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메양귀비
1
날이 흐려 걱정했는데 지프차를 타고 천문봉에 이르니
발아래로 천지가 말갛게 온몸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때맞
추어 구름 사이로 막 지던 해가 웃을 조금 열어 몸 한 부분
을 살짝 보여주기도 한다. 저녁을 먹고 기상대에서 잠시 눈
을 붙였다가 별을 보겠다고 나와보니 하늘은 두껍게 구름
으로 덮였다. 아침에도 하늘은 잠깐 뜨는 해만 보여줬다가
완강하게 구름으로 몸을 덮는다. 해가 지고 뜨는 곳이 지척
인 것이 놀랍다.
2
서울서 장마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 떠났는데 이곳은 봄
이 한창이다. 산록이 온통 연초록의 비단으로 덮였고 그 비
단을 붉고 희고 노란 들꽃이 수놓았다. 그 갖가지 꽃들 중
에서 나는 굳이 녹황색의 두메양귀비를 찾아본다. 백두산
밤하늘의 별들한테 듣지 못한 얘기들을 그것들이 대신 들
려준다고 해서다. 갑자기 구름 사이로 쏟아진 햇살이 꽃밭
을 훑고 간다. 뜰 수 없을 만큼 눈이 부시다.
3
백두산을 내려와 연변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처녀
가이드는 외할머니가 고국을 떠나면서 외할아버지를 잃
고 다른 외할아버지를 만나 정착한 사연을 옛말하듯 들려
준다. 개방 후 외할머니가 옛 형제들을 만나는 재회와 갈등
의 사연도 눈물겹다. 그녀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줄곧 두
메양귀비를 생각했다. 어쩌면 그 꽃은 힘겹게 백두대간을
타고 올라와 이곳에 피면서, 늘 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울고
있을 것 같았다.
4
오락가락하던 비가 멎고 구름이 갈라지더니 동쪽 하늘에
쌍무지개가 떴다. 무지개는 산과 마을을 바꿔가면서 우리
를 쫓아온다. 초승달도 구름으로 얼굴을 덮었다 벗었다를
되풀이한다. 별들이 다닥다닥 붙은 백두산의 하늘은 끝내
펼쳐지지 않고 대신 떴다 감았다 하는 눈앞에 수천수만송
이의 녹황색 두메양귀비만 어른거린다.
사진관집 이층
신경림, 창비시선 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