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필자의 변
이 글은 딘 다카하시(Dean Takahashi)의 책 [Opening the Xbox, Inside Microsoft\'s Plan to Unleash an Entertainment Revolution]에 대한 기이한 서평이다. 책의 충실한 요약도, 그렇다고 책에 대한 논평도 아니기에 기이하다는 수식어가 타당하다고 여겼다. 이 글은 Xbox의 세상에 빛을 보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에서 필자가 흥미를 느낀 부분들을 공유해보고자 하는 욕심에서 작성되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 중 이 책을 출판해주실 고맙고도 장한 의도를 머금게 된 \'능력있는\'(제일 중요하다!) 분들은 주저말고 많이 연락해주시길. 필자의 이 메일은 anarinsk@hananet.net
1. 기원: 위와 아래
"PS2를 날려버릴 수 있겠어. 프로그래밍하기 쉬운 그런 게임기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시머스 블랙클리(책, 9쪽)
Xbox는 포스트 PC 시대에 향한 마이크로소프트(MS) 경영진의 전략적인 준비와 아래로부터의 다소 충동적이고 엉뚱한 발상이 어우러져 태어난 산물이다.
포스트 PC 시대의 전장은 다름 아닌 거실. 가전업계와 PC업계가 서로의 영역에 한 발씩 들어놓으면서 시작된 격전에서 소니의 PS2는 대대적인 신호탄 역할을 한 셈이었다. 이미 OS로 PC시장을 싹쓸이 한 MS였지만, 거실에서 만큼은 마땅한 확신을 주는 무기가 없었던 그들에게 "PlayStation"라는 성공적인 프렌차이즈를 지렛대 삼은 소니의 야심은 그만큼 위협적이었던 것이다.
거실로의 입성 시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MS는 이미 세가와 소니를 통해 자사의 OS를 거실로 들여보내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세가의 드림캐스트에 탑재된 윈도우즈 CE 버전(드래곤 버전)은 실제로 거의 활용되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었으며, 소니의 이데이 회장은 빌게이츠가 제안한 PS2의 윈도우즈 탑재를 단칼에 거절하였다. 바야흐로, 포스트 PC 시대로의 서막을 앞두고 MS가 보다 적극적인 방식의 일전(一戰)을 벌이려는 순간이었다.
MS 상층부가 이러한 전략적인 모색을 궁리하던 때와 거의 같은 1999년 3월, 이제 막 MS에 입사한 베테랑 게임개발자 시머스 블랙클리(Seamus Blackley)는 GDC에서 PS2의 열광적인 데뷰를 목격하게 된다. 드림웍스(Dreamworks)에서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던 [Trespasser]의 참담한 실패 이후, MS로 자리를 옮긴 블랙클리는 PS2에 관한 자료에 접하면서 개발상의 약점을 재빨리 알아채게 되었다. 그리고는, 스스로 \'뭣같은 아이디어(bullshit idea)\'라고 부른 엉뚱한 착상을 내놓는다.
PC 플랫폼 최대의 장점, 즉 DirectX를 개발툴로 삼는 게임기라면? 이러한 블랙클리의 생각은 전혀 터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MS의 내부적으로 보자면, 이미 게임기를 제작할 충분한 조건이 갖춰져 있던 것이다. ① 당시 8.0 버전의 출시를 앞두고 있던 DirectX는 PC와 게임기를 통틀어 어느 개발 도구와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는 편의성과 성능을 갖추고 있었다. ② MS의 조직문화는 이단아들과 엉뚱한 발상을 적극적으로 수용·장려하는 편이어서 블랙클리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심각하게 제한되지 않았다. ③ 1999년 즈음 MS는 몸집을 상당히 불린 게임 사업부를 거느린 이미 확고한 지분을 확보한 게임개발사였다.
GDC에서 돌아온 불랙클리는 MS발(發) 게임기라는 착상을 주변에게 퍼트리기 시작했고, 예전부터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던 MS의 이단아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이 들은 이후 자칭 \'Xbox의 사총사(Musketeer)\'로 불리우게 될 테드 하스(Ted Hase), 케빈 바커스(Kevin Bachus), 오토 벅스(Otto Berkes)였다.
