사일런트힐F 분석 칼럼-1: 여우의 혼례식”편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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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나는 무엇을 해석하려 하는가?
2. 그 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 과자가게에서의 회합
(2) 사일런트 힐의 도래
(3) 추억을 향해
(4) 과거와의 이별
(5) 하나의 몸, 두 개의 이름, 세 개의 의식
(6) 패륜의 연회
(7) 사카츠키
(8) 파멸의 질주
3. 나는 왜 그렇게 해석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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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무엇을 해석하려 하는가?
3회차 플레이를 마치고 감상문을 써서 올린 후, 저는 레딧의 여러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대체적으로 '작품에 등장한 이것은 무슨 의미냐?', '저 등장인물은 왜 저러는 거냐?'같은 질문들이었죠. 이 경험으로, 저는 영미권 플레이어가 사일런트힐F를 플레이하면서 놓칠 수 있는 부분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게임이 지나치게 동양문화에 기반하고 있기는 하죠. 그래서 '만약 칼럼을 쓰게 된다면 영미권에서 이해하기 힘든 동양적인 부분'에 대해 자세히 다루는 글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게임이 다루고 있는 동양 문화, 특히 신토에 대해 모르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죠. 그런데 마침, 이렇게 칼럼을 쓸 기회가 생겼군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하의 해석은 '제 해석'일 뿐, 결코 정답이 아닙니다. 정답을 정하는 것은 이 게임의 저작권자인 코나미의 고유한 권리입니다. 어떤 플레이어라도 그 권리를 가질 수는 없어요. 얼마나 많은 정보를 찾아내든, 얼마나 논리적으로 추론해내든, 팬의 해석은 팬의 해석, 팬의 추측은 팬의 추측일 뿐입니다. 현실적으로도, 게임의 플레이어는 게임 내의 모든 정보를 모을 수 없고, 설령 모든 정보를 모으더라도 완벽하게 해석할 수가 없으니까요. 애초에 제작진들이 인터뷰에서 '일부러 여러 해석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을 강하게 강조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세요. 그러니, 이하의 글은 어디까지나 '이런 견해가 있다'는 느낌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이후의 칼럼을 위한 스토리 전체 흝어보기, 제가 해석한 스토리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 그 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아래 본문은 게임의 1회차 플레이 타임라인에 맞춰 '게임 내용 설명-> *을 붙인 해석' 순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점 감안하시고 읽어주세요. 또한, 각각의 사항을 '왜 그렇게 해석했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칼럼들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각 중요 용어 뒤에는 검색용 원문을 붙여두었으니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복사해서 구글로 검색하시면 찾으실 수 있을겁니다.
(1) 과자가게에서의 회합
- 에비스가오카:
시미즈 히나코의 결혼식 전날 아침, 히나코는 아버지와 심하게 말다툼을 합니다. 이 말다툼은 히나코가 결혼에 대해 탐탁치 않아 해서 발생한 것으로, 아버지 시미즈 씨는 그녀에게 '너에게 그 이상의 행복이 어디있어?'라고 외치지만 히나코는 그 말을 무시하며 마을로 나가버립니다.
마을로 나선 히나코는 곧 사쿠코를 만나 "아무하고나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야."라고 말하죠. 그리고 잠시후 과자가게에 도착한 히나코는 슈와 만납니다. 슈와 히나코는 어색하게 서로를 외면하며, 말하기 힘들어 합니다. 잠시 후, 슈는 마음을 풀고 "그게 너의 선택이라면, 나는 언제까지나 응원할게!"라고 말합니다. 곧 린코와 사쿠코도 과자가게에 도착하고, 넷은 잠시 담소를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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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와 히나코가 서로 어색하게 '히나코의 선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히 히나코와 고토유키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히나코도 슈도 말하기가 힘든 거죠. 정확히 말하자면 히나코는 민망해서, 슈는 히나코를 좋아해서 말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 슈는 빨간 알약 통을 만지작거리다가, 히나코에게 자연스럽게 건네줍니다. 히나코도 별말 없이 자연스럽게 약을 받는데, 이것으로 둘이 이전에도 여러 번 약을 주고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곧 린코가 '여기서 만날 줄 알았으면 히나코에게 빌렸던 잡지를 들고 올 걸 그랬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언뜻 봐서는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린코와 히나코는 같은 마을에 살고 집도 그리 멀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히나코는 다음날 결혼해서 마을을 떠나기 때문에, 린코가 잡지를 돌려줄 수 없게 된 것이죠. 히나코도 처음부터 돌려받기는 포기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이 장면은 현실의 20대 여성 히나코가 결혼식 전날 고향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을 기반으로 구성된 환각입니다.
(2) 사일런트 힐의 도래
- 에비스가오카:
친구들과 담소하던 중, 갑자기 여기저기서 붉은 꽃이 피어오르고, 사쿠코는 온 몸에 꽃이 피어나며 즉사,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히나코는 시로무쿠(안개로 가려져 있음)에게 쫒겨다니며 마을을 한 바퀴 돕니다. 겨우겨우 시로무쿠의 추적을 피해 과자가게로 돌아온 히나코는 사쿠코의 시체를 천으로 덮어주고, 이후 과자가게 앞에서 괴물들과 싸우다 기절합니다.
- 어둠의 신전:
히나코는 어떤 방에서 깨어납니다. 그 방은 제단에 다섯 가지 공양물을 바쳐야 하는 방이었는데, 히나코가 술, 생선, 고기, 인형, 부채를 올바르게 올린 뒤 방을 나가려해도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패닉에 빠진 히나코는 "누가 좀 도와줘요, 문이 안 열려요, 열어줘요오오오!"라면서 미친듯이 문을 두드리고 몸을 부딪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문 밖에서 누군가가 "히나코, 진정해라. 내가 문을 열어주마."라고 말하더니 진짜로 문을 열어주고, 열린 문 사이로 쓰러지는 히나코를 안아서 받아줍니다.
문을 열어준 것은 여우가면 고토유키였습니다. 그는 히나코를 보며 '좋은 아침이구나, 악몽이라도 꾸었느냐?'라고 말하고는 등불을 건네주고 함께 어디론가 가자고 합니다. 히나코는 고토유키를 따라 부적이 잔뜩 붙어있는 토리이들과 엔마로 가득한 벽을 지나, 작은 사당에 도착하여 그곳에 놓인 단도를 챙깁니다.
단도로 괴물들을 헤치며 나아간 히나코는 이윽고 두 여우신이 지키는 커다란 대문앞에 도착하고,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는 '봄눈의 경옥을 깎아 만든 열쇠(거대함)'를 받습니다. 고토유키는 "너를 위해 만들어진 그 열쇠를 받아주다니 고맙구나."라고 말하고, 히나코는 열쇠로 여우 조각상이 지키는 대문을 열고 통과합니다. 대문이 열리는 것을 보면서 고토유키는 "이 문은 출입을 허가받은 자만이 열 수 있는 문이다."라고 말하고, 그 말을 들은 히나코는 주저하면서 "그럼 저는 들어가도 되나요?"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고토유키는 몸을 돌려 히나코를 정면으로 바라보더니, 아주 단호한 어조로 "물론이지, 오늘은 '너를 초대하기 위한 날'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 안심해 신사로 들어가던 히나코는 갑자기 뒤에서 뭔가 불안한 것이 덮쳐오는 느낌을 받고, 황급히 문을 닫으려하다가 뭔가에 밀쳐져 쓰러지며 기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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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점이 시로무쿠와 쇠빠따 히나코가 처음으로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이 장면은 친구들과 헤어진 후 결혼식을 위해 고토유키 집으로 향하던 도중의 히나코가 떠올렸던 기억을 기반으로 한 환각입니다. 사쿠코가 맨 처음으로 죽은 것은 헤어질 때 사쿠코가 헤어지기 싫다는 식으로 칭얼대는 것을 본 히나코에게 생긴 죄책감일 가능성이 높죠. 즉, 시로무쿠(현실의 히나코)는 결혼식을 위해 츠네요시 신궁으로 향하면서 과거의 인연들에 대한 미련과 그리움을 지우려 노력하고 있었고, 이것이 환각 속에서 쇠빠따 히나코가 시로무쿠에게 쫒기는 모습으로 투영된 것입니다.
* 처음에 히나코가 골목에서 더 이상 갈곳이 없어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군가가 "히나코, 정신 차려!"라고 외치면서 지붕 위에서 사다리를 던져줍니다. 짤랑 하는 방울소리와 목소리로 히나코의 언니인 준코임을 알 수 있는데, 정작 준코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건 아래 (6)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니까 넘어갑니다.
* 어둠의 신전의 히나코, 즉 현실의 히나코는 결혼식장인 츠네요시 신궁 외곽에 있습니다. 시간은 이른 아침이고요. 그런데 잠시 후 낮에 있을 결혼식을 기다리던 히나코는 어느 순간 생전 처음 보는 장소에 대한 불안감과 약물 중독 때문에 패닉에 빠져 소동을 부리게 됩니다. 그래서 고토유키가 급히 달려와 그녀를 진정시키고, "좋은 아침이구나, 악몽이라도 꾸었느냐?"하면서 달랬던 것이고요.
* 이 장면을 포함해 모든 어둠의 신전 파트의 히나코는 '현실의 히나코'입니다. 그러나, 보고 있는 광경은 환각이에요. 현실의 히나코는 20대지만 어둠의 신전의 히나코는 고등학생의 외모를 하고 있고, 어둠의 신전은 밤인데 고토유키가 '좋은 아침이다'라고 인사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즉, ㅁㅇ에 중독된 히나코가 현실에서 보고 있는 풍경을 왜곡해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 현실의 히나코는 맨 처음 깨어난 방에서 다섯 개의 공물을 바치고 나서야 문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현실의 신토 결혼식 과정의 일부로, 결혼식 당일, 보통 이른 아침이나 결혼식을 시작하기 전의 오전에 공물을 바치는 과정입니다. 헌찬(献饌, Kenshen)의 의식이라고 불리는데, 결혼식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다른 신토식 행사에서도 으레 행해지는 절차입니다. 제단에 올리는 공물은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달라졌지만 술, 생선, 고기, 소금, 가금류, 곡물 등 음식 공물을 기본으로 하되 지역마다, 집안마다 올리는 올리는 공물이 조금씩 달라지는 식이었습니다. 특히 신토는 이런 '로컬 룰'에 굉장히 관대한 편으로, 지금도 여러 신사의 결혼식 과정을 찾아보면 전부 조금씩 달라요. 헌찬을 하는 시간대도 전부 조금씩 달랐지만, 대체적으로 집안에서는 아침식사 전, 행사에서는 본 행사 시작 전의 오전에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게임에서도 이른 아침에 헌찬을 했는데, 앞서 말했듯 고토유키가 공물을 바친 히나코에게 '좋은 아침이구나'라고 인사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 히나코가 바치는 다섯 가지 공물은 술, 생선, 고기, 부채, 인형 다섯 가지입니다. 술은 영혼, 생선은 바다의 생명, 고기는 땅의 생명, 부채는 바람의 생명, 인형은 인간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다만 부채 같은 경우엔 결혼 봉납물보다는 무용가나 가부키 배우들의 봉납물로 많이 쓰였고, 인형 같은 경우엔 봉납물보다는 정화 의식의 도구로 취급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 특히 이 중 인형은 '카타시로(形代, 형대)'라고 해서, 공물을 올리는 인간을 대신하는 의미를 지닌 공양물입니다. 인간에게 닥쳐오는 불행을 대신 맞아주거나, 신에게 바침으로써 인간의 죄를 대신 갚는 역할의 인형이죠. 일본 미디어에서 흔히 나오는 종이를 잘라 만든 사람모양 인형, 혹은 작은 옷모양 천으로 된 부적이 바로 이겁니다. 카타시로라는 글자의 뜻 자체가 '형태를 대신하는 것'이거든요. 게임에서는 이 카타시로 안에 작은 참새 시체가 들어있는데, 주인공의 이름인 '히나코'가 '작은 새'라는 뜻입니다.
* 이 카타시로를 거꾸로 해석해서 '카타시로에게 가해지는 고통이 사람에게 돌아가길' 비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형에 상대의 머리카락을 집어넣고, 거기에 못을 박아넣거나 불을 붙이는 이야기가 그거죠. 그 저주인형의 이름은 와라닌교(藁人形, Wara-ningyo, 짚인형)인데, 이것도 카타시로로 분류되는 물건입니다.
* 또한, 일본 게임에서 흔히 등장하는 '소유자가 사망할 때 대신 죽어서 소유자를 살리는 아이템'도 이 개념의 확장입니다. 게임 내에서는 '액막이 손거울'이 그런 아이템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현실에서도 거울이 비슷한 의미의 공물로 쓰이기도 합니다. 거울에 비치는 인물은 소유자와 똑같은 얼굴, 정확히는 앞뒤반전된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거울 속 세계는 일반적으로 '현실의 그림자, 현실의 역, 가짜 세계, 귀신의 세계, 현실의 거짓된 모습'등으로 여겨집니다.
+ 여담으로, '거울 속의 모습을 현실에 구현할 수 없다'는 말이 일견 복잡해 보여 살짝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거울 속에 보이는 세계는 현실의 앞뒤반전상(z축 반전)이므로 3차원의 현실세계에서는 구현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좌우반전(x축 반전)된 비대칭 2차원 도형, 예컨대 ☜ 기호와 ☞ 기호를 봅시다. 이 기호들은 3차원에서 한쪽을 180도 뒤집는 방법, 그러니까 한쪽이 그려진 종이를 들어서 뒤집어 엎는 방식으로 간단히 똑같은 모양으로 일치시킬 수 있지만, 2차원에서 각 기호를 위, 아래, 왼쪽, 오른쪽으로 평면이동시키는 방법으로는 일치시킬 수 없습니다. 똑같은 이치에서 거울 속의 공간은 3차원의 앞뒤반전상이므로 4차원에서 180도 뒤집어야만 구현할 수 있고, 3차원 현실 안에서는 구현할 수가 없어요.
+ 왜 거울 속의 세계가 좌우반전(x축 반전)이 아니라 앞뒤반전(z축 반전)인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현실의 인간이 거울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면, 거울 속의 인간은 현실을 향해 왼손을 내미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거울의 모습은 좌우반전상'이라고 오해하기가 쉽죠. 자, 거울 앞에 포크, 스푼, 나이프를 가로로 늘어놓았다고 상상해보세요. 이것의 좌우반전상은 나이프, 스푼, 포크 순서로 놓아진 모습(x축 반전)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실제로 거울에 비춰보면 순서는 여전히 포크, 스푼, 나이프입니다. 그 다음 스텝으로 쟁반, 쟁반 위에 케이크, 케이크 위에 딸기가 올라가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것의 상하반전상(y축 반전)은 딸기, 딸기 위에 케이크, 케이크 위에 쟁반이 올라간 모습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거울에 비춰보면 여전히 쟁반, 케이크, 딸기 순입니다. 케이크는 엎어지지 않았어요. 자, 마지막 스텝으로 당신이 육면체 주사위를 들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현실의 당신이 보고 있는 주사위 면은 6입니다. 운이 좋군요. 당신이 그 상태 그대로 거울을 보면, 거울에 비치는 주사위의 숫자는 1입니다. 거울은 '내가 보고 있는 현실의 주사위'의 뒷면을 비추고 있으니까요. 이것이 앞뒤반전(z축 반전)입니다.
+ 이렇게 사물에 대비해서 생각하면 이해가 쉬운데, 왜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보면 여전히 좌우반전처럼 느껴지냐면, 사람은 자기 자신의 좌표를 기준축(0,0,0)으로 설정하기 때문에, 거울 속에 있는 사람을 머릿속에서 회전시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자, 어째서 거울에 보이는 사람이 '왼손'을 들었다고 생각했나요? 거울 속의 사람을 머릿속에서 180도 회전시켜 "(내가 저 사람의 위치에 있으면) 들어올리고 있는 손은 왼손이다."라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거울 속 인물이 180도 회전한다고 해서 오른손이 왼손으로 변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오른손을 들어올린 채 뒤로 돈다고 해서 오른손이 왼손으로 변하지 않는 것처럼요. 즉, 실제 거울 속 인물은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올린 것이며, 다만 그 오른손을 자신의 앞쪽이 아니라 당신 쪽으로 들어올린 것입니다. 거울 속의 인간, 앞뒤가 뒤집혀있는 인간이니까. 당신이 거울 속 인간의 얼굴이라 생각하면서 보고 있던 것은 그의 뒤통수입니다. 거울 속의 인간, 앞뒤가 뒤집혀있는 인간이라서 뒤통수에 눈코입이 달려있는거죠. 그래서, 현실의 당신이 거울을 향해 앞으로 걸어가면, 거울 속 사람은 당신을 향해 뒤로 걸어와서, 서로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 위 내용을 곰곰히 생각하다보면 살짝 오싹한 느낌이 들지 않나요? 누구나 그렇습니다. 그렇게 느끼실 수 있도록 일부러 살짝 길게 설명한거고요. 바로 그 오싹한 느낌 때문에, 옛날사람들이 거울 속 세계를 귀신의 세상, 무서운 세상, 뭔가 비틀어진 세상, 자꾸 보고 있으면 홀리는 세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거울처럼 맑은 수면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에 반해 죽게 된 요정 나르키소스 이야기처럼 '거울 세계에 홀리는 것을 경계하는 이야기'들도 그래서 생겨난 것이고.
+ 이렇듯, 거울 속의 공간이란 4차원 상에서 180도 반전된 현실의 앞뒤반전상, 거꾸로 된 세계, 이면의 세계, 그림자의 세계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반전된 거울 속 세계는 '현실의 반전상, 현실의 그림자, 이면에 존재하는 비슷하지만 다른 세계'라는 개념으로 쓰여왔어요. 원래 이야기하던 카타시로 역시 '인간의 그림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카타시로라는 이름 자체가 '형태를 대신하는 것'인데, 그림자라는 것은 3차원 세계에 존재하는 물체의 '형태'가 빛에 의해 2차원의 평면에 '대신' 투영된 모습이니까요. 덧붙여 이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즉 "현상계에서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인식하는 세계는 사실 완전한 본질(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면세계'에 대해 다루는 게임인 사일런트힐에서 다룰법한 이야기죠.
* 히나코가 기절에서 깨어나, 방에서 풀어야 하는 다섯 공물 퍼즐은 공물과 제단에 새겨진 매듭의 모양을 맞추는 형식입니다. 이 매듭들도 각각 다른 의미가 있는데, 이렇게 의미를 가진 장식용 매듭을 통틀어 수인(水引, Mizuhiki, 물에 적셔 만든 매듭)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바로 위에서 다루었던 카타시로 공물의 경우 허리에 붉은색과 흰색의 두 선이 두 개의 동그라미를 만들며 묶인 매듭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다키아와지 무스비(な抱きあわじ結び, 포옹담로 매듭)이란 것으로, 중간의 '아와지'는 일본의 지명입니다. "어새신즈 크리드 쉐도우스 DLC:아와지의 덫"의 그 아와지 맞아요. 이 매듭은 양쪽으로 당길수록 단단히 묶이기 때문에 '단단하고 쉽게 끊기지 않는 인연', 혹은 '여러 번 축하할 일이 없는 일에 대한 축하', 즉 결혼이나 이사 등을 축하하는 선물에 매는 매듭입니다. 다른 공물에 묶인 매듭들에도 다 이름과 의미가 있는데,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까 생략합니다. 대체적으로 공물, 인연, 축하, 결혼 등 좋은 의미를 가진 매듭이에요. 안에 쥐새끼 시체나 썩은 생선 같은게 들어있으니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사실 그건 히나코가 환각으로 보고 있는 거니까 그런거고 현실에서는 좋은 물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이후 히나코가 지나가는 부적이 잔뜩 달린 나무 기둥들과 엔마가 여러개 주렁주렁 달린 벽은 신사의 바깥에 배치되는 요소들입니다. 부적이 달린 나무 기둥, 정확히는 '토리이(鳥居, torii, 새가 사는 곳)'이라고 하는 문인데, 이 문은 보통 신성한 장소의 입구를 뜻합니다. 다만, 게임에서처럼 토리이에 부적이 잔뜩 달리고 새끼줄 매듭(注連縄, shimenawa)과 종이(紙垂, shide)가 붙으면 '후지토리이(封じ鳥居, fuji-torii, 봉인된 토리이)'라고 해서 정 반대의 의미, 즉 사람의 출입을 금지하거나, 전염병이나 자연재해 등 사악한 것을 봉인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죠. 실제로 일본에는 후지토리이가 여러 곳에 있어요. 말씀드렸듯, 보통은 전염병, 자연재해 등 불길한 일이 일어난 곳이나,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물론 그런 불길한 장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일은 없으므로, 실제로는 보통의 토리이인데 히나코가 환각 속에서 후지토리이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 다면적 해석의 측면에서는 '츠네키 가문이 안쪽에 신을 봉인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여우신이나 나무신이 실존한다고 해석하시는 분은 이 부분을 신과 연관지어 해석하실 수 있겠죠.
* 참고로 토리이라는 글자를 풀면 '새가 사는 곳'이나 '새가 있는 곳', 또는 '새가 차지한 장소'라는 뜻인데, 4회차 엔딩을 보면 히나코가 이 토리이 위에 올라가 앉아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히나코라는 이름은 '작은 새'라는 뜻이므로, "새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토리이 위에 새들이 앉아있는 경우도 많아요. 그렇다고 현실에서 사람이 토리이 위로 올라가면 절대로 안 됩니다. 큰일나요. 사람이 토리이 위에 올라가 앉는 것은 기독교로 치자면 '교회에 들어가 십자가를 발로 밟는 행위'와 동급인 굉장히 무례한 모독행위거든요. 혼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안좋게 풀리면 체포될수도 있는 수준의 문제입니다. 실제로 토리이에 낙서를 하다가 진짜로 형사입건된 사례도 있어요.
