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오케스트라
오늘은 전체 단원들의 정기 건강검진일이다.
우리는 모두 병동 앞으로 나가 나체로 줄을 서서 대기했다.
텅 빈 마당에는 낡은 피아노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대기시간이 길어지자 길게 하품하던 친위대 장교 하나가
누가 피아노를 한번 멋지게 연주해보라고 했다.
K가 천천히 걸어나가 나무의자에 앉더니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는 지난해 프라하의 테레진수용소에서 온 젊은 작곡가였다.
잠시 후 우리는 모두 얼굴이 사색이 되고 말았다.
그의 연주는 장교들이 좋아하는 흥겨운 왈츠곡이 아니라
평소 내 영혼이 작곡했다고 자랑한 자신의 피아노독주곡이
었다.
다음날 새벽
기차 타고 노동현장으로 출근하는 ‘수감자 행진곡’ 연주가
끝나자
단장이 갑자기 오후에 특별공연이 있다고 했다.
얼마 전 부임한 악단장 겸 지휘자는 작곡가 말러의 조카인데
죽음에는 리허설이 없다며 단원들을 카포 이상으로 혹도라
게 다뤘다.
우리 유대인 단원들의 공연 실수는 바로 지옥행이었다.
모두 악보와 악기를 목숨처럼 닦고 조이기에 정신이 없었다.
점심 때 우리는 묽은 감자수프를 먹고 공연장으로 갔다.
어린아이들과 머리 깎은 어른들이 손을 잡은 채 웅성거렸고
창백한 얼굴에 붉은 비트즙을 발라 건강하게 위장한 병자들
도 보였다.
모두 목욕에 대한 기대 탓인지 아주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늘 그렇듯 악단은 밝은 표정으로 막사 무대를 정돈했고
난 악보와 트럼펫을 꺼내 다시 점검했다.
마침내 유대인 카포가 샤워실 회색 철문을 열자 우리는
베르디의「개선 행진곡」과 스트라우스의「푸른 도나우강」을
연주했고
카포에게 ‘선발’된 수백 명이 경쾌한 행진곡에 발맞춰 행진
했다.
그런데 그 긴 행렬 중간에는 어제 연주하다 사라진 K도 있
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난 숨이 가빠져 트럼펫 선율이 흐트러
졌다.
단장과 카포의 눈빛이 비수처럼 내 가슴에 꽂혔다.
얼마 후 행진이 끝나고 회색 철문이 닫히자 지휘봉이 치
솟았다.
단원들은 얼른 뒤돌아 앉아 다른 막사에 비명이 들리지
않도록
주페의「경기병 서곡」을 더욱 힘차게 연주했다.
이 곡은 트럼펫 독주여서 난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처럼
허리가 휘어지도록 혼신을 다해 불었다.
오늘도 우리의 ‘샤워심포니’ 공연은 무사히 끝났다.
막사로 돌아와 낡은 수도꼭지를 트니
독가스 대신 물방울이 똑, 똑 떨어졌다.
모두 물방울 같은 하루분의 생명이 연장되었다.
물론 난 예정대로 우리 악단의 행진곡에 발맞춰 행진할
것이다.
멀리 트럼펫 같은 굴뚝 위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제는 새들도 굴뚝의 연기를 피해 날아가고
태양도 막간을 이용해 잠깐씩 뜨고 질 뿐이었다.
악의 평범성
이산하, 창비시선 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