이들이 최초로 결성한 팀이 이후 Xbox 팀으로 진화하게 되는 "프로젝트 미드웨이(Project Midway)." 미드웨이란 두 가지 의미를 지닌 말로서 첫째는 비디오 게임기와 PC의 장점을 결합한다는 것. 여러 가지 호환성 때문에 안정성을 보장할 수 없는 PC의 단점을 게임기의 규격 통일성으로 보완하면서, 편리한 개발 도구라는 PC의 장점은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숨겨진 의미는 바로 2차 대전 일본군을 대패시킨 미드웨이 해전이다. 세가, 소니, 닌텐도가 버티고 있는 무적의 게임제국 일본을 함락시키겠다는 의지가 담긴 이름이었다. 한편, 이들은 DirectX에 기반한다는 의미에서 이 MS發 게임기를 당분간 "Xbox"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2. 내부 경쟁: 웹TV와의 대결
"PC에서 출발하는 접근방식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어요. 뭔가 해야한다면, Xbox같은 형태가 될 것 같군요. … Xbox 팀이 타당합니다. 예술가들(역주-게임개발자)에게 놀라운 작품의 영감을 불어넣어 줄 플랫폼을 제공해봅시다.", 빌 게이츠(책, 111쪽)
빌게이츠가 발의한 PS2 Killer 프로젝트에 귀를 종긋 세우고 있던 사람들은 Xbox 팀만은 아니었다. 1997년 MS는 웹TV 네트워크를 인수하여, 디지털 VTR을 구현한 TiVo의 잠재적인 위협에 대응하고자 했다. 현실적으로 Tivo가 커다란 위협이 되지는 않았지만, MS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웹TV 팀 역시 게임기로서의 기능을 포괄한 가정용 엔터테인먼트 기기를 통해 거실로 침투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웹TV 팀을 이끌던 팀 부커(Tim Bucher)는 3DO M2의 디자이너를 맡았던 인물. 부커는 M2의 실패를 거울삼아 웹TV를 구상하였다. 당시 3DO는 기술을 설계한 후 이를 마쓰시다의 파나소닉에게 라이센싱했다. 파나소닉은 하드웨어를 통해 돈을 벌고자 했고, 기기는 700달러의 고가로 출시되었다. 당연히, 기기의 제조까지 직접 담당했던 세가와 닌텐도에 비해 3DO는 가격인하에 많은 여러움을 겪었고, 마침내 시장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사업의 통제권을 다른 회사에 너무 많이 넘겨주지 말라(책 98쪽)." 이것은 부커가 3DO에서 배운 뼈아픈 교훈이었다. 주변부품들에 대해서는 외주가 가능하겠지만, 핵심적인 부품 특히 그래픽 칩만은 초기에 높은 비용이 들더라도 자사에서 직접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웹TV 팀에 대한 블랙클리의 입장은 매우 냉정한 것이었다. "그들은 하드웨어가 너무 비싸면 패한다는 점을 배웠다. 내가 [Trespasser]의 실패로부터 지나치게 부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3DO의 경험에서 부상했다. 그들은 컨텐츠가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했다. 개발자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는 점을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두 진영은 의견이 조율될 수 있는지를 모색했지만, 둘은 비전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웹TV 팀이 보다 넓은 엔터테인먼트 컨텐츠를 포괄하면서 게임을 그 하나의 요소로 배치하려는 입장이었다면, Xbox 팀은 게임 자체에 집중하는 것만이 PS2에 대한 가장 정확한 대응이라고 주장했다. 웹TV 팀은 기기를 제조해본 경험을 앞세워 Xbox 팀의 구상을 공허한 것으로 비판했고, Xbox 팀 역시 개발에 대한 마인드가 결여된 웹TV 팀을 공공연하게 조롱하였다. 한마디로 그들은 적이 된 셈이었다.
웹TV 팀과 Xbox 팀이 각기 품었던 게임기 구상을 항목별로 간단히 비교해보도록 하자.