* 등불로 신부를 인도하는 관습은 실제로 있었습니다. 특히 쇼와 초중기, 농촌에서 자주 있었던 한밤중의 혼례(夜嫁入り, Yoru-yomeiri, 밤신부행, 농촌에서 낮에 일하기 위해 밤에 혼례식을 올리거나, 밤에 신부가 신랑의 집으로 이동하는 결혼식)에서 꽤 중요한 부분이었어요. 다만 신부에게 등불을 직접 들려준 것은 아니고, 신부의 가족과 친척들이 나서서 등불로 신부의 앞길을 비췄습니다. 이 등불의 행렬이 멀리서 보면 여우가 주술로 부리는 도깨비불처럼 보인다고 해서 '여우의 혼례식'라고 불렸습니다. 위키피디아에도 있는 유명한 이야기에요. 그리고 아시겠지만 이 게임 엔딩 중 하나의 이름도, 이 칼럼-1의 제목도 '여우의 혼례식'입니다. 참고로 이때 등불로 신부의 앞길을 비추는 사람들은 신부측 가족이나 친척이었는데, 등불로 앞길을 비추기만 하고 신부를 돌아보지는 않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신부가 미련을 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죠. "혼자서 집으로 돌아오지 마라!"라고 외치던 시미즈 칸타 씨가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 여담으로, 이 등불 인도는 현대 신토식 결혼식까지 내려져오고 있는데, 다만 형태가 좀 변해서 무녀들이 등불이나 오오누사(大幣, Onusa, 종이를 여러 겹 매달아 휘두르는 신성한 지팡이)를 들고 맨 앞에 서서 신부의 행렬을 인도하는 방식이 되었습니다. 이를 참진의식(参進の儀, Shansin no Gi, 신전으로 향하는 의식)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신토식 결혼식을 하면 서비스로 신청할 수도 있어요.
* 엔마는 소원판이란 이름 그대로, 방문객이 소원을 적어 매다는 장식입니다. 일본은 이렇게 염원을 적어 매달아두는 식의 전통이 많아요. 이렇게 엔마를 매다는 장소는 신사에 들어가기 전의 공간, 보통 광장이나 길 한켠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즉, 후지토리이와 엔마가 매달린 벽은 현실의 히나코(와 고토유키)가 현재 결혼식 장소인 츠네요시 신궁의 외곽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혼식장 외곽에서 식이 벌어지는 예식장 안으로 이동하는 도중인거죠.
* 히나코가 찾은 단도는 신부 복장인 시로무쿠에 포함된 물건입니다. 정확한 이름은 회검(懐剣, Kaiken)이며, '품 안에 숨기는 칼'이란 뜻입니다. 호신을 위해 품 안이나 베개밑에 숨기는 작은 칼인 수도(守刀, Mamorikatana)의 한 종류죠. 하코세코(箱迫, 빗이나 화장도구가 들어있는 지갑처럼 생긴 주머니, 옷깃 사이에 끼워넣음), 카이켄(회검, 허리띠에 끼워넣음), 스에히로(末広, 부채, 허리띠에 끼워넣음)의 세 가지를 가슴 근처에 매다는 것이 신부 복장인 시로무쿠의 기본 구성으로, 이는 각각 단정함, 결의, 번창을 의미하는 상징물입니다. '날이 서지 않았다'라는 설명이 인상적이라는 분도 계셨는데, 날선 단도를 신부의 가슴 근처에 매달아뒀다가 행여 사고라도 생기면 큰일이므로 당연히 날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신부 가슴팍에 칼이 꽂혀있는 모양새가 보기에 썩 좋지는 않으니까, 두 줄기의 흰색 술이 달린 하얀 주머니로 감싸서 꽂아두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언급으로 눈치채셨겠지만, 게임의 몬스터인 시로무쿠의 가슴팍에도 두 줄기의 흰색 술이 달린 주머니가 매달려 있어요. 그게 바로 게임 내내 당신이 썼던 그 단도입니다.
*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열쇠를 받음으로써, 히나코는 외부인은 들어갈 수 없는 여우가면 일족의 장소에 들어갈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결혼이죠. 고토유키가 '오늘은 너를 초대하기 위한 날(결혼식날)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신부에게 건네지는 열쇠는 보통 집안의 관리권을 넘긴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실제로 쇼와 초기에는 농촌 지방에서 신랑의 어머니가 신부에게 집 열쇠를 맡기는 관습이 있는 곳도 있었다고 합니다.
* 고토유키는 이 열쇠를 '봄눈의 경옥'을 깎아 만들었다고 말하는데, 그게 실제로 있는 보석은 아닙니다. 경옥(硬玉, Jadeite)이란 초록색으로 빛나는 돌인 비취인데, 오래 전부터 현대까지, 특히 동양 쪽에서 값진 보물로 여겨졌죠. 동양에서는 흠이 없는 경옥을 '완벽'이라고 쓰며, 이는 영어의 '퍼펙트'와 같은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왜 경옥(단단한 구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냐면, 실제로 비취를 구성하는 광물질은 소듐알루미늄규산염으로, 모스경도가 7정도 되는 엄청나게 단단한 광물이기 때문입니다. 구리의 모스경도가 3, 강철의 모스경도가 5정도니까, 진짜로 강철보다 단단한거죠. 다만 인성은 그리 높지 않아서 쇠망치로 때리면 깨집니다. 사실, 모스경도 10인 다이아몬드도 쇠망치로 때리면 깨지죠. 어쨌든,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비취의 주성분은 나트륨, 알루미늄, 규소, 산소로 이루어진 규산염인데, 이것들은 전부 반투명한 무색을 띕니다. 여기에 크롬이 섞이면 녹색, 철이 섞이면 회색, 산화철이 섞이면 홍차색, 망간이 섞이면 보라색, 탄소가 섞이면 검은색이 되는거죠. 그런데 자연계에서 경옥이 형성되는 마그마층에는 크롬과 철이 가장 풍부하기 때문에 녹색 빛을 띈 비취가 가장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참고로 에메랄드가 초록색인 이유도 똑같아요.
* 봄눈(淡雪, 아와유키)는 불투명하거나 흰 빛을 띄거나 안에 몽실몽실한 모양이 있는 형태를 시적으로 일컫는 일본식 형용사입니다. 왜 아와유키, '봄에 내리는 눈'이냐면, 봄에 내리는 눈은 겨울의 눈과는 달리 내리면서 허공에서 녹아 반투명한 흰 빛을 띄기 때문이죠. 그래서 봄눈, 아와유키는 반투명한 흰 빛을 아름답게 부르는 일본식 관용어입니다. 반투명한 흰 빛의 유리 공예품이나, 반투명한 흰 빛의 설탕 공예품에도 마찬가지로 봄눈이라는 말이 들어갑니다. 문학에서도 많이 쓰이는데 보통은 '덧없는 순수성'이나 '허무하게 빼앗긴 처녀성', 혹은 '희미해진 어린 시절의 동심'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즉 '봄눈의 경옥'이란, 색이 옅거나, 흰 빛이 강하거나, 반투명하거나, 안에 무늬 같은게 보이는 비취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게임에서 봄눈의 경옥을 깎아서 만들었다는 그 열쇠를 보면 초록빛이 엷고, 겉이 살짝 반투명하며, 안에 무늬같은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봄눈의 경옥을 깎아서 만들었다고 하는 거에요. 거기다 그 열쇠는 무기로 써도 될 만큼 거대한 크기니까, 실제 열쇠의 역할을 하는 물건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비싼 선물'이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 그 열쇠는 (검으로 써도 될만큼 거대한 크기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모양이 좀 특이하게 생겼죠. 그 열쇠는 현실의 여우신 신앙에서 여우신이 물고 있는 보물 중 하나로, 벼를 수확하는 낫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한 상징입니다. 아래 보이는 여우신 목상은 교토의 후지미이나리 신사(伏見稲荷大社, Fushimiinari)에 있는 것인데, 보시면 게임 내의 열쇠랑 아주 비슷하게 생겼어요. 경옥 설명이 살짝 길어졌으니까, 여우신 이야기는 아래 돌구슬에서 다루겠습니다.
* 열쇠와 한 짝을 이루는 돌구슬도 마찬가지 의미입니다. 그 돌구슬을 보면 완전 동그란 모양이 아니라, 위쪽이 뾰족하고 중간에 홈이 파여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우카노미타마(宇迦之御魂神, UkanoMitama)라는 여신이 손에 들고 있는 여의보주(如意宝珠)라는 구슬입니다. 우카노미타마는 곡식, 농업, 상업을 보살피는 풍요의 여신으로, 3개의 상징물을 지니는데 바로 여의보주, 벼, 그리고 여우입니다. 이 여신은 보통 여우를 손에 들고 있거나, 여우에 올라타 있거나, 여우로 변신한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그래서 이 여신의 별명이 '이나리 님(お稲荷さん, Oinari-san, 존귀하신 여우신님)'입니다. 일본에선 여우를 풍년의 상징이라 여겼거든요. 실제로 앞서 열쇠 설명할 때 말했던 후지미이나리 신사에는 벼를 물고 꼬리에 구슬이 달린 여우상이 있어요. 구슬만 물고 있는 여우상도 있고. 참고로 일본에 여우신을 모신 신사는 대략 3만곳 정도 됩니다. 덧붙여 어둠의 신전 내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불꽃이 3개 달린 구슬 문양'도 여의보주의 문장입니다. 정확히는 여의보주의 한 형태인 화염의 보주(焔玉, Homuradama, 불꽃의 구슬)이라는 것으로, 그 문장도 실제로 있는 문장이에요.
* 이 '생명의 순환을 상징하는 불꽃의 구슬'은 불교의 관세음보살에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세계를 굽어살피고 사람을 구원하는 부처'인데, 인간이 지닌 '고통, 분노, 카르마의 불길을 진정시키는 부처'이기 때문에 불의 상징인 불꽃 문양을, 또한 '물을 뿌려 정화하는 부처'이기도 하기 때문에 물의 상징인 물병이나 물방울 문양, 혹은 버드나무도 사용합니다. 실제로 관세음보살의 상징은 화연(火焔, kaen, 불꽃)이나 수연(水煙, suien, 물안개)으로 감싸인 구슬인 여의보주인데, 보통 불탑 꼭대기에 많이 있어요. 유명한 만화중에 '드래곤볼'이란 만화 있죠? 그 만화에서 나오는 '소원을 들어주는 신비한 구슬' 드래곤볼의 모티프도 여의보주입니다. 이 여의보주가 신불습합 과정에서 신토에 영향을 주어 '여신이 들고 있는 신비한 구슬'로 이어진거죠. 다만 모든 화염의 보주나 우카노미타마가 관세음보살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고,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화라는 것은 이렇게 지역마다, 나라마다 사람이 오가면서 영향을 주고 받고, 섞이고 하기 때문에 찾다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참 많죠. 불교가 원래는 인도에서 유래했는데도, 현대 인도의 불교와 아시아의 불교가 상당히 다른 이유도 똑같습니다. 원래 그렇게 영향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독자적으로 발전하는 거니까요.
* 참고로 관세음보살은 인도, 중국, 일본, 한국 모두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처인데, 특히 일본에서는 '예수'와 비슷한 의미로 많이 쓰였어요. 예컨대 서양에서 '오, 지저스!'라고 외칠 때, 일본에서는 '아, 관세음보살!'이라고 외치는 식이었죠. 일본 카메라 브랜드 중에 아주 유명한 '캐논'이 있죠? 그 캐논이라는 이름의 뜻이 관세음보살입니다.
* 히나코가 최초로 찾게되는 공물인 '빗'도 있습니다. 이게 왜 공물인지 의아해하시는 분들도 있더군요. 일본 신화에는 빗으로 변신해 남편 스사노오와 함께 전장으로 향한 쿠시나다히메(櫛名田比売, Kushinadahime)라는 여신이 있고, 이 여신의 변신을 혼인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거울, 빛, 구슬을 공물로 바치는 전통도 있었어요. 이즈모국풍토기 같은 오래된 책에도 "공물로 바치는 거울, 빗, 구슬은 신의 혼을 안정시키기 위한 도구다."라는 문장이 있고, 현대 시대에도 빗을 공물로 바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 실제 일본의 교토 아라시야마 근처에는 미카미 신사라는 곳이 있는데, 이 신사에는 지금도 낡은 빗과 머리카락을 바치는 절차가 있습니다. 미카미(御髪, 신성한 머리카락)이라는 이름으로 알 수 있듯 '머리카락의 신'을 모시고,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유지되기를 기원하는 신사에요. 탈모에 관심있는 분이 교토로 여행가셨다면 직접 가보실 수도 있습니다.
* 히나코가 대문 앞에서 주저하면서 "제가 여기로 들어가도 되나요?"라고 말한 것, 고토유키가 "물론이지, 오늘은 '너를 초대하기 위한 날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모두 결혼식의 맥락입니다. 농촌 가난한 집 출신인 신부가 남의 집, 그것도 커다란 부잣집 대문으로 들어가며 불안해하고, 신랑이 그런 신부를 달래며 '여기는 너의 결혼식을 위한 공간이며, 오늘은 그 결혼식이고, 그 결혼식을 통해 너는 이 곳의 사람이 된다'라고 이야기해주는 장면인 것이죠.
* 엔마 퍼즐을 푸는 장소에서, 갑자기 서양식 인형과 마주친 히나코가 "...어째서 여기에?"라면서 놀라는데, 다른 칼럼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 인형의 정체는 슈이기 때문에 히나코가 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문을 건너는 히나코를 밀치고 문 안으로 들어선 것도 이 서양식 인형입니다. 이 인형은 1회차때는 안 보이고, 2회차부터만 보여요. 즉, 이 장면은 현실에서 슈가 히나코의 뒤를 쫒아 결혼식장에 숨어드는 장면입니다. 그 직후 대문이 녹아서 사라지는 장면도 이미 침입자를 허용했으니 대문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했음을 상징하는거고.
(3) 추억을 향해
- 에비스가오카:
기절했던 히나코는 슈의 품에서 깨어납니다. 히나코가 깨어나자 그녀를 껴안아주고 있던 슈는 온 마을이 텅 비었다면서 "만약 온 세상이 멸망한 거라면, 나와 같이 살아남은 나머지 한 사람이 너라서 기뻐, 파트너."라고 말합니다. 히나코는 그 말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린코는?"이라고 묻지만, 슈는 그 말에 갑자기 엉뚱하게 "나는 걔가 할말이 있다고 해서 따라갔던 거고, 린코에게는 딱히 관심이 없어."라고 대답합니다. 답답해진 히나코가 "린코가 무사한거냐고?"라고 묻자, 그제야 슈는 린코가 집으로 도망쳤을지도 모르니 린코의 집으로 가보자고 하죠.
주위를 경계하며 나아가던 둘은 곧 린코의 집 앞에 있는 논에 도착하는데, 논길을 걷던 히나코가 갑자기 "왠지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 든다(우주전쟁 놀이를 계속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슈가 "그럼 뺨이라도 꼬집어볼래?"하면서 히나코의 뺨에 손을 가져다대자, 히나코는 격렬하게 거부하면서 "내 뺨은 내가 꼬집을거야!"라면서 돌아섭니다. 그러자 슈는 자신의 뺨을 꼬집고는 "유감이지만, 꿈은 아닌 것 같네."라고 말하죠.
잠시 후, 논을 건너던 중 그들은 거대한 형상의 괴물 '아라-아바레'에게 쫒기고, 히나코는 뒤쳐지지만 곧 우물에서 건진 열쇠를 이용해 탈출에 성공합니다. 겨우 탈출한 히나코를 보고 슈는 "다행이다, 준코(히나코의 언니)가 오래 전 너를 지켜달라고 부탁했어."라고 말하며 안심하기도 하죠. 그리고 계속 논을 가로지르던 둘은 추억의 장소를 발견하게 되고, 히나코는 그곳을 보며 "어렸을 때 여기에서 울었었다."라면서 추억을 되새깁니다. 슈는 그런 히나코에게 "너는 뭐든 마음속에 품어두는 나쁜 버릇이 있잖아, 괴로우면 언제든 울어, 내가 다 들어줄테니까."라고 이야기해주죠.
그러나 좋은 분위기도 잠시, 주변에 짙은 안개가 깔리기 시작하고, 히나코는 곧 슈가 어디론가 사라진 논에서 섬뜩한 허수아비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이 허수아비들은 히나코와 친구들의 모습을 하고 있죠. 항상 바깥쪽에 서있는, 상체만 있는 허수아비는 얼굴에 '너는 누구? 외톨이,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해. 내가 친구가 되어주지 않으면 혼자야. 너희 둘은 정말 그냥 친구 사이야? 나는 늘 네 뒷모습을 보고 있어.'라는 말들이 쓰여있고, 나머지 허수아비들 중에는 쪽지가 꽂혀 있는 허수아비가 하나 있습니다. 그 쪽지를 뽑아서 펴보면 이해할 수 없는 짧은 말이 한줄씩 적혀있죠. 그리고 쪽지가 뽑힌 허수아비는 몸을 뒤틀며 어떤 방향을 가리키는데, 히나코는 그 허수아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논을 탈출합니다. 슈는 논 너머에서 히나코를 기다리고 있었고, 둘은 곧 합류해서 린코의 집에 도착하게 됩니다.
린코의 집에서, 슈와 히나코는 예상대로 집으로 도망쳐 숨어있던 린코를 만나게 됩니다. 린코는 슈를 격렬하게 반기지만, 같이 도착한 히나코는 반기지 않고 오히려 노골적으로 히나코를 향한 질투심을 드러냅니다. 히나코는 어떤 대응도 하지 못하고 떨떠름한 표정만 짓고요. 그리고 셋은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는데, 결국 슈의 제안대로 중학교 너머에 있는 슈의 집 뒷산을 통해 마을을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출발 전, 히나코와 린코는 산길을 건너기 위한 반창고 등의 준비물을 챙겨가기로 하죠. 그런데 준비물을 챙기기 위해 창고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던 히나코는 계단 아래에서 '린코를 믿으면 안돼'라는 말을 바닥에 새겨놓은 서양식 인형을 보게 됩니다. 놀란 히나코는 린코를 부르며 뒤를 돌아보려다가, 갑자기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집니다.
- 어둠의 신전:
히나코는 어둠의 신전에서 깨어납니다. 신전 안을 헤매던 히나코는 습격을 당해 등불을 놓치고, 대신 우연히 찾아낸 나기나타를 집어들게 됩니다. 나기나타로 괴물들을 물리치며 전진하던 히나코는 갑자기 사쿠코의 목소리를 듣게 되고, 그 목소리를 따라가죠. 그리고 마침내 다리 위에 도착한 히나코의 앞에, 괴물이 되어버린 사쿠코가 나타나 히나코를 습격합니다. 괴물 사쿠코는 히나코에게 "널 구하러 왔어,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같은 말을 하며 거세게 공격하지만 히나코는 그 공격을 간신히 견뎌내고, 잠시 후 사라졌던 고토유키가 나타나 히나코를 감싸안고 사쿠코의 공격을 대신 맞아주며 괴물 사쿠코를 쫒아냅니다. 그리고 고토유키는 히나코에게 "마귀 주제에 이곳에 발을 들이다니 어리석구나, 네게 붙어온 부정함일 테지. 이제 사라졌으니 안심하거라."라고 히나코를 달래주죠.
그리고 고토유키와 히나코는 커다란 문을 지나, 물과 국자가 있는 작은 사당에 도달합니다. 고토유키는 "너도, 나도 부정함을 들여보낼 수는 없다."라고 말하며 국자로 물을 떠 손을 씻고, 입을 헹구고, 국자 손잡이를 씻은 다음, 히나코에게 그 국자를 건넵니다. 그런데 국자를 받은 히나코가 앞에 서자, 갑자기 평범했던 사당의 물이 붉게 끓는 용암으로 변해버립니다. 히나코가 당황하자, 옆의 고토유키가 그런 그녀에게 "괜찮다, 평범한 물이다."라고 말하고, 그 말을 들은 히나코는 주저하면서 고토유키가 했던 것처럼 따라합니다. 하지만 국자 안의 물은 히나코의 입 안에서 용암으로 변해버렸고, 히나코는 입에 용암을 머금은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기절합니다.
- 에비스가오카:
히나코는 계단 아래 굴러떨어진 모습으로 깨어납니다. 인형이 있던 곳에는 슈가 있고, 그가 히나코를 깨우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린코는 아직도 계단 위에 선 상태인데, 그녀는 "히나코가 바보같이 혼자 굴러떨어지더라."라고 비웃죠. 그리고 셋은 린코의 집을 떠나 중학교로 향합니다. 이때 히나코는 계단 위에서 린코의 분위기가 이상했던 것을 기억해내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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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으로 향하는 환각 시퀀스는 히나코가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는 장면입니다. 특히 기절한 히나코가 슈의 품에서 깨어나는 것, 슈가 히나코에게 열심히 구애하지만 히나코는 이해를 못해서 그냥 넘겨버리는 장면은 많은 걸 상징하죠. 슈가 히나코의 뺨을 꼬집으려 할때 히나코가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데, 이것은 히나코가 '가정폭력 트라우마' 때문에 폭력을 매우 혐오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히나코가 슈를 사랑하고 있지는 않다는 이야기기도 하죠. 무엇보다 히나코는 자기 뺨을 자기가 꼬집겠다고 말해놓고 실제로 꼬집지는 않아요.
* 우물은 많은 창작물에서 '깊은 기억'을 상징하는 장치입니다. 즉 깊은 우물 속에서 히나코가 끄집어낸 것은 이전까지 마음 속 깊은 곳, 의식의 건너편에 묻어두었던 기억들입니다. 결혼식장으로 향하는 히나코의 안에서는 여러 과거의 기억들과 미련들이 뒤섞이고 있었고, ㅁㅇ 작용 때문에 아주 오래된 기억까지 끄집어낸 것이죠.
