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 대폭 개선한 ‘엘리온’, 이제야 테라의 후계자답다
“잘 지내고 있는 거겠죠, 좀처럼 연락이 없네요. 요즘 많이 바쁜가 봐요. 이미 다른 사람 품에 안긴 너인데…” 발라드 듀오 바이브 1집에 실린 ‘미워도 다시 한번’이란 곡이다. 제목과 가사에서 보듯 감성적이면서도 뭔가 질척거리는 느낌이 일품이다. 물론 기자를 비롯한 뭇 게이머에게 이 ‘미워도 다시 한번’이란 표현은 가요보다 광고 문구로 더 익숙할 터이다. 지금 당장 복귀만 하면 60렙제 아이템 풀세트를 지원해줄 것만 같은 그런 절실함이 묻어나는 문구다.
여기 또 하나의 ‘미워도 다시 한번’이 있다. 크래프톤이 개발하고 카카오게임즈가 서비스 예정이었던 ‘에어(A:IR)’가 그 주인공. 2017년 첫 테스트 이후 수차례 담금질을 거듭한 끝에 올해 4월부로 ‘엘리온(ELYON)’이라 개명했다. 아무리 2차 CBT 반응이 궤멸적이었다지만 정식 서비스도 전에 제목까지 바꾼다는 건 매우 이례적이다. 과연 크래프톤과 카카오게임즈의 의중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러한 시도가 성공적일지 11일 하루간 진행된 서포터즈 테스트를 통해 살펴봤다.
제목 변경이라는 파격적인 카드를 꺼낸 '엘리온', 과연 그만큼 재미있어 졌을까?
날개를 접고 두 다리로 오롯이 서다
‘에어’가 어째서 ‘엘리온’이 되어야 했는가,를 얘기하려면 우선 ‘에어’는 왜 망했는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아직 정식 서비스도 되지 않은 게임에 함부로 망했다는 표현은 조심스러우나 2차 CBT 반응이 그만큼 안 좋았다. 기자는 2017년 말 1차 CBT보다도 전인 FGT부터 불려가서 ‘에어’를 근 수년간 체험했는데 처음부터 이래저래 위태로워 보이는 게임이었다. 당시 기자와 크래프톤 김형준 PD가 나눈 인터뷰를 되돌아보면 ‘에어’의 기획 의도는 대략 이러하다. 더이상 MMORPG가 지상에서 보여줄 것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니 우리는 하늘로 간다! 그래서 비행선을 통한 공중전에 집중했고, 그래서 제목이 ‘대기(大氣)’를 의미하는 ‘에어’가 됐다는 식이다.
살짝 제이크 질렌할 닮은 조종사 일러스트는 '에어' 시절의 게임 컨셉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터졌다. ‘공중전이 중심인 MMORPG’를 놓고 유저가 꿈꾸는 이상향과 실제 크래프톤의 개발력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발생했다. 여태껏 ‘공중전이 중심인 MMORPG’가 없었을 뿐 ‘공중전이 중심인 게임’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즉 그만큼 게임 속 공중전에 대한 유저들의 눈높이가 결코 낮지만은 않다. 분명 ‘에어’는 여느 MMORPG에 비해 공중전이 갖는 비중이 크긴 하지만 정작 그 공중전의 완성도가 애매했다. 거기다 공중전에 신경 쓰느라 지상전은 여타 클래식 MMORPG과 별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구닥다리. 지상전도 되고 공중전도 되는 게임을 기획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어느 쪽도 확 끌리지 않는 어중간한 졸작이 되어버린 셈이다.
아직 달리기도 서툰데 무작정 하늘을 날려고 한 결과물이란, 대체로 좋지 못한 법이다.
그래서 ‘엘리온’은 과감히 날개를 접었다. 이것이 더이상 제목이 ‘에어’일 수 없는 진짜 이유다. 엄밀히 말해서 구 ‘에어’와 현 ‘엘리온’은 완전히 다른 게임은 아니다. 동일한 에셋과 세계관, NPC, 맵을 공유하는 사실상 같은 게임이다. 그럼에도 ‘엘리온’이 ‘에어’일 수 없는 까닭은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아예 비행 콘텐츠를 제거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게임의 주된 비중은 지상으로 넘어왔다. 당초 ‘공중전이 중심인 MMORPG’를 만들어보자고 출발한 프로젝트가 공중전을 버린다는 것, 어떻게 봐도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니다. 그만큼 이 작품을 살려야 한다는 크래프톤과 카카오게임즈의 절실함이 느껴진다. 그러니 웬만하면 미워도 다시 한번 보자.
여느 최신 게임에 못지않은 훌륭한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을 확인한 후…
건전한 체험기 작성을 위하여 고양이 거너로 게임을 시작했다. T'ekaaluk~!