비 고 |
웹TV |
Xbox |
진입지점 |
가정용 엔터테인먼트 |
게임 |
공략지점 |
가격 |
성능 |
OS |
Windows CE |
Windows 98의 차기 버전 |
개발툴 |
미정 |
DirectX 차기 버전 |
칩셋의 제조 |
자사 제조 |
외주 |
하드디스크 |
미장착 |
장착 |
개발팀의 장점(단점) |
기기 제조의 경험 |
게임 개발의 경험 |
이 두 진영은 빌게이츠를 최종 심판관으로 둔 숙명의 \'미인 대회(Beauty Contest)\'를 벌이게 된다. 여기서 빌 게이츠의 마음은 Xbox 쪽으로 기울게 되었는데, 결정적인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Xbox는 ① 하드디스크를 탑재하여 기존 게임기나 콘솔들에 비해 성능상의 우위를 확실히 보장할 수 있고, ② MS의 핵심 사업분야인 윈도우즈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보다 안전하고 PC 친화적인 형태이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Xbox 팀의 승리는 굳어진 것이었을까? 천만에. 1999년 4월 2일에 벌어진 미인 대회는 이후에 겪게 될 시달림의 시작에 불과했다.
3. PC와 거리두기
"Xbox에서 윈도우가 구동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Xbox가 업무용 플랫폼 혹은 e-커머스 혹은 e-메일 플랫폼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중요했지요. 이 점은 빌을 발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Xbox가 게이머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기능들을 역시 제외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죠.", 릭 톰슨(책, 152쪽)
웹TV라는 외부의 적에 대해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 후, 바야흐로 Xbox 사총사들 사이에도 미묘한 분열의 씨앗이 싹트게 된다. 이들은 게임과 DirectX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일치했지만, Xbox의 구체적인 모습과 형태에 대해서는 분명한 견해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개발자들이 훌륭한 게임을 뽑아낼 수 있도록 해주는 매개체로서 Xbox, 이것은 블랙클리와 바커스의 시선이었다. 하스와 벅스는 게임을 하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한 기존 PC의 하드웨어를 개량한 것으로 Xbox를 자리매김했다. 벅스는 이미 오래전부터 윈도우즈를 게임에 최적화시킨 Windows Entertainment Platform(WEP)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Xbox는 윈도우즈에 기반한 \'PC\'로서의 기능해야 하며 당연히 PC게임을 돌리는 것도 가능해야 했다. 요컨대, 이들은 Xbox를 PC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한 것이다.
PS2 Killer로 Xbox가 결정된 이후, 테드 하스와 오토 벅스는 Xbox 팀을 떠나게 되었다. 이들 사이의 심각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기보다는, 아마도 팀에서 가장 색깔이 강했던 블랙클리의 추진력과 욕심이 가져온 이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간간히 루머로 듣게 될 MS發 홈스테이션(Xbox의 기능을 포괄하는 가정용 엔터테인먼트 PC)은 어느 정도는 WEP을 구상했던 인물들에 기반한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이들이 팀을 떠난 후 블랙클리의 추진력에 부스터를 달아준 인물은 Xbox 팀과 경영진 간의 연결고리라는 소임을 맡고 합류한 프로젝트 매니저 J. 앨러드(J. Allard)였다. 일찍이, 폐쇄적인 MSN을 통해 인터넷과 경쟁하려던 빌 게이츠의 구상을 인터넷 쪽으로 돌려놓은 바 있었던 앨러드, 그가 Xbox 팀에 결합하면서 Xbox는 PC와 완전히 단절된 독자적인 게임플랫폼으로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와 블랙클리 모두는 이른바 게임기를 포함한 가정용 엔터테인먼트 기기들이 한 형태로 통합되는 경향을 띤다는 "수렴가설(Convergence)"을 거부했다. 둘은 오직 \'게임\'만으로 진검승부를 내야 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일치했던 것이다. 벅스나 하스가 온전한 OS를 탑재할 수 있는 PC를 구상했다면, 블랙클리와 앨러드에게 OS는 단지 게임을 최적화된 형태로 돌릴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다. 요컨대, 블랙클리, 바커스, 앨러드는 Xbox를 보다 철저하게 \'게임기\'로 몰아갔던 것이다.
