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루 배리모어, 장미의 이름으로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
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어라
―소설『장미의 이름』에 붙이는
움베르토 에코의 서문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드이
가장 무서운 질병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
은 무분별한 불량 비디오를 시청함으로써
비행 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
게 됩니다…… 한 편의 비디오, 사람의 미
래를 바꾸어놓을 수도 있습니다
―영화「장미의 이름」에 대한
문화공보부의 서론(?)*
어린 날, 내 망막의 처녀지에 맺혔던 붉은 꽃의 아름
다움, 나는 그 꽃 이름을 몰라 며칠을 앓아야 했다네 마
침내 그 이름이 ‘장미’라는 걸 알았을 때, 비로소 아름
다움에 대한 제공권을 완전 장악한 것 같은 망상에 사로
잡혔지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어 이름이란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영토를 명확하게 해준다는 것을, 그
러니까, 내 것이 아닌 장미를 질투하는 힘으로 장미의
이름을 외운 거라네 매혹적인 이미지에 견딜 수 없을
때, 나는 매혹의 이름을 찾아 헴ㅆ어 영혼을 부르는 듯
한 새울음을 향해, 호랑지빠귀, 라고 불러보는 그 순간,
울음의 매혹과 비행할 수 없는 육체의 슬픔을 견딜 수
있었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휘발성, 결국 장미도 이름
으로만 남는 거야
향기의 움직임이여, 그대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네
나는야 할리우드 키드였으므로, 할리우드 여배우 이름
이나 외우며 사춘기의 전부를 허비했지 저수지의 개, 같
은 날들이라고 비웃지 말게 난 모든 종류의 진지함을 경
멸했어, 그게 나의 호환이고 마마야 과연, 이름 속에 갇
혀 있는 게 진리일까? 비비안 리의 해골에 담긴 물을 마
시고 잠깐 깨달음을 얻은 적도 있었지 하나 나의 상상력
은 자꾸만 썩은 물이 고인 저수지처럼 음습한 곳으로 향
하는 것 같아 심지어 불량 불법 비디오에 나오는 모든
배우의 이름을 알고 싶어 이발소 그림, 화신극장의 쇼
걸, 만화에 나오는 등장인물들, 해적판 레코드 위에서
희미하게 광란하고 있는 기타리스트, 바기나에 난 점이
인상적이었던 ㅍㄹㄴ 배우…… 폐기물들의 환희……
뭐 그딴 것들, 내 청춘의 도서목록이랄까 나는야 쓰레기
의 이름들로 붐비는 지하 도서관, 내가 택한 건 향기 없
는 진리보다 지금 이 순간, 독버섯의 매혹, 문득 독약을
곁들인 웃음의 스테이크를 먹고 싶네 서른 넘어 만화방
한구석에 앉아 라면을 먹으며 저수지를 어슬렁거리는 개
처럼, 쿡쿡, 웃었지 잔뜩 무게 잡고 있는 세상을 향해,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후미진
만화방봐 나은 곳은 없어라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으므로 나는 행복했네
난 한 편의 불량 비디오에 의해 미래가 바뀌길 바랐어
아무것도 저지르지 못한 삶, 난 언젠가 인생의 안전
핀을 제거할 거야
폐기 처분될 운명들에 대한 내 연민의 저인망, 승자
도 패자도 없는
진흙탕 위에서 레슬링하기, 산다는 것은
비디오 숍에 가면 수많은 거짓말들이 제 이름을 대며
꽂혀 있지
난 진실한 사랑을 네게 고백했어 & 난 달콤한 거짓
말로 널 ㄸㅁ었어
우우 불타는 불량 테이프들의 환희처럼
거짓말들은 사라지고 사랑의 이름만 남는다네
드루 배리모어, 존재의 참을 수 없는 휘발성으로 널
부른다
12살에 건너간 ㅁㅇ과 알코올의 바다, 할리우드라는
영원한 기쁨조,
그리고 환각과 환멸의 도플갱어, 난 너를 모르네 아
니 알 것만 같네
가장 강력한 ㅁㅇ은 마음속에 있지 드루 배리모어,
인생이라는 환각에 취해 널 부른다 겉늙은 미소 짓
지 마
너를 마지막으로 내 청춘은 끝이 났다 말하는 순간,
지상 첫 붉은 열망의 파도가 다시 밀려온다네
변방의 한 시인이 거대한 세계의 수챗구멍을 들여다
보며
오물의 상상력으로 말한다 몸부림치며
썩어가는 모든 것들이여, 모든 쓰레기의 악령들이여,
내게로 임하라 내가 썩으며, 장미 먹는 벌레처럼
아름다움의 영토를 토해내리니
망막의 처녀지가 내게 물었네
악취와 향기, 무엇이 옳고 그른가
나의 후각이란 지식처럼 방자한 것,
망막의 처녀지가 다시 내게 물었네
붉은 꽃이여, 어떤 이름이 이를 대신할 수 있는가
*움베르토 에코, 조형준 옮김,『철학의 위안』,「역자 후기」중에서.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유하, 문학과지성 시인선 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