* 우물에 빠뜨린 열쇠를 건져올리는 히나코를 방해하는 '아라-아바레'는 거대한 몸집, 육중한 뱃살, 폭력의 상징인 칼로 된 오른손, 느물거리면서 히나코를 끌어당기는 거대한 왼손, 그리고 두툼한 뱃살 한가운데에 굉음을 질러대는 커다란 입이 달린 몬스터입니다. 그야말로 '여성의 입장에서 본 성인 남성의 공포'를 형상화한 모습이죠. 이름인 아라-아바레는 '거칠게 날뛰다'라는 뜻입니다. 왜 이게 갑자기 논으로 가는 길 한가운데서 등장하냐면, 히나코는 어렸을 적 부모로부터 가정폭력을 당했지만, 가정폭력과 별개로 논에 들어갔다가 그 논에 있던 어른에게 맞았던 경험도 있기 때문이죠.
* 항상 논의 입구에 서있는 얼굴없는 허수아비에 써있는 말들은 '린코가 히나코에게 하는 말'들입니다. 이는 늘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채, 사쿠코하고만 붙어다니는 외톨이 히나코를 보며 린코가 느끼는 작은 우월감, 그러나 그런 히나코를 좋아하는 슈를 보면서 린코가 느끼는 질투심을 표현하고 있죠. 허수아비에 꽂혀 있는 쪽지도 사실은 린코의 쪽지인데, 1회차에는 그 쪽지의 이름이 '단어장의 일부'라고 되어있지만 2회차에는 '사고 기사'로 바뀌고, 3회차 이후에는 아예 대놓고 '린코의 메시지 카드'로 바뀝니다. 또한 여담으로, 여기서 퍼즐 난이도를 낮게 설정하면 모든 '정답 허수아비'가 히나코를 닮은 단발의 허수아비로 변하고, 반대로 퍼즐 난이도를 높게 설정하면 사쿠코->린코->히나코 순으로 정답 허수아비가 변합니다.
* 히나코는 어릴 적 논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습니다. 흥분한 그녀는 너무 멀리 숨었고, 아무도 그녀를 찾아주지 않아서 결국 혼자 길을 잃고 헤매다가 집 정반대로 가게 되었죠.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히나코는 아직도 린코의 집에 가기 위해 그 논을 지나칠 때마다 괴로워합니다. 그렇게 길을 헤메던 히나코를 도와준 것은 린코인데, 3회차에 린코의 방에서 그 일을 언급하는 쪽지가 나옵니다. "그때 구해주지 말걸 그랬어."같은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 앞서도 말했지만, 슈는 적극적으로 히나코에게 어프로치합니다. 슈는 게임 초반에는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라고 말하지만, 이 시점부터는 히나코가 울면 받아주겠다거나, 준코나 과거의 추억들을 언급하거나, 히나코의 괴로움을 받아주겠다는 식으로 어떻게든 히나코를 꼬시려 하죠. 문제는 슈가 태도만 적극적일 뿐 말을 너무 돌려서 했고, 그래서 히나코가 슈가 표현하는 의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 좀 더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현실에서 슈는 '자신이 히나코를 여성으로 본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히나코와의 파트너 관계까지 잃어버릴까봐' 무서워서 히나코에게 직접적으로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슈가 이 부분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역으로 히나코는 "슈는 날 여자로 보지 않나?"라는 서운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건 게임이 진행되면서 차차 설명되는 부분이죠.
* 린코는 노골적으로 슈에게 매달리면서 히나코를 견제하고 질투합니다. 그러나 히나코는 그에 대해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죠. 현실의 히나코는 극도의 의사소통 장애를 앓고 있어서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약혼자에게 '결혼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해 자신의 결혼식장에 끌려간 수동적인 인물입니다. 그래서 현실의 히나코는 자신을 비꼬던 현실의 린코에게 적절한 대응, 예컨대 "싸가지없는 말 할거면 당장 꺼져."같은 대응을 하지 못했고, 이 때의 스트레스가 환각 속에서 '비열한 린코'로 재구성된 것이죠. 덧붙여, 현실에서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히나코는 린코가 슈에게 매달리는 것을 막을 권리가 없으니, 눈앞에서 뻔히 린코의 수작질을 보면서도 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그녀의 소중한 파트너를 뺏아가려 하는 린코에게 울화가 치밀었던거죠. 그 상황이 환각 속에서 투영된 모습이 바로 '슈에게 매달리며 히나코를 질투하는 린코'의 모습으로 투영된 것입니다.
* 린코가 계단에서 히나코를 밀쳤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린코가 먼저 멈추고, 히나코는 그로부터 4계단(9걸음)이나 더 내려간 다음 굴러떨어집니다. 4계단 아래에 있는 사람을 손으로 밀치는 것은 불가능하고, 발로 밀칠수는 있지만 히나코가 굴러떨어지는 와중에 비춰지는 린코의 다리는 미동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2회차에서 보면 히나코가 구르기 시작한 계단에 붉은 꽃잎이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입니다. 즉, 히나코는 인형을 본다음 혼자 굴러떨어졌고, 린코는 그 모습을 보면서 '...쟤 갑자기 왜저래?'하면서 멍때리고 있던 거에요. 그리고 그 장면에서 린코를 믿지 말라고 하는 인형은 앞서 말했듯 바로 슈입니다. (+) 다면적 해석이 가능한 부분으로, 사실 이 부분은 린코가 밀쳤다고 해도, 계단의 피안화가 발을 걸었다고 해도, 인형이 히나코를 홀렸다고 해도 말이 됩니다. 초자연적으로 해석하시는 분들은 피안화나 인형 때문에 히나코가 굴러떨어진 것으로 해석하실 수도 있죠. 다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셋 다 '정확히 이것 때무이다'고 말하기 어렵게 짜여져 있어요. 린코가 밀쳤다기엔 둘 사이 거리가 너무 멀고, 피안화가 발을 걸었다기엔 히나코는 계단위에서 멈췄다가 굴러떨어집니다. 인형이 히나코를 홀리거나 끌어당겼다고 하기엔 인형이 힘을 쓸 때 나타나는 특유의 일렁거림이나 색반전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이 장면 자체가 '어떻게 해석해도 앞뒤가 맞도록' 하기 위해서, 역으로 어떻게 해석해도 앞뒤가 맞지 않도록 짜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예 '히나코가 혼자 굴러떨어졌다'고 해석했습니다. 어차피 이 일 자체가 히나코의 정신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 다시 말해, 이 장면은 현실의 히나코가 '결혼이 정해진 히나코 앞에서 슈에게 매달리면서 히나코를 비웃는 린코'를 보았던 경험, 그리고 소통 장애와 다른 남자와의 결혼이라는 사정 때문에 그런 린코를 뻔히 보면서도 뭐라고 할 수 없어 울분과 억울함이 가득찼던 기억이 환각 속에서 투영된 장면입니다. 그리고 현실의 슈가 히나코에게 '린코가 하는 말을 믿지 마, 나는 린코에게 관심없어'라는 식의 변명조로 말을 했고, 그것이 환각 속에서 '린코를 믿지 마'라는 인형의 말로 투영된 거죠.
* 이어지는 어둠의 신전 장면은 나기나타를 찾는 과정인데, 이 나기나타는 많은 경우 여성들의 호신용 무기로 사용되는 무기입니다. 현재도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들이나 여학생들의 취미 스포츠로 이용되고 있고. 옛날에는 실제로 어릴때부터 익히던 나기나타를 혼수품으로 챙겨가는 신부도 있었다고 해요. 그만큼 건강하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로.
* 나기나타를 찾는 도중, 히나코와 마유미를 포함한 여자 그림 4점이 서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 그림들을 잘 보면 흘림체로 한두줄씩 글이 쓰여있는데, 이 글은 오노노 코마치(小野小町)라는 여류시인의 "꽃의 빛은...(花の色は...)"이라는 시입니다. 시 내용은 "꽃의 빛은(花の色は) / 덧없이 바랬구나(うつりにけりないたづらに) / 내 몸, 세상에 시달리며(わが身世にふる) / 한탄하는 사이에(ながめせしまに)."인데, 보시면 아시겠지만 여성의 아름다움이 너무나 빠르게 스러지는 것을 한탄하는 시입니다. (+) 다면적 해석이 가능한 부분으로, 왼쪽에서 두 번째 그림의 모델인 마유미가 남긴 여러 메모, 모든 그림에 얼굴이 없다는 점, 근처에 여성에게 얼굴 박피시술을 해주며 즐거워하던 사람의 쪽지가 있는 것을 고려하면, 그 그림들을 그린 사람은 아마도 상당한 수준의 성형 시술 전문가였던 것 같습니다. 여성들이 너무 빠르게 늙는 것을 한탄한 나머지, 직접 박피시술을 해서 탱탱한 피부를 되찾게 해주고 싶어하던 사람인거죠.
* 이후 히나코가 어둠의 신전에서 괴물 사쿠코를 만나는 장면은, 현실에서 히나코가 결혼식장에 숨어든 사쿠코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히나코에게 깊이 의존하고 있던 사쿠코는 결혼식장에 몰래 숨어들어가 히나코를 불러냈고, 히나코에게 "널 구하러 왔어,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같은 말을 하며 함께 도망치자고 설득하려 했던 거죠. 이게 ㅁㅇ중독 상태인 히나코에게는 괴물 사쿠코로 보인 거고요. 보스룸에 들어가기 직전, 사쿠코가 "히나코, 여기 굉장해!"하면서 천진난만하게 놀라자 히나코가 "사쿠코? 사쿠코가 왜 여기에? 사쿠코... 여기는... 안돼."같은 말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 괴물 사쿠코가 입은 옷은 전통 무녀 복장인데, 외투에 식물의 꽃 모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문양은 국화를 뜻하는 국화문,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두 개의 국화를 나란히 붙여서 그린 '쌍국문'이라는 문장인데, 결혼을 상징하는 문양입니다. 칡잎 문장을 쓰는 고토유키 가문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죠. 게임 내에서 이 쌍국문 문양의 옷을 입는 사람이 둘 더 있는데, 바로 히나코의 의식(팔, 낙인, 가면 의식)을 도와주는 빨간 여우 가면을 쓴 두 무녀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괴물 사쿠코가 입은 옷은 그 두 무녀의 복장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머리장식하고 손에 든 것만 다르죠. 그리고 게임을 한참 더 진행하면 히나코가 여우가면을 이식받은 후 들어갈 수 있는 비밀 방 중에 이 무녀복들이 여러 벌 걸려있는 방이 있습니다. 즉, 츠네키 가문의 옷이에요.
* 다시 말해, 현실에서는 사쿠코가 몰래 결혼식장에 잠입하여, 결혼식을 진행하는 무녀의 복장을 훔쳐서 입은 후, 무녀인 척을 하면서 히나코에게 접근하여 설득하려 한 것입니다. 사쿠코는 원래도 무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으니 그 과정이 쉬웠던 거죠. 2회차 이후에 사쿠코네 신사에 가보면, 신사 안에서 무녀의 춤을 연습하는 사쿠코의 그림자도 볼 수 있어요. 덧붙여 그렇게 무녀 아르바이트를 하던 사쿠코가 츠네요시 신궁을 보면서 놀랐던 이유도, 사쿠코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신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럭셔리한 츠네요시 신궁의 위엄에 놀랐던 거죠. 그리고 현실에서 히나코는 사쿠코의 설득에 따르지 않았고, 결국 히나코와 사쿠코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이윽고 그 실랑이를 눈치챈 고토유키가 달려와 사쿠코를 쫒아버렸고요. (+) 다면적 해석이 가능한 부분으로, 주변에 있던 무녀들을 보며 '무녀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쿠코'를 회상하던 히나코가 갑자기 패닉을 일으켰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해도 사쿠코가 츠네키 무녀의 옷을 입은 것이 설명되고, 고토유키가 '속세에서 달라붙어 따라온 마귀'라고 표현한 것도 자연스러워지니까요.
* 이후 고토유키와 히나코가 도착한 사당은 '테미즈야(手水舎)'라는 곳으로, 현실에서는 토리이를 지나 신사에 들어서면 정문 바로 옆에 있는 장소입니다. 즉, 이제 고토유키와 히나코는 토리이로 이어진 참배길과 산문을 지나서, 실제로 결혼식이 벌어질 신사의 정문 앞에 도착한거죠. 테미즈야라는 이름은 "손+물+장소"라는 단어를 순서대로 합친 것인데, 말 그대로 신사에 들어가기 전 몸과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손과 입을 물로 헹구는 절차인 테미노즈기(手水の儀, Temizu, 손 씻는 의식)을 위한 장소입니다. 신토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의식이죠. 그리고 앞사람이 그렇게 먼저 손과 입을 정화하고, 국자 손잡이를 씻어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것도 실제 절차입니다.
* 여담으로, 테미즈야에 물이 한가득 차있고, 그걸 사람이 떠서 손을 씻거나 입을 헹구는 식이라 오염에 굉장히 취약할 것 같지만, 계속해서 흐르는 지하수인데다 소독을 거치기 때문에 물 자체는 잘 오염되지 않고, 가장 오염에 취약한 부위는 오히려 국자 손잡이 쪽입니다. 그래서 국자 손잡이를 씻는 과정이 있는거죠. 물론 식수용도의 물은 아니기 때문에 마시는 걸 권장하지도 않고, 현대에는 손만 씻거나 아예 손도 씻지 않고 제스처만 한 다음 들어가는 것을 권장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천주교 성당 앞의 성수 샘물과 비슷한 거죠. 다만 이걸 잘 모르는 사람들, 특히 외국 관광객들은 별 생각없이 벌컥 마시기도 하기 때문에, 관광 안내문이나 표지판에 '마시는 물이 아닙니다'라고 대문짝만하게 써놓는 곳도 있습니다.
* 고토유키는 물로 입을 헹궈도 멀쩡했고, 히나코에게 직접 "평범한 물이다."라고도 말해줍니다. 그러나 히나코가 이것으로 입을 헹구려하자 물이 갑자기 용암으로 변해버리죠. 그 이유는 히나코가 온전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혼 자체에 대한 불안감, 결혼식장에 숨어든 슈와 사쿠코를 보고 느낀 스트레스, 무엇보다 ㅁㅇ 중독 때문에 물을 이상하게 느낀 것이죠. 실제로 ㅁㅇ중독자가 평범한 음식에서 금속맛이나 썩은 냄새 등을 느껴 섭식장애가 생기는 일은 흔합니다. 이를 미각환각 현상이라 하는데, 중증 약물중독자나 조현병 환자들은 이 미각환각을 겪는 빈도도, 그 원인에 대한 피해망상을 가지는 빈도도 높습니다. 보통은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물에 약을 탔다'는 식으로 발현되죠.
(4) 과거와의 이별
- 에비스가오카:
살짝 뒤쳐져 린코와 슈를 따라가던 히나코는, 앞서 가던 린코가 슈에게 "히나코는 벌써 죽었어, 저쪽 세계에서 재밌게 지내고 있다니까!"라고 말하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히나코는 또다시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따라갑니다. 여기서 린코에 대한 히나코의 일기를 읽어보면, '린코와 예전에 크게 싸워서 두세번 이상 절교했었고, 린코는 툭하면 슈랑 사귀는 건지 물어본다, 슈와 사귀지 않는다고 말해도 린코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최근 린코가 내 험담을 하는 것 같다는 소문을 들었다'라고 쓰여있습니다.
그리고 린코, 슈, 히나코는 예전 셋이 같이 다녔던 중학교에 도착합니다. 린코가 떼를 써서 슈와 린코는 1층의 한 교실에서 쉬고, 히나코 혼자서 뒷산으로 넘어갈 열쇠를 찾아 돌아다니게 되죠. 여기저기 헤메던 히나코는 린코의 자리에 놓인 비밀상자에서 2층 문을 열수 있는 열쇠를 찾아냅니다. 그런데, 히나코가 2층으로 가려 하자 교실 창문 밖으로 언니인 준코의 그림자가 비춰지며, 그림자는 히나코를 돌아보지 않고 "친구들은 영원하지 않아, 걔들도 언젠간 너를 배신할거야, 저울질할 가치가 있는지 잘 판단해야 해."라고 차갑게 말하더니 사라져버립니다.
이후 여러 암호를 풀어낸 히나코는 결국 뒷산으로 넘어갈 수 있는 열쇠를 찾아내 린코와 슈에게 돌아갑니다. 린코는 슈에게 "히나코를 버리고 나와 같이 새로운 우주 전쟁 놀이를 시작하자."라고 말하고 있었고, 문 밖에서 그 말을 들은 히나코는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가 슈에게 열쇠를 건네줍니다. 그러자 열쇠를 받은 슈와 린코는 히나코에게 쉴 것을 강요하고, 그 강요에 못이긴 히나코는 책상에 엎드려 잠들게 됩니다. 잠드는 히나코의 귓가로 "슈도 그런거 좋아하지...?"라면서 슈를 유혹하는 린코와 "관심없어."라는 슈의 퉁명스러운 대답이 들려옵니다.
- 어둠의 신전:
입을 헹구다 기절했던 히나코는 어둠의 신전 정문 안, 고토유키의 곁에서 깨어납니다. 고토유키는 그녀를 깨우며 "네게 목숨을 빚진 후, 나는 네게 마음을 빼앗겼다. 이번에는 내가 네 영혼을 구하고, 네 목숨을 가져가겠다."라고 조용하게 읊조리죠. 그 말을 들으며 서서히 깨어난 히나코에게 고토유키는 "정화수가 조금 독했던 모양이지, 넌 생각보다 섬세하고 민감하구나. 그러나, 정말 잘했다. 히나코."라고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줍니다. 머리를 쓰다듬어진 히나코의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려퍼지며, 곧 히나코는 멍한 표정이 되어 고토유키를 따라갑니다.
잠시 걷던 고토유키는 어떤 길 앞에 서더니, 히나코에게 "먼저 가서 준비해 두마, 작별하고 오도록 해."라면서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그 말을 들은 히나코는, 굳데 단힌 커다란 문의 좌우로 이어지는 미로같은 장소에 들어서게 됩니다. 벽에는 빨간 글씨로 '배신자'라는 말이 수없이 쓰여있죠. 이곳에서 히나코는 토끼장, 탈의실, 그리고 괴물 사쿠코가 입었던 무녀복이 있는 제단의 방을 지나 사쿠코가 갇힌 감옥에 도착합니다. 사쿠코는 히나코에게 자신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애원하지만, 히나코는 아무말 없이 차갑게 돌아서서 감옥을 나가버립니다.
그 다음 방에서 히나코는 용암 위에 매달린 철창에 갇혀있는 린코를 만나게 됩니다. 이곳에서 히나코는 히나코를 저주하는 글과 그림이 가득한 린코의 방, 과자가게, 중학교 교실에서 하나씩 여우 메달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히나코는 그 세 개의 여우 메달을 장치에 넣어 린코를 용암에 빠뜨리죠. 린코는 히나코를 저주하며 사과하라고 소리높여 외치지만, 히나코는 사쿠코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지 않고 차갑게 돌아섭니다.
마지막 방에서, 히나코는 굳게 닫힌 문과 여섯 개의 탁상을 보게 됩니다. 각 탁상에는 (a) 한자 시험공부를 잘 봐서 부모님이 사준 식물 채집도구 세트 (b) 히나코를 그린 그림 (c) 히나코에게 선물했던 화분(말라죽었음) (d) 우주전쟁 놀이에 썼던 제일 소중한 보물인 광선총 (e) 자작 만화를 그린 노트가 올라가 있고, 하나는 비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너머 책상에는 "옛 나날의 추억, 이 앞으로는 가지고 가지 말 것, 예를 갖추고 좌대에 바치고 가도록. 미련이 남았다면 문은 열리지 않으리라."라는 메모가 있죠. 히나코가 그 메모를 읽자 어디선가 "파트너, 너의 진정한 선택이 궁금해."라는 슈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헤매던 히나코는 과학 히어로 만화를 얻게 됩니다. 누군가가 그 만화 위에 낙서를 덧붙였는데, 만화속 악당을 전부 히나코로 이름붙이고, 악당이 죽는 장면에는 훨씬 끔찍하게 죽도록 피가 튀는 모습을 그려놓았죠. 이 잡지를 비어있는 좌대에 올려놓자 문이 열렸고, 히나코는 천장에 매달린 슈와 마주치게 됩니다. 슈는 히나코에게 뭔가를 전하려 하다가, 꾹 참고는 "히나코가 원하는 대로 해, 난 파트너의 선택이라면 받아들일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나코는 앞선 둘과 마찬가지로 슈를 외면하며 걸어가 레버를 당기고, 그 결과 슈는 목이 매달려 발버둥치다가 사망합니다.
잠시 후, 슈의 시체가 매달린 방의 문이 서서히 닫히고, 닫힌 문을 등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휘청거리는 히나코 옆에 고토유키가 나타납니다. 고토유키는 히나코에게 "오랜 친구에게 이별을 말하는 것은 힘든 일인데, 내가 강요해서 미안하다."라고 사과합니다. 그러자 히나코는 "더 일찍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오히려 사과하죠. 그리고 히나코는 걸어나가려다 두통을 느끼며 자리에 쓰러져 기절합니다.
- 에비스가오카 :
히나코는 잠들었던 중학교 교실에서 깨어납니다. 그러나 망을 본다던 슈와 린코는 어느샌가 사라져있었고, 히나코는 당황하여 주변을 살핍니다. 그 때 엄청난 수의 괴물들과 시로무쿠가 히나코를 쫒아오고, 히나코는 어쩔수 없이 도망쳐 슈의 집으로 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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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에서 히나코는 고토유키와 결혼하게 되었으므로, 슈와는 이어질 수 없습니다. 즉, 린코의 "히나코는 죽었어!"라는 말은, 현실에서 '히나코는 이미 결혼했고 남편과 재밌게 살고 있으니 그만 미련을 버리라는 식으로 말하며 슈를 꼬시는 린코'를 본 히나코가 그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환각입니다. 이 게임의 스토리는 이런 식으로 '결혼은 여자의 죽음'이라고 은유한 부분이 많죠. 또한, 여러 일기나 메모장에서 '린코가 고집과 선민의식이 강하고, 슈에게 반해있다는 묘사'가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환각 말고 현실에서도 린코가 싸가지가 없기는 없던거죠. 실제로 린코 자신는 그 성격 문제때문에 친구가 없었다고 합니다. 물론, 언제나 떨떠름한 표정에 약물중독, 소통장애까지 앓고 있는 히나코 자신도 남들에게 좋은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실제로도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고.
