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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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결혼식에 간다 친구의 들러리를 서기 위해,
(결혼에 관한 한 그는 늘 들러리 의식을 갖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우연히 신부 친구와 눈이 맞는다 (앤디 맥
도웰 같은 여자를 상상하면 좋겠다) 처음 본 그날, 사내
와 여자는 돌발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다음날 아침, 그녀
는 사내에게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묻는다 우리 결혼하
지 않을래요? 사내는 당황한다 우린 겨우 한 번 만났을
뿐인데…… (사내는 결혼이란 두 개의 영혼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여자의 얼
굴이 일순 꺼졌다 켜진다 호호, 농담이었어요 그녀에겐
‘자유분방함’이라는 알리바이가 있다
그들은 다른 친구 결혼식에서 다시 조우하게 된다 그
리고 또 한 번의 즉흥적인 정사, 사내가 묻는다 도대체
몇 명의 남자와 잤죠? 사내는 여자의 내부에 보일 듯 말
듯한 컴컴한 다락방이 견딜 수 없이 궁금하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글쎄, 34명 정도? 그럼 나는? 당신
은,, (순간, 진한 아픔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32번째였
어요 당신은요?…… 둘은 서로의 기억 저편에 닫아둔
다락방에 대해 묻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욕망
이란, 서로의 뇌수 뚜껑을 열어 그 은밀한 다락방을 들
여다보고, 그 공간을 완벽하게 지배하고픈 것일지도 모
른다 그 다락방조차도 햇빛 가득한 창문을 내고 자신의
살림살이를 들여놓고 싶다는 욕망,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해될 수 있게, 다락방을 털어 재빨리 케케묵은 상처를
윤색하고, 비밀의 서랍을 정리해보지만, 그래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숨길 수 밖에 없는 그 무엇이
아니라, 원래 침묵의 편에 서 있는 것들이다 (두 사람
사이엔 침묵의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지금 이 순간의
‘불타오름,’ 그리고 나머지는 온통 무심한 어둠, 그 불
꽃의 저편은 내 격정의 영토와는 무관하다 그 어둠 속
에, 내 불타오름의 ‘타인’인 내가 살고 있고, 그녀의 불
타오름의 ‘타인’인 또 다른 그녀가 살고 있다 이 순간의
불쏘시개가 될 수 없는 상처들은, 타인인 ‘나와 그녀’가
사는 세계, 어둠 그 자체로 그냥 남을 뿐이다 그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기에, 어린애의 칭얼거림으로 그 어
둠의 세계를 들쑤시듯 간섭하거나, 아예 말문을 닫아버
린다 그 ‘말할 수 없음’이 사내와여자의 내면에 몇 개
의 우주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 불꽃에서 보면, 먼 별
속에 서로의 소유가 될 수 없는 ‘저편의 아름다움’이 있
다 불꽃의 매혹이 클수록, 그렇게 먼 그대, 타인됨의 아
름다움이 고통스럽다 그 고통의 속수무책: 둘은 저 바다
를 방관할 수밖에 없는 소나무의 마음처럼, 서로를 그대
로 두기로 한다 그 후로도 두 번의 결혼식이 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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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 번의 장례식, 결혼식 하객 한 명이 죽었다
그에게도 침묵의 성질을 타고난 미세한 상처의 흠집,
비밀들과
콤플렉스의 두개골, 그리고 몇 가지 삶과 사랑의 우
주가 있었지만,
그것들은 이제 더 이상 그의 몫이 아니다, 물론 침묵
의 몫도 아니다
그의 내면에 존재하던 무수한 타인들은 하나로 겹쳐
지는 게 아니라
재즈처럼 두서 없이 불연속적으로 소멸된다
그를 사랑한 자들만이 말없음의 강을 사이에 두고
괴로워할 뿐,
(애도는 산자의 공포를 잠시 위안의 무덤으로 인도
한다)
이윽고 산 자의 사랑은 몇 방울의 눈물을 징검다리
삼아
잽싸게 다른 우주로 이주해간다
한 영혼의 흠집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세상의 흠집만 깊게 남는다
무덤은 사자의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여 사자의 은밀한 상
처와
자의식들은 이제 완벽하게 흙의 무심함 속에 보존되
거나
혹은, 완벽하게 허공과 몸을 바꾼다
그가 생전에 마음의 눈길을 주었던 나무와 꽃잎만이
그 사라진 다락방의 움직임을 알고 있으리라
3
두 남녀는 결혼식을 포기하고 그냥 같이 살기로 한다
다른 두 개의 하늘, 두 개의 태양 아래서
그리고 서로의 얼굴에 언뜻 스치는 먼 별빛의 아름다
움을
권태의 손가락으로, 가끔은 겸연쩍게 가리키며, 웃음
짓는다
불꽃의 에너지는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
불꽃이 살아 있을 동안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으
므로,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유하, 문학과지성 시인선 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