겁없는(!) 앨러드는 빌 게이츠 앞에서 Xbox에는 온전한 형태의 윈도우즈가 탑재되지 않을 것이라는 못박았다. Xbox의 OS는 하드 디스크가 아닌 플래쉬 롬에 놓일 것이며, PC에서와 같은 충돌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모든 DLL파일은 제거된다. 대신 각 게임별로 필요한 OS 파일을 컨텐츠 DVD에서 읽어들이게 된다. "우리 팀은 윈도우즈 NT에서 필요 없는 것들을 제거해 나갔다. 다시 말하면 게임 소프트웨어를 구동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DirectX에 집어넣는 수준이었다. 이것은 온전한 윈도우즈가 아니라, 오히려 DirectX OS"(책, 301쪽)였다.
빌 게이츠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Xbox 팀의 결정은 다소 의외의 것이었다. 애초에 그가 Xbox를 택한 이유는 PC시장과 OS시장에서 확보해온 MS의 강점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Xbox에 온전한 윈도우즈가 탑재된다면, 장차 웹TV 팀이 제시한 비전까지도 포섭할 여지를 갖는 것이다. 하지만, 앨러드는 이러한 빌 게이츠의 암묵적인 계획을 완전히 뒤바꿔 버렸다. 이들의 구상에 따르면 Xbox는 오직 게임에만 최적화된 기계이며 범용 PC부품들을 이용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소니나 닌텐도의 보통 게임기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빌 게이츠는 이러한 디자인의 급작스런 변경에 크게 반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분명 그의 입장에서는 Xbox 팀의 결정은 의외였다. 하지만, Xbox가 철저하게 게이머들 위해 디자인되지 않는다면, 결코 라이벌 기종들과 경쟁할 수 없을 것이었다. Xbox 이후의 경쟁에서 어떤 방향의 가정용 엔터테인먼트 비전이 우위를 차지할지는 모르지만, 임박한 경쟁에서 기회를 잡으려면 게임기로 승부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애초의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Xbox는 PC나 윈도우즈와 같은 MS의 핵심 사업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견고한 게임기라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 셈이다.
4. 미궁의 MS
"블랙클리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내리는 결정에는 최종적인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Xbox 팀은 이리저리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고, 세부사항은 계속해서 변경되었으며 일정은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딘 다카하시(책, 204쪽)
MS에 관한 흔한 오해 한 가지. \'MS는 돈이 많은 기업이고 따라서 대단히 헤프게 사업을 벌일 것이다.\' 분명 MS의 자금 동원력은 막강한 수준이지만, 그 쓰임새는 결코 헤프지 않다. Xbox 프로젝트 역시 예외는 아니다. 빌 게이츠의 허가가 떨어진 프로젝트였지만, 계획이 다듬어지고 본격화되기까지는 1년이 넘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필요하였다.
빌 게이츠 뒤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MS의 CEO 스티브 발머(Steve Ballmer). MS에서 그의 역할은 무형의 아이디어를 유형의 돈으로 바꿔내는 것. 빌 게이츠가 혁신을 주도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들을 자극하는 역할이라면, 스티브 발머는 이를 사업으로 다듬는 쪽을 맡고 있었던 셈이다. 발머 앞에 선 Xbox 팀은 사업 모델의 세부사항을 조목조목 파고드는 그의 질문에 제대로 응할 수 없었다.
"자네들 돈은 어떻게 벌 거지?" … "수치를 대보라구. 거기 써봐." 당시, Xbox 팀은 여전히 개발자들에게 로열티를 부과하지 않게 되기를 희망했다. 소니와 닌텐도는 게임을 테스트하고 플라스틱 주얼 케이스에 포장해주는 댓가로 게임당 7달러의 로열티를 받고 있었다. 이 로열티이 없다면, 마이크로소프트는 퍼스트파티의 게임을 통해 이득을 얻거나 컨트롤러와 같은 주변기기 판매를 통해 푼돈을 챙길 수 밖에 없었다. 발머는 무(無)로열티 모델의 타당성에 대해서 질문했다. 엄청난 비용을 고려할 때 하드 드라이브의 장착이 실리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아하게 여겼다. 마지막으로 발머는 덧붙였다. "지금에서 100달러는 깎으라구." … 훗날 바커스가 술회하기를, "그는 우리가 진짜 멍청하는 것을 입증했다."(책, 123쪽)
이러한 시달림과 담금질을 통해 개발자 마인드가 지배하던 Xbox 팀에 비로소 경영 마인드가 접목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결합한 인물이 MS의 하드웨어 부문을 이끌던 릭 톰슨(Rick Thompson)과 인터넷 부분을 이끌던 앨러드였고, 릭 톰슨이 2000년에 퇴사한 후 현재의 로비 바크(Robbie Bach)가 자리를 이어가고 있다. 팀에서 이들의 역할은 블랙클리로 대표되는 개발자 마인드를 사업 마인드와 조화시키고, 일선의 Xbox 개발팀과 경영진이 소통할 수 있는 경로를 만드는 것이었다.
