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거의 밤 11시가 넘어서도 끝나질 않았다.
앤은, 라자르가 낙원에 잠식당했을 때 스쳐지나가듯 펙소 콘소시엄의 단서를 보았던 것부터 이야기를 하였다.
겨우 일 초 남짓한 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는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앤은 낙원 속에서 라자르가 어려지는 과정을 직접적으로 보았기에 똑똑이 기억하고 있었다. 낙원의 시스템이 사용자의 욕구와 무의식을 가상현실에 반영하며, 그 욕구와 무의식은 기본적으로 사용자가 가지고 있는 기억을 근원으로 하고 있다. 즉, 앤이 낙원에서 본 라자르의 무의식 속의 펙스의 단서는, 라자르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기억이라는 소리이기도 하였다.
당연히 기억이 날 리가 없다.
그 때가 언제인지도 모르고, 설령 언제인지 안다 하더라도 이제와서 그 때의 상황이 무슨 상황이었는지 조차 기억을 할 수가 없으니깐.
낙원에서 앤이 보았던 자신의 무의식을 토대로 라자르가 겨우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은, 하여튼 그 날이 자기 생일이었던 거 같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뭔가 선물을 주려던 찰나 누군가와 대판 싸웠던 것 정도로 겨우 기억을 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일단 확실한 건 그 싸움의 대상이 어머니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여기까지 기억을 해내긴 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라자르도 올해로 나이가 200살이 훌쩍 넘어가는 데, 못해도 9살 이전의 기억을 되새겨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9살 이후부터는 부모가 아닌 메이드와 집사들에게 보살핌을 받아 자랐고, 그 마저도 사관학교에 들어간 후부턴 부모에 대한 관심 자체를 완전히 잊었으니, 오히려 지금까지도 제 엄마 아빠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용하도 할 정도였다. 그래서 솔직한 말로다가, 낙원에서의 강력한 영향을 받아 어려지고 나서 잠시나마 엄마처럼 따랐던 앤이야 말로 진짜 자신의 엄마와도 같았다.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를 막 엄청 빼다 닮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렸을 적 보았던 특유의 기품있고 우아하면서도, 또 한 편으론 어딘가 모르게 엉뚱하고 4차원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 것이 신묘할 정도로 닮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비단 앤 뿐만이 아니라, 다섯 부인들 모두가 다 남편에게 모성애를 느끼고,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곤 하였다.
“...”
“와, 우리 아빠 그런 취향이었...”
“조용해라, 다 들리겠다."
“너도 인마, 맨날 큰 엄마 젖으로 부족하다면서 아자젤 누나랑 베로니카 누나 찾아가서 시도때도 없이 젖 달라고 하는 주제에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 않냐?”
“글세~ 이래보여도 난 아직 애기라서 그래도 된다 생각하는데?”
“그리고 자기보다 훨씬 덩치 작은 유모한테 앵겨붙어서 젖 달라고 애교 부리는 애한텐 듣고 싶지 않은데.”
“...”
“넌 좀 나한테 맞아, 이 쉐키야.”
“어, 어...?”
“인사해, 얘 이름이 단풍이인데, 단풍나무로 만들어져서 이름이 단풍이거든?”
“가벼우면서도 무지하게 단단하지. 그래서 아무리 두들겨 맞아도 죽진 않을 거야.”
“야, 야! 장난이라고! 리처드 좀 말려봐, 좀!!!”
“야, 버질, 니가 좀 참아라.”
“놔 봐! 오늘이 저 녀석 제삿 날이야!!”
“지난 번에는 내 물푸레나무 배트를 부숴뜨려놨더니, 이제는 날 페도새끼라고 놀리고 자빠져있어, 으어?!?!”
“...”
“밤 늦게까지 다들 참...”
“활기차네...”
“내가 가서 조용히 하라고 하고 올까?”
“냅 둬, 저러면서 크는 거지 뭐, 다들.”
“아직도 젖먹이를 하는 구나.”
“귀여워라~”
“저게 말이 젖먹이지, 하는 짓은 순 지 아빠랑 다를 바 없는데...”
“크흠!...”
“하여튼 마저 이야기 하면, 대충 자기가 꼬꼬마였을 시절에 오메가 그룹이 그룬더 인더스트리를 향해서 계속 인수합병 제의를 해왔었다는 거야.”
“총 일곱 차례의 인수합병 시도가 있었고, 그 중 마지막 일곱 번째는 아예 그룬더 인더스트리의 소액주주들과 그룬더 사의 경영진들을 유인하고, 그 당시 오메가 그룹과 거래를 하고 있던 주요 메이저 언론사에 찌라시를 뿌려서 장기적으로 그룬더 인더스트리의 주가를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인수합병을 진행한다고 나와있었어.”
“주가 조작이라는건가...”
“그룬더 인더스트리의 시세가 최종 하한 금액으로 떨어질 때, 시장매집으로 오메가 그룹이 그룬더 인더스트리의 주식을 매수하려고 했었던 거지.”
“이건 뭐 더 포장해서 말하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이, 계획적인 금융범죄라고 밖에 할 수 없어. 그건 오빠도 잘 알지?”
“그리고 이 모든 인수합병 계획의 승인권자가 바로...”
“콜름 오드리스콜...”
“그 당시 오메가 그룹의 대표이자, 현재 펙소 콘소시엄의 대표이면서...”
“레모네이드 오메가가 부활시키려고 하는 사람.”
“... 이 양반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이길래...”
“내가 10살도 안 되었을 때부터 이런 짓을 벌여왔었다고...?”
그룬더 인더스트리와 펙소 콘소시엄 사이의 오랜 인연을 들은 라자르는, 오드리스콜 회장,통칭 오메가 회장이란 사람이 자신이 한창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부모님의 회사를 강제로 인수합병하려고 했었다는 사실은 놀람과 당혹을 넘어 충격 그 이상이었다.