* 신토식 결혼식에서 신부의 가족은 보통 참례자(参列者, sanretsusha,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참가하는데, 특히 신부의 형제는 가까이서 신랑의 행렬을 안내하거나, 신부의 옆이나 뒤에서 행진을 돕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래서 히나코의 유일한 자매인 준코가 계속 히나코 근처에 있었던 거에요. 그런데 히나코가 자꾸 친구들과의 미련을 놓지 못하자 "친구들은 영원하지 않아."라고 따끔하게 말한 거죠. 그러나 그건 교실에 있는 히나코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현실의 히나코(어둠의 신전에 있는 히나코)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준코가 그림자로만 보이는거죠. 2회차 이후에서는 "친구들이랑 잘 놀았니? 그럼 이제 죽이렴."이라고 말하면서 미련을 끊으라고 이야기해줍니다. 즉, 준코는 히나코를 믿고 있었고, 히나코가 스스로 친구들의 미련에서 벗어날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내버려뒀던 것입니다. 히나코의 어린 마음, 약한 마음을 히나코 스스로가 정리할 시간을 만들어주었던 거죠. 하지만 현실에서 결혼식이 점차 진행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상태가 이상한 히나코를 보며, 태도를 바꿔 히나코에게 "그만큼 했으면 됐잖아? 이제 미련을 버려."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 고토유키가 히나코를 다독이며 말하는 '생명을 구해주고, 영혼을 구해주고'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후 밝혀집니다. 정리하자면, 어렸을 적 놀이터에서 여우에게 물려서 크게 다친 고토유키를 히나코가 구해주었고, 고토유키는 그때부터 히나코에게 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당시 고토유키가 집안 사정으로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되어 인연이 이어지지 못했던거죠.
* 현실에서 그 상황을 재구성해보면, 히나코가 멀쩡한 물로 입을 헹구다가 갑자기 읍읍읍하면서 고통을 호소하더니 픽 쓰러진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고토유키는 히나코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정화수에 내가 모르는 독한 맛이 있었나보다, 히나코가 엄청 섬세하구나."라면서 다독여준 것입니다. 정말로 히나코를 사랑하는거죠.
* 고토유키가 혼잣말을 하는 장면에서, 고토유키가 여우가면을 벗어서 손에 들고 있다가 히나코가 깨어나자 다시 뒤집어씁니다. 실제로 그의 여우가면은 주변에 뿌리같은 것들이 자라나 있지만, 그 뿌리들이 살을 침식하지 않고 가볍게 떠있어서 벗을 수 있도록 되어있죠. 히나코, 준코, 여우일족 여자들의 가면이 얼굴에 실로 꿰메붙어져 벗을 수 없는 것과는 다르게.
* 이후 히나코가 세 명의 친구들을 처형하는 시퀀스는 '히나코가 옛 친구들에 대한 미련을 끊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히나코가 무슨 사이코패스 살인광도 아니고, 자기 친구를 처형하면서 멀쩡하다는 건 이상하죠. 예를 들어 현실의 사쿠코는 이미 앞서 결혼식장에 잠입해서 히나코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고토유키에 의해 쫒겨난 상태입니다. 따라서 히나코가 어둠 속에 가두는 사쿠코는 '사쿠코에 대한 히나코의 미련'인 거고요.
* 당연히, 실제 결혼식에서 친구를 처형하는 관습 같은 건 없었습니다. 현실에서는 신부와 신랑이 손을 씻고 신사에 입장하면서 신관에게 도달하는 과정을 손씻기 의식, 그 직후 신관이 오오누사(흰 종이가 여러개 매달려있는 봉)을 흔들어 신부와 신랑을 씻어주는 과정을 수발의식(修祓の儀, Shubatsu no Gi, 부정을 씻어내는 의식)이라고 하는데, 이 전체 과정의 의미가 '속세의 나쁜 기운과 인연'을 모두 씻어내고 새 사람이 된다는 의미였어요. 즉, 현실에서 히나코가 속세의 인연인 친구들을 잊고 신부가 되어가는 결혼식 과정입니다.
* 현실의 히나코는 결혼식 도중에도 친구들에게 미련을 가진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했고, 그래서 고토유키에게 "더 일찍 했어야 하는데 미안하다."면서 사과했습니다. 이렇게 현실의 히나코가 마음속으로 미련을 없애는 과정이 환각의 히나코에겐 시로무쿠와 괴물들이 쫒아오는 과정으로 비춰진거죠. 환각 속에서 중학교에 있던 슈와 린코가 없어진 것도 마찬가지 이유인데, 그들을 현실의 히나코가 마음속에서 처형해버렸기 때문에 사라진 것입니다.
* 이 스테이지에서 풀어야 하는 퍼즐은 파란 새, 하얀 토끼, 붉은 삼각형, 초록 잎사귀의 4문장을 활용합니다. 파란 새는 당연히 히나코, 하얀 토끼는 사쿠코입니다. 그리고 붉은 삼각형 세 개의 문장은 린코, 초록 잎사귀는 슈의 문장입니다.
* 린코의 문양은 세 개의 비늘 문장(三つ鱗, Mitsuuroko)라는 일본의 유명한 문장인데, 가문 문장으로 쓰이면 용, 정화, 불, 장수 등 좋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가부키나 가면극에서는 뱀, 질투, 변심, 금단의 사랑, 여자의 원념 등 부정적인 의미의 상징으로 사용되죠. 세 개의 비늘 문장을 옷에 새긴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가 도죠지(道成寺)에 나오는 키요히메(清姫)인데, 승려를 사랑했다가 배신당한 뒤 질투심과 분노 때문에 뱀으로 변신해서 그 승려를 태워죽이는 여자 귀신입니다. 키요히메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일본 창작물에서 여자가 세 개의 비늘 문장, 또는 삼각형 문양으로 뒤덮인 옷을 입고 있으면 거의 비슷한 류의 악역입니다.
여담으로, 나중에 보스로 등장하는 괴물 린코는 신관복을 입고 있는데, 그 신관복에도 거의 똑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다만 그 신관복의 문양은 세 개의 비늘 문양 바깥쪽을 뱀 몸통이 감싸는 식으로 어레인지되어있어요. 그리고 이 게임에는 삼각형 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고 있는 인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서양식 인형이죠. 그 인형이 입고 있는 원피스는 빨간 바탕에 하얀 삼각형 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그 인형, 다시말해 슈는 고토유키를 질투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 초록 잎사귀의 슈 문장은, 알아보시는 분 계시던데, 대마초 잎입니다. 흔히 마리화나 하면 생각나는 사티바 계열은 아니고, 인디카 계열입니다. 잎사귀 아래 씨앗 문양도 한쪽이 뾰족한 동그라미 모양이 그대로 들어가 있죠. 인디카 계열 대마초는 실제로 쇼와 초기까지 복통제, 진통제, 수면제로 쓰였는데, 환각 유발이 너무 강한 부작용 때문에 1954년에 약초 목록에서 삭제되었습니다. 물론 사티바 계열은 유지되었고요. 애초에 1960년대까지도 일본에서 대마 흡연은 불법이 아니었어요. 재배나 거래는 불법이었지만. 타지에서 온 마을 의사가 '전통 의학'을 믿지 못하는 이유에는 전통의학의 이런 어두운 부분이 있었던거죠. 그 마을 의사의 쪽지에 대놓고 "약학법에서 취급을 제한하는 성분이 들어 있는 것 같다."라고 써있기도 하고. (+) 다면적 해석이 가능한 부분으로, 마을 의사의 쪽지에 나오는 '취급 제한 성분'을 백흑초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백흑초는 현실에 존재하는 풀이 아니고 따라서 약학법에서 취급제한했다는 이야기가 좀 어색해요. 실제로 약사 공부를 하고 있던 슈도 그게 무슨 성분인지 몰랐고.
* 덧붙여, 이 '등장인물의 상징'들은 게임 내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형태도 여러가지고요. 대표적으로 사물함에 많이 붙어있는 히나코를 상징하는 작은 새 포스트잇, 고토유키를 상징하는 여우 포스트잇, 슈를 상징하는 꽃 포스트잇, 사쿠코를 상징하는 토끼 포스트잇, 그리고 린코를 상징하는 뱀 포스트잇이 있습니다. 나중에 시미즈 저택의 히나코 방에 가보면 작은 새 모양의 도자기 인형이 여기저기 놓여 있어요. 히나코 스스로도 그 이름을 좋아했나봅니다.
* 김이 좀 새는 이야기지만, 게임적으로 보면 이 부분 전후해서 이야기와 게임성이 전반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문열기 퍼즐이 사쿠코-린코 스테이지 2번이나 반복되는데 반해, 슈 스테이지는 과학 잡지 하나만 찾으면 되고 그것조차 무슨 중요한 장소가 아니라 계단 난간에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습니다. 히나코가 린코와 사쿠코보다 슈에게 더 호감이 있어서 스테이지가 그렇게 쉽다고 치기엔 슈를 너무 무자비하게 처형하고. 개인에 대한 호감이나 미련이 스테이지에 반영된다고 보기에는 린코와 사쿠코 스테이지가 너무 비슷하거든요.
* 이야기도 중간고리가 없어져서, 여기서 처형하는 친구들이 실제 인물인지, 환각속 인물인지, 다른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도 안해줘요. 거기다 어쨌든 친구들과 여태껏 그럭저럭 잘 지내던 히나코가 갑자기 돌변해서 셋을 무자비하게 처형해버리죠. 이 부분이 스토리적으로도 붕 떠있고 연결도 깔끔하지 않아서, 이 부분부터 갑자기 뭔가 이해하기 힘들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이 많을거라 생각합니다. 저도 그랬고. 저는 이 부분을 도저히 이해할수가 없어서 나무위키라는 위키에서 정보를 찾아봤었는데, 거기서 세 친구가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라고 쓰여있는 걸 보고 진짜 그런가 하고 오해했었습니다. 그래서 첫 감상문 쓸때까지만 해도 친구들이 현실에서 벌써 다 죽은 줄 알았어요. 4회차 끝내고 곰곰이 되돌아보니까 '그런 해석도 있을수 있다'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 특히 슈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성의없습니다. 이전 사쿠코와 린코에 대해서는 모든 사건과 내용을 여러 개의 쪽지를 통해 굳이 길고 자세하게 풀어주는데, 슈는 "너도 알잖아?"라는 식으로 대충 넘어가버려요. 왼쪽 첫 번째 탁상 위에 있는 식물 채집 세트는 언뜻 봐서는 이게 뭔지 알수도 없고, 심지어 "저거 사달라고 하려고 한자공부를 열심히 했지."란 설명이 끝이에요. 슈도 아니고, 린코에 대한 메모에서 슈가 곤충과 식물 채집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과 연관짓지 못하면 그 세트가 뭔지 알수가 없습니다. 왜 이렇게 대충 해놨는지 모르겠어요. 슈에 대한 반전(ㅁㅇ 공급책이었다는 점, 인형이라는 점)을 숨기려고 했다기엔 반전과 별로 연관도 없는 정보들인데.
* 거기다 이곳은 3회차부터 반전의 키로 작용하는 부분인데, 이전까지 히나코를 저주하고 욕하던 친구들의 쪽지가 "사실 히나코는 좋은 애였지."라는 식의 급격한 이해와 화해의 쪽지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쪽지를 보면서도 히나코의 행동은 변하지 않고, 이전과 똑같이 3명 전부 무참하게 처형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앞뒤가 잘 맞아 흘러가질 않아요. 이 구간 이후로 이상하게 임신 몬스터와 몬스터 웨이브 강제전투같은 것들이 반복적으로 강요되기도 하는 점을 봐서, 이 근처 제작중에 개발팀 내부에서 불화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5) 하나의 몸, 두 개의 이름, 세 개의 의식
- 에비스가오카:
학교 뒷문으로 도망친 히나코는 피난용 오두막과 산길을 거쳐 슈의 집에 도착합니다. 히나코는 슈의 집 문을 열고 들어서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고, 이윽고 히나코를 쫒던 시로무쿠가 슈의 집에 도착해 히나코를 붙잡고 바닥에 내팽개쳐 기절시킵니다.
- 어둠의 신전:
히나코는 어느샌가 고토유키와 함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고토유키가 "여기서부터는 큰 고통이 있을 것인데, 괜찮으냐?"라고 묻자, 히나코는 멍한 표정으로 "네, 저는 두렵지 않아요."라고 대답합니다. 계단 한가운데에선 몸을 숨긴 인형이 '도망쳐, 돌이킬 수 없게 될거야'라는 말을 벽에 새겨놓았지만 히나코는 무시하죠. 그렇게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던 히나코는 어느 샌가 고토유키가 사라진 것을 깨닫지만, 오른손으로 왼쪽 옷깃을 어루만지며 "보이지 않아도 여기 있는게 느껴진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길을 따라 나아간 히나코는, '분노한 붉은 여우 가면'을 쓴 두 무녀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오른팔을 자르고 그곳에 여우팔을 이식받습니다. 그녀는 그 여우팔로, 이전에는 힘이 모자라 움직일 수 없던 문손잡이들을 돌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잠시 쓰러트릴 수만 있었던, 무한히 부활하는 괴물들을 완전히 침묵시킬 수 있게 되죠.
여우팔로 문을 열면서 나아간 히나코는, 이윽고 등에 고토유키의 가문을 상징하는 칡잎문양 낙인을 받게 됩니다. 그 낙인 덕분에 히나코는 여우팔을 거대화해 적들을 물리치거나, 칡잎문양으로 봉인된 문을 열수 있게 됩니다.
낙인으로 길을 헤치고 나아간 히나코는, 마침내 얼굴 가죽을 벗겨내고 그 자리에 여우가면을 이식하게 됩니다. 여우가면을 이식한 히나코는 "이제 드디어... 새로운 내가 되는 거야."라면서 히죽 웃습니다. 가면을 이식받은 히나코는 이전에는 단순히 벽으로만 보이던 '부적으로 봉인된 벽'을 꿰뚫어보고 지나갈 수 있게 됩니다.
마침내 세 가지 의식이 모두 종료되고, 히나코는 벽화가 새겨진 문을 거쳐 마침내 칡잎 문양이 새겨진 큰 문 앞에 도달하게 됩니다.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토유키는 도착한 히나코를 보며 "아주 아름답구나, 히나코."라면서 그녀를 반기고, 둘은 손을 잡고 여우 조각과 여우 가면을 쓴 일족들 사이를 걸어서 통과합니다. 여우 가면 일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행렬 중간쯤에 한 여성이 히나코에게 "당신의 새 인생에 축복을."이라고 말해줍니다.
이윽고 여우가면 일족들 사이를 건너 신관 앞에 도착한 고토유키와 히나코는 고개를 숙이고, 오오누사로 그들을 씻어주는 과정인 수발 의식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신관이 오오누사를 슬쩍 들어올리더니 갑자기 히나코에게 내려칩니다. 그것은 사실 오오누사가 아니라 붉게 달아오른 쇠사슬이었고, 신관복을 입고 있는 것은 린코였습니다. 히나코가 당황하자, 린코는 "오늘은 정말 행복한 날이야, 내 세상에서 히나코가 사라지는 날이니까!"라면서 히나코를 죽이려 덤벼듭니다. 그러나 히나코는 그런 린코를 여우팔로 가볍게 제압하고, 린코에게 "너의 그런 마음을 알고 싶지는 않았어, 하지만 오늘은 기뻐! 헤어질 때에야 겨우 진심을 말했네!"라고 말하면서 린코를 여우팔로 내리쳐 없앱니다.
린코가 사라진 직후, 히나코는 갑자기 혼란에 빠져 "나는... 시미즈 히나코... 가 아니야?"라고 말하며 머리를 감싸쥐고 휘청대는데, 그러자 어느샌가 다시 나타난 고토유키가 그녀를 껴안고 그녀에게 "너는 나의 히나코다!"라고 말하며 그녀를 달래줍니다.
- 에비스가오카:
시점은 다시 에비스가오카로, 슈의 집 앞에서 시로무쿠에게 습격당했다가 깨어난 히나코는 시끄럽게 울리는 슈네 집 전화의 전화벨 소리에 결국 전화를 받게 되는데, 전화에서는 엄마의 목소리로 "슬슬 돌아오렴, 저녁이 다 됐어."라는 말과 "린코를 놔줘! 으아아아앗!"라는 슈의 외침이 들려옵니다.
기겁한 히나코가 전화기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슈의 집에서 준코가 걸어나옵니다. 히나코는 준코를 보면서 "언니가 언니가 아닌것 같다, 이상한 기분이다."라고 말하고, 준코도 "내 안의 히나코는 아직 초등학생인데, 그런 모습을 보니 히나코가 아닌 것 같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히나코는 준코에게 뭔가 말하려 하지만, 준코는 그런 히나코를 지나치며 "네가 아직 살아있다는 건, 아직도 망설이고 있다는 뜻이겠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삶은 네가 선택하는거야. 남의 의견 들을 필요 없어. 그러나, 네가 고민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어, 보통 사람이라면 진작에 그 시간은 끝났을거야"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립니다.
당황하던 히나코는, 일단 슈의 집을 떠나 자신의 집인 시미즈 저택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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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의 히나코는 이미 결혼식 도중이고, 그녀는 최선을 다해 '과거의 미련(+약물중독)으로 생겨난 마음'인 환각의 히나코를 죽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에비스가오카의 히나코에게는 시로무쿠의 추적으로 나타난 것이죠. 고토유키와 같이 계단을 내려가던 중, 히나코가 벽 뒤에 숨은 인형(슈)의 말을 본체만체 무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 같이 계단을 내려가던 중 갑자기 고토유키가 보이지 않게 되고, 히나코가 보이지 않아도 느껴진다고 말하며 왼쪽 옷깃을 어루만집니다. 2회차에서 이 부분을 보면 히나코는 그 옷깃에 달린 브로치를 만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보이진 않지만 고토유키가 "가자, 히나코."라고 목소리로 말해주기도 하고, 히나코도 그 말에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괴물과 싸우고 미로를 헤쳐나가는 것은 환각이고, 실제로는 고토유키와 함께 식장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 첫번째 의식, 기존의 팔을 버리고 여우팔을 이식하는 과정은 습관을 바꾸는 과정, 즉 '능력의 변화'를 뜻합니다. 가난했던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부잣집 며느리가 되는 과정, 다시 말해 츠네키 가문의 돈을 상속받는 것을 말하는거죠. 히나코는 그 팔을 받은 후 "주신 이 팔, 소중히 쓰겠습니다." 혹은 "이 선물에 부끄럽지 않게..."라고 말합니다. 일본에서 '주신 물건을 소중히 쓰겠다'같은 것은 물리적인 형태의 선물, 특히 의복이나 장신구, 금전을 선물로 받았을 때 대답하는 말입니다. 신사에서 부적이나 팔찌 등을 받을 때도, 신관이 "(신을 대신하여) 이것을 전해드립니다."라면서 건네주고, 받은 사람이 "주신 이 물건, 소중히 쓰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관례가 있어요. 또는 습관의 변화라고도 말할 수 있고요. 실제로 일본에서 팔(腕, ude)이나 손(手, te)은 신체기관을 가리키는 뜻 말고도 능력, 솜씨, 습관, 버릇 등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손이 빠르다(手が早い, tega-hayai)는 '성격이 급하다, 바람둥이다, 일을 잘한다' 같은 뜻이고, 팔이 운다(腕が鳴る, udega-naru)라는 표현은 '습관이나 버릇, 능력이나 의욕을 참기 어렵다'라는 뜻이에요.
* 두번째 의식, 등에 낙인을 찍는 것은 '성'을 바꾸는 과정, 즉 '정체성의 변화'를 뜻합니다. 이제 그녀는 츠네키 히나코이고, 그녀는 츠네키 가문 사람들의 공간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미 선물받은 재물을 훨씬 더 자유롭게 다룰 권한도 얻게 되었죠. 히나코가 칡잎문양의 힘을 모아 변신할때 들어보면 "훌륭한 가르침...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그녀가 물질이 아닌 선물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죠. 즉, 이전 의식에서 선물받은 돈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 이 시점부터 그녀는 '시미즈' 히나코가 아니라, '츠네키' 히나코입니다. 츠네키라는 이름 자체가 여우(狐, 키츠네)의 아나그램인 것을 감안했을 때, '키츠네 히나코(여우 히나코)'가 된 히나코가 여우팔을 휘두르고 여우 집안을 돌아다니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죠. 여담으로, 히나코의 언니인 준코의 풀 네임은 '키누타 준코'인데, 이 키누타라는 성은 너구리(狸猫, 타누키)의 아나그램입니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우와 너구리 사이를 '톰과 제리'같은 라이벌 관계로 생각했어요.
* 세번째 의식, 가면을 이식하는 과정은 표정과 태도를 바꾸는 과정, 즉 '자아의 변화'를 뜻합니다. 여우 집안 여자들은 전부 여우 가면을, 준코는 올빼미 가면을 쓰고 있죠. 이는 그 집안 사람으로서의 전통 풍습, 태도, 표정 등을 몸에 익힌 모습입니다. 실제로 일본은 지방마다, 집안마다 나름의 예법이 조금씩 달라요. 그리고 그녀는 그 가면을 통해 가문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원래의 가면은 눈 위로 세줄기 눈썹이 있고 이마가 평평한데, 히나코가 가면을 이식받자 표면에 핏줄기 같은 것이 솟더니 눈썹이 사라지고, 이마에 작은 문양이 튀어나오죠. 즉, 히나코가 기존의 자아와 기존의 전통을 섞어서 만든 새로운 자아입니다. 그리고 이마에 튀어나오는 문양은 고토유키의 칡잎 문양 한가운데 있는 꽃술 모양의 문양이에요.
