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산> 의 권율
1595년(선조 28년) 초 당시 남해안 일대 지역으로 철수한 일본군과 대치하면서 상황을 주시하던 전방의 조선군과 그 장관들을 절제하던 것은 도원수(道元帥) 권율(權慄)이었다. 당시 권율은 경상좌병사 고언백(高彦伯),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 삼도 방어사 권응수(權應銖), 전라도 병마사 이시언(李時彦),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 경상좌수사 이수일(李守一), 순변사 이일(李鎰) 등의 장관들을 절제하며 일본군에 대한 일선 대응과 정보 수집, 탐망등 일선에서 이루어지는 조선군의 군사적 행동을 총괄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요동도사에 발송한 1595년 3월자 회자에 의하면 당시 권율은 원임 진주목사 박종남(朴宗男)과 함께 경상도 함안(咸安)에 주둔하면서 군을 절제하고 있었다.1 이는 조선의 공식 외교문서였으므로, 그 신뢰성에 있어서는 다른 사료들보다 상대적으로 월등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해당 자문의 계개(計開)에는 다른 기술이 있다. 여기서 권율은 함안이 아니라 함양(咸陽)에 있는 것으로 기술된 것이다.
함양과 함안은 같은 경상도에 존재하는 지역으로서, 현재도 자칫 착각을 할 수 있는 지명이다. 그렇기에 자문을 작성하던 도중에 오기가 발생하여, 권율이 함안에 주둔하고 있는지 함양에 주둔하고 있는지 같은 자문내에서조차 불분명해 졌다.
물론 당시 권율은 제도도순찰사*이자 도원수로서 어느 한 지역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면서 명령을 내리고 보고를 수용하고 군을 시찰하며 감독을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자문의 발송 목적은 엄연히 당시 남부 지역에 있던 조선의 주요 장수들의 신상과 주둔지, 병력을 명의 요구대로 전달해 주는 것이었으므로, 권율의 주요 주둔지로 지목코자 한 지역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것이 자문내에서 발생한 오기로 인해 함안과 함양, 둘로 갈리는 것이다.
과연 자문 작성 당시 조선 조정이 권율이 있던 지역으로 지목코자 했던 것은 함양이었을까. 함안이었을까.
필자는 조선 조정 입장에서 권율의 주둔지로 실제로 표기를 의도한 지역은 '함양'일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난중잡록』의 기술이다.
『난중잡록』을미년(1595년) 1월 6일에 권율이 남원에서 영남(경상도)로 들어갔다는 구절이 보이며2, 그 뒤 1월 24일의 기록에 진운홍(陳雲鴻)과 낙일룡(駱一龍)이 함양에 이르러 권율로부터 대접을 받았다고 기술되고 있다.3 당시 진운홍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의 회담 이후 복귀하던 차였다.4 권율은 함양에 머무르고 있다가 진운홍을 대접한 것이다.5 이를 통해 회자 작성 전 권율이 확실히 함양에 주둔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둘째로, 『고대일록』의 기술이다.
『고대일록』은 함양에서 활동한 의병장 정경운의 일록이다. 그렇기에 함양에서 있었던 여러 일들에 대해 기술이 되어 있는데, 여기서 1595년 초 당시 도원수 권율이 함양에 자주 주둔한 것이 서술되고 있다. 특히 『난중잡록』과의 교차검증을 통해 최소 1월 7일~27일까지 권율이 함양에 주둔하고 있었던 사실이 파악되고, 또한 실제로 권율이 진운홍을 대접한 시기가 1월 27일임이 드러난다.6 이 이후에도 권율은 함양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직임을 수행했고, 이 역시 『고대일록』에 기술되어 있다. 이를 통해 권율이 영남에서의 직임을 위한 순주(巡駐)에서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로, 이로부터 얼마 뒤에 발송된 선조 28년 3월 21일의 회자에 실린 내용이다. 해당 회자는 3월 4일의 자문 발송 이후, 분수참의 양호가 동해 2월 5일에 보낸 자문에 대한 회자였다. 해당 자문 역시 남부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의 배치와 병력, 각 군 지휘관들이 기술되고 있는데, 이전에 발송된 자문보다 최신의 정보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권율은 '함양' 등처를 순주하고 있다고 기술되고 있다.7 완전한 '주둔'으로 기술한 것은 아니나, 권율이 (함안이 아닌) '함양'을 주요 거점으로 삼아 영남 순주를 하고 있음을 보다 확실하게 명시하고 있다.
