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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즈샵의 〈방구석에 인어아가씨〉가 히트한 뒤 이젠 모바일에서도 비주얼노벨 장르를 보기 쉬워졌습니다. 〈루시 - 그녀가 바라던 것 -〉은 그 비주얼노벨 게임들 중 하나로, 할 게임이 없어 심심하던 차 루리웹에서 해당 작품에 대한 글을 보고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게임을 해 보니 전반적으로 높은 퀄리티의 완성도가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스토어를 보면 이런저런 비주얼노벨 게임들이 많이 산재해 있지만 이 정도로 미려한 CG를 보여준 작품은 거의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거기다 성우분의 연기도 무척 잘 어울려 게임에 몰입하기 좋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게임더빙은 발더빙이 꽤 되다보니 아예 음성을 끄고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루시 연기는 캐릭터의 사랑스러움이 잘 드러나 굉장히 듣기 좋았습니다.
다만 정작 비주얼노벨의 근간인 스토리에 대해서는 영 찝찝함이 남았습니다. 중반까지는 매우 재미있게 몰입했기에 게임을 끝내고는 이 게임을 구입한 게 좀 후회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일밖에 모르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가 싫은 아들의 갈등, 그리고 이들 사이에 끼어든 인간만큼 정교한 안드로이드라는 소재는 좋았지만 중반 이후 너무 급작스레 마무리지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해결되기는커녕 폭발하고 끝났고, 그 와중에 루시는 불쌍하게 희생되고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끝까지 아버지는 일밖에 모르고 아들을 자기 뜻대로만 부리려는 강압적인 인간으로 남았으며 그런 행동에 변변한 이유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루시를 죽여가며까지 주인공을 짓밟는 결말에서 작자는 대체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던 걸까요. 에필로그에서조차 아버지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고 주인공은 그런 아버지도 아버지라는 건지 노후를 보살피는 모습에서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아무리 그런 아버지라도 안드로이드보다는 낫다는 의미인걸까요?
또, 루시가 그렇게 죽어서 주인공에게 남긴 것이 대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되려 루시가 그런 억울한 죽음을 맞으면서 가족의 정을 루시에게서만 느낄 수 있었던 주인공은 평생 가시지 않을 상처만이 남았을거라 생각합니다. 훗날 루시는 오랜 시간이 걸려 부활하지만 본편에 납득하지 못한 제겐 그저 얄팍한 감동 장치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엔딩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마음에 든 작품이었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습니다. 메인 플롯인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외에도 흥미로운 소재가 군데군데 보여서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좋았는데 왜 이렇게 빠르게, 절망으로 빠뜨리는 결말로 끝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