MS의 의사결정 구조는 대단히 유연하다. 위계나 서열에 얽매이지 않고 프로젝트 팀이 구성되고 이를 최고 결정권자 앞에서 주장할 수 있다는 점은 MS의 기업문화가 이단아들과 이그 사고방식에 대해서도 충분히 개방적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나 사고방식이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논쟁과 반론을 견뎌내야 한다. MS 내부에서는 이를 "전략적인 조세"(Strategy tax)라고 부르는데, 새로운 아이디어가 제출되기는 쉬워도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라는 추가적인 비용이 들게 된다는 뜻이다.
Xbox의 그래픽 칩의 결정과정은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준다. 웹TV 팀과의 미인대회에서 빌 게이츠는 미묘한 불씨는 남겨 두었는데, Xbox, PC, 웹TV가 공유할 수 있는 하드웨어를 모색해보라는 것이다. 이미 웹TV에 장착될 독자적인 그래픽 칩셋을 기획 중이던 웹TV 팀은 이를 빌미로 Xbox 팀의 주변을 끊임없이 서성였다. 당시 MS는 이미 기가픽셀(GigaPixel)과 그래픽 칩의 개발에 관한 계약을 마친 상태였고, 웹TV 팀은 Xbox에 장착될 그래픽 칩의 공급자로 기가픽셀이 선정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Xbox 팀은 처음부터 엔비디아 이외에는 선택은 고려하지 않았다. 기가픽셀이 내세운 기술이 엔비디아에 비해 신선하고 잠재적으로 뛰어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 기술에 게임 개발자들이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이미 검증된 안전하고 강력한 길이 있는데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빌의 승인을 얻은 Xbox 팀도 엔비디아를 Xbox의 그래픽 칩 공급자로 만드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우선, 엔비디아에서 제시한 가격 조건이 ATi나 3Dfx에 비해 2배 가량 높은 것이었다. 대신 엔비디아는 이미 1999년에 \'지포스3\'가 Xbox용으로 공급될 것이며 그 성능은 PS2의 3-4배에 이를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래픽 칩 공급원의 결정이 지지부진한 사이, 웹TV 팀은 기가픽셀이 설계한 MS産 칩이 Xbox에 장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끊임없는 반전과 논란을 거듭한 끝에, 황소같이 밀어붙인 블랙클리의 추진력과 엔비디아 CEO Jen-Hsun Huang의 끈질긴 공작 덕택에 Xbox 팀의 계획이 관철되었다. 하지만, 앞서 인용된 블랙클리의 술회처럼 이러한 모든 과정은 MS에서 뭔가를 확실하게 결정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5. 보이지 않는 위협?
"Xbox는 진정으로 사업상의 중대한 결정이었습니다. 거보(巨步)를 내딪은 것입니다. 향후 5년 동안 우리가 옳았는지를 지켜봐 주십시오. 저는 꽤 낙관적으로 봅니다. 우리는 혁신적인 기술적 성취를 이뤄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들을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Xbox는 지금까지 MS가 해온 일들 중 제일 위험한 사업입니다.", 빌 게이츠(2001년 여름에 가진 인터뷰 중, 책 205쪽)
어쨌든, Xbox는 출시되었다. 시머스 블랙클리로 대표되는 개발자 마인드는 소니의 지향점과도 구분될 수 있는 \'게임기\' Xbox를 탄생시켰다. PS2가 게임기를 초월해 가정용 엔터테인먼트의 허브로 향하는 길에 놓인 \'미들맨\'라면, 게임이라는 단일한 컨텐츠로 보다 확실한 승부를 내려고 벼르는 쪽이 Xbox인 셈이다. 출시 후 6개월 남짓 지난 현 상황에서 그 성패를 가늠하기는 힘든 일이다. 다만, 다카하시의 책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Xbox의 잠재적인 위협요소들을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첫째, 비즈니스 모델의 부재. Xbox 첫 번째 총책임자였던 릭 톰슨이 제출한 Xbox 프레젠테이션 자료의 첫 페이지의 문구는 "Hail Mary." 한마디로, 수익을 내려면 신이 돕는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Xbox 사업은 손익계산에 근거해서는 정당화될 수 없다. 이 보고에서 톰슨은 향후 8년 간 최소한 9억불의 적자는 감수해야 한다고 예측하였다. 분석가들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 10억불 전후의 적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전망이 일반적이다.