꿈의 기술이라고도 불리우는 핵융합 발전 신기술로 시작하여 어머니와 아버지가 일구어놓은 회사를, 무려 일곱 차례에나 걸쳐서 강제로 가져가려고 했었다는 점도 이미 굉장한 충격이었을 터. 하지만 멸망 전부터 봐왔던 그 늙다리 양반이 아무리 겉으로 나이가 많아봐야 1세대 슈퍼솔져 출신인 자기보다 나이가 많을까 생각했는데, 자기가 아홉 살도 채 되기 전의 꼬꼬마이던 시절부터 이미 회사 대표였다는 사실이, 과연 이제와서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이기나 할까?
제1차 연합전쟁 이후 블랙리버의 자회사로 들어간 그룬더 인더스트리의 사장으로서이자 앙헬 리오보로스 회장의 대리이기도 하였지만, 기업의 그 어느 누구도 자신보다 나이 많은 자는 없었다. 하물며 그 앙헬 리오보로스 조차도 뒤늦게 오리진 더스트로 신체를 강화하여 젊은 외모를 유지하긴 하였으나, 국가에 의해 관리되던 오리진 더스트가 민간에 풀린 건 2세대 슈퍼솔져가 나오고도 한참 뒤의 일이었으므로 기업인들 중에는 라자르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없다고 봄이 맞았다.
“그래서 마저 이야기를 하자면...”
“일곱 차례에나 걸쳐서 오메가 회장이 그룬더 인더스트리를 인수합병 목적으로 여러 방향에서 집요하게 괴롭혀왔고, 이 시기가 당신이 어렸을 때 부모님이랑 사실상 떨어져 지낸 시기와 거의 엇비슷 하다는 거지.”
“연일 언론에서 찌라시를 뿌렸을 거고, 주식 시장에선 매일같이 주식이 왔다갔다 하고 있을 터이니, 솔직한 말로 내가 이 회사 대표라 하면 아예 그냥 다 포기하고 인수합병을 그냥 받아들였을 거야.”
“어째서...”
“왜 그 새끼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 엄마랑 아빠가 일궈낸 회사를...”
“그 물음의 대한 대답은 오빠가 더 잘 알 거 같은데.”
반일라가 쓰고 있던 돋보기를 벗어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빠도 기업인 출신이잖아.”
“일라야!”
“뭐? 난 우리 남편 욕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야!”
“나도 안타까워 죽겠어, 우리 남편한테 이런 상처가 있었다는게. 생긴건 아주 그냥 사랑스러워 죽겠는데!”
“근데 만약이라는 걸 생각해보자고. 이런 일이 있었던 것 조차 모른 채로 자기 엄마랑 아빠가 일궈놓은 회사를 자식이 그냥 내다 판 거면...”
“어... 나는 솔직히 용서 못할 거 같아, 부모된 입장으로서.”
“...”
“그렇데, 디온.”
“... 앞으로 엄마 말 더 잘 들어야겠다, 진짜...”
일라의 말 한 마디에 라자르는 물론이고 부인들 모두가 침묵하였다. 일라의 말대로, 그녀가 남편을 욕보이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상처를 안타까워하고, 또 과거부터 벌어진 사건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지금 나열한 것들은 말 그대로 다 추측일 뿐이잖아, 그 당시 상황을 타임머신 타고서라도 직접 가보지 않는 이상. 이제와서 이걸 가지고 뭘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부모님에 대한 정보만 더 자세히 알려줘. 그러면 내가 그 당시 상황까지 낙원 시스템에 다 입력시켜서, 가상현실에서 어머님, 아버님을 뵐 수 있게 해줄 테니깐.”
“이렇게 해서라도 난, 당신이 부모님과 마지막 인사를 해야된다고 생각해.”
“... 여보.”
“말해.”
“나 뿐만 아니라 여기있는 새아가, 사라카엘이랑 일라, 클로이랑 은별이 우리 모두 당신을 남편으로서 사랑하고...”
“또 당신의 부족한 모성애를 채워줄 엄마로서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 하지만 우리 모두가 당신의 진짜 엄마가 될 수는 없어.”
피톤의 한 마디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다.
여섯 부인들을 부인 이상으로서 사랑하고 있었던 라자르에게는 마치 현실을 직시시키듯 마법이 풀리는 것 같았다.
낙원에서 그의 엄마가 되어주었던 앤 뿐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민하준 합동참모차장의 명령으로 부관 및 감시역으로 시작한 그녀들은, 라자르를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가지고 있는 상처를 눈치챘고, 그 곳에서 모성애를 느꼈다. 다섯이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 다 다르겠지만, 어쨋건 본질적으로는 모두 모성애로 직결되어졌다.
그 만큼 남편을 사랑한단 뜻이고, 또 그 만큼 안타깝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더 이상의 말 한 마디 오가지 않고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깊히 고민을 하던 라자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시간을 좀 줘. 생각할 시간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좀 줘.”
“... 알았어.”
“준비되면 언제든지 말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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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중 삽화로 사용되는 그림과 사진의 출처는 구글링과 핀터레스트입니다.
드디어 정규 30화 + 후일담 2화에 걸친 대장정이 끝이났습니다.
아 빨리 흐린 기억 챕터 넘어가고 싶어서 얼마나 마음이 다급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저는 챕터 끝났다고 쉬는 거 없습니다.
바로 흐린 기억 챕터로 금방 여러분들의 앞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뭔가 묘하게 라자르가 버키, 아이언맨에 샤아 아즈나블이 섞인 것 같아져버렸군요.
하여튼 모성애는 위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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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01.08 18:1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