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레이한 데모는 북미판 공식 엑스박스잡지(OXM) 12월호에 포함된 것입니다.
게임에서 톰 클랜시의 이름을 보는 일은 크게 낯설지 않다. [스타크래프트]와 더불어 멀티플레이 게임의 재미를 일깨워준 [레인보우6] 시리즈가 우리에게 친숙해졌기 때문이다. \'군사\', \'첩보\', \'막후 정치\'를 키워드로 하는 톰 클랜시의 작품 세계는 꾸준하게 영화와 게임으로 세를 넓혀가면서 클랜시만의 독특한 밀리터리 엔터테인먼트로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이렇듯 그간 PC에서 제법 재미를 봐온 클랜시 사단이지만, 정작 게임업계의 주류로 부상하고 있는 콘솔에서 이들은 별다른 히트작을 내놓지 못했다. 아마도 클랜시 게임의 관심층과 제작기술이 콘솔과 그다지 친근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러한 부진의 이유일 것이다. 게다가 혼자 즐기는 데 초점을 맞추는 콘솔용 게임의 특징이 멀티 플레이를 내세우는 클랜시표 게임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클랜시 사단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일까? 클랜시 사단을 등에 업고 Ubi에서 제작중인 [스플린터셀 Splinter Cell]은 전략을 위주로 하는 밀리터리 FPS가 아니라 액션 게임으로 기획되었다. 바야흐로, 클랜시 사단 최초의 싱글플레이 액션게임인 것이다.
빛과 어둠
빛과 어둠은 잠입의 기본이다.
데모판에서 볼 수 있는 지하 감옥
우선, 게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래픽이다. 언리얼 엔진을 기본으로 활용했다는 [스플린터셀]은 언리얼 엔진에 놀라운 빛과 어둠의 효과를 입혀 놓았다. 데모는 한밤중에 거리의 가로등이 비추는 지하감방의 입구에서 시작된다. 빛과 그림자의 표현이 탁월해서인지 음침한 공간의 느낌이 생생하다. 실내로 들어와 백열등이 흔들거리는 지하 감옥의 미묘한 조명 표현을 만나게 되면 절로 탄성이 흘러나온다.
그런데, [스플린터셀]에서 이러한 부분은 단지 시각적인 즐거움을 넘어서는 위치를 차지한다. 제작자의 말을 빌자면, "잠입"에서 빛과 어둠은 게임플레이 자체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눈요기거리 이상이다. 이러한 게임철학은 게임기용 \'잠입\' 장르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메탈기어솔리드](이하 [MGS]) 시리즈와 대조를 이룬다.
[MGS]의 경우 시야의 표현은 미니맵의 레이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플레이어는 그 레이더에 잡히는 적의 동선이나 시야범위를 통해 플레이를 조절하게 된다. 반면, [스플린터셀]에서는 이러한 전지적 시야가 제공되지 않는다. FPS처럼 오직 화면의 시야에 잡히는 지형지물들, 적병사들, 그리고 감시장치의 동선을 직접 살펴야 한다. 이때, 이러한 각종 배치와 요소들을 드러냄과 숨김으로 연결해주는 것이 바로 빛과 어둠이다. [스플린터셀]의 빛과 그림자는 단지 보기 좋은 포장을 넘어 잠입이라는 핵심적인 게임플레이를 좌우하는 요소가 된다.
액션이 아닌 시뮬레이션
[스플린터셀]은 분명 액션 게임이다. 극도의 사실성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렇다. 에너지 게이지와 헬스킷(health kit)이 존재한다는 점은 이 게임이 기존 액션 게임의 규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적인 특징을 제외하면 \'잠입\'에 관한 한 이 게임이 추구하는 방향은 \'액션\'보다는 \'시뮬레이션\'에 가깝다. [스플린터셀]은 액션 어드벤처에 가까운 [MGS2]보다는 잠입을 제대로 살린 [시프]에 가깝다.
