엥겔스의 여우사냥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애인이 런던의 맑스 무덤으로 가서
혼자 촛불을 들고 찍은 셀카사진을 보내왔다.
사진 밖으로 엥겔스가 개를 데리고 여우사냥을 떠나고 있
었다.
난 슬며시 해방 직후에 나온 맑스의『자본론』을 뒤적거
렸다.
맨체스터 방직공장에서 착취당하는 10살 소녀에게
한 노동위원이 종이에 God(신)의 글자를 써보라고 하자
소녀가 거꾸로 Dog(개)이라고 썼다는 대목이 각주에 나
왔다.
때마침 신을 조롱한 맑스의 풍자에 맞춰 옆집 개들이 짖
었다.
촛불이 꺼진 광장 위로 멧돼지의 유령들이 배회했다.
다윈은 맑스가 보낸『자본론』친필사인본을 읽다가 던져
버렸다.
진화론은 공산주의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맑스는 이미 다윈의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에서
‘계급투쟁’이라는 결정적인 아킬레스건을 찾아냈다.
맑스가 숨지자 엥겔스는 그의 이론에 진화론을 삽입했다.
제1바이올린을 보조하는 제2바이올린의 엥겔스는
한때 낭만주의 시와 고급 와인에 젖어 살던 문학청년이었다.
그에게 인간 본성은 계급 이전의 진화였을까.
그에게 자본론과 진화론은 두 개의 수레바퀴였을까.
자본주의는 위기 때마다 새로운 가면을 쓰며 폭주하고 있다.
맑스의 자본론이 오히려 예방주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엥겔스는 다윈의 장례식장을 조문한 1년 뒤
맑스의 장례식에 가서 담담한 표정으로 추도사를 낭송했다.
“그는 모든 것에 앞서 진화론적 사고를 했다.
비록 다윈이 그 내용을 몰라서 거절했지만
맑스는 자본론의 일부를 다윈에게 바치려고 했다.”
폐렴으로 숨진 맑스는 런던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묻혔다.
몇년 후 엥겔스도 숨졌지만 제1바이올린의 화려한 선율을
가리지 않기 위해 맑스 옆에 눕는 대신 화장되었다.
유골도 신을 개라고 쓴 방직공장 소녀가 투신한 강에 뿌려
졌다.
얼마 후 맑스의 딸 라우라도 남편과 함께 동반자살했다.
“더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이유였다.
조문 온 레닌의 추도사를 들으며 맑스는 반쯤 눈을 감았다.
“라우라 부친의 꿈은 예상보다 빠르고 거침없이 실현될
것이다.”
그 꿈은 7년 뒤에 이루어졌고 70년 뒤에 무너졌다.
개를 데리고 여우사냥을 떠났던 엥겔스는 멧돼지를 잡
았고
내 애인은 여전히 맑스 무덤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촛불을
들고 있었다.
아마도 엥겔스가 사진 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몰랐다.
악의 평범성
이산하, 창비시선 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