이런 근거들을 보건대, 3월 4일 요동도사로 발송된 자문에서 본래 권율의 주둔지로 의도한 지역은 함안이 아니라 함양일 것으로 보인다. 다만 처음에 자문을 작성할 때에 함안과 함양이 모두 경상도에 위치했으며, 모두 주요 군사 거점이었기 때문에 자문을 작성한 이가 이를 착오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함안과 함양의 위치와 특성을 생각해 보자면, 함안보다 함양이 도원수의 주둔지 또는 순주 거점으로 보다 적합하다.
함안은 당시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전라도 병마사 이시언이 담당하고 있던 지역으로서 김해, 창원, 의령을 잇는 경상우도 전면 방어선의 일획이었다. 자문에서도 드러나듯, 김해부사 백사림과 창원부사 정언중이 당시 함안과 칠원 일대에서 적로를 초탐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도도순찰사이자 도원수였던 권율이 해당 지역을 근거하거나 순주 거점으로 삼는다면, 한 부의 담당 전선 전면에 도원수가 위치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조선 남부의 모든 군대를 총괄하면서 각 지역에 산재해 있는 지휘관들을 통솔해야 하는 총사령관이 한 부가 담당하는 전선의 전면 한 측에 나서는 형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반면에 함양은 같은 경상도에 위치하긴 했으나 경상우도 전선과 경상좌도 전선으로부터 충분히 거리를 두고 떨어진 제 2선의 위치였기에 비록 전방 지역이긴 하나 최전선이라는 부담을 지고 있진 않았으며, 경상좌도 방어선, 경상우도 방어선, 한산도 통제영, 장기현과의 거리도 적절했고, 무엇보다도 상대적 후방 지역인 전라도 장흥부에 주둔하고 있던 순변사 이일과의 거리도 상대적으로 가까워 당시 남부 전선의 주요 지휘관 모두와 연락과 지시, 보고를 용이하게 주고받을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함양은 당시 남부 전선을 통제하는데에 있어 함안보다 상대적으로 좋은 입지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권율 역시 함양을 주요 순주 거점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자문에서 의도한 '권율의 주둔지' 역시도 함안보다는 함양일 것으로 보인다.
*제도도순찰사는 사대문궤등 명에 대한 자문등에서 언급되는 권율의 직위이다. 조선 국내에서 통용되기보다는 명에 권율의 위치를 나타내기 위한 직함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1.『事大文軌』 권 12 만력 23년 3월 4일. 諸道都巡察使權慄, 領牙兵, 原任晉州牧使朴宗男等二百九十八員名, 住箚中路咸安郡, 節制東西水陸各該將官.
2.조경남, 『난중잡록』권3, 을미년 1월 6일.
3.조경남, 『난중잡록』권3, 을미년 1월 24일, 陳駱二將,自倭營到咸陽, 權慄在本郡宴饗. 난중잡록에는 단지 진, 낙 두 장수라고만 서술되나, 당시 진운홍과 함께 했던 것은 수비 낙일룡(駱一龍)이다. 『선조실록』 선조 28년 2월 11일.
4.『선조실록』 선조 28년 2월 3일.
5.단, 후술하겠지만 실제로 1월 24일에 이들을 대접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실록 동일 기사에서 22일에 진운홍이 밀양 유천참~청도에 있음이 드러나고, 또 당시 감기에 걸려 몸을 운신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진운홍이 함양에 도착하여 권율로부터 대접받은 날은 1월 27일로 생각된다. 이는 아래에서 다룬다.
6.정경운, 『고대일록』 권2 을미년 1월 7일, 1월 27일.
7.『事大文軌』 권 12 만력 23년 3월 21일, 而諸道都巡察使權慄, 領牙兵原任牧使朴宗男等, 二百九十員名, 巡住咸陽等處, 節制東西水陸將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