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링크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니 무언가 살짝 이상하긴 했다.
수집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예언에 가까운 예측을 하는 아르망조차 그가 그녀를 꺼린다는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어째서 그런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지게 된 것일까.
-영 뭔가 이상하긴 하네.
불과 몇 개월 전보다 작업 능률이 크게 오른 덕에 빠르게 오전 업무인 서류 작업을 비롯하여 각종 데스크 업무를 다 처리한 사령관은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쿠구구구구구!!!!!!!!!’
……어딘가에서 오르카 호를 뒤흔들 정도의 엄청난 굉음이 들려오기 전까진 말이다.
이전 같았으면 어디 암초에 충돌했거나, 또는 과도한 실험으로 인해 또다시 동력원의 노심 용해가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고 기겁을 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사령관은 한숨과 함께 패널의 화면을 전환하여 닥터와 포츈이 담당하는 R&D 구획의 연구 계획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 정리 중인 아르망에게 말했다.
“아르망, 소완한테 점심은 간단하고 깔끔한 거로 만들어서 함교로 보내 달라고 전달해줘. 난 도서실에 간다.”
“네, 폐하. 바라시는 대로.”
“그리고 너는 시간 딱 맞춰서 교대하고, 다른 애들이 좀 많이 의심하더라.”
오르카의 현재 수심과 위치가 표시되고 있는 화면만 켜둔 후, 걸쳐둔 외투를 습관처럼 걸치면서 부탁하는 그에게 아르망은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저는 단순히 의심받는 것을 넘어설 날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폐하.”
“어이구, 노리는 사람이 또 늘어난 건가. 몸이 여러 개면 좋았을 텐데.”
그녀의 말에 가벼운 웃음과 함께 가벼운 농담으로 맞받아쳐 준 사령관은 방을 나서려 했다.
“아 맞다, 폐하. 처음 보는 기묘한 가능성이 확인되었는데, 만약을 위해서라도 이틀 후의 서버 점검 담당을 교체하시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응?”
……조금 느닷없는 예측이 아르망의 입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알 수 없는 가능성이라고? 철충과의 전투에서 뭔가 일이 터지는 쪽이야?”
“아뇨, 뭔가 다릅니다. 이런 건 처음인데……. 그래서 알 수 없다고 한 겁니다, 폐하.”
“허어…….”
뭔가 목 뒤가 쭈뼛 설 정도로 본능적인 경계가 울린다.
“도저히 무어라 형용하기 힘듭니다만, 아마 최소한 폐하의 앞날에 큰 분기점이 될 사건이 찾아올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최소가 그 정도면, 최대는?”
“오르카 사회의 분기점으로 예상됩니다. 그 이상은 판단이 힘듭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르망조차 예지를 못 할 정도의 일이면 분명 무언가 커다란 사건일 것임은 확실했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말하는 것만으로는 무언가 석연찮은 점이 많았다.
“일단 서버 점검 담당자 명단을 뽑아서 내 계정으로 보내놔, 도서실에 가서 여유가 있으면 확인하면서 교체해볼 테니까.”
“명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폐하.”
‘치익-.’
그렇게 문 앞에서 나서자, 한 마리의 대형 경비견처럼 주변을 날카로운 눈으로 감시하고 있던 붉은 머리칼의 바이오로이드가 귀를 쫑긋 세우곤 벌떡 일어나 사령관을 맞이했다.
“오늘도 열심히구나, 펜리르.”
“아, 주인님!”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조금 전까지의 날 서린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꼬리도 세차게 흔들면서 펜리르는 방긋 웃었다.
“나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 같았어?”
“그럼, 예전에는 고기에 낚여서 레아를 들여보낸 적도 있었으니까, 그날에 비하면 엄청나게 발전했지.”
펜리르는 방금 들은 말에 무서운 기억이 떠올랐는지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으, 그날 리리스 언니랑 페로한테 엄청나게 혼난 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구…….”
“하하, 그래도 그렇게 혼나면서 많이 배웠잖아? 자, 이거 먹으면서 좀 떨쳐내.”
상상 이상으로 엄하게 혼났던 모양일까, 말하면서도 살짝 떠는 붉은 머리의 늑대 귀를 한 바이오로이드는 늘 간식으로 받는 육포를 받아들고 약간 울상이 된 채 우물거리다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주인님 식사는 항상 그 소고기 완자? 아니, 이게 아닌데, 소… 뭐라는 요리사가 만드는 거지?”
“소완 말하는 거라면 뭐 그렇지? 왜?”