Xbox의 원가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무래도 엔비디아가 제조하는 두 가지 주요 부품 Xchip과 MCPX이다. 웹TV 팀에서 그래픽 칩의 자사 제조를 강력히 주장했던 것도 결국 비용상의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확고한 개발자 마인드에 섰던 Xbox 팀은 비용을 포기하고 성능을 택하였다. 엔비디아와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단가를 낮추는 방향(원칩화, 공정의 단순화 등등)이 모색된다면 타 경쟁사에 비해 크게 불리한 상황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엔비디아가 MS의 자회사는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칩의 유일한 공급원이라는 현실이 부담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을 터이다.
한편, 출발부터 Xbox 팀은 컨텐츠 판매에 꽤나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개발자 중심으로 맞춰진 기기에서 양질의 컨텐츠가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Xbox 팀의 자신감이 적중할 것인지, 그리고 이번 E3에서 천명한 온라인 컨텐츠 모델 \'Xbox 라이브\'가 기대한 만큼의 엘도라도가 될 수 있을지를 지켜보는 일도 꽤나 흥미로울 것이다.
둘째, 내부의 적. 아직 논쟁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2002년을 넘겨서도 Xbox가 부진할 경우 웹TV 진영이나 테드 하스, 오토 벅스가 주도하는 WEP 진영이 다시 개입할 여지는 충분하다. Xbox가 게임에 특화된 좁은 시야의 기기라면 웹TV나 홈스테이션은 비즈니스 모델 상의 우위를 바탕으로 Xbox를 포괄하려는 전략을 취할 수 있다.
Xbox를 오늘날의 위치로 이끈 불도저 블랙클리와 계획가 바커스가 모두 MS를 떠났다는 사실 역시 Xbox 팀의 정체성에 일정한 불안을 드리우고 있다. 어쨌든, 사업에 대한 논의가 유달리 치열하고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MS이고 보면, Xbox를 머금고 보다 넓은 차원의 새 판을 짜려는 내부의 움직임은 언제든지 다시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가정용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비전. 대다수의 분석가들은 닌텐도와 달리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의 비전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물론, 거실에서 VTR의 자리를 대체하겠다는 궁극의 야심에서 본다면 둘은 어쩔 수 없는 라이벌이다. 하지만, 각기 전면에 세운 PS2와 Xbox는 그 지향에 있어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PS2가 게임기로서의 기능과 더불어 다음 세대에 완성될 가정용 엔터테인먼트 허브를 미리 선보이려는 의도를 끊임없이 드러내는 반면, PC와 친화적인 MS의 여러 면모에도 불구하고 Xbox는 전적으로 게임에만 집중하고 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빌 게이츠가 애초에 구상했던 것은 현재의 Xbox 같은 형태의 견고한 게임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빌 게이츠와 Xbox 팀은 게임이라는 컨텐츠로 승부를 내지 않는 이상 이번 세대의 피말리는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렇다면 핵심은, 게임이라는 새로운 엔터테인먼트가 틈새를 벗어나 주류(主流)의 위치로 올라설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게임 산업이나 게임 인구가 폭발적인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15세에서 32세의 남성으로 그 인구가 제한되어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러한 한계를 탈피해 사람들의 여가생활에서 독서, 영화, 음악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면, 게임으로만 확실하게 승부를 걸었던 Xbox의 \'도박\'은 의외의 성공을 맛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6. 에피소드들
이 부분은 책에 언급된 비화(秘話)들입니다. 이미 루리웹에 게재된 "Xbox 개발 비화-2"와 연장선상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냥 그렇구나\'하는 정도에서 씩 웃으며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1. 2000년 6월쯤 하나의 데모를 만들게 됩니다. 만들었다고 합니다. 예전 Xbox의 데모 중 험악한 외모의 여인네와 로봇이 등장하는 데모가 있었죠. 그 로봇이 등장하는 데모랍니다. 데모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첨에 엑박 로봇이 등장. 소닉에게 두두둑~. 소닉,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다음, 마리오를 뭉갠다. 마리오 아작난다. 다음으로는 전자 빔으로 크래쉬밴디쿳을 두동강낸다. 어떤 팀의 사기(morale)이란게 참 재미있죠. 이 데모는 200명의 Xbox 스텝들에게만 시연되었다고. 이 자리에서 한 멤버는 중화기를 들고와 PS2에 구멍을 냈다는 군요.