‘테라’에서 한발짝 더 나아간 논타겟팅 액션
물론 단순히 있던 것을 없앤다고 게임이 막 진일보하진 않는다. 그보다 ‘엘리온’은 비행 콘텐츠를 향한 집착을 내려놓고 지상전부터 제대로 만들어낸 결과물에 가깝다. 이런 방향성은 이달 초 공개된 ‘개발자가 들려주는 콘텐츠 소개 영상’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전투와 몰이사냥에 대한 언급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플레이 타임 대부분을 몬스터 사냥으로 보내는 이러한 MMORPG에서 전투가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중요한 진리다. 그래서 ‘엘리온’은 구닥다리 전투 시스템을 버리고 논타겟팅 액션과 스킬 커스터마이징, 몰이사냥으로 나아갔다.
개발자피셜 '엘리온'의 핵심 세 가지는 논타겟팅, 스킬 커스터마이징, 몰이사냥이다.
MMORPG와 논타겟팅 액션이라면 ‘엘리온’의 큰누나뻘 되는 ‘테라’가 떠오른다. 실제로 ‘엘리온’이 보여주는 논타겟팅 액션은 ‘테라’의 발전형이란 느낌이다. 연계를 고려하여 영리하게 설계된 직업별 스킬셋과 흠잡을 데 없는 타/피격 판정, 기력 게이지를 통한 비교적 자유로운 회피 동작까지. 솔직히 아무리 잘 봐줘도 2020년 신작다운 그래픽은 못되지만 그 대신 전반적인 움직임은 아주 매끄럽다. 대다수 스킬이 범위기이며 동일 레벨대 몬스터를 압도하도록 밸런싱되어 단숨에 십수 마리씩 몰이 사냥하는 쾌감도 크다. 그에 따른 기기 성능 저하는 거의 느끼지 못했다.
논타겟팅 액션은 '테라'의 발전형이다. 움직이며 스킬을 연계할 수 있고 타/피격 판정도 깔끔하다.
권총에서 무슨 대포알이랑 미사일이 나간다. 화력 덕후인 기자의 마음에 쏙 들었다.
몰이사냥뿐 아니라 패턴 기반의 보스전도 은근히 잘 만들었다. 전반적으로 전투가 괜찮다.
스킬 커스터마이징도 공들인 티가 나는 시스템이다. 게임 내 모든 스킬은 기본기 외에 유물이라 명명된 네 가지 추가 옵션이 제공된다. 유물이라고 뭔가 자원이 필요한 것은 아니고 레벨이 오를 때마다 총량이 증가하는 유물력을 분배하여 효과를 얻는 식이다. 이 유물을 통한 커스터마이징은 간단히 기본기를 강화하는 것부터 아예 범위와 효과를 바꾸는 것까지 다양하다. 가령 기자가 플레이한 거너의 경우, 도약하며 은신하여 생존을 도모할 수도 있고 또다른 공격 스킬인 강철비가 발동하도록 하여 딜량을 벌충할 수도 있다. 또는 수류탄에 전혀 다른 속성을 부여해 상대를 얼릴리기도 중독시키기도 한다. 초기화도 자유로워 이리저리 세팅해보는 맛이 상당하다.
스킬 커스터마이징은, 실질적으로 고민할 가치가 있는 네 가지 옵션을 제공한다.
몬스터들의 접근이 부담스럽다면 수류탄에 얼음 속성을 부여해 발을 묶거나,
평타 6타 후 슬라이딩 옵션을 선택하여 속도감 넘치는 히트 앤 런을 구사할 수도 있다.
스킬 단축키 지정이 가능한 버튼이 1, 2, 3, 4, Q, E, R, LB, RB까지 아홉 개. 여기서 스킬마다 네 가지(기본기까지 포함하면 다섯 가지) 옵션이 제공되므로 커스터마이징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얼어붙은 적에게 전격을 가하면 추가 피해가 발생하는 등 스킬간 시너지도 존재하고, 초보자도 따라할 수 있도록 프리셋 역시 지원한다. 액션 자체의 동세와 시각 효과도 훌륭하지만 이런 시스템 덕분에 전투의 심도가 한층 깊어졌다. 액션 게임을 주로 즐긴 독자라면 눈치 챘겠지만 사실 ‘디아블로 3’와 같은 작품에서 이미 선보인 시스템이기도 하다. 독창적이진 않을지언정 그만큼 검증됐다는 것. 어쨌든 ‘엘리온’의 전투가 ‘에어’보다 훨씬 재미있는 건 분명하다.
월드 퀘스트를 통해 다양한 필드 보스와 맞설 수 있다. 쪼렙이라 숟가락만 얹어봤다.