아우로라, 포티아와 함께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소완이 컴패니언의 막내에게서 언급되자 그는 다소 의외라는 표정이 되었다. 대체 그녀가 무슨 이유로 펜리르의 입에서 언급될 이유가 있는 것인가?
“그게 언니가 그 소완이라는 요리사를 위험요소라고 하면서 건수 잡히면 조용히 묻어버리고 말겠다는 말을 했었거든. 주인님, 내가 오기 전에 언니랑 요리사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음…….”
과연, 그런 이유인가. 라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리리스가 소완을 노골적으로 싫어하고, 자매들 앞에서 저렇게 이를 갈면서 묻어버리고 싶다고 벼르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분명 그건 그의 상태가 안 좋아져서, 판단력이 크게 떨어졌을 때 일어났던 사건들이 원인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 이야기를 하려면 좀 길어지는데…….”
◐
소완이 오르카에 합류하기 약 보름 전.
“대단한 걸, 괜히 최고의 경호원이라 불리던 것이 아니었구나.”
“우후훗, 개인 경호에 있어선 저와 제 자매들은 항상 최고의 실력을 자랑했답니다.”
항공모함보다 거대한 잠수함 오르카는 거대한 만큼 각종 편의시설은 물론, 어마어마한 전투력을 지닌 고급 바이오로이드들도 훈련이 가능한 시설도 내부에 갖추고 있었다. 블랙 리리스는 현재 가동 가능한 최고 수준의 개인 경호 훈련을 순식간에 통과하고, 난이도를 올리기 위해 블랙 리리스 본인이 추가한 무작위 위협 요소도 빠르게 제거하였다.
그 일련의 매끄러운 훈련 기록을 패널을 통해 재생해본 사령관은 오르카에 찾아온 이래 몇 번의 면담을 통해 차근차근 알아나가던 블랙 리리스와 다시 함장실에서 마주한 채 진심을 담은 감탄을 하고 있었다.
“다른 애들도 시나리오를 진행하면서 전부 지켜냈고. 솔직히 처음 만난 날 들은 말 때문에 잔뜩 긴장했거든.”
“주인님이 바라시는 바니까요. 비록 제가 원하지 않더라도 해낼 의무가 있답니다.”
공손하게 그의 말에 답해주지만, 내부에는 무언가 묘한 어긋남이 느껴지는 그녀를 보면서 옆에서 부관의 일을 해주고 있던 콘스탄챠는 다소 우려스러운 눈이 되었다. 눈앞의 컴패니언 바이오로이드가 들어온 후 오르카에서 무슨 행적을 보였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유일무이해진 인간이자, 그녀들의 주인이 된 사령관에 대한 일거수일투족을 몰래 뒤쫓는 것부터 시작하여, 제멋대로 사령관에게 접근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을 선별한 후 일부와는 충돌을 일으키는 등의 사건들을 불과 며칠 만에 모조리 일으켰다.
오르카에 온 직후부터 검사를 받다가 탈주한 시점에서 고운 눈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저런 일들이 계속해서 겹쳐 일어나다 보니 자연스레 블랙 리리스에 대한 악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가 시저스 리제와 비슷한 수준의-물론 리제처럼 가위를 들고 살벌하게 날뛴 것이 아님에도-스토커로 낙인이 찍힌 건 물론, 오르카를 홀로 뒤엎어 버릴 수 있는 경계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것까지 그의 귀에도 드문드문 들려올 정도였다. 그 때문일까, 마치 시한폭탄을 쳐다보는 것만 같이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던 메이드 바이오로이드는 이내 입을 열려 했다.
“주인님, 역시 아무래도…….”
“괜찮아.”
손을 살짝 들어서 그녀가 말하려는 것을 제지한 사령관은 고개를 살짝 돌려서 말을 덧붙였다.
“자리를 비워줘, 콘스탄챠. 이제부턴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해야 하니까.”
“하지만…….”
“문제없을 거야, 그러니 부탁이야.”
명령조가 아닌, 부탁이 담긴 사령관의 말에 눈동자가 흔들리던 콘스탄챠는 이내 수긍하듯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보리야, 나가자.”
‘딸칵-.’
함장실 한편에서 잠들어있던 개를 깨운 후 같이 자리를 비운 메이드가 문을 닫으면서 들려오는 소리를 확인하고 작은 한숨을 내쉰 사령관은 이내 패널을 비롯한 방 내부의 모든 전자기기의 전원을 내렸다. 만약을 대비하여, 지금의 대화가 유출될 일이 없어야 했기에.
“콘스탄챠가 너를 저렇게 경계하는 이유, 너 자신은 알고 있지?”