잠입이라는 테마에 맞게 이 게임의 호흡은 매우 완만하다. 특히 기존의 액션게임과 비교하면 [스플린터셀]의 호흡은 더욱 느리게 느껴진다. 레이더 시스템이 없는 관계로 마치 FPS처럼 코너를 돌 때나 창가를 통과할 때면 자연스레 긴장하게 된다. 게다가, 요즘 액션 게임의 경향 대로 스텔스 게이지(소음을 감지하는 시스템)가 채용되어 쿵쿵거리며 섣부르게 뛰어다니다가는 낭패를 보게 되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나이트비전헤드셋으로 본 화면
서멀비전헤드셋으로 본 화면
캐릭터 애니메이션과 다양한 아이템 역시 잠입이라는 복잡한 테마에 걸맞게 다채롭게 준비되어 있다. 일단 데모에서 볼 수 있는 동작으로는, 뛰기(걷기), 벽에 기대기(엿보기), 앉기(앉아서 전진), 점프(이중 점프)가 있다. 조준한 상태에서는 FPS와 비슷한 시점에서 오른쪽 스틱으로 사격하게 된다. 액션버튼을 통해서는 다양한 동작을 취할 수 있다. 문을 열고, 아이템을 취하고 쓰러진 적을 등에 짊어질 수 있다. 이외에도 인질잡기(심문하기), 줄타기, 매달리기 등등 잠입과 연관된 다양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고 한다. 데모판에서는 무장 해제된 적을 뒤에서 잡은 상태에서 심문을 벌일 수 있다. 이때 조준 버튼을 누르면 적을 방패로 총격을 가할 수 있고, 발사버튼을 누르면 후두부를 권총손잡이로 타격한다. 나이트비전헤드셋과 서멀비전헤드셋 두가지가 지원되고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활용해야 한다. 한편, 데모 버전의 상대적인 빈약함과는 달리 제품판에서는 다양한 무기와 아이템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니, 진정한 잠입의 묘미를 기대해봐도 좋을 것이다.
이런 액션도 가능하다.
[MGS] 킬러?
후속작이 앞서의 걸작들과 비교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하물며, 그 장르가 동일하다면 이러한 비교는 피해가기 힘들다. [스플린터셀]은 [MGS]의 확실한 저격수가 될 수 있을까?
앞서 지적했듯, 더 나은 하드웨어와 기술을 등에 업은 [스플린터셀]은 \'잠입\'이라는 게임플레이 면에서 [MGS]를 능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빛과 어둠을 게임의 중심에 깊숙하게 둔 덕분에 그 사실성이 제대로 구현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아직 가능성에 불과하다. 데모에 포함된 레벨은 다소 반복적이어서 [MGS2]의 유조선 미션과 비교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진다. 요컨대, [스플린터셀]은 매우 뛰어난 재질의 원단이지만 멋진 옷으로 재단되기 위해서 제작진의 섬세한 솜씨가 필요하다.
이 남자의 카리스마를 넘어서게 될 것인가?
뛰어난 게임플레이의 가능성을 지녔지만, [스플린터셀]이 콘솔에서 대형 히트작이 될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데모판끼리 비교해본다면, [MGS2]가 워싱턴 브릿지에서의 침투 장면처럼 압도적인 오프닝으로 큰 화제를 일으킨 반면, [스플린터셀]에는 이에 버금갈만한 화제 거리는 없다. 이러한 차이는 두 게임의 미묘한 취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MGS2]가 게임플레이와 더불어 짜임새있는 내러티브를 내세우는 반면, [스플린터셀]은 (적어도 데모로 보자면) 이러한 서사의 측면은 다소 부족해 보인다. 어쩌면, 게이머들이 흔히 말하는 일본발 게임과 서구발 게임이 지닌 차이가 드러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스플린터셀]의 제작자는 게임의 내러티브에서도 상당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구소련의 그루지아에서 자라나고 있는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특파된 비밀요원 샘 피셔, 그가 뛰어든 일촉측발의 위기의 배후는 누구인가? 제작자인 매튜 펄랜드는 놀라운 결말을 기대해도 좋다고 귀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