* 이 게임은 '얼굴이 잘려나가는 것'을 기존의 자아를 분리 및 소거하는 과정으로 묘사하는데, 여우의 혼례식 엔딩에서 "엄마처럼 살기 싫다"고 징징대는 시미즈 히나코의 얼굴이 시로무쿠(츠네키 히나코)의 머리에서 떨어져나가 계단참에 버려지고,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과정이 대표적입니다. 비슷하게 얼굴이 떨어져나가는 여성형 괴물 카시마시, 얼굴 부분에 나무 가면이 붙어있는 여성형 괴물 하라이-카타시로도 있고요. 이건 다음 칼럼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고 있기 때문에 넘어갑니다.
* 네 번째 엔딩인 '사일런트힐' 엔딩에서, 히나코는 고토유키의 도움을 받아 결혼식장에서 도망쳐버립니다. 그리고 에비스가오카로 도착한 그녀에게는 더 이상 낙인(츠네키 성씨)이나 여우가면(츠네키 가문의 전통)이 남아있지 않지만, 여우팔(돈)은 남아있죠. 결혼식장에서 도망쳤으니 성씨나 전통 같은 건 히나코에게 남아있지도 않고, 히나코가 써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돈은 다르죠. 돈에 따로 가문 이름이 쓰여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결혼식장에서 도망친 20대 여자가 어떻게 '선택에 대해 생각할 시간' 운운하며 느긋하게 고향을 거닐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걸로 표현되는 것도 아니고. 즉, 히나코는 츠네키 가문에게서, 정확히는 고토유키에게서 받은 돈으로 유유자적하게 자아찾기 여행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뭐, 고토유키가 불만없다면 그것도 괜찮죠.
* 여우가면 일족들 사이를 걸어가는 장면에서 "당신의 새 인생에 축복을."이라고 말해주는 왼쪽줄 일곱번째에 서있는 여성은 히나코의 언니인 준코입니다. 실제로 준코만 다른 일족들과 달리 올빼미 가면을 쓰고 있고, 말하기 직전 고개를 돌리면서 특유의 짤랑하는 방울소리도 울립니다. 조명 때문에 잘 보이진 않지만 꾀꼬리, 벚꽃, 강이 그려진 준코 특유의 기모노도 볼 수 있죠. 참고로 그 셋 모두 졸업, 해방, 이별, 미래를 상징하는 상징물입니다.
* 그리고 그 장면에서, 뒷쪽의 여우 목각상들을 보면 대부분 두마리나 세마리가 세트로 묶여있어요. 그들은 결혼식 관람객이고, 부부나 아이동반 부부이기 때문에 그렇게 모여있는 거죠. 가끔가다 혼자 떨어져있는 솔로 목상도 있긴 있습니다. 덧붙여 히나코가 의식을 치른다음 들어갈 수 있는 방 중에, 여우 목각상들이 술자리를 벌이고 있는 방이 있습니다. 거하게 취한 여우 목각상들은 아예 바닥을 뒹굴고있죠. 그러니까, 후계자인 고토유키의 결혼식에서 흥이 올라 과음한 츠네키 가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취해서 굴러다니는 꼴을 보면 그중에서도 남자들일 가능성이 높죠.
* 회랑에 일렬로 서 있는 사람들이 왜 다들 말없이 히나코를 보고 있느냐 하면, 원래 신토식 결혼식에서 신관 앞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예의이기 때문입니다. 참례자도, 신부도 원래 신관 앞에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에요. 그리고 준코도 실제로 말을 한 것은 아닌데, 준코의 말을 잘 들어보면 목소리가 웅웅웅하면서 이상하게 울립니다.
* 같은 장면에서 왼편에 일렬로 서있는 여자들의 가면은 전부 실로 얼굴에 꿰메어 붙여진 것이고, 가면이 붙여진 모든 여자들은 목 부분에 크게 봉합한 자국이 있으며, 전부 공손히 손을 모으고 있습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이지만 피부색도 시체처럼 칙칙한 색이고. 심지어 여우가 아니라 올빼미 가면을 쓰고 있는 준코도 가면만 다르지 모든 점에서 다른 여자들과 똑같습니다. 반대로 같은 장면에서 오른편에 일렬로 서있는 남자들의 가면은 띠를 이용해 머리에 묶은 것이고, 남자들의 피부색은 아주 활기찬 색이고, 목에 흉터도 없고, 손을 편하게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가문의 전통에 속박된 여성들과, 반대로 가문의 전통을 자유롭게 다루는 남자들을 은유한거죠. 실제로 남자들, 특히 가문의 당주나 원로들은 전통을 새로 만들거나 폐지할 수 있었어요.
* 괴물 린코가 입고 있는 신관복은 카리기누(狩衣, kariginu)라는, 남자 신관이 입는 옷입니다. 특히 린코가 입은 건 보라색 카리기누인데, 현실에선 특급 신관이 입는 높은 위계의 색이고요. 이를 통해, 현실에서 린코가 사쿠코와 달리 신관복을 훔쳐입고 결혼식장에 잠입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린코가 입은 신관복에는 또다른 문양이 찍혀있는데, 위에서 설명했던 뱀의 몸통이 세 개의 비늘을 감싸고 있는 문양입니다.
* 그리고 현실에서 히나코가 린코를 알아보면서 언쟁과 소동이 일어났고, 결국 린코는 다른 사람들에게 제압당해 끌려나갔습니다. 린코가 끌려가는 것을 보고 같이 잠입해있던 슈가 그것을 막으러 뛰어들며 '린코를 놔줘!'라고 외쳤고요. 히나코가 그 상황에 대한 기억을 ㅁㅇ의 힘으로 재구성한 환각이 바로 슈의 집에서 받은 전화에서 들렸던 '린코를 놔줘!'의 정체입니다. 그리고 린코가 끌려가는 소동을 보며 스트레스를 받은 히나코가 휘청대면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고토유키가 히나코를 안아들어 달래준거고요.
* 이후 슈의 집에서 걸어나오는 준코는, 현실에서 결혼식장 참례자로 같이 있는 준코의 기억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환각입니다. 그리고 준코가 히나코를 차갑게 대하는 이유는, 지금 준코와 만나는 환각의 히나코는 현실의 히나코가 아니라, 현실의 히나코가 가진 동심, 미련, 어리석은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ㅁㅇ중독으로 만들어진 해리성 인격이지만 준코는 그 사실을 모르니까. 그래서 준코는 "네가 아직 살아있다는 건(=히나코가 친구들에게 미련이 있다는 건) 아직도 망설이고 있다는 뜻이겠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준코가 '히나코가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보통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끝났을거다'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결혼식 도중에 여전히 친구들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으니, 그만 좀 고민하라고 말하는거죠. 고토유키는 히나코가 고등학생 때부터 그녀에게 구혼 편지를 보냈고, 히나코는 현재 20대 성인이므로 결혼식이 치뤄지기 전 그녀에게는 년단위의 '생각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프로포즈 후에 몇년씩 기다리는 사람은 흔치 않죠. 정말 대단한 순정남 고토유키입니다. 그래서 준코가 '보통 사람이라면 진작에 그 고민할 시간은 끝났을거야."라고 말한 것이고요.
* 2회차 이후에선 둘의 대화가 조금 달라지는데, 히나코가 "언니도 모두를 죽였어?"라고 묻고 준코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히나코가 그 말을 듣고 두려워하며 "난 죽기 싫어..."라고 말하자, 준코가 차갑게 "오늘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아니?"라고 차갑게 질책하고, 이후 '선택에는 댓가가 따른다'라고 말하며 사라집니다. 이 대화도 원래의 대화를 보강하는 내용입니다. 친구나 가족과의 미련을 끊어낸 것을 '죽였다'라고 표현한 것이고, 히나코가 "난 미련을 끊기 싫어...(죽기 싫어)"라고 말하자, 화가 난 준코가 "그게 결혼식날에 신부가 할 소리니?'하고 질책한 것이죠. 그리고 결혼식 도중에 언쟁이 너무 길어지면 안 되니까, 준코는 '너 그러다 큰일나(선택에는 댓가가 따르니까), 얼른 마음 정리하고 신랑이랑 행복하게 살 생각만 해."라는 식으로 말하며 대화를 끊었는데, 이게 환각 속에서는 준코가 '선택에 댓가가 따른다'고 말하며 사라지는 것으로 재구성된 것입니다.
* 2회차 이후에 영도를 얻고 붉은 알약을 얻지 않았다면, 히나코가 슈의 오두막에 붉은 알약 상자를 놓아두면서 "이제 내가 해볼게..."라고 눈물흘립니다. 현실의 히나코가 어떤 계기로 인해 붉은 알약의 섭취를 끊고 자아를 찾아가는 모습이죠. 역으로 지장보살에 고토유키의 브로치를 지장보살에 반납하는 모습도 있는데, 두 모습 모두 히나코가 자신을 사랑한 남성으로부터 해방되는 모습입니다.
(6) 패륜의 연회
- 에비스가오카:
히나코는 마을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녀가 집에 도착해 문을 열자 전화가 울리는데, 전화를 받자 '시미즈 씨 댁이시죠? 오카모토 수산입니다! 항상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뚝)'하고 전화가 끊깁니다. 그리고 히나코는 천천히 집을 탐색하게 되죠. 그러나 히나코의 집은 이상하게 바뀌어, 복도와 문의 위치도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북쪽 문(집 뒷문)을 열고 들어가면 항상 현관으로 돌아오는 기괴한 구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시공의 문(뒷문) 바로 옆에는 달력을 거는 장소가 있는데, 이 달력을 통해 히나코는 자신이 세 날짜의 집을 반복해 돌아다니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히나코가 맨 처음 들어가는 집은 1962년 10월 6일의 시미즈 저택입니다. 이 집은 전체적으로 노란색 전등이 환하게 켜져있죠.
이 첫번째 저택에서 시공의 문을 넘어 히나코가 두 번째로 도착한 집은 1960년 5월 26일의 시미즈 저택입니다. 이 두번째 저택은 흰생 전등이 아주 적게 켜져 있어서, 굉장히 어두운 것이 특징입니다.
이 두번째 저택에서 또한번 시공의 문을 넘어 히나코가 세 번째로 도착한 집은 1961년 4월 7일, 히나코의 결혼식 당일의 시미즈 저택입니다. 이 세번째 저택은 흰색 전등이 여럿 켜져있어 환한 것이 특징입니다.
히나코는 이 세 개의 방을 계속 반복해서 탐색하고, 결국 원래는 단단히 잠겨있던 62년 저택의 자신의 방 문을 열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금까지의 히나코와 똑같이 생긴 또다른 히나코가 방으로 들어오더니 히나코에게 마구 화를 냅니다. 결국 심한 말다툼이 벌어지고, 말다툼 끝에 갑자기 나타났던 또다른 히나코는 사라져 버리죠. 그리고 에비스가오카의 히나코는 지금껏 잠겨있어 열지 못하던 부채무늬 문을 넘어가게 됩니다.
- 에비스가오카:
부채무늬 문을 넘어서 히나코가 도착한 곳은 새로운 시미즈 저택, 곳곳이 꽃으로 침식되어있고, 달력도 핏자국으로 지워져 날짜를 확인할 수 없는 저택입니다. 그 기괴한 시미즈 저택을 나아가던 히나코는 이윽고 린코, 슈, 사쿠코의 시체가 매달려있는 방에 도착합니다. 결국 친구들의 시체 앞에서 쓰러져 "왜 이렇게 되었지...?"라고 절망하는 히나코 앞에서, 갑자기 반대쪽 문이 열리면서 "오, 히나코! 이제야 돌아왔구나!"나 "기다리고 있었다구!"하는 여러 어른들의 목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히나코가 고개를 들자, 아버지인 시미즈 칸타 씨가 어머니 시미즈 키미에 여사와 함께 여러 기괴한 음식들을 차려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미즈 씨는 히나코를 보더니 "히나코, 늦었구나. 지금 막 시작하려는 참이었다!"라고 말하더니, 시미즈 여사가 공손히 건네주는 자신의 회칼을 집어들고 일어섭니다. 주변에서는 그런 시미즈 씨를 보며 "역시 칸타가 최고야!"나 "기다리고 있었다구!"처럼 흥분해서 응원하는 여러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죠. 그리고 일어선 시미즈씨는 주변을 한바퀴 돌아보면서 사방에 대고 "그럼, 와주신 여러분, 화려한 칼놀림을 부디 지켜봐 주십시오!"라고 외치며 회칼을 높이 들어올립니다.
히나코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과거의 트라우마, 아버지가 회칼을 던져 위협하던 트라우마 때문에 혼란해하는데, 그런 히나코를 등지고 시미즈 씨와 시미즈 여사 둘은 보스 몬스터로 변신해 히나코에게 달려듭니다. 그리고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히나코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쇠파이프로 두드려패서 제압합니다.
그리고 제압당한 시미즈 씨와 시미즈 여사는, 잠시 후 비틀거리면서 연회장 밖으로 걸어나갑니다. 방을 완전히 나서기 직전, 시미즈 여사가 히나코를 돌아보고 미소와 함께 고개를 살짝 끄덕입니다. 그 모습을 본 히나코는 연회장을 나가는 부모님을 한발 뒤늦게 따라가는데, 놀랍게도 그녀의 부모님은 집 대문 앞에서 시로무쿠에게 머리를 붙잡힌 상태였고, 히나코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시로무쿠는 둘의 머리를 쥐어짜 살해합니다. 그리고 그 바로 앞에서 부모님의 피를 뒤집어쓰게 된 히나코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다가 기절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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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미즈 저택' 시퀀스는 이전의 정보를 모아 몇가지를 이해한 다음에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해해야 하는 정보는 '깨진 시계열', 즉 에비스가오카의 히나코가 보고 있는 광경은 시간순서대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히나코는 이 곳에서 62년의 시미즈 저택(결혼식 1년 이후)->59년의 시미즈 저택(결혼식 1년 이전)->61년의 시미즈 저택(결혼식)이라는 총 3개의 시간대를 자유자재로 넘나듭니다. 거기다 '여우의 혼례식' 엔딩으로 향하고 있다면 1950년 9월 19일의 시미즈 저택(결혼식 11년전)에도 갈 수 있죠. 앞서 말했듯, 에비스가오카의 히나코가 보고 있는 것은 '현실의 히나코의 경험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환각'이기 때문에 시간선후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 둘째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시미즈 가의 상황'입니다. 히나코의 아버지인 시미즈 칸타 씨는 빚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아내인 시미즈 키미에 여사가 수술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빚에 허덕였냐 하면, 시미즈 씨가 젊을때 원양어선에서 함께 생선을 잡으며 형제처럼 지냈던 친구, 같이 식당을 열자고 약속했던 그 친구가 돈을 가지고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미즈 씨는 빚더미에 올라앉았고, 성격도 비뚤어진 것이죠.
* 셋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상황입니다. 이 연회가 시미즈 저택에서 이어진 장소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오해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결혼식장인 츠네요시 신궁에서 벌어졌어요. 보스룸의 에셋을 보면 안개 모양 장식이 달린 육각형 등갓, 여우 그림이 그려진 족자, 츠네키 가문의 상징인 칡잎문양의 등롱, 칡잎문양의 문손잡이 장식을 볼 수 있습니다. 게임 내에서 이 에셋들이 등장하는 장소는 여우 신전 초입, 히나코가 다섯 가지 공물을 제단에 바치는 장소 주변입니다. 다른 장소들은 문의 형태가 전혀 다르고, 비슷한 문들도 얼굴높이에 커다랗게 칡잎문양이 들어가있어요. 즉, 부모님 보스전이 벌어지는 장소는 츠네키 가문의 연회장입니다. 시미즈 가가 아무리 츠네키 가문의 처갓집이라도, 자기 집에다가 츠네키 가문 문장과 장식을 박아넣을 수는 없습니다. 즉, 시미즈 부부 보스전은 시미즈 저택에서 벌어지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보스룸으로 이어지는 부채무늬 문을 다른 시점에서 가보면 그냥 평범한 문입니다.
* 게임 내에서 연회장 문과 똑같이 생긴 문은 네 군데, 맨처음 히나코가 공물을 올리던 사당의 문, 사쿠코 보스룸 직전의 조그만 건물의 문, 슈가 매달려있던 공간에서 나가는 문, 여우회랑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런데 사쿠코 보스룸, 슈가 있던 곳이나 여우회랑은 너무 공간이 협소하죠. 그리고 시미즈 부부 보스룸 자체가 뭔가 2층이 있는 것처럼 생겼는데, 자세히 보면 어둠의 신전 방이 통째로 보스룸 위쪽에 붙어있습니다. 그러니까 2개의 방이 상하로 연결된 상태에요. 참고로 시미즈 저택을 돌아다니다 보면 벽마다 사람들 사진이 걸려있는 색이 좀 특이한 방이 하나 있는데, 그 방에서 천장을 바라보면 여우신전 초입에서 봤던 각등들과 물 위에 떠있던 등의 윗쪽이 보입니다. 그 물그림자가 비쳐서 방 색깔이 특이한 거고요. 그러니까 시미즈 저택 자체가 여우신전 아래에 180도 반전해서 깔려있는 형태입니다. 아래 사진의 육각형 등갓을 잘 보면, 등갓을 묶은 줄이 시미즈 저택 바닥을 향해 있습니다. 다시말해, 천장면을 기준으로 거울처럼 서로 위아래가 뒤집혀 붙어있는 형태에요. 저는 처음에 그 방에 들어가보고, 에비스가오카 맵 전체가 어둠의 신전 맵 아래 깔려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맵의 각 부분을 찍어서 비교대조했었습니다. 물론 들어맞지는 않더군요. 3회차 이후의 시미즈 저택에서는 히나코의 방이 2개가 동시에 있다던가, 날짜마다 집의 구조 자체가 다르다던가 하는 사실도 그 가설을 포기할 수 있게 해줬고.
+. 이는 다시 말해 환각의 세계였던 에비스가오카와, 현실의 세계였던 여우신전이 뒤섞이고 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것을 현실의 세계에서 바라보면, 시미즈 히나코라는 사람의 표층심리와 심층심리가 뒤섞이고 있다는 뜻이죠. 이를 트랜스 상태라고 하는데, 긍정적일 경우 그것은 몰입 상태, 황홀경 상태로 대표되는 일종의 고양 상태를 경험하게 합니다. 창의성, 직관, 통찰력 등이 극단적으로 상승하고 무의식과 소통하면서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달은 듯한 전능감을 느끼게 해주죠. 네...보자마자 이해하셨겠지만, ㅁㅇ의 작용과 아주 유사합니다. 실제로 고대의 신관이나 주술사들은 ㅁㅇ을 이용해 의도적으로 트랜스 상태에 돌입하거나, 그 상태를 제어하는 방법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역으로 부정적일 경우, 무의식이 표층심리를 꿰뚫어내 잠식하면서 패닉, 공황, 정체성 혼란, 환각, 강박, 망상 등이 인식체계를 오염시켜버립니다. 앞서도 설명했지만 인간의 뇌는 손실편향, 과거의 좋은 기억보다는 나쁜 기억을 더 정확히, 더 세밀하게, 더 중요하게 저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어되지 않은 트랜스 상태는 부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훨씬 높고, 아주 위험합니다. '페르소나'라는 개념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한 카를 융은 이 상황을 '자아의 침수(Ego submergence)'라고 불렀어요.
+ 무의식 깊은 곳에 가라앉았던 과거의 부정적인 기억들, 고통들이 정신의 막을 뚫고 올라와 자아를 오염시키면, 갑자기 모든 세상이 끔찍하고 괴롭고 괴물같은 것으로 인식됩니다. 생리학적으로는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을 담당하는 뇌 부위인 편도체, 섬엽, 해마가 과항진된 상태거든요. 보통 사람도 이런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데, 바로 가위눌림입니다. 겪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가위눌림 상태에서는 평범한 벽의 얼룩이나 그림자 같은 것이 귀신이나 괴물처럼 왜곡되어 보이죠.
+ 이런 식으로 '현실이 괴물처럼 왜곡된 상태'가 가위눌림처럼 일시적인 현상으로 지나가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의 단일체가 아니고, 수많은 스위치가 동시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하나의 큰 흐름, 마음이라 불리는 연속성 파장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이 수많은 스위치가 우연히, 혹은 어떤 계기에 의해, 혹은 잠깐 일시적으로 '약간 부정적인' 조합으로 켜질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러나 유전적 소인, 뇌기능 이상, 물리적 충격, 심리적 충격 등으로 이 '현실이 괴물처럼 왜곡된 상태'가 고정될 경우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이 경우, 그 사람은 그 끔찍하고 괴물같은 세상 속에 꼼짝없이 갇혀버리게 되니까요.
+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이 패닉이 가위눌림과 마찬가지로 어떤 명확한 '실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현실의 평범한 요소들이 괴물처럼 오인식되는 것이기 때문에 불안 요소를 어떻게 제어할 방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신체 감각이나 일상 자극들이 강렬한 공포 반응을 일으키는 경우, 불안을 제거하겠답시고 신경을 절단하거나 일상을 보내지 않을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이런 식으로 뇌의 불안 회로가 과민화되어 통제할 수 없는 공황발작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사람이 상당히 '이상한' 상태가 되어버리는데, 이것이 바로 코드 F41.0, 공황장애의 발병 기전입니다.
+ 또한, 공황발작이 일시적 증상이 아니라 만성적으로 유지될 경우 단순히 세상이 무섭고 두려운 문제를 넘어서서, 자기를 인식하는 자아경계선이 소실되어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하는 것이 어려워지거나, 시간 감각이 왜곡되거나, 감정이 과잉되거나, 정서가 폭주하거나 하는 인식오류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 상태가 유지될 경우 현실에서 판단력 저하, 사회적 단절, 인식체계 손상, 최악의 경우 온갖 정신병리적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죠. 여기서 사고의 비약, 자아감 붕괴 등이 얽히며 나타나는 정신병리적 증상 중 하나가 바로 '나는 내가 아니다' 혹은 '누군가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 혹은 '내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 같은 느낌이 드는 증상, 이인감(Depersonalization)입니다.
