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물방울이었다
깊은 밤 내 이마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천장에서 약 2분 간격으로 일정하게 똑, 똑 떨어졌다.
누수현상이 장마 탓인지 윗집 탓인지는 알 수가 없었고
내 몸은 이상하게 사지가 묶인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물방울이 톡, 톡 튀어 시원했다.
이미 잠은 달아나 어둠속을 가만히 응시했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한동안 종소리에 실려 먼 여행을 떠났다.
고향으로 가는 길은 가장 멀었다.
얼굴과 머리맡이 촉촉해졌다.
한 시간쯤 지나자 물방울의 강도가 바뀌었다.
작은 돌이 이마에 떨어지는가 싶더니
세 시간쯤 지나서는 망치로 못을 박았고
다섯 시간쯤 지나서는 도끼로 이마를 꽝, 꽝 내리찍었다.
이제 이마는 물방울이 떨어지기 전에 이미 도끼에 찍혔다.
이때부터 난 환청과 환시에 시달렸다.
한 장수가 젊은 포로를 잡아 눈도 가리고 손발도 묶어
적군의 매복지를 실토할 때까지 막사 추녀 밑에 세워놓았다.
정수리에 빗물이 일정하게 떨어지는 ‘물방울 고문’이었다.
한 젊은이가 큰 소금독에 묻혀 목과 머리만 위로 내놓았다.
절인 생선처럼 그의 몸에서 천천히 물방울이 빠져나갔다.
염소들이 차례차례 의자에 묶인 여자의 발등을 핥고 있었다.
옆에서 남자가 웃으며 계속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낡은 수도꼭지에서 똑, 똑 떨어지는 물방울을 서로 먹으려고
사투를 벌이는 아우슈비츠의 비명이 들려왔다.
시골집 추녀 밑의 바닥이 움푹 패 있었다.
실성한 포로와 젊은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이후 세상의 모든 것들은 물방울로 보였다.
자세히 보면 맑고 투명한 물방울 속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어 고요해지는 그 무엇이 숨어 있다.
자신을 적당히 허물어 절반의 미련을 남기는 법도 없고
비루한 생의 잉여까지 저물도록 방치하는 법도 없다.
언제나 자신의 형체를 완전히 파괴해 완전히 증발시켜버렸다.
내가 물방울 앞에서 물방울보다 먼저 무너지는 이유였다.
나는 여전히 다른 세상으로 가는 입구를 찾지 못했고
내가 찾을 때쯤이면 입구는 이미 출구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계속 물방울을 맞으며 부서져야 했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그 무엇이 도끼처럼 내 정수리를 찍었다.
실은 내 자신이 물방울이 아니었던가.
물방울의 모순과 분열을 애써 숨기지 않았던가.
부정하고 싶어도 내가 물방울이 아니란 것을 증명할 길이 없
었다.
늘 똑같은 것이 반복되면 똑같지 않은 것이 전복되므로
무수히 많은 세계들이 그 물방울에 부서져 증발했을 것이다.
오늘도 물방울은 여전히 일정한 간격으로 똑, 똑 떨어졌고
그 속에는 예기치 않은 그 무엇이 숨어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무엇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 무엇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내 눈에는 모두 물방울이었는데 아무도 물방울이 아니었다.
악의 평범성
이산하, 창비시선 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