RvR로 귀결되는 전투 콘텐츠와 빠른 성장
문뜩 처음 ‘에어’를 테스트했을 때가 떠오른다. 당시에는 어떤 부유섬을 무대로 여행을 개시하여 본격적으로 비행선에 탑승하기까지 상당량의 스토리를 진행해야 했다. 다만 지상전이 너무 재미가 없어서 프롤로그를 좀 줄일 필요가 있다고 했더니, 다음 테스트선 게임 도입부터 거대 비행선에서 시작하고 부유섬 부분은 과거 회상으로 조금만 껴 넣었다. 비행 탈것도 획득 시점이 훌쩍 당겨져 일찍부터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고 보니 공중전도 별로 재미가 없더라. 결국 ‘엘리온’은 공중전을 통째로 들어냈다. 자연스레 초반 전개도 다시금 수정됐다.
매번 테스트마다 도입부가 바뀐다. 이번에는 시작부터 비행선이 공격 당하고,
'에어'에서 '엘리온'으로의 변화를 은유하듯 곧바로 지상으로 추락하고 마는 주인공.
이제 ‘엘리온’은 서사적인 뼈대가 흐물흐물하다. 게임을 시작하면 검은 사도에게 붙잡혀 있던 주인공이 깨어나고, 비행선 인벤투스를 구하고자 사투를 벌이며, 어쩌다 100년 후 미래로 떨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묘사되긴 한다. 하지만 분량이 워낙 짧고 그다지 중요하게 다뤄지지도 않는다. 게임은 서둘러 유저를 양대 세력, 벌핀과 온타리가 대립하는 RvR 맵으로 던져 넣는다. 그리고 별로 읽을 가치가 없는(기자는 가능한 모든 지문을 읽는 편이다) 내용의 수많은 퀘스트에 따라 맵을 순회하는 성장 동선을 제시한다. 이와 함께 각종 PvP, PvE 모드가 순차적으로 소개된다.
메인 시나리오가 있기는 한데… 검은 사도가 나쁜놈들이다 정도만 기억하자.
대다수 서브 퀘스트는 닥사지만, '에어'의 잔재인지 묘한 미니 게임이 껴있기도 하다.
지역 자체가 레벨업과 RvR에 맞춰졌다. 중앙선을 기준으로 남부는 벌핀, 북부는 온타리.
서사 자체가 문제라는 게 아니라 그걸 풀어가는 과정이 지루하다고 피드백 했는데 아예 스토리를 날려버렸다. 뭐 좋다. 그걸 지적하자는 건 아니다. 개발자가 뭔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하는 것과, 그 이야기가 들을만한가는 전혀 별개이기 때문이다. 국내 MMORPG로 좁혀 말하자면 굳이 뭔가 이야기를 하려는 시도가 유저를 더 괴롭히는 경우도 많았다. “태초에 천상과 마계가 열 두개의 봉인을 놓고 어쩌고 저쩌고~”하는 부류 말이다. 그러니까 ‘엘리온’은 이 지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 셈이다. 사냥 일변도의 퀘스트를 쭉 수행하며 빠르게 캐릭터를 성장시키고 각종 PvP, PvE 모드를 거쳐 궁극적으로는 RvR로 귀결되는 게임, 그게 ‘엘리온’이다.
접경지를 향해 단체로 돌격할 때는 정말 뽕이 차오른다, 이 맛에 RvR 하는 거지.
마갑기를 소환하여 온타리 친구들에게 네이팜 냄새를 맡게 해주는 것도 잠시…
집중 포화를 견디지 못하고 고철덩이가 되어 전장을 이탈하고 말았다.
정리해보자. ‘엘리온’은 ‘에어’ 시절 강조하던 비행 콘텐츠과 맞바꿔 지상에서의 전투 시스템을 크게 개선해냈다. 서사는 RvR로 향하는 레일로드로 기능할 정도로만 희미하게 남겨뒀다. 여기서 흥미로운 물음이 하나 있다. ‘에어’는 독창적인 컨셉에서 출발하여 유저 제작 퀘스트니 공중전이니 여러 새로운 시도로 똘똘 뭉친 작품이었다. 그런데 완성도는 낮고 재미도 없었다. ‘엘리온’은 그런 곁가지를 대부분 쳐내고 닥사와 RvR 중심으로 재편한 어찌 보면 구태의연한 작품이다. 그런데 적어도 재미있기는 하다. 어느 쪽이 더 좋은 게임일까? 물론 판단은 뭇 유저의 몫이다. 어쨌든 기자로선 PC 온라인 게임을 추억하는 이들에게 ‘에어’보다는 ‘엘리온’이 권할만하겠다.
이미 다 만든 비행 콘텐츠를 아예 버리진 않았다. 어떠한 형태로든 재활용될 듯하다.
모여서 낚시하고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얘기하며 가볍게 잠시나마 인연을 맺는 중.
PC 온라인 게임 신작이 씨가 마른 후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훈훈한 감각이었다.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