+ 물론 몰입, 황홀경 등을 이용해 창의적이거나 예술적인 성과를 내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보시는 것처럼, 이런 트랜스 상태의 유지는 정신건강이라는 측면에서는 썩 좋지 않고, 정신을 해칠 위험성도 높은 편입니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대체적으로 살짝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인다"거나 "예술가들은 모두 괴짜다"같은 인식이 생겨난거고요. 반대로 운동 선수들도 이런 몰입에 빠지기도 하죠. 네, 러너스 하이 이야기입니다. 극한의 탈력 순간, 혹은 극한의 집중 순간에 들어갈 수 있는 트랜스 상태인데, 이 경우 엄청난 고양감, 전능감, 황홀감을 느끼게 되죠. 그리고 이 경우에도 역시 시간인식이 왜곡되어서, 1초가 수십 초처럼 느껴지는 상태가 됩니다. 현실의 사람들이 "취미에 몰입하다 정신차려보니 몇 시간이 지나갔다"는 식으로 경험하는 그 느낌을 수백배 늘려놓은 것과 비슷해요.
+ 즉, 트랜스 상태의 활용이란 것은 안전하게 제어할 수 있으면 창조적 영감과 엄청난 황홀감, 혹은 위기 상황에서 생명을 건지는 슈퍼 파워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제어하지 못할 경우 정신병리적 증상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것이 됩니다. 이 설명을 보시면, 그것이 대마초 등 예술가들이 영감을 위해 활용하는 ㅁㅇ에 대한 설명과 아주 흡사하다는 것을 아실 수 있죠. 왜냐하면, ㅁㅇ이든 트랜스 상태든 결국 뇌에 간섭해 인식체계를 교란한다는 기본 원리 자체는 똑같고, 그걸 몸 내부의 피드백 회로에서 자체적으로 처리하느냐, 아니면 외부에서 유입된 물질을 통해 인위적으로 발생시키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니까요. 트랜스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처음에 히나코가 시미즈 저택에 들어서면서 "문... 복도... 위치가 다 달라졌어..."라고 말하는 것만 봐도, 에비스가오카의 시미즈 저택이 현실의 시미즈 저택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그 점은 그냥 컷신만 봐도 알수 있죠. 게임 맨 처음 오프닝과 시미즈 부부 보스전 컷신에서 나오는 시미즈 저택은 전화기가 현관 왼쪽 수납장 위에 올라가 있는데, 게임에서 돌아다닐 수 있는 3개의 시미즈 저택은 전부 전화기가 현관 오른쪽 수납장 위에 올라가 있으니까요. 즉, 전화기가 왼쪽에 올라가 있는 쪽이 실제 시미즈 저택인거죠.
* 이야기의 논조 유지를 위해 먼저 위의 정보를 정리한 후, 게임의 시계열에 따라 다시 처음부터 해석을 진행하오니 이 점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처음 히나코가 들어간 시미즈 저택에 걸려온 전화는 '오카모토 수산'이라는 생선장수집에서 걸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선장수가 "시미즈 댁 맞으시죠? 항상 이용해주셔서 감사합..."이라고 말하다 전화가 끊기죠. '항상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고객이 제품을 구매했을 때 "저희 제품을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뜻으로 말하는 일본식 관용어구입니다. 이것으로, 시미즈 저택의 누군가가 오카모토 수산에서 생선을 구매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설마 저녁거리용 고등어 한마리를 산 사람한테 감사하다고 전화하진 않았을테니, 대량으로 생선을 구매했다는 것도 짐작 가능하죠. (+) 다면적 해석이 가능한 부분으로, 이 대량으로 구매한 생선을 쓴 사람은 시미즈 씨가 확실하지만, 과연 어떻게 썼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히나코의 결혼식 연회장에서 솜씨를 부리기 위해 구매했을 수도 있고, 반대로 히나코의 결혼으로 빚을 갚고 식당을 차리게 되어 구매했을 수도 있어요. 히나코가 전화를 받은 시미즈 저택은 1962년 10월 6일, 결혼식 1년 뒤 시미즈 저택입니다. 다만 그 날짜의 집이라도 딱 그 날짜의 일들만 나오는 것은 아니고, 다른 날의 추억들도 나오기 때문에 너무 날짜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 히나코가 처음 들어간 1962년 10월 6일의 시미즈 저택은 1회차에서 들어갈 수 있는 세 개의 저택 중 가장 나중의 것입니다. 아버지의 방에서 '시미즈 칸타 씨의 빚이 변제 완료되었습니다'라는 쪽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빚은 고토유키가 히나코와 결혼하면서 지참금으로 갚아준 것이죠. 그래서 전구를 여러 개 켜고 있어서 집이 노란빛으로 빛나는 것입니다. 이 미래 집의 가스레인지에는 호스가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래서 불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또한 여기저기에 화려한 붉은색 상자, 여우 그림이 그려진 족자, 노끈으로 묶인 상자들이 놓여있는데, 전부 어둠의 신전에 있던 것들입니다.
* 이 첫번째 저택을 돌아다니다 보면 앞서 언급한, 그림들이 벽마다 하나씩 걸려있는 특이한 방을 찾을 수 있습니다. 히나코-린코-슈와 사쿠코-시미즈 부부-앞선 모든 인원들의 사진이 걸려있죠. 1회차에는 단체사진에서 히나코의 얼굴에 덧칠이 되어있고, 2회차에서는 린코와 부모님의 얼굴에 덧칠이 되어있는 식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방의 색이 특이한데, 천장을 바라보면 이 방이 어둠의 신전 외곽, 공연장 근처의 아래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첫번째 저택에서 시공의 문을 넘어 히나코가 두 번째로 도착한 집은 1960년 5월 26일의 시미즈 저택입니다. 결혼식 1년 전이죠. 아직 빚을 못 갚아서 전등을 많이 켜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이 어둡죠.
* 두 번째 저택에서 또한번 시공의 문을 넘어 히나코가 세 번째로 도착한 집은 1961년 4월 7일, 히나코의 결혼식 당일의 시미즈 저택입니다. 이곳은 처음부터 벽에 날짜가 적힌 캘린더가 걸려있죠. 욕실의 욕조에는 피가 가득차 있고, 히나코의 방에는 고토유키가 보낸 연애편지가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는 가스레인지의 호스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62년의 시미즈 저택에서는 사라진 호스죠. 그리고 전화기 옆에 엄마의 심부름 쪽지, 슈네 집에서 약을 받아달라는 쪽지가 있는데, 설마 결혼식날 아침에 신부한테 심부름을 시킨 것은 아닐 테니, 그 이전에 쓴 심부름 쪽지가 남아있던 것이죠.
* 이 '결혼식날'의 시미즈 저택에는 다른 저택과 달리 서남쪽 끝에 방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방에 들어가면 쓰러진 커다란 인형 하나와 수없이 많은 조그만 인형들이 있고, 한구석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믿을 수가 없다'고 쓴 시미즈 여사의 찢어진 일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은 히나코의 결혼식날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히나코가 결혼식장에서 쇠파이프로 사람들을 때려죽인 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2회차 이후에는 이 시미즈 여사의 일기가 사라집니다.
* 이 인형들은 독특하게 생겼고 존재감도 큰데 비해, 싸우거나 부술 수 없기 때문에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그래서 이게 뭔지 묻는 질문도 많죠. 먼저, 저렇게 생긴 형식의 인형은 '고케시'라 불리는 일본 전통 인형인데, 아이들을 보호하는 보호의 의미를 가진 인형입니다.
* 가로로 쓰러져있는 커다란 고케시 인형의 몸통은 가운데가 흰색, 양 옆이 남색이고, 수염을 기르고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이건 히나코의 아버지인 시미즈 칸타 씨의 특징입니다. 그는 하얀 셔츠에 남색 재킷을 걸치고 있죠. 또한 커다란 고케시 인형의 몸통 쪽을 잘 보시면 식물 이파리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대나무 잎사귀를 그린 죽엽문이라는 문장입니다. 이건 시미즈 씨의 셔츠에는 없는 부분이죠. 죽엽문은 보통 꺾이지 않는 기개(대나무는 안 꺾이니까), 가문의 번창(대나무가 빨리 자라니까), 아이의 보호(대나무숲은 피난처), 남자아이 출산 기원(남근숭배) 등을 상징하는 그림이고, 칸타 씨의 성격적인 특징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습니다. 또한 얼굴 한쪽이 깨져서 노란색 눈동자가 드러나있는데, 이 눈동자는 살아있어서 항상 히나코를 감시하듯 따라가며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커다란 인형의 오른쪽 옆구리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흰 글씨로 뭔가 길게 적혀있습니다. 실제 일본어 글자는 아니라서 해석할수는 없는데, 행서체의 세로쓰기된 글이라는 점은 알 수 있죠.
* 시미즈 씨 인형에 깔려 있는 작은 고케시 인형들은 목부분이 남색, 나머지 부분이 흰색인데, 이것은 히나코의 어머니이자 시미즈 씨의 아내인 시미즈 키미에 여사가 입은 옷과 같은 색배치입니다. 그녀는 남색 기모노에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있죠. 또한 시미즈 여사 인형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표정이 있는 부분이 부서져있거나, 피로 가려져 있어요. 방 바깥에 있는 작은 고케시들 중에는 표정이 살짝 보이는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 피로 얼룩져서 '멍든 얼굴'로 웃는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 보면 방문 바로의 복도, 시미즈 여사 인형들이 모여있는 중간에 사진이 한장 세워져 있는데, 그 사진은 부모님 방의 시미즈 여사 책상, 미싱기가 있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사진과 똑같은 사진입니다.
* 이상의 정보를 종합하자면, 저 고케시 인형은 '원래는 아이와 가정을 보호하는 강인한 남성, 그러나 망가지고 쓰러져서 오히려 아이와 가정을 감시하는 존재'가 된 시미즈 씨와, 그런 시미즈 씨에 의해 '수백개로 쪼개져, 자기 의견(표정)이 없이 남편의 뜻에만 따르는 존재'가 된 시미즈 여사를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히나코의 피해망상이 만들어낸 광경이므로, 현실의 히나코가 받아들이는 것은 '이 집 안에서, 내가 뒤틀린 폭군, 집안에서만 폭군인 아빠의 감시의 눈길을 피할 방법이 없다, 너무 작고 폭력에 굴복한 엄마는 나를 보호해줄 수 없다. 이곳은 무너졌다(실제로 벽에 심하게 금이 가있죠).'라는 절망감과 폐소감의 상징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습니다.
* 그러나 고케시 인형은 깨져있고(=힘이 없음), 넘어져 있기 때문에(=행동할 수 없음), 비대한 몸으로 방 안에 갇혀 히나코를 감시할 뿐 실제로 뭘 하지는 않습니다. 현실의 시미즈 씨도 딱 이런 식으로 식칼을 던져 위협하기만 했지 히나코를 때리진 못했고, 아내인 시미즈 여사가 행주빤 물과 싫어하는 반찬을 며칠동안 먹이는데도 찍소리 한번 못하고 주는대로 먹다가 항복한, 나약한 인물이죠.
* 또한 위의 두 해석을 어머니의 찢어진 일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믿을 수가 없다'라고 적힌 일기와 연관지으면, 1회차 한정으로 그 인형들이 히나코의 결혼식 난동, 혹은 난동 이후 도주한 히나코 때문에 큰 상처를 입고 쓰러진 시미즈 씨와, 시미즈 여사의 모습에 대한 환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혼식 난동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다른 회차에서 엄마의 일기가 사라지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 다면적 해석이 가능한 부분으로, 욕조에 피가 가득 차있고 욕조 한켠에 식칼이 꽂혀 있으므로, 이것을 '결혼식장에서 난동을 부린 히나코가 시미즈 저택으로 도망쳐 욕조에서 피를 씻어낸 흔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히나코는 망가진 쇠파이프를 결혼식장에 버리고, 식칼만 가지고 도망쳤으니까요. 이렇게 해석할 경우, 머리에 큰 상처가 있는 커다란 시미즈 씨 인형과, 수천갈래로 쪼개진 시미즈 여사의 인형이 뜻하는 것은 아주 끔찍한 일이라는 결론이 되겠죠. 거기다 그렇게 해석하면 피로 물든 욕조에 잠겨 있는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머리카락 무더기는, 아마도 시미즈 여사의...
* 또한, 이 저택에는 갑자기 생김새가 전혀 다른, 신혼부부의 방처럼 보이는 다다미방이 5개 연속으로 붙어있는데, 방에 들어가보면 첫번째 방에는 베게가 하나 올라가있는 준코의 이불과 물건들, 두번째 방에는 첫번째 방과 똑같은 물건들이 방향만 바뀌어서 있고, 세번째 방에는 린코의 방에 있던 3개의 히나인형과 준코가 가지고 놀던 고케시 인형, 베개가 두 개 올라간 분홍색 꽃무늬 이불(참고로 꽃무늬는 슈의 상징)이 놓여있고, 이불의 머리맡에 백흑초 화병이 있습니다. 네 번째 방은 문이 살짝 열리다 뭔가에 끼어서 들어갈 수가 없는데, 문틈으로 잘 보면 세 번째 방과 똑같이 생겼고, 왼쪽 벽에 서양식 인형이 숨어있는 모습이 보이죠. 네번째 방의 문틈 너머로 다섯번째 방도 살짝 보이는데, 그 방은 세번째, 네번째 방과 똑같이 생겼습니다.
* 2회차부터 열리는 네 번째 시미즈 저택은 1950년 9월 19일의 시미즈 저택입니다. 이날은 대략 10살 전후의 어린 히나코가 남자애들이랑 놀다가 여자애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화가 나서 서양식 인형을 버린 날입니다. 그리고 그 버려진 서양식 인형을 주워서 히나코를 찾아온 소년, 슈와 처음으로 만난 날이기도 하죠. 그리고 히나코의 방에 언니의 이불이 놓여 있고, 언니의 이불 위에 여러 고케시 인형들이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이건 바로 위에 언급한 다다미방, 히나인형이 있는 곳에도 진열되어 있습니다.
* 네 개의 육각형 메달을 꽂고 방을 나서려던 에비스가오카의 히나코 앞에 나타난 또다른 히나코는 현실의 히나코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미련, 마음속의 응어리인 히나코를 끊어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끝끝내 살아남아 마음속을 어지럽히는 환각의 히나코, 에비스가오카의 히나코에게 화가 나있던 것이죠. 2회차 이후에는 현실의 히나코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회상의 그림자 형태로 옷장에 기대고 있다가, 에비스가오카의 히나코가 방을 나가려고 하면 말을 걸어옵니다.
* 2회차 이후에는 현실의 히나코와 환각의 히나코가 하는 대화가 달라지는데, 여기서 히나코가 '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대화가 나옵니다. 정확히는 현실의 히나코가 "고토유키에 대한 감정은 따듯하고 시큼하고 달콤하고 엄청 포근한데, 거기에 이질적인 두려움이 있다. 이게 진짜 사랑일까?"라고 묻자, 환각의 히나코가 "확실한 건, 이게 슈에게 느낀 감정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라는거야."라고 대답하죠. 즉, 히나코는 고토유키에게 사랑을 느꼈고 그것은 슈를 친구로서 소중히 여기는 감정과는 다른, 남녀 사이의 사랑이었는데, 히나코는 트라우마 때문에 그것을 진짜 사랑이라고 확신할 수가 없어서 두려워하던 것입니다.
* 정확히 말하자면, 현실의 히나코가 슈에게 호감을 가진 것은 맞습니다. 그렇지만 '사랑'과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죠. 일기에서도 보면 "슈가 나를 여자로 대우해주지 않아서 서운하다"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슈는 히나코가 말한 "나를 여자로 취급하는 것이 싫다."는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자신이 히나코를 여성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관계가 끊어질까봐 무서워해서 숨겼기 때문이죠. 그래서 슈가 그렇게 매번 "히나코는 내게 여자가 아니고, 여자로 대우한 적도 없어!"라고 강하게 강조했던 것입니다. 게임 초반, 슈가 또 그 지겨운 말을 했을 때, 히나코가 뒤에 남겨져 바닥을 노려보면서 한참동안 마음을 추스려야만 했던 이유도 그겁니다.
* 그렇지만 이러한 히나코의 마음은 '나는 여자인데 여자로 봐주지 않아서 서운하다'에 것에 가깝지, '나를 사랑하고 고백해주지 않아서 서운한 마음'인 것은 아니란 것도 표현됩니다. 일기에서 보면 "여자인 나를 인정해주지 않아서 서운하다."라고 써있으니까요.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에 진입할 때 뺨을 내주지 않는 모습이죠. 그리고 고토유키가 보낸 연애편지를 슈가 읽지 못하도록 숨기거나, 슈가 찾아오자 집에 없는 척을 하려 하거나, 몸이 좋지 않다고 슈를 내쫒아버리는 광경들도 비슷한 의미입니다. 맨처음 구혼을 받았을 때는 히나코도 슈와 상담을 했었어요. 그런데 어느 정도 마음을 정하면서 더 이상 슈에게 상담하지 않고 숨깁니다. 결정적으로, 히나코는 '고토유키에 대한 따듯하고, 시큼하고, 달콤하고, 엄청 포근한 감정은 슈와는 다른 감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히나코가 슈에게 호감을 가진 건 맞지만, 그건 우정에 가까운 감각이었어요. 물론 슈에 대한 우정이 사랑으로 바뀔 수도 있었고, 슈도 바로 그걸 기대했던 거지만, 잘생기고 돈많고 성격좋고 능력좋은 고토유키가 등장하면서 헛된 꿈이 되어버렸죠.
* 매달린 친구들의 시체를 보고 절망하는 히나코의 모습은 일견 어색합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들은 이전에 히나코가 직접 기계를 조작해 처형하는 바람에 그 모습으로 죽어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이 부분은 애초에 1회차에서는 이해할 수가 없도록 짜여져 있습니다. 히나코가 두 사람이라는 반전이 그 한참 이후에 나오거든요. 물론 그들을 처형한 히나코는 현실의 히나코고, 에비스가오카의 히나코는 현실의 히나코와는 다른 인격이기 때문에 절망했던 것이죠. 즉 이 부분은 이전까지 한 인물의 동일한 타임라인처럼 제시되던 '현실의 히나코(여우가면 히나코)'와 '환각의 히나코(쇠파이프 히나코)'의 시계열이 어긋나는 부분입니다.
* 친구들의 시체를 넘어선 히나코가 도착한 곳은 연회장입니다. 위에서 말했던 츠네요시 신궁의 연회장이죠. 웅성거리는 소리 덕분에, 보이진 않지만 실제로 근처에 많은 어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미즈 씨가 독특하고 이상한, 약간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어서 좀 이상하게 보이죠. 눈을 감은채로 느릿느릿 말하거나, 갑자기 눈을 부릅뜨면서 회칼의 날을 흝어본다거나. 포즈도 마치 영웅처럼 회칼을 한 손에 높이 들어올린 과장된 포즈를 취해서, 딱 봐도 뭔가 어색하고 이상해 보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일본 농촌에서 유행했던 가부키를 흉내낸 과장 표현으로,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장엄한 연극조 표현' 같은 것입니다. 거기서 시미즈 씨가 "좌중의 여러분, 부디 지켜봐주십시오!"라고 외치는 것도 같은 의미고요. '좌중의 여러분'은 결혼식 등 큰 잔치의 하객들을 높여 부르는 말이고, "부디 지켜봐주십시오!"라는 말도 역시 그런 큰 잔치에서 공연, 재주, 요리 등을 하객들에게 선보이면서 말하는 연극조의 관용어구입니다. 아주 유명한 만화인 원피스에 보면 '쿠마도리'라고, 표정과 대사가 굉장히 어색한 캐릭터가 있어요. 그 캐릭터도 똑같이 가부키를 모티프로 한 캐릭터라 그렇게 어색한 표정, 과장된 포즈, 느릿느릿한 말투를 가진 것입니다.
* 시미즈 씨는 원양어선에서 참치를 잡던 어부였고, 따라서 그가 차리려던 식당도 횟집이나 초밥집일 것입니다. 그가 항상 오른손에 쥐고있는 칼이 생선을 손질하는 칼, 회칼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생선, 그것도 참치처럼 큰 생선을 잡아 회뜨는 기술은 대단히 정교한 칼놀림을 필요로 하며, 특히 일본에서는 이런 장인정신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까 오카모토 수산에서 생선을 구입해줘서 고맙다고 전화한 것, 그리고 그 전에 슈네 집에서 시미즈 여사가 '저녁이 다 되었으니 돌아오라'라고 전화했던 것 기억나시나요? 즉, 지금은 결혼식을 마친 후 피로연을 하고 있는 것이고, 그 피로연의 연회장에서 시미즈 씨가 하객들에게 자신의 회 요리를 대접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의 자부심의 원천이자, 한때 그의 희망이었고, 몰락한 이후에도 결코 손에서 놓지 못하던 바로 그 회칼로.
* 이후 연회장에서 나간 시미즈 부부가 시로무쿠에게 붙잡혀 사망하는 장면은 연회가 끝나고 신부와 친부모가 서로 마지막 인사를 올리며 인연을 끊는 장면인데, 이후 시로무쿠 시점에서 제대로 설명되므로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 주변에서 들려오는 하객들의 소음 중에 '역시 칸타가 최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부 아버지의 이름을 그렇게 허물없이 부른다는 점에서, 이 연회 자체가 굉장히 흥겹고, 허물없고, 통속적인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엄숙한 공식 석상에서는 아무리 친해도 '시미즈 씨'라고 부르는 것이 예의니까요.
* 참고로 시미즈 씨의 이름인 칸타(寛太, Kanta)는 '관대하고 듬직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인 시미즈(深水, Shimizu)는 '깊은 물'이라는 뜻, 아내인 시미즈 여사의 이름인 키미에(君江, Kimie)는 '고귀한 강'이라는 뜻이고요. 시미즈 부부의 자식인 준코(潤子, Junko)는 '순종하는 아이', 히나코(雛子, Hinako)는 '새의 아이' 혹은 '병아리'라는 뜻입니다. 친구들 이름의 뜻은 린코(凜子, Rinko)는 '고귀한 아이', 사쿠코(咲子, Sakuko)는 '꽃이 피는 아이', 슈(修, Shu)는 '수양이 깊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여우가면 고토유키(寿幸, Kotoyuki )는 '생명과 행복', 또는 '오랜 행복'을 의미합니다. 고토유키의 寿자가 '목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장수(긴 삶)'을 의미하기도 하거든요. 보시면 여자들의 이름은 대부분 코(-ko)로 끝나는데, 이는 아들 자(子)라고 쓰는 글자로 '아이'나 '아들'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여자아이들의 이름으로도 많이 썼고.