“흐음, 착한 리리스가 항상 성실하게 밀착 경호를 한 것 때문일까요?”
“…잘 아네.”
뻔뻔할 정도로 자신이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의 눈총을 받는 이유를 한 방에 내뱉는 리리스를 다소 어이없는 표정으로 보던 사령관은 이내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뭐, 그렇게까지 내 뒤를 밟아 왔으니 이야기는 쉽겠다. 리리스, 너는 내 몸에 뭔가 이상이 있는 걸 눈치챘지? 솔직하게 답해줘.”
“.......”
그의 말에 블랙 리리스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평상시의 자신만만하던 모습과 달리, 처음 만났을 때 페로에게 추궁당하던 모습과 비슷하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마치 어떻게든 답을 피하려고 애쓰는 것만 같이 시선을 못 마주치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네. 알아버렸어요. 나쁜 리리스가……. 죄송해요, 주인님.”
“어디까지 알아냈니. 기록에 남지 않게 하고 있으니 그냥 내게 터놓아 줘.”
“근육 경련, 그리고 감각에 문제가 있어 보이시는 것과 약간의 불면증 증세 정도…….”
그의 뒤이은 질문에는 풀 죽은 투로 점점 기어서 들어가는 투로 답해왔다. 그 말에 다소 떫은 표정이 되었던 사령관은 잠깐 침묵했다가 이내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이거 참, 다 아네. 그럼 혹시 그걸 다른 애들한테 알렸니? 예를 들자면 컴패니언의 자매들한테 라던가.”
“아뇨, 주인님께서 모두에게 숨기시려는 모습을 보이셨는데 어떻게 그걸 알고 말할 수 있겠어요…….”
넌지시 떠보는 듯이 한 그 질문에는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마치 알게 된 사실을 자신의 속내에만 담은 채, 걱정되는 마음으로 뒤를 밟아 왔다는 것을 알리는 것만 같았다.
-확실히 마리 말마따나 유별난 성격이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뺨을 두드리면서 지켜보던 그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 블랙 리리스를 만났던 날, 그녀는 호위를 위해서라면 다른 아이들을 배제하겠다는 투로 무언가 내면이 망가진 느낌을 풍겨왔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리리스의 모습은 그날 봤던 모습과는 무언가 달랐다. 오직 자신의 인정을 위해 달려오다가 넘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넘었음을 인지하고 움츠러든 모습은 전혀 다른 바이오로이드인 것만 같았으니까.
이런 애한테 과연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맡길 수 있을 것인가?
-좀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생각을 정리해보면, 사실 복잡하게 생각했기에 그렇게 보이는 걸 수도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첫날 그렇게 말한 것도 결국 그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나르시시즘 가득한 말로 선언한 것일 뿐, 막상 정말로 위험한 선을 넘은 전적은 없었다. 특히 진짜로 위험한 주시 대상으로 올라와 있는 편집광적인 집착 증세를 보이는 페어리의 리제에 비하면, 리리스가 보인 행보는 그저 호위용 바이오로이드라는 역할에 충실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정리되자, 사령관은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넌 겉과 속이 다르구나. 위협하는 말을 해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줄 알아. 이러면 믿고 맡길 수 있겠어.”
“주인님?”
독단적으로 행했던 일들 때문에 혹여나 거부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했지만 그것과 정반대되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자 리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사령관은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스토킹은 분명 나쁜 거지, 하지만 덕분에 넌 내가 어떤 상태인지 오르카 내에서 누구보다 잘 알게 됐어. 그걸 다른 애들에게 알리지도 않았고.”
그렇게 말한 후, 잠시 뜸을 들였던 그는 결심이 굳은 투로 그녀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그러니 리리스, 이제부터 너는 내 그림자가 되어 움직여줘.”
“주인님의 그림자라 하심은……?”
좀처럼 이해가 안 가는지 리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눈에 띄게 심해진 후유증으로 인해 떨리는 양팔을 책상 위에 올리며 살짝 웃으면서 답해줬다.
“콘스탄챠는 물론 라비아타를 비롯해서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내 뒤를 지켜주면서 내가 알아채지 못한 문제가 터졌을 때 대신 은밀히 움직여주는 것. 경우에 따라선 오르카에서 잠시 떠나야 하는 일도 생기겠지만, 그래도 원하는 ‘보상’은 반드시 해줄게.”
‘오르카 내에서, 내 모든 것을 완전히 알아챈 것은 네가 유일무이하니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라고 말이 끝난 순간, 블랙 리리스의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의 독단에 가까운 스토킹을 통해, 오히려 그녀를 믿게 된 것이었다.