2. 번지(Bungie). 먹느냐 마느냐를 두고, MS 퍼스트파티 제작 책임자 에드 프라이즈가 상당히 고심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요구한 액수가 실제 기업가치보다는 꽤 높았기 때문. 하지만, 2년째 제작중이던 구라웨어(Vaporware) [헤일로]를 보고, 몸 값이 더 뛰기 전에 잡자고 결심했다는 군요. 결과로만 본다면, 현명한 판단인 셈이죠. 한편, 2년 동안 PC용으로 코드를 쓰고 있던 번지 역시 Xbox로 플랫폼을 정한 후에 본격적으로 일을 진행시킨 듯 합니다. 그 전까지는 [헤일로]의 세계를 탐험하는 MMORPG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는 군요.
3. 비주얼컨셉. 세가가 하드웨어 시장에서 빠질 수도 있다고 예측하고 세가의 개발 팀을 각개격파하기로 마음먹은 프라이즈. 먼저 가까운 곳에 있는 비주얼컨셉에 접근했습니다. 하지만, 비주얼컨셉은 세가와의 성생활(?)에 불만이 없었던지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합니다.
4. 엑박에도 캐릭터를! 마리오, 소닉, 크래쉬 밴디쿳에 버금가는 캐릭터가 필요하다는 빌 게이츠의 코멘트에 프라이즈가 물색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조안 K. 롤링의 [해리 포터]. 문제는 [해리 포터]의 출판사가 AOL계열이라는 것. 어쨌든, 백방으로 뛰었으나 아시는 것처럼, EA에게 밀리게 되었습니다.
5. 노티독. [크래쉬 밴디쿳]의 제작사이자, 이후에 SCEA로 흡수된 소규모 개발사이죠. MIT출신의 제이슨 루빈과 앤디 개빈을 프라이즈가 만났습니다. 협상을 했으나 결국 실패. 프라이즈는 소니와 그렇게 사이가 좋으면 그냥 잘 해보라고 한마디. 제이슨 루빈의 화답. "저는 PS2의 프로그래밍에 어렵다는 점을 개의치 않습니다."
6. MS가 Xbox의 제조건으로 접촉했던 회사는, 델, 게이트웨이, 컴팩, 그리고 NEC, 샤프, 카시오, 토시바, 미쯔비시. 대답은 한결같이 모두 "아니오"였습니다. 그리고 삼성도 이에 포함되어 있었죠. 책에 소개된 삼성전자 CEO 진대제씨의 발언을 옮겨봅니다. "MS는 가격의 측면에서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다. 이 사업에서 우리가 수익을 낼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왜 우리가 그들의 제품을 만들어 줘야 하나? 우리는 삼성 브랜드의 제품을 만드는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덧붙여, Dell의 CEO 마이클 델의 발언. "소니가 플레이스테이션의 가격을 떨어뜨리면, 그들의 주가는 올라간다. 내가 (Xbox의) 가격을 떨어뜨릴 때마다, 우리 회사의 주가는 떨어질 것이다. 왜 그런지를 이해할 수 없다면, 당신은 게임기 업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Xbox 사업이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전략사업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왜 이것이 델의 전략사업인지는 이해할 수 없다."
7. 예전에 루머로 나왔던 MS발(發) 휴대용 게임기 Xboy 프로젝트는 사실이라고 합니다. 모바일 쪽에 대한 MS의 대책으로 제출되었던 프로젝트였고, 역량의 분산이 우려되어 프로젝트는 일단 중단되었다고. 조만간, 닌텐도도 또 다른 전선에서 MS와 조우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