* 여담으로, 저는 첫 감상문을 쓸때까지만 해도 이 자(子)라는 글자를 여자아이 이름에 붙이는 것이 남자아이를 출산 기원과 연관되어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 글 쓰면서 여러 자료를 찾아보니 그런 건 아니라고 합니다. 실제로 여자아이에게 남자아이 출산을 기원하는 이름을 붙이긴 했는데, 子라는 글자가 딱 그런 의미를 가지진 않았대요. 보통 末(Sue, 막내), 留(Tome, 멈춤), 捨(Sute, 버림), 阿久里(Aguri, 밝음) 등을 여자아이 이름에 붙여서 "여자는 그만, 남자아이를 원함"이라는 기원을 담았다고 합니다. 아키타 대학의 2015년 연구 논문인 "今昔の日本命名に見られるパターン"에서 확인한 내용으로, 인터넷에 전문 공개되어 있고, 해당 내용은 8페이지에 있어요.
* 시미즈 저택 시퀀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장면은 시계열이 무너졌다는 사실입니다. 저택의 달력부터가 그렇죠. 그리고 애초에 시로무쿠는 결혼식날 아침부터 입는 옷입니다. 게임 내에서는 이 시점에서 한참 이후, 엔딩 직전에서야 히나코가 반지를 교환하고 시로무쿠가 되는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 현실의 히나코는 맨처음 여우신전에 공물을 올릴 때부터 시로무쿠를 입고 있는 상태였어요. (+) 다면적 해석이 가능한 부분으로, 앞서 말했듯 결혼식장에서 난동을 피운 히나코가 그대로 탈출해서 시미즈 저택으로 돌아가 시미즈 부부를 살해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위의 고케시 인형 이야기하면서 설명했었죠. 다만 이 경우, 시미즈 여사의 설명과 시미즈 씨의 도게자, 고토유키의 배려로 여행을 떠나는 4회차 히나코도 시미즈 부부와 보스전을 치르는 것이 앞뒤가 맞지 않게 되죠.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히나코가 "너희는 누구야? 왜 부모님 흉내를 내는거야?"라고 외치지만, 그 대사로는 보스전 직후 시로무쿠에게 살해당하는 시미즈 부부를 설명할수가 없잖아요.
* 물론 신토식 결혼식에서도 결혼 후 신부가 친정으로 돌아가는 절차는 있습니다. 하나요메모도리(花嫁戻り, 신부의 귀환)이라고 하는데, 결혼식 3~5일 후에 신랑신부가 함께 친정으로 돌아가 결혼식을 잘 마쳤다고 인사를 올리는 풍습이죠. 물론 신부가 시로무쿠를 입고 친정으로 돌아가진 않았습니다. 애초에 결혼식에서도 신부가 계속 시로무쿠만 입고 있는게 아니에요. 피로연 시작하기 전에 갈아입습니다.
+ 여담으로, 이렇게 행사 도중 신랑신부가 옷을 갈아입는 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한국에서는 보통 웨딩드레스->폐백용 한복->피로연용 파티복 순서로 3번 갈아입어야 합니다. 근데 이 옷들이 활동성보다는 맵시 위주로 디자인되어 있어서 여기저기 조이고, 아프고, 가렵고, 답답한데다, 정신없이 행사하는 와중에 뛰어가서 다시 갈아입고 화장도 다시 해야 해서 진짜 사람 환장하게 만듭니다. 역시 사일런트 힐에서든 현실에서든 결혼식은 사람잡는 절차인것 같군요.
* 시미즈 저택으로 향하는 도중에 놀이공원 근처에서 한 라디오를 찾을 수 있는데, 이 라디오를 켜면 소방서에서 출동한 대원이 '대략 10명 정도가 바닥에 쓰러져 있다'라고 보고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현실의 히나코가 결혼식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다는 이야기죠.
(7) 사카츠키
- 어둠의 신전:
히나코는 문득 정신을 차립니다. 옆에서 기다리던 고토유키는 "이걸 마시면 조금 편해질 것이다."라면서 술잔을 건넵니다. 그리고 히나코와 고토유키는 그 이후로 이런저런 말을 나누며 세 잔의 술을 나눠마시죠. 술을 마시고 마음이 좀 편해진 히나코가 "이러면 다른 분들이 저를 싫어하실까요?"하고 두려워하자, 고토유키는 강한 어조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라고 히나코를 안심시킵니다.
진정한 히나코가 마시던 술에 대해 묻자, 조상님의 영혼에 바친 쌀과 물을 거른 것이고 신성한 힘이 깃들어있다고 말합니다. 술로 마음이 조금 풀린 히나코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됩니다. 고토유키는 일어선 히나코를 대견스러워하며 그녀의 왼쪽 옷깃에 브로치를 달아줍니다. 그 브로치는 히나코가 '자신의 것'이라는 의미라고 말하면서요. 그리고 그는 히나코를 위해 준비한 것이 하나 더 있다며, 그녀를 어디론가로 이끕니다.
그렇게 고토유키와 히나코가 어디론가로 가던 도중, 갑자기 준코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부드러운 어조로 히나코와 잠시 둘이서만 이야기할 수 있게 해달라고 고토유키에게 부탁하죠. 고토유키는 히나코를 바라보며 잠시 주저하지만, 곧 준코에게 깍듯이 인사하며 "그럼 전 잠시..."라고 말하고는 멀찍이 떨어져줍니다. 준코는 히나코에게 "제대로 죽였어?"라고 직설적으로 묻고, 히나코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 하지만, 오늘을 지나도 살아있다면 내가 죽이겠어."라고 말합니다. 준코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고토유키가 모르는 척 끼어들고, 준코는 할 이야기를 다 했다며 어디론가로 사라집니다.
준코를 보내고, 다시 조금 더 걸어가 벽화가 그려진 문을 통과한 고토유키와 히나코는 마침내 고토유키의 선물, 상자에 담긴 반지가 있는 방에 도착합니다. 반지 상자 앞에는 하얀 여우와 검은 여우가 서로 끌어안고 있는 조각상이 있고, 꼬리 부분에 반지를 끼워넣을 공간이 있습니다. 고토유키는 조각상 앞에 서서 히나코를 바라보며 "그럼, 시작할까?"라고 말하고, 히나코는 "네"라고 대답하며 자신의 반지를 여우 조각상에 끼워넣으려 하지만 크기가 맞지 않아 반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당황한 히나코는 고토유키를 돌아보는데, 고토유키는 그런 히나코가 너무 사랑스럽다는 듯이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나코가 자신을 돌아보자 그는 손을 내밀어 자신의 반지와 히나코의 반지를 교환해줍니다. 그리고 여우조각상에 맞는 반지들이 들어가자, 그 너머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합니다.
- 에비스가오카: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 기절했던 히나코는 정신을 차렸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히나코는 부모님의 핏물로 가득한 바닥을 네 발로 기어가 집어든 어머니의 신발을 끌어안고 통곡합니다. 그런 히나코에게 몬스터들이 하나둘씩 다가오는데, 분노에 미쳐버린 히나코는 쇠파이프를 휘둘러 몬스터들을 때려죽이면서 시로무쿠를 쫒아 달려나갑니다.
계속해서 몬스터를 때려죽이며 달려가던 히나코는 이윽고 과자가게 앞에서 시로무쿠를 찾아냅니다. 그런데 시로무쿠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자, 갑자기 격렬한 두통이 닥쳐와 히나코는 바닥에 쓰러집니다. 겨우겨우 두통을 이겨낸 히나코가 마지막 힘으로 시로무쿠에게 쇠빠따를 휘두르지만, 시로무쿠는 그런 히나코를 가볍게 제압해버리죠. 그때, 준코가 다가오더니 "이럴 줄 알았어, 이게 얼마나 무례한 짓인지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죽여!"라고 시로무쿠에게 말합니다. 시로무쿠는 그 말을 듣고도 잠시 주저하지만, 준코는 그게 히나코를 위한 일이라며 다시 한번 강하게 죽이라고 재촉합니다. 결국, 시로무쿠는 히나코를 쥐어짜서 죽입니다.
- 어둠의 신전:
어느샌가 어둠의 신전의 히나코는 다시 여우목상이 가득 들어찬 회랑에 서있었고, 자신의 여우팔을 흝어보던 그녀는 곧 여우회랑을 걸어서 건너가기 시작합니다. 그런 그녀에게 "어머, 정말 예쁜 아이네.", "옷이 날개라더니", "너무 빈약한 신부인데?", "어서 오거라, 부디 편하게 지내렴."같은 어른들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히나코는 그녀를 기다리던 고토유키와 함께 나뭇가지를 제단에 바칩니다.
나뭇가지를 제단에 바치자, 갑자기 히나코의 온 몸을 꽃이 뒤덮는데, 이 꽃들은 히나코의 온 몸을 감싸안았다가 다시 사방으로 흘러내립니다. 그리고 흘러내리는 꽃잎 속에서 등장한 진정한 히나코는 이제껏 에비스가오카에서 온갖 참사를 몰고 다니던, 신부복을 입은 얼굴 없는 괴물, 시로무쿠였습니다.
- 에비스가오카:
과자가게 앞에서 시로무쿠가 히나코를 쥐어짜 죽인 직후로 돌아갑니다. 시로무쿠는 서서히 녹아내리는 에비스가오카의 히나코의 시체를 일별하고, 천천히 어디론가 걷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걸어가 도착한 곳은 그녀가 태어난 집, 시미즈 저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저택 앞에는 그녀의 부모님, 시미즈 칸타 씨와 시미즈 키미에 여사가 집앞에 나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로무쿠, 히나코의 모습을 본 시미즈 여사는 기쁨과 자부심, 감동이 가득한 얼굴로 "히나코야, 너무 예쁘구나."라고 이야기해줍니다. 그리고, 한참동안 말없이 땅을 쳐다보고 있던 시미즈 씨도 아내가 재촉하자 마침내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여기는 이제 네 집이 아니다. 혼자서 돌아온다 한들, 문턱을 넘을 생각은 하지 마라."라고 엄하게 말합니다. 그 말에 대한 대답으로, 시로무쿠는 시미즈 부부에게 깊이 고개숙여 인사하고는 오른손에 아버지, 왼손에 어머니의 머리를 잡고 쥐어짜 살해합니다. 그 광경 뒤로, 에비스가오카의 히나코가 내지르는 처절한 절규가 메아리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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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나코와 고토유키가 술을 마시는 장면은, 신토 결혼식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 중 하나인 '삼삼구도'의 장면입니다. 앞서 설명한 여러 예식들은 지역마다 하는 곳도 있고, 안하는 곳도 있고, 다르게 하는 곳도 있고 그런 반면, 신토식 결혼식을 하는데 삼삼구도는 거의 들어가는 편입니다. 무려 무로마치 막부(14세기)시절부터 내려온 전통이라서. 삼삼구도(三三九度)라는 이름은 '3/3/9의 예법'이라는 뜻인데, 이는 작은 잔, 중간 잔, 큰 잔(3)에 담긴 술을, 신랑 신부가 각 잔마다 번갈아 한모금씩, 총 세 모금으로 나눠 마셔서(3) 결국 (9)모금의 술을 마시는 절차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개의 잔은 하늘, 땅, 사람을 의미하며, 각각의 잔을 세번씩 나눠 마시는 것은 조상에 대한 감사, 두 사람의 맹세, 자손 번영을 의미합니다. 혹은 과거, 현재, 미래로 해석하기도 해요. 부부에게 좋은 일만 일어나고, 나쁜 일이 없기를 비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같은 잔의 술을 서로 나눠마심으로써 인연을 연결한다는 뜻도 있고.
* 게임에서는 고토유키가 작은 잔을 건네줌-> 히나코가 한모금(1)-> 고토유키가 나머지를 마심(2)->고토유키가 중간 잔에 술을 담아 건네줌-> 히나코가 여우팔로 중간 잔을 받아들다가 반쯤 흘리고 한모금 마심(3)-> 그 잔을 받아서 고토유키가 다시 한모금(4)-> 다시 히나코가 한모금(5)-> 마지막으로 고토유키가 큰 잔을 들어 먼저 한모금(6) 마시고 히나코에게 건네줌->히나코가 한모금(7)->고토유키가 한모금(8) 마시고 옆에 큰 잔을 내려놓으니까, 합쳐서 총 8모금을 마신거죠. 그래서 틀렸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고토유키가 히나코에게 작은 잔을 건네주기 전에 먼저 한모금을 마신 것입니다. 원래 삼삼구도의 첫 잔은 남편이 마시는 거거든요. 그리고 고토유키가 큰 잔을 내려놓는 옆을 보면 공물로 올렸던 술병과 똑같이 생긴 술병, 그리고 작은 탁상 위에 포개져 있는 작은 잔과 중간 잔을 볼 수 있습니다.
* 이런 엄숙한 의식에서 받은 술을 쏟는 것은 당연히 큰 무례입니다. 엄청난 죄라고는 할 수 없지만, 별로 운이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죠. 그래서 술을 흘린 히나코가 "이런 모습을 보여서, 다른 분들이 저를 싫어하실까요?"하고 고토유키에게 물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게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주변에 하객들이 잔뜩 모여 히나코와 고토유키를 보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그래서 고토유키가 크고 강한 어조로 '그런 건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고 달래준거고.
* 특히 영미권 친구들이 '조상님의 영혼에 바친 쌀과 물을 거른 것'라는 고토유키의 설명을 듣고 그 술을 '연금술 같은 주술의식으로 만들어낸 마법의 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냥 쌀로 만든 일본 전통주라는 뜻이에요. 조상님의 영혼에 바쳤다는 이야기는 다른 음식들처럼 공물로 제단에 올렸다가 시간이 지나 제단에서 내린 쌀로 만들었다는 뜻이고. 애초에 음식물을 제단 위에 올리고 그대로 내버려두면 당연히 썩어서 난처해지죠. 그래서 제단에 올린 공물은 시간이 지나면 회수해서 사람이 먹는데, 이렇게 제단에 올렸다가 회수한 쌀로 빚은 술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마시면 고통이 줄어든다."라는 고토유키의 말도, 술이니까 당연히 진통효과가 있는 거고.
* 다만, 그 술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고, 어차피 히나코도 20대니까 술을 마셔도 되긴 하지만, 현실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삼삼구도는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ㅁㅇ, 그것도 환각제 계열의 중증 ㅁㅇ중독자에게 술을 먹인 것이니까요. 어쩌면 바로 그래서 결혼식 난동사건이 일어났을수도 있고. 역시 전문가와의 상담을 거치지 않은 약물 남용과 과도한 음주는 건강에 좋지 않군요.
+ 여담으로, 삼삼구도의 의식이 왜 이렇게 3과 9에 집착하냐 하면, 동양 세계관에서는 3을 특별한 숫자, 9는 완전한 숫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고대 중국의 수학책(점술책으로도 쓰였음)인 주역에서는 불완전(1)과 대립(2)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3)이야말로 완전함, 균형, 순환을 만들어내는 수라고 해석했어요. 노자의 도덕경에서는 '하늘이 하나요, 땅이 둘이니, 셋에서 만물이 생긴다.'라는 구절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셋에서 생긴 만물'이 바로 하늘, 땅, 사람인거죠. 그래서 동양수학에서는 3을 균형, 조화, 창조의 수로 여깁니다. 이 3이 세 번 반복되어 만들어지는 9(3+3+3)은 동양에서 '완전한 숫자'라고 부르며 '완전함, 극에 달함, 균형'의 의미로 여겼어요. 10은 0으로 돌아가는 뜻이라고 생각해서 9를 만수(가득찬 숫자)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 혹시나 해서 추가 여담으로,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3과 9는 특별한 수로 다루어졌습니다. 서양쪽에서 3하면 당연히 신성, 신, 예수를 하나로 여기는 삼위일체가 바로 떠오르죠. 아기 예수가 헤롯왕의 폭정을 피해 마구간에서 태어나자, 그를 찾아온 동방박사들이 세 개의 선물을 바치니 각각 금, 유향, 몰약이었습니다. 9가 상서로운 숫자로 쓰인 것은 마찬가지였죠. 대표적으로 3x3배열로 나뉘어진 9칸의 정사각형에 가로로 더해도, 세로로 더해도, 대각선으로 더해도 같은 숫자 배열을 새겨넣은 모양을 마방진이라 하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마방진은 신비로운 힘이 깃들었다고 여겨져 부적으로 쓰였습니다. 현대의 친구들은 5x5배열인 사토루 마방진이 좀 더 친숙하겠지만요. 심지어 현대에도 3은 아주 중요한 수 중 하나입니다. 닫힌 평면 도형을 만들어내는 최소 조건이 3개의 꼭짓점이고, 따라서 피타고라스나 유클리드 기하학이 기본적으로 삼각형 모양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 고토유키가 히나코에게 달아주는 브로치를 잘 보면 미소짓는 여우와 2개의 활짝 핀 꽃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꽃은 모란꽃인데, 동양에서 부귀와 번영, 그리고 행복한 결혼을 의미하는, '꽃의 왕'이라 불리는 꽃입니다. 딱 보기에도 화려하고 예쁘기 때문에 아름다운 여성을 칭찬하는 의미로도 쓰이고. 모란꽃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삼지창 형태의 잎사귀인데, 잘 보시면 브로치에도 삼지창 형태의 잎사귀가 달려 있습니다.
* 또한, 이 브로치도 시계열이 찢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왜냐하면 2회차 이후에 보면 이미 한참 전에 히나코가 브로치를 옷깃에 달고 있고, 의식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브로치를 만지며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1회차때의 히나코도 똑같은 곳을 어루만지고 있는데, 브로치가 안 보여서 손모양이 어색하죠. 실제로는 1회차때도 그 위치에 브로치가 있는거에요. 그리고 2회차 이후, 영도를 정화하면 이 브로치를 공양할 수 있는데, 히나코가 공양 후 뒤돌아서마자 브로치가 순식간에 녹슬어버립니다. 속박에서 해방된 히나코를 상징하는 거죠. 여담으로, 브로치가 청록색으로 녹스는 광경을 보면 그것이 청동(구리+주석 합금)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60년대 일본에서 청동 공예품은 레트로풍 장식으로 인기가 높았어요.
* 고토유키와 히나코가 반지 교환을 하러 가는 도중, 준코가 히나코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장면을 보면, 고토유키가 잠시 히나코를 바라보면서 주저하다가 준코에게 굉장히 깍듯하게 인사하고 자리를 피해줍니다. 실제로 고토유키의 항렬에는 고토유키 하나만 있는 게 아니고, 고토유키의 배다른 누나가 둘 더 있어요. 의사의 메모에 '기적적으로 회복한 장녀와 차녀'의 이야기가 나오니까요. 원칙대로 따지자면 그 누나들이 적자, 즉 본처에게서 태어난 정당한 자손이지만, 하필 둘 다 여자라서 사생아지만 남자인 고토유키가 후계자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고토유키가 누나라는 존재를 보는 입장이 친누나를 보는 것처럼 편하거나 허물없지는 않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 경험이 히나코의 언니, 자신에게는 또다른 누나인 준코에게 아주 깍듯한 것에도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죠. 물론 고토유키는 예의바르고 멋진 남자이므로 누구에게나 깍듯하긴 하겠지만. 거기다 자신의 첫사랑이자 신부인 히나코의 언니니까 더 조심하는 것도 있겠죠. 원래 남자는 처가에 미움받기 싫은 법이니까요.
* 준코가 히나코에게 죽였네 뭐네 하는 말은 당연히 '친구들과 과거에 대한 미련을 끊었느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히나코가 그 말에 그렇다고 대답하면서도 태도가 애매합니다. 땅을 보면서 힘없이 "...응."이라고 대답하니까요. 그래서 살짝 화가 난 준코가 "확실히 미련을 끊어!"라고 강하게 히나코를 질책했고, 그 와중에 목소리가 높아지자 고토유키가 돌아와서 짐짓 모른척 하면서 둘을 말린 거죠. 아무리 신부 가족이라도, 결혼식 도중에 신랑을 떼어놓고 신부와 따로 이야기하거나 말싸움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사실, 큰 실례죠. 그래서 준코가 고토유키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 2회차 이후에서는 준코의 대사가 살짝 달라지는데, 이 때는 준코가 다짜고짜 "(미련이) 아직 살아있지?"라고 확신에 찬 어조로 묻고, 히나코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시간을 더 벌어주고 싶었지만, 미련은 이제 끊어야 해."라고 말합니다. 준코가 게임 맨 처음, 에비스가오카에서 환각의 히나코에게 사다리 던져준거 기억나시나요? 그러니까 준코도 나름대로 히나코에게 기회를 주려고 계속 시간을 벌어주고 있던 거에요. 그런데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것 같으니까 노선을 바꿔서 아예 강하게 다그치는 쪽으로 말하기 시작하는것입니다. 정말 착한 언니군요.
* 반지를 끼워넣는 여우조각상, 검은 여우와 흰 여우가 서로 껴안고 있는 조각상은 흰 여우가 고토유키, 검은 여우가 히나코입니다. 둘의 머리색과 똑같죠. 그리고 잘 보면, 두 여우의 자세가 조금 다릅니다. 흰 여우가 자기 품에 검은 여우를 쏙 넣어서 끌어안고 있어요. 흰 여우는 검은 여우가 자신의 품에서 빠져나가지 않도록 고개를 살짝 안쪽으로 비틀고 있습니다.
* 히나코가 반지를 여우조각상에 끼워넣을 때 맞지 않았던 이유는, 원래 결혼식에서 반지는 상대방에게 끼워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히나코의 손에 들린 반지는 고토유키에게 끼워줘야 할 반지인데, 그것을 자기가 끼우려 했으니 안맞은거죠. 그리고 그런 히나코를 보며 고토유키가 그윽한 미소를 짓는 이유는, 히나코가 반지를 다른 누군가에게 끼워줘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고.