멸망 전의 동형기, 아니 ‘나쁜 리리스’들처럼 거부당하지 않고, 그녀의 행적을 유심히 관찰하다 인정해주었다. 최후의 인간, 오르카 호의 함장이자 저항군의 사령관이 그녀를 밀어내지 않고 필요하다고 해준 것이었다.
“아… 아…….”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치는 것을 느끼며, 리리스의 몸이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비싼 결함품.
마음이 병든 실패작.
멸망 전에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그 모든 말들이 한순간에 잊힐 정도로 머릿속이 어지러워져 가는 가운데, 그 모습을 보고 사령관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디 안 좋아? 안색이 좀 하얘졌는데.”
“아, 아니에요. 그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어서 잠시…….”
그의 말에 손사래를 살짝 치며 당황한 표정이 됐던 리리스는 이내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누구도 알지 못하게 주인님을 지키는 건 가능할 거예요, 그게 제 특기니까요. 하지만 외부 임무를 홀로 나가는 것은 철충의 상황에 따라서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무리 철충과의 전투를 상정하고 개조가 이루어졌다 한들 리리스는 기본적으로 호위를 위한 바이오로이드니까요.”
고민하면서 한 말은 항상 보이는 나르시시즘 성향 가득한 말과는 달리, 최대한 냉정히 현실을 알려주는 말이었다. ‘블랙 리리스’라는 모델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했기에, 단독으로 진행할 수 있는 외부의 임무는 분명히 극명한 선이 존재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듣자마자 사령관은 쓴웃음을 살짝 지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래서 혹여나 네가 도움이 필요할 때 찾아갈 만한 입이 무거운 애들의 목록을 만들어 놨다.”
“예?”
사령관이 서랍을 열어서 작은 메모리 칩 하나를 꺼내서 건네주자 그녀는 약간 넋이 나간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멍하게 그것을 받아든 리리스를 보면서 사령관은 계속 떨리고 있는 팔을 억지로 누르며 말했다.
“이대로면 조만간 난 어떤 식으로든 사고를 한번 겪을 거다. 이건 그 때를 대비한 보험이니까, 네 판단에 따라서 그 누구도 모르게 호위와 만약을 위한 외부 동선을 짜도록 해. 네가 나를 믿고 있는 만큼, 나도 너를 믿어서 주는 거야.”
“주인님…….”
건네받은 메모리 칩의 무게는 분명 그녀의 머리 장식보다도 가벼울 터였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지금껏 그녀가 접해왔던 그 어떤 물건보다도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동형기들이 주인에게서 늘 바라왔던 인정과 신뢰. 그토록 바라왔던 그것이 자신에게도 빠르게 찾아왔지만, 동시에 그것으로 인해 찾아든 무게감은 실로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낯선 감각을 느낀다고 그녀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런 의무를 받을 수 있을 기회는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기에. 그저 받아든 것을 꼭 쥐면서 잠시 눈을 감았던 블랙 리리스는 이내 애써 평상시와 마찬가지의 표정을 지었다.
“후훗……. 나약한 아이들을 지키는 건 취미가 아닌데. 주인님께서 원하시니, 착한 리리스는 원하시는 대로 따르도록 할게요.”
자신의 한계를 말할 때와는 달리, 다시 평상시의 나르시시즘이 느껴지는 말을 한 리리스는 뒤이어 검지로 자신의 입을 살짝 가리며 덧붙였다.
“대신 ‘보상’은 주인님이 괜찮으실 때, 원하는 형식으로 꾸준히 받아가는 거로 할게요. 괜찮죠?”
“뭘 보상으로 받아가려고…….”
“후후, 비밀이랍니다.”
콘스탄챠와 바닐라의 말에 따르면 블랙 리리스는 함장실 뿐 아니라 업무 중에 잠시 쉬기 위해 사용하는 휴게실에도 몰래 들어왔다고 한다. 갑자기 털이 곤두서면서 묘한 오한이 드는 것을 느꼈다.
“그럼 주인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준비하기 위해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저를 믿고 맡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한다. 경호대장.”
그렇게 블랙 리리스는 사령관의 그림자가 되었다. 항상 그를 따라다니고, 때에 따라선 그를 대신해 문제를 해결하지만, 아무도 그 수고를 알아주지 못하는, 단순히 경호원을 넘어선 권한을 떠맡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나중에 찾아올, 요리사로서 설계된 고급 바이오로이드가 일으킨 사건으로 인해 어떤 잔혹사를 일으킬지는 그 당시에는 사령관도 결코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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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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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철충남 몸에 문제 생겼던게 진짜가 됨....?