* 히나코가 어둠의 신전 회랑을 지나 나뭇가지를 제단에 올리는 절차는, 하얀 종이를 매단 비쭈기나무를 제단에 바치는 절차인 '다마구시(玉串, tamagushi) '입니다. 보통은 이 다마구시가 신토식 결혼식의 마지막 행사입니다. 단, 다마구시를 꼭 결혼식에서만 하는 건 아니고, 신토식 절차에는 의레 다마구시가 들어가있어요. 물론 실제 비쭈기나무 가지는 게임에서 나오는 것처럼 뭔 사슴뿔 꺾어놓은 것마냥 괴상하게 생긴게 아니라 그냥 나뭇가지처럼 생겼고, 초록색 잎사귀도 달려 있습니다. 히나코가 ㅁㅇ중독 상태라 이상한 모습으로 보고 있는거죠. 또한 게임에서 보이는 비쭈기나무에는 이전 공물들과는 다른 형태의 흰색+붉은색 선이 합쳐져 큰 동그라미를 그리는 매듭이 묶여 있는데, 이것도 앞서 공양물에서 설명했던 '의미를 가진 매듭, 미즈히키'입니다. 그 장면에서 제단을 잘 보면, 게임 맨 처음 헌찬에서 히나코가 바쳤던 공물들이 2개씩 올라가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고토유키와 히나코, 두 사람의 것이라 두개인 거죠.
* 그리고 마침내 히나코가 시로무쿠로 재탄생하는 모습을 잘 보면, 앞서 언급한 하코세코, 부채, 카이켄이 옷긴 사이와 가슴 허리끈 위에 꽂혀있는게 보입니다. 가장 눈에 띄는 머리 위에 쓰인 하얀 모자는 와타보우시(綿帽子)라는 모자인데, 이렇게 큰 모자를 머리 위에 쓰는 이유는 질투 때문에 이마에 솟아나는 뿔을 가리기 위해서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원래는 솜으로 만든 방한모자였다는 설이 더 유력하긴 합니다. 저거 실제로 써본 사람이 직접 말해준건데, 무게도 엄청 무겁지만 그건 둘째치고 엄청나게 덥대요. 저 커다란 모자 안쪽이 비어있는게 아니고 솜이 차있는 구조라서 그렇다고 하더군요. 또한 이 시로무쿠는 얼굴 부분이 잘려나가서 없는데, 이건 다음 칼럼에서 깊게 다루는 주제라 넘어갑니다.
* 시로무쿠가 집 앞에서 시미즈 부부를 살해하는 장면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시미즈 여사는 당연히 막내딸이 드디어 결혼용 복장을 입고 자기 앞에 서있으니 너무 기쁜 거죠. 그런데 시미즈 씨는 왜 엄하게 말하고, 왜 그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걸까요? 당시의 문화적 맥락에서 여성은 결혼하면 신랑측 가족이 된다는 인식이 강했고, 그래서 결혼 후 혼자서 친정으로 돌아가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히나코가 혼자서 시미즈 저택의 문턱을 넘는다는 것은 곧 결혼 생활에 실패해서 츠네키 가에서 쫒겨났거나, 스스로 도망쳤다는 의미입니다. 결혼식에서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죠. 그래서 시미즈 씨는 "시댁에서 남편과 잘 살아라, 이 집으로 돌아올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빌겠다, 부디 행복하게 살아라."라는 의미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시미즈 칸타 씨는 분명 미치광이 가정폭력범이지만, 그래도 그가 딸을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틀림없으니까요. 다만 그는 억눌리고 강요된 시대상으로 인해 '남자는 무뚝뚝하고 강인하고 권위주의적이어야 한다'라는 잘못된 관념에 얽매인 인물이었고, 그래서 애정표현조차 그렇게 비뚤어진 형태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엄하게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유도 똑같고. 시미즈 씨에 대해서는 다른 칼럼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으니 넘어갑니다.
* 시로무쿠가 집앞에서 친부모에게 깊게 절을 하는 것은 실제로 있는 전통입니다. 키워주셔서 감사하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의 인연이 끝났다는 의미였죠. 심지어 요새도 지역에 따라 하는 곳이 있어요. 다만 신부행진이 있으면 보통은 아침에 친정집 앞에서 출발할 때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게 보통입니다. 그 이후, 결혼식에 신부의 친부모가 참여하더라도 말이죠. 물론 시로무쿠가 실제로 부모님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미련을 끊은 것이 그렇게 표현되는 것일 뿐이니까, 실제로는 현실의 히나코가 부모님과 집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기억을 되새기면서 미련을 끊은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시로무쿠가 부모를 살해하는 환각 장면에서 울려퍼지는 에비스가오카 히나코의 비명소리는, 이전 에비스가오카 히나코가 시미즈 부부 보스전을 치른 다음, 시로무쿠에게 살해당하는 부모님을 보면서 내질렀던 비명소리와 완전히 똑같은 소리입니다. 두 컷신이 색감이나 구도가 너무 달라서 알아보기 힘들지만, 결국 같은 사건인거죠. 정확히는, 같은 사건에 대한 히나코의 내면의 기억.
* 여기서 시계열이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게임 상에서 비춰지는 순서대로라면 1) 히나코와 시미즈 부부의 전투-> 2) 시로무쿠의 시미즈 부부 살해-> 3) 히나코의 시로무쿠 추적-> 4)시로무쿠의 히나코 살해-> 5) 시로무쿠 시점에서 시미즈 부부 살해 순서로 이어지니까요. 시간선으로 정리해보면 (a) 시로무쿠가 시미즈 부부를 죽이는 것을 목격한 히나코가 시로무쿠를 쫒아가 덤비다가 과자가게 앞에서 살해당하는 시간선 (b) 시로무쿠가 과자가게 앞에서 히나코를 죽인 뒤 마을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 시미즈 부부를 죽이는 시간선이 서로 모순됩니다. 거기다 b시간선의 마지막에는, a시간선의 맨 처음에 울려퍼지던 히나코의 비명이 들려옵니다. 즉, 두 시간대가 서로 루프하고 있어요.
* 바로 그래서 위에서 누누이 '시계열이 찢어져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게임의 순서를 시간의 흐름과 똑같다고 해석하면 여기서 막히니까요. 시간 순서를 따지지 말고, 상황을 '사람의 마음'이라고 해석해야 앞뒤를 맞출 수 있습니다. 즉, 현실의 결혼식장에 있는 히나코의 마음 속에서는 'a. 부모님에 대한 미련을 가진 환각의 인격'과 'b. 그 미련을 끊으려는 현실의 인격'이 서로 비등비등하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때 1)a인격은 기본적으로 ㅁㅇ에 의해 분리된 해리성 인격이므로 불안정했고, 그래서 a인격이 우세할 때는 현실 히나코의 상태가 이상해집니다. 2)현실 히나코의 이상한 상태를 본 현실의 준코가 현실의 히나코를 다그쳤고, 현실의 인격인 시로무쿠, b인격이 마음을 다잡고 미련을 버렸습니다. 3)그러나 미련이라는 것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현실 히나코 안에는 다시 미련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현실 히나코는 다시 처음의 생각(부모님에 대한 미련)으로 돌아가버렸고, 그 결과로 a.인격이 다시 부활한거죠.
* 약물 중독자, 특히 환각제나 항우울제를 남용하는 중독자들은 많은 경우 생각의 루프(thought loop)현상을 겪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돌다가 맨 처음에 하던 생각으로 돌아오고, 거기서 다시 생각이 이어지다가도 다시 처음에 하던 생각으로 돌아와서, 결과적으로 계속 같은 생각만 하게 되는 식이죠. 이렇게 반복되는 생각이나 행동의 조절에는 뇌의 선조체(Striatum)가 관여하는데, 약물이 이 선조체를 과항진시켜 똑같은 생각을 끝없이 반복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환각제인 LSD의 경우, 사용자의 약 70% 정도가 '생각의 루프 현상'을 겪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게임에서도 환각제 남용 때문에 정신이 해리되어 있는 히나코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난거죠. 그리고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이 게임은 '뱅글뱅글 돌다가 맨 처음으로 돌아오는 무한반복'을 아주 깊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전 스테이지가 바로 '3개의 시간대를 무한히 반복하며 헤매다가 매번 처음으로 돌아오는' 시미즈 저택이었잖아요.
+ 여담으로, 약물 사용자가 아닌 보통의 사람도 살면서 생각의 루프에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특히 부정적인 생각의 루프에 빠지기 쉽죠. '난 왜 이 모양이지?->최근에 있던 나쁜 일->그 이유는 옛날에 겪었던 나쁜 일->난 왜 이 모양이지?'처럼 반복되기가 쉽죠. 왜냐하면 인간의 뇌는 손실편향, 즉 이득보다는 손실에 민감한 방향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생존에 훨씬 더 유리하니까요. 바로 그래서 약물 사용자가 아닌 보통 사람도 '나빴던 일을 상기시키는 트리거'에 마주쳤다가 생각의 루프에 빠지며 우울해지는 일이 일어나는거죠. 간단한 심리학적 기법 몇개만 알고 있어도 이 생각의 루프를 탈출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이런 기법들은 잘 알려지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우울한 하루를 보내거나, 최악의 경우 우울증에 걸리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8) 파멸의 질주
- 어둠의 신전:
에비스가오카의 히나코는 문득 깨어납니다. 어느샌가 그녀는 에비스가오카를 벗어나 어둠의 신전에 있었죠.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몬스터들을 후려쳐 죽이며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때리고, 부수고, 죽이며 나아가던 에비스가오카의 히나코는 마침내 결혼식이 치뤄졌던 본당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뭔가를 바라보고 있던 준코는, 히나코의 모습을 보고는 놀라서 "설마 살아있었을 줄이야..."라고 놀랍니다. 히나코는 준코도 어짜피 '그쪽 사람'이니 믿을 수 없다며,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히나코를 준코가 어떻게든 설득해보려 하지만, 히나코는 "돌아가고 싶어!"라고 외치며 붉은 알약을 한가득 손에 털어넣고 삼켜버립니다.
놀란 준코가 "그건 무슨 약이야? 언제부터 먹은거야? 그렇게 먹어도 괜찮아? 그 약을 먹는 걸 그만둬!"라고 말하며 그녀를 말리려 들지만, 히나코는 "당연히 괜찮지, 이 약은 내 마음을 편하게 해줘, 내게 간섭하지마!"라고 외치며 준코를 밀쳐냅니다. 그리고 밀쳐진 준코는 갑자기 뻣뻣하게 굳어버리죠. 굳어버린 언니를 무시하고, 제단으로 걸어올라간 히나코는 쇠빠따를 마구 휘둘러 제단을 박살내버립니다. 그때 뒤에서 시로무쿠가 나타나 마구 분노한 소리를 질러대죠. 그 소리에 뒤로 돌아선 히나코는 시로무쿠에 "날 돌려줘, 빼앗은 걸 전부 돌려줘!"라고 외치며 달려들어, 마침내 시로무쿠도 때려죽여버립니다.
그렇게 히나코가 시로무쿠를 때려눕히자, 갑자기 사방에서 수많은 괴물들이 나타나 다가옵니다. 그 괴물들을 때려눕히고 걸어가는 히나코가 보는 세계가 갑자기 에비스가오카의 풍경으로 변하고, 어디선가 "잠깐, 이게 뭐하는 짓이야?", "네놈, 제정신이냐!"라고 히나코를 비난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나 히나코는 "시끄러워, 비켜!"라고 말하며 쇠빠따를 휘두르며 계속 나아갑니다.
그러자 갑자기 풍경아 다시 어둠의 신전의 의식장소, 여우팔과 가면과 낙인을 이식받았던 곳으로 바뀝니다. 어디선가 고토유키가 "다들 기다려... 히나코와는 내가 대화하지. 히나코, 왜냐... 어째서...? 네 마음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라고 비통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히나코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어둠의 신전을 달려나갑니다.
풍경은 다시 시미즈 저택으로 변합니다. 계속해서 친구들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퍼집니다. 사쿠코가 "히나코, 계속 약속했었잖아, 이 배신자!", 린코가 "왜 이러는거야? 그만둬! 슈를 훔쳐간 너, 용서할수 없어!", 슈가 "미안하다, 히나코. 정말 미안... 내가 틀렸어... 나는 단지... 그래도 이렇게 될 줄은...."이라고 말하죠.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히나코는 "친구들 목소리로 말걸지마! 나를 내버려둬!"라고 외치며 그 모든 목소리를 무시하고 나아갑니다.
풍경은 다시 어둠의 신전으로, 어떤 큰 문을 열고 나간 히나코는 정신없이 앵앵대는 사이렌 소리와 사방에서 붉은 불빛이 깜박거리는 장소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다리던 것은, 이미 한번 물리쳤던 시로무쿠였죠. 히나코는 "우리를 방해하지 마아아아아아!"라고 절규하며 쇠빠따를 들고 시로무쿠에게 덤벼듭니다.
한참 후, 경찰 무전에서 여러 경찰들이 정신없이 대화하는 내용이 지나갑니다. 정리하자면 "피의자로 추정되는 여성에게 습격당한 남성 2명 중 한명 심정지, 일부 피해자에게 사용된 식칼 발견하지 못했음, 여성 피의자는 20대, 새신부 복장, 신장은 160cm가량, 츠네요시 신궁에서 도주중, 흉기 소지 가능성 높음, 피의자는 현장에서 적백색 캡슐 형태의 알약을 범행 도중 틈틈히 복용했음"이라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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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적으로, 쇠빠따 히나코든 시로무쿠든 '현실의 히나코'의 머릿속에 있는 인격들입니다. 그래서 환각속에서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이죠. 실제로 쇠빠따 히나코도 시로무쿠에게 당해서 재가 되어 사라졌다가 다시 부활하지만, 시로무쿠 역시 쇠빠따 히나코에게 당해 재가 되어 사라졌다가 부활해서 다시 나타납니다.
* 쇠빠따 히나코가 몬스터들을 해치우며 전진하는 곳은 신전 외곽에서 결혼식장으로 이어지는 길인데, 히나코는 결혼식을 하면서 이 길을 한번 지나가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척척 지나가는거죠. 다만 처음에 지나갈 때는 너무 어두워서 등불을 들고 갔었는데, 이때는 허공에 파란 도깨비불들이 잔뜩 떠있어서 주변이 훨씬 잘 보인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 히나코와 준코가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에서, 준코가 히나코를 설득하고 약을 먹지 못하게 말리려다 갑자기 굳어버리는 것은 상당히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2회차때 보면, 실제로는 서양식 인형이 준코에게 달라붙어 그녀를 제압해버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준코가 자신에게 달라붙은 인형을 보고 "너는(お前は, omaewa)... 대체?"라고 말하는데, 이 '너는(お前)'이라는 말은 사람을 가리키는 2인칭 대명사입니다. 아주 넓게 잡아서 동물도 그렇게 부를 수는 있는데, 물건을 그렇게 부르진 않아요. 다시 말해 현실의 준코에게 인형은 사람으로 보인 거죠. 만약 현실의 준코한테도 인형이 인형모습 그대로 보였다면, 준코가 "이건(これは, korewa)... 대체?" 혹은 "이 물건은(この物は, konomonowa)... 대체?"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현실에서는 갑자기 히나코 상태가 안좋아지는 것을 보고 준코가 다가가 히나코를 케어하려 했지만, 잠입해있던 슈가 결혼식을 파탄내기 위해 준코를 제압한 것이죠.
* 2회차 엔딩에서는 준코 다음에 고토유키가 히나코를 구하러 오는데, 갑자기 뒤에서 슈가 나타나 야구배트로 고토유키의 뒤통수를 내려칩니다. 그리고 뒤통수를 맞고 쓰러진 고토유키를 죽이기 위해 슈가 야구배트를 높이 들어올리자 히나코가 자기 몸으로 고토유키를 덮어서 막아줘요. 이 시퀀스를 포함해 게임 전체적으로 슈가 나올 때는 인형이 안 나오고, 인형이 나올 때는 슈가 안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최종보스인 츠구모가미의 가슴 가운데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2회차 엔딩에서는 여기에 슈가, 3회차 엔딩에서는 같은 곳에 인형이 들어가 있습니다. 슈의 행보에 대해서는 다른 칼럼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 여담으로, 시로무쿠 보스전에서는 배경을 잘 보면 여우들의 눈빛만 검은 허공에 떠서 별처럼 빛나고 있는데, 이 눈빛들을 가만히 보다보면 깜빡깜빡하면서 눈을 감았다 뜨는 여우들도 보입니다. 귀여워요.
* 전체적인 시퀀스에서, 히나코에게 들리는 목소리 중 '물 속에 잠긴 듯 웅웅대며 들리는 목소리'는 현실에서 들리는 것이고, '현실에서 듣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환각에서 들리는 것입니다. 히나코가 달려가는 시퀀스에서 보면 고토유키, 슈, 하객들의 목소리는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하게 들리고, 린코와 사쿠코의 목소리는 마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립니다. 현실에서는, 린코와 사쿠코가 벌써 오래전에 결혼식장에서 쫒겨났으니까요. 그래서 그 둘만 뜬금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거고.
* 이후 스토리는 경찰 무전을 통해 '슈가 준 ㅁㅇ 때문에 환각에 빠진 히나코가 결혼식장에서 난동을 부리고 도망쳤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출동한 소방관이 무전으로 '10명 정도가 바닥에 쓰러져 있다'고 했으니, 현실의 히나코는 사람이 수십명 모인 결혼식장 한가운데에서 단신으로 난동을 부리며 10여명을 때려눕힌 것입니다. 쇠빠따 휘두르는 솜씨가 실로 대단했던 거죠. 그 정도 재능이라면 다른 것을 목표로 삼았어야 했는데...
3. 나는 왜 그렇게 해석했는가?
제가 해석한 1회차의 타임라인은 위와 같습니다. 원래는 다른 회차 플레이와 멀티 엔딩 분석도 글로 하나씩 정리하고 있었는데, 겹치는 부분이 워낙 많고 일일이 대조하다보니 너무 난잡해져서 그냥 1회차 플레이 위주로 정리했습니다. 말투도 처음엔 모든 문장에 "~~라고 사료됩니다."를 일일이 붙이다가 너무 난잡해지길래 깔끔하게 "~~입니다."로 수정한 것이고요.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위의 해석은 '완전한 정답'이나 '유일한 해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작진들은 이 게임의 스토리가 여러 방식의 해석이 가능하도록 구성했다고 이미 밝혔어요. 그래서 '단 하나의 올바른 스토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해석하려 하면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모든 조각을 올바르게 맞추면 반드시 하나의 완성된 모양이 되는 직소 퍼즐'을 다루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조각이 벽도, 바닥도, 철도, 나무도 될 수 있는 레고'를 다루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제대로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위 해석 또한 읽으시는 분 각자의 '정답'을 찾는 과정에서 재미로 읽어볼만한 여러 생각 중 하나로 여겨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보신 것처럼 저는 위에서 이 게임의 내용을 해석하면서 오컬트적 존재, 예컨대 신이나 영혼 같은 부분을 전부 제외했습니다. 오컬트적 존재의 대표격인 '여우신'이 명백하게 인격을 가진 사람, 결혼식에서 술을 많이 마셔서 흥분한 사람으로 묘사되므로, 그 대척점에 있는 인형을 포함한 모든 것도 현실의 것이라고 해석하는 쪽이 합리적이고 깔끔하거든요.
실제로 저는 이 글을 쓰면서 오컬트가 존재한다고 해석한 타임라인도 따로 정리했는데, 그쪽도 앞뒤는 맞아 떨어집니다. 애초에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말이 되도록 짜여진 부분이 여럿 있으니까요. 멀티 엔딩도 마찬가지로, 저는 모든 엔딩이 '그럴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는게 맞다는 파입니다. 애초에 제작진이 진엔딩은 없다고 이야기했으니까요. 제작진이 그렇게 말한 이상, 무엇이 진엔딩인지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요.
다만, 이 게임은 '어느 쪽으로든 말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너무 애매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현실과 오컬트를 섞어서 해석하려하면 오히려 전체 이야기의 밀도가 흐릿해져요. 예컨대 히나코의 난동이 'ㅁㅇ 중독', '신령들의 싸움' 두 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해봅시다. 그럼 이야기 내에서 정확히 어느 선까지가 ㅁㅇ 중독 때문에 벌어진 문제고, 정확히 어느 선부터 신령들의 싸움 때문에 벌어진 문제인지를 가르기가 굉장히 애매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예 처음부터 ㅁㅇ 중독 쪽으로 결론을 내린 후 정리했습니다. 앞뒤가 잘 맞고, 이해하기 쉽고, 깔끔하니까요. 취향 수준의 문제니까요. 이렇게 한쪽으로 해석할 경우, 반대쪽 해석의 근거로 사용되는 파츠들이 전부 버려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전체 스토리가 여기저기 구멍난 젠가처럼 되버린다는 점은 아쉽지만.
마지막으로, 위에서 언급한 현실의 여러 자료들 역시 꼼꼼하게 검증하기보다는 기억나는 것 위주로 먼저 적고 구글에 검색해서 맞는지 확인하는 방법으로 간단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틀렸거나, 틀리진 않았어도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있을수도 있어요. 이 글은 게임 내용에 대한 팬의 분석글일 뿐, 논문이나 학술적 가치를 지닌 자료가 아닙니다. 그 점 꼭 감안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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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큰 그림,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큰 줄거리를 흝어보았으니, 다음 칼럼부터는 세부적인 부분들에 대한 제 생각과 고찰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근데 일일이 사진 넣으려니까 시간이 너무 소요되서, 다음편부터는 사진없이, 그리고 사건 내용에 대해 다루기보다는 고찰 위주로 다루려고 합니다. 칼럼 7편 쓰는데 총 35시간 정도 걸렸는데, 그중 20시간이 이 1편 하나 쓰는데 소요되네요.
